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9화 (109/293)
  • 109.

    23. 계략을 시행하는 문제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도 카페 주인은 저 왕자가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어디서 머리를 맞고 왔다고 믿는 듯했다. 그 생각을 간직한 채 주변에 소문을 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약이 끝나고, 카페 주인은 오늘 당장 자신이 이곳에서 나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카페 3층은 주인의 개인 생활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카페 주인은 건물주였다.

    부유한 사람이었잖아?

    약간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원하면 계속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카페 주인은 기뻐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실직자 신세니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과연 카페 주인의 가족이 그의 직업을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카페 관리 상태를 보면 아닐 것 같은데.

    아버지가 저 카페를 오래 운영하지는 못하겠단 생각은 다들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난 그에게 여기서 계속 일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 카페를 쓸모없는 상태로 유지해 줄 사람 같아서.

    거리를 걸으며 로웰은 보이는 가게마다 조언했다. 레스토랑, 디저트 가게, 옷 가게처럼 별 관심 없이 지나치던 모든 곳이 사치를 할 만한 곳이라는 얘기였다.

    “관심 있는 상대와 데이트를 할 때, 이런 곳에 딱 들어가서 상대가 옷을 고를 수 있게 하는 거죠.”

    “응.”

    “그리고 상대가 옷을 하나 고르면, 전하께서는 그 옷뿐만 아니라 그때껏 봤던 모든 옷을 결제하시는 거예요. 그게 또 요즘 유행하는 데이트 방법이죠.”

    로웰은 옷 가게 앞을 지나치며 말했다. 옛날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었다. 이델라가 로웰을 만났다면 옷은 잔뜩 받았겠다.

    “사람들이 좋아해?”

    “아, 물론, 호불호가 갈릴 방법이긴 하죠. 하지만 대략 8할 정도는 좋아하지 않았나…….”

    몇 명한테나 같은 수법을 쓴 거야?

    “……왜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세요?”

    난 말을 돌렸다.

    “아니. 네가 다니는 걸 보니 좋은 가게인가 보네.”

    “맞춤옷을 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꽤 좋은 가게라고 생각해요.”

    “남성복도 취급해?”

    “어,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요. 전하께서 이용하시게요?”

    로웰이 당황했다.

    “나 말고.”

    난 알렉스를 돌아봤다.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장에 평상복과 교복밖에 없는 상태의 이델라 같았다.

    정말 옷장에 옷 하나만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열어 봤더니, 비슷한 셔츠와 비슷한 바지가 쭉 걸려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났다.

    바움쿠헨 백작은 아이를 정말 어떻게 기른 걸까?

    “알렉스. 혹시 색 있는 옷은 싫어해?”

    “아니요, 전하.”

    “같은 옷만 입는 편이야?”

    “아니요. 복식에 특별히 호불호가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옷을 선물해 주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내 기사가 된 기념으로.”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영광입니다.”

    로웰이 옷 가게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어서 오세요.” 하는 상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옷 가게 주인은 뺨에 점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 놀란 듯하더니 이내 후후 웃었다.

    “여자 친구 선물 사러 왔어요? 아카데미 학생? 세상에, 너무 로맨틱하다. 이런 애인을 두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 친구 사이즈는 알고 오신 거죠?”

    “여자 친구는 없고, 이 친구 옷을 맞춰 주러 왔는데.”

    난 알렉스를 내 앞에 뒀다. 내 손에 잡혀 순순히 따라온 알렉스가 옷 가게 주인 앞에 섰다. 주인은 놀란 듯했다.

    “이런, 제가 큰 실례를……. 불쾌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뭔가 이상한데.

    “전하.”

    알렉스도 눈치챘다. 난 주인의 착각을 정정했다.

    “이쪽이 남자 친구인 것도 아니야.”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실례를……. 전하? 아카데미의…… 조프리 2왕자 전하!”

    옷 가게 주인이 몸을 숙였다.

    “2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런 곳을 찾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응. 반가워. 내 기사에게 옷을 맞춰 주고 싶은데.”

    “2왕자 전하의 기사분이시군요! 그러니까 전하께서 기사님에게 옷을, 그런 로맨틱한…… 음…….”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좋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저희는 옷을 제작하지는 않고, 만들어진 옷을 수선하고 판매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맞춤복을 원하시면 다른 가게를 찾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냐. 내 말도 그 뜻이었어. 로웰이 그러는데 이곳이 괜찮은 가게라며. 보면 알겠지만, 내 기사는 이런 옷밖에 입지 않거든. 세상에 다양한 옷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

    웃으며 말하자 옷 가게 주인은 난처한 듯 로웰을 쳐다봤다. 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전하.”

    주인이 말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부담 가질 필요 없는데. 설령 내 기사가 옷이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대를 혼내진 않을 거야.”

