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0화 (110/293)
  • 110.

    알렉스는 몇 번 옷을 갈아입고 우리 앞에 선보였다. 가게 주인이 고른 옷은 실제로 알렉스에게 다 잘 어울려서 속에 없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떠오르는 대로 훌륭하고 아름답고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흠모할 거라고 칭찬하자, 알렉스는 네 번째 옷을 선보일 즈음엔 얼굴을 가리고 나왔다. 목까지 새빨갰다.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귀족들이 얼마나 단 말에 길들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역시 바움쿠헨 백작의 교육은 특이했다.

    마지막 복장은 연회복이었다. 알렉스는 아카데미에 연회복을 챙겨 오지 않았다.

    파티 같은 데 참여할 생각이 없는 좋은 학생이었다. 난 파티에 데려갈 속셈이지만.

    “연회장에 들어가면 미움받을지도 모르겠다.”

    “예?”

    알렉스가 손을 내렸다. 의아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네 에스코트를 받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 내가 기회를 빼앗았잖아.”

    알렉스는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귀엽다.

    “전하,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지만 저희 너무 오랜 시간 머무는 게 아닐까요.”

    로웰이 말했다.

    “아, 그래. 계산해야지. 내 기사가 입은 옷 전부 포장 부탁해. 입어 보진 않았지만 추천해 준 옷도.”

    로웰의 조언대로 옷 가게에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를 해 봤다. 옷 가게 주인은 “어머, 저 그 말 너무 좋아해요.” 하며 알렉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기사님, 너무 좋으시겠다. 저렇게 전하께서 아끼시니까요.”

    “…….”

    알렉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식지 않아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른스러운 기사로 보이진 않았다.

    그는 처음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 난 가게 주인에게 다가갔다.

    “부탁이 있는데, 여성용 평상복과 연회복도 한 벌씩 골라서 보내 줄 수 있을까? 장갑 세 켤레와 굽 낮은 구두도. 알렉스 것과 따로 포장해서.”

    “제가 골라서요? 선물 받으실 분이 직접 고르시는 게 좋을 텐데요.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른 법이어서요.”

    가게 주인이 나를 따라 소곤소곤 속삭였다.

    “직접 올 순 없어. 바쁜 사람이라. 부탁할게.”

    “그러면 사이즈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아가씨는 어떤 분이죠? 어울리는 이미지는?”

    난 가슴께에 손을 댔다.

    “키는 이쯤 되고 날씬해. 씩씩하고, 똑똑하고, 착하고, 열심히 사는 애야.”

    “아…… 그분의 이미지인가요?”

    “그리고 귀여워.”

    가게 주인이 안도했다.

    “귀여운 분이군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상도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눈은 토파즈 같은 황색이고, 머리카락은 다갈색이야. 그리고 미인이야.”

    “그렇군요.”

    “어울릴 만한 걸 잘 골라 줘.”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네, 감사…….”

    가게 주인은 내가 수표에 쓴 금액을 보고 대답을 흐렸다. 부탁에 따른 부담감은 사라진 듯했다.

    나도 손이 떨릴 정도의 금액을 써 냈기 때문에, 주인이 놀라 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배송지는 아카데미 여자 기숙사, 이델라 에클레어 앞이야. 그리고 내가 이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이건 명령이야.”

    “예, 전하. 그것만 비밀을 지키면 되나요?”

    또 무슨 비밀이 있는데? 내가 오늘 얼마나 썼는지?

    그건 널리 퍼뜨려야지.

    “알렉스 일이라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돼.”

    가게 주인은 의아한 듯했으나, 왕자에게 반문하지 않았다.

    며칠 뒤면 이델라에게 옷이 갈 것이다.

    마음의 빚은 덜었다.

    아카데미를 나온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골목에 붙어 있는 음식점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맛이 없었다.

    내가 만든 토스트는 맛있었던 것 같은데. 난 사실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냥 먹었다. 식사 시간인데도 우리 식사가 끝날 때까지 손님은 두 명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두 사람마저 한 입 맛보더니 표정이 변해서 나갔다.

