소설리스트

0과 1-185화 (185/293)

185.

“조프리. 왜 여기까지 나왔어?”

그는 내 등에 손을 두르고 부축하듯 끌어안았다. 부축이라기보다 포옹에 가까운 것 같았다. 알렉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가 원수처럼 지내던 게 엊그제인데 의아해할 만도 했다. 알렉스에게 말해야 하는데.

“걸어 다녀도 괜찮아? 약은 먹었어? 의사는?”

“나 다리 안 부러졌어.”

“그래?”

에드워드는 손을 놓지 않았다. 다정하게 말하더니 내 걸음에 맞춰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귀족들을 통과해 단 위로 올라와 있었다. 대전에 모인 귀족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대전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아까 전 시장통 같던 분위기는 뭐였는지 모르겠다. 귀족들은 얼빠진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옥좌에서 왕관을 집어 들었다.

“좀 앉을래?”

“어디에?”

설마 거긴 아니겠지.

“의자가 마음에 안 들어? 새 의자를 가져올까?”

에드워드는 걱정스러운 듯 내 발을 보고 있었다. 얜 뭘 하고 싶은 걸까?

“아니. 괜찮아.”

“무리하지 마.”

너나 이상하게 굴지 마…….

“서 있고 싶은 기분이야.”

“그래? 아까는 걷고 싶은 기분이라 여기까지 찾아왔어? 내가 보고 싶으면 시종을 보내지 그랬어. 당장 갔을 텐데.”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이 말이 나만 이상하게 들리나?

귀족들은 서로를 보며 웅성거렸다. 작은 소리가 모이니 단 위에선 소음으로 들렸다. 나만 이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 내가 방해가 됐어?”

난 말을 돌렸다.

“그럴 리가. 마침 잘 왔어. 너와 관련된 얘기야.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만 구경할래?”

에드워드가 선뜻 권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봤다. 왕의 사냥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서 재상은 멍하니 우리를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무슨 구경?”

“재판.”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자, 실이 끊기듯 왕의 친구들이 주저앉았다.

“조, 조프리 전하. 아닙니다! 저희의 억울함을 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무슨 수로 폐하의 뜻을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저희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

난 당황해서 에드워드를 돌아봤다. 저들이 나랑 관련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날뛰지 못하게 해.”

에드워드가 명령했다.

기사들이 왕의 친구들을 뒤에서 붙잡았다. 그들은 붙잡히자 오히려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더 날뛰었다.

“전하, 전하!”

“저는 전하의 편입니다! 함께 사냥을 나간 적도 있지 않습니까?”

“이놈들, 무엄하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기사들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의 친구들.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저 사람들, 누구야?”

“폐하를 부추긴 자들. 폐하께선 오래 병마와 싸우시느라 마음이 약해지셨던 모양이야. 가까이 있던 간신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가장 충실한 아들을 의심할 만큼 약해지셨지. 저들은 네게 누명을 씌운 자들이야.”

그들이 사냥터에서 왕의 비위를 맞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왕에게 홀대받는 어린 왕자에게는 관심 없었다.

그때 왕은 바움쿠헨 백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 주고 비위를 맞춰 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큰일을 저지르지도 못할 사람이니까.

충동적인 계획을 떠올렸다가도, 곁에서 ‘그래도 된다’고 말해 주지 않으면 실행하지 못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너 때문에 모두 불행해졌어.’

왕이 늘어놓던 변명이 떠올랐다. 남 탓만 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난 에드워드의 손을 떼어 놓고 단 아래로 내려갔다. 왕의 친구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의 얼굴이 기대로 밝아졌다.

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마마마를 죽이라고 사주한 것도 당신들이야?”

“아닙, 아닙니다, 전하! 억울합니다!”

그들이 버둥댔다. 알렉스가 내 뒤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챌 능력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의 곁에 있었다.

화풀이일까?

에드워드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라의 대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으니 다른 재판이 필요하겠어? 명예롭고 신의 있는 귀족들이 저들의 죄를 묻고 있었어.”

그가 고개를 돌려 귀족들에게 물었다.

“저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엄히 죄를 물으심이 옳습니다. 법에 따라 작위와 재산을 몰수하고 처형하십시오.”

누군가 말했다. 에드워드는 만족하지 않았다.