    “감히 전하의 하사품을 거부하다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알렉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싫으면 거절해야지. 마음에 안 드는 옷 나 때문에 입진 마.”

    “예, 전하.”

    그냥 입겠네. 알아서 걸러야겠다.

    그런데 내 안목을 믿을 수 있나?

    카탈로그를 보고 옷의 디자인을 정하는 일 같은 건 왕성에서도 못 해 봤다. 내 옷의 경우 도트와 시종 다섯 명이 붙어서 결정했으니까.

    “기사님은 어떤 종류의 옷을 좋아하시나요? 선호하는 디자인이나 재질이 있으신가요? 언제, 어느 자리에 입을 옷을 찾으시나요? 말씀해 주시면 참고해서 추천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사님처럼 범 같은 체구를 가진 멋진 분들은 이렇게 은근히 라인을 보여 주는 셔츠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옷 가게 주인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알렉스의 상체에 옷을 댔다.

    “육체미가 돋보이면서 우아하고, 너무 달라붙지 않아 실용성도 놓치지 않는……. 전하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어떻게 생각해?”

    난 로웰을 바라봤다. 전혀 모르겠다.

    “잘 어울리네요. 기본 셔츠는 됐고, 좀 색이 들어간 화려한 건 없을까요?”

    로웰이 온화하게 물었다.

    “그럼요. 좋은 선택이세요. 기사님께선 장신이시지만, 몸의 비율이 워낙 좋으셔서 어떤 옷이라도 소화하실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우세요. 처음에는 머리 색에 맞춰 추천드릴까도 했는데, 이 보석 같은 눈동자를 살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가게 주인은 움직이며 긴장이 풀린 듯했다. 그녀는 색색의 옷을 알렉스의 턱 밑에 대었다가 옆으로 치우기를 반복했다. 의자 위에 옷이 쌓여 갔다.

    “검은색도 아주 잘 어울리시는걸요.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으면 기사님의 불꽃같은 머리카락이 더 선명히 보여서 무척 섹시하세요. 비슷한 옷만 입고 다닌다고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사실 기사님께서는 본인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옷 가게 주인은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 웃었다.

    알렉스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가만 보자, 타이를 제가 어디에 뒀더라…….”

    그녀가 사다리를 가지러 간 사이, 알렉스는 내게 변명했다.

    “전하. 저는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응?”

    “그런, 전하께 그렇게 보이려는 의도는…….”

    뭐가?

    “어머나, 상냥하셔라. 감사합니다.”

    로웰은 옷 가게 주인을 따라가서 사다리를 펴 주고 있었다. 그가 밑에서 사다리를 잡자, 주인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품에 한가득 작은 장사를 들고 내려왔다. 그녀가 상자를 거침없이 풀어 헤쳤다.

    저래도 괜찮은 건가? 우리가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어쩜.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옷 가게 주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에서 내려와 알렉스에게 타이를 매 주고 있었다.

    박력 있게 알렉스를 돌려세우고 타이를 묶고 있는데, 그녀가 시선을 더 밑으로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알렉스의 손이 검에 가 있었다. 반사적인 반응인 듯 빼진 않았다. 가게 주인이 봤다면 오늘 쇼핑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역시. 짙은 녹색이 괜찮네요.”

    로웰이 가게 주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목 있으시다, 손님. 제가 긴가민가했는데……. 저번에 여자 친구랑 오신 분 맞으시죠?”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로웰이 하하 웃었다.

    “어머, 다정하셔라. 존댓말. 맞으시잖아요. 귀족인데 존댓말 쓰시는 분 드물다고요. 요즘 세상에 자유연애가 뭐 숨길 건가요.”

    “하하…….”

    학기 시작된 지 이틀째인데 데이트?

    굉장하다. 저번에 그 카페 종업원인가?

    로웰은 캐릭터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하, 저자를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렉스가 싫은 얼굴로 로웰을 쳐다봤다. 로웰의 위치는 다시 저자로 격하됐다.

    내년엔 저놈이 될 것 같다.

    이 둘을 같은 방에 배정한 건, 알렉스가 로웰을 싫어하게 만들려고 게임 제작자가 세운 고도의 계책이었던 모양이다.

    “크기는 맞나요? 바움쿠헨은 근육이 두꺼우니까, 여기서는 얼핏 맞아 보여도 막상 입으면 터질 수도 있을 텐데요.”

    로웰이 화제를 돌렸다.

    “어머, 별 걱정을 다 하셔. 입어 보시면 되죠. 기사님, 드레스 룸은 이쪽이에요.”

    옷 가게 주인이 호호 웃으며 앞장섰다.

    알렉스는 나를 돌아보며 끌려갔다.

    내가 지금 선물을 해 주고 있는 게 맞나?

    이 선물로 알렉스의 호감도가 안 오를 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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