    난 오늘 배운 걸 응용해서 그 음식점도 샀다.

    로웰이 옆에서 ‘전하’라고 부르며 바람을 잡자 음식점 주인은 가게를 파는 데 쉽게 동의했다.

    주방장인 주인을 포함해 네 명의 종업원이 있는 가게였고, 난 그들에게도 계속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난 그대 요리가 마음에 들어.”

    주방장에게 말하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다.

    아마 그렇겠지.

    음식점이 망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맛이라는 이유를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음식점을 나섰다.

    “와, 전하. 훌륭하신데요! 이제 한 번 입고 버릴 옷을 맞춤으로 주문하시고, 먹고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용도도 없는 파티를 수시로 개최하시고, 파티에 동행하는 분께 보석과 레이스를 선물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제 도움이 더 필요 없으시네요.”

    로웰이 칭찬했다.

    “뭘. 다 네 덕분이지. 도와줘서 고마워.”

    “예. 저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하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분인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테니까요.”

    아까부터 로웰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피곤해서 눈이 이상해진 건가?

    아무튼 정말 필요한 도움이었다.

    “내가 어떻게 보답하면 될까?”

    “보답이라니요, 전하.”

    “두 번 오는 기회가 아닐지도 몰라. 상인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텐데?”

    로웰이 빙긋 웃었다.

    “그러면 전하, 제게 전하의 다음 투자를 꼭 맡겨 주세요.”

    “이미 약속했잖아. 그리고 그건 내가 더 원하는데.”

    “그 다음 투자도. 또 어떤 문제가 생겨도. 가능하시다면, 저를 가장 먼저 고려해 주세요. 전하께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가장 먼저 알고 도와 드리고 싶어요.”

    말을 왜 저렇게 예쁘게 할까?

    “너한테 좋은 일 맞아?”

    “예, 물론이죠.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그럼, 그래. 투자나 사업을 진행할 때, 가장 먼저 너와 상담할게.”

    로웰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 * *

    로웰 몽블랑은 학생회관 복도에서 파벨과 마주쳤다.

    “요즘 재미 좋은가 보더라?”

    파벨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주변에 데리고 다니던 부하들이 없다.

    “그럭저럭? 너도 즐거워 보이던데.”

    “나쁘지 않지. 흠, 아니, 나빠. 너 때문에 기분 잡쳤다고.”

    파벨이 질척거렸다.

    얜 왜 헤어진 연인도 안 하는 짓을 자꾸 나한테 하려 드는 걸까? 로웰은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그런 말을 해 봐야 파벨이 펄쩍 뛰는 꼴만 보게 될 텐데, 재미도 없고 피곤하기만 했다. 파벨은 남을 괴롭히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둘째로 파벨이 뭐라고 대답하든 안 궁금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최근 로웰의 관심은 조프리 2왕자에게 쏠려 있었다. 로웰은 비밀스러운 사람도 다정한 사람도 엉뚱한 사람도 만나 봤다. 모두 제각기 매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로웰은 흠뻑 빠져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매력이 독특한 힘을 발휘하는 건 잠깐이었다. 로웰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면, 그건 찰나의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 그 시간이 지나기 전에 사랑을 해야 한다.

    하지만 조프리 왕자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었고, 로웰은 그를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조프리 왕자가 유혹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로웰이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을 때 무언가를 느꼈어야 정상이니까.

    왕자는 로웰이 수작 부리고 있음을 모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관심이 없을 뿐이다. 왕자의 앞에 있는 사람이 로웰이 아니라 길거리의 부랑자라도 악수를 청하면 받아 줬을 거고, 눈을 빤히 보면 마주 봤을 것이다.

    ‘난 돈 낭비를 좋아해.’

    왕자는 로웰에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로웰은 아직 그만한 신뢰를 얻지는 못했다.

    사치?

    로웰은 그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를 생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국어를 익혔다. 하나의 단어가 다른 나라에서 갖는 미묘한 뜻을 익히기 위해 사전만 한 게 없었다.

    ‘사치’라는 단어에는 ‘분수에 지나치다’는 뜻이 내포돼 있었다.