“정의의 여신은 관대하군. 왕족의 피를 보게 한 자들이야. 그만한 벌로 될까?”

“죄인들을 말에 묶어 수도를 돌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성들도 죄인들을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바움쿠헨 백작이 말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입을 열었다.

“성난 백성들을 잠재우기 좋은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을 달래기로 더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광장에서 공개 처형해 주십시오. 감히 왕족을 음해한 자들이 어찌 되는지 본을 보여야 합니다.”

“애초에 이런 간신들을 어찌 폐하 곁에 둘 수 있었단 말인가?”

“재상은 뭘 했길래…….”

“한통속이 아닌가?”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재상은 더 창백해졌다.

에드워드는 소란을 진정시키지 않았다. 그가 귀족들이 죄인을 욕하고 재상을 모욕할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옳은 의견이군. 어떻게 생각해, 조프리?”

“이견의 여지가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난 처형에 동의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에드워드가 허락했다. 죄인들은 밖으로 끌려 나갔다. 몸부림치는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저 자리에 얼마 전엔 내가 있었다.

난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몸이 떨렸다. 게임을 끝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자리에 무릎 꿇고 있을 때 난 두려웠다. 저들로 만족할 수 없었다.

난 왕에게 복수하고 싶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에드워드가 나를 끌어안는 게 의식됐다.

그 말은 에드워드의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말과 같았다.

귀족들은 조용했다. 죄인들이 애원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마저도 두꺼운 문 너머로 사라졌다.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들은 왕의 측근들이다. 왕은 저들을 가까이 두고 아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자가 왕의 측근들을 끌어내렸다. 귀족들은 동의했다. 권력은 왕에게서 에드워드에게로 넘어갔다.

에드워드에게?

“조프리, 얼굴이 창백하잖아. 아직 아픈 거지? 들어가서 쉬고 있어. 끝나면 내가 갈게.”

에드워드는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그런 에드워드를 보고 있었다.

* * *

결국 셔벗 얘기는 묻지 못했다.

난 침실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가 떠올랐다.

긴 시간 잠들었던 것 같기도 했고, 짧은 시간을 앓았던 것 같기도 했다. 왕에게 찔린 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났다.

난 꿈을 꾸고 있었다. 과거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들을 모두 되찾았다.

난 어디서나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울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피하지 않고 대면했더라면, 우리는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와 대화하려고 했을 텐데. 나 때문에 힘들 거라고, 서로를 힘겨워하고 있다고, 짐작하며 피하지 않았을 텐데.

우는 내 곁에 누군가 있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조프리.’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괜찮아질 거야.’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후회할 일은 하지 않을 텐데.

더 이상 문제를 피하지 않을 텐데.

다시 눈을 뜨니 방에 햇살이 가득했다. 도트와 로웰이 곁에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위하는 건 그런 성격의 캐릭터라서가 아니었다. 나를 아끼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걸 지금까지 몰랐다니 믿기지 않았다.

시종들과 궁인들이 침실을 찾아왔다. 그들이 눈물짓는 걸 봤다. 난 눈을 뜨고도 앞을 못 보고 있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냥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현실이고, 이 사람들은 각자 감정을 갖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라고.

어떤 루트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가슴이 간지러운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

내가 피하고 있던 문제.

이 왕성의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내가 에드워드에 대해 오해하는 사실이 많을 것이다. 난 에드워드를 늘 안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여주인공을 좋아하게 될 거야. 날 죽일 거야. 나를 미워할 거야. 너무 미워해서, 언제나 나를 보고 있는 거라고.

감옥에서 알렉스를 꺼낸 뒤, 어두운 침실로 혼자 돌아갔다.

어두운 곳에서 깨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에드워드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항상 밤에 찾아왔으니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문제를 대면할 것이다.

하루 종일 무리하게 움직인 몸은 고단한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드워드는 날 찾아올 것이다. 난 에드워드에게 물어야 했다.

왜 날 구했어?

짐작하지 않을 거야. 네 입으로 말해. 오해하고 멀어지고, 그러다 후회하는 일은 반복하지 않을 거야.

왜 그렇게 울었어?

우는 나한테, 왜 입 맞췄어?

그리고 에드워드가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입 맞췄다.

난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에드워드, 날 좋아해?’

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도 도망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감정을 확인한 뒤에,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유연호의 사랑 예찬론 같은 거나 떠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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