    귀족 계층에게조차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받고 싶으면,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면 된다.

    그런데 왕자의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라는 건 대체 어떤 걸까?

    로웰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사치스러워 보이는 방법을 조언했다. 그와는 별개로 왕국의 현재 분위기에서 왕자가 사치스럽다는 평을 듣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끝났다. 신항로가 개척되어 경제적인 활로가 트였으며, 각종 공사로 토목업계도 성황이었다.

    귀족들에게서 풀린 돈이 백성의 주머니로 들어가니 나라 전체가 부유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떴다.

    조프리는 사랑받는 왕자였으므로 그가 어지간히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 한 백성들은 변함없이 사랑과 지지를 보낼 것이다.

    왕비의 세력은 그를 단단히 받쳐 주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왕이 될 것은 당연해 보였다. 에드워드 왕자가 엄청난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기 전까지.

    조프리 왕자의 투자가 성공한 것에 대해 업계에서는 말이 많았다.

    왕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귀족들 가운데서도 왕자처럼 무지한 사람이 성공할 정도라면 그들은 당연히 대성할 거라고 기대하는 자들이 많았다.

    어리석었다.

    로웰은 왕자가 어떤 방식으로 투자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가 세간에 알리지 않은 몇 가지 사업도 함께했다.

    왕자는 속을 터놓고 말할 정도로 로웰을 믿고 있진 않았으나,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길 정도로는 신뢰하고 있었다.

    상인의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로웰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손에 쥐어 봤지만 그중 왕자처럼 어려운 사람은 없었다.

    왕자는 조심해서 접근해야 하는 상대였다.

    방탕하고 문란하다는 평가여서야 그 곁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로웰은 눈치 빠르고 무해한 투자 조언자여야 했다.

    “왕자 눈에 그렇게나 들고 싶냐? 몇 년 지기를 이 낯선 땅에 방치해 놓고 혼자 즐기기는.”

    파벨이 치근거렸다.

    로웰은 몹시 귀찮았으나 그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부탁한 손님이었다.

    “당연히 들고 싶지. 너라면 왕자 전하께 선택받을 기회를 놓치겠어? 개소리 좀 하지 마.”

    로웰이 웃으며 말했다. 파벨은 왕자를 초청해 식사 자리까지 만들었다. 누구한테 헛소리지?

    “아, 누가 뭐래? 왕자 전하랑은 손뼉치기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알아서 하고, 나랑은 재미있게 놀자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하던 대로 말이야. 괜찮지? 사람 모았어. 파티 열 거야. 장소는 네가 좀 알아봐.”

    파벨이 씩 웃었다.

    귀찮은 자식.

    “여자 부르지 마.”

    로웰이 충고했다. 파벨은 펄쩍 뛰었다.

    “뭐? 농담이겠지. 그럼 무슨 재미야?”

    “여기 아카데미야.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몰라?”

    “아, 망할! 재미없어!”

    “더럽게 노는 건 너네 나라에서나 해.”

    로웰이 웃으며 말했다.

    “개과천선하셨군요? 아주 현자가 다 되셨어.”

    파벨이 로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무한테나 친한 척하는 놈이긴 하지만 배알이 없는 놈은 아니다.

    파벨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로웰은 알고 있었다.

    말실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로웰 몽블랑과 척져서 좋을 게 없기는 파벨도 마찬가지였다.

    로웰은 친절하게 대꾸했다.

    “개과천선까지야. 나이도 찼으니 철들 때가 됐지.”

    “꼭 모리스 경처럼 말씀하시는군.”

    파벨이 투덜거렸다. 로웰은 그 고지식한 문장가 모리스 상송의 자식이 저 모양 저 꼴인 게 가장 신기했다.

    “혼자 실컷 철들어라. 얼마나 출세하나 보자.”

    “진심 없는 응원 고마워. 그 전에 너 집에서 안 쫓겨나겠어?”

    파벨이 한숨을 내쉬자 앞머리가 허공에 떴다.

    “그게 문제긴 해. 망할 노친네. 언제 죽어 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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