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6화 (96/103)
  • 허풍개 - [5]

    밤중임에도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연히도 그들은 노인 한 명의 출입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관심받을 짓을 해야 할 것이다.

    허풍개는 평소 탄지공을 연속으로 구사할 때, 주머니에 손을 반쯤 넣은 채 검지와 엄지만 꺼내놓곤 한다. 그 나른한 자세에서 전조 없이 날아간 BB탄에 적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BB탄을 가득 쥔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자신이 뭔가 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이기 위한 자세, 그 손에 권총이라도 들려있으면 모두가 혼비백산할 만한 자세였다.

    그날 방송국에서 취했던 자세이기도 했다.

    면장갑을 낀 양손을 사람들에게 겨누고는, 튕겼다. 일부러 큰 소리가 나도록, ‘탁’.

    플라스틱 구체가 건물 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한 번 ‘탁’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김없이 회사원 한두 명이 딱딱하게 굳었다. 석상처럼 멈춰선 사람들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뭐야?” “괜찮아?”

    굳어버린 사람의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동료의 이상에 영문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직은 다들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허풍개는 손가락을 계속해서 튕겼다.

    순식간에 열다섯 명 가까이 굳어버렸을 즈음에야 여기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비로소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

    그 와중에 한 명이 기어이 옆으로 쓰러졌다. 걷고 있느라 마비된 순간 서 있지 못했던 남자였다.

    어딘가를 강하게 얻어맞아서 쓰러지는 사람에게는 역동성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이 멍하니 쓰러지는 경우는?

    고꾸라지는 그 과정은 정지화면 두 장을 오려 붙인 것처럼 정적이다. 쓰러질 당시의 자세와 쓰러진 후의 자세와 똑같기에 그렇다.

    남자가 쓰러지는 모습이 그러했다.

    기괴한 것을 본 사람들은 그제야 몇몇이 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때, ‘짜르르르르르릉’······. 건물 전체에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귀를 찌르고 파고드는 그 소리는 지금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거대한 패닉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위험을 알리는 그 신호는 정체 모를 이유로 사람들이 마비되거나 쓰러지는 이 상황이 모두가 기겁해야 할 비상사태임을 명백하게 해주는 셈이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허풍개가 걷고 있었다. 도주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노인, 양팔을 쭉 뻗은 허풍개를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방송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허풍개는 걸으면서 손가락을 튕기고 또 튕겼다.

    이제부터는 탁,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비명이 동반되었다.

    소스라친 사람들은 그 손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플라스틱 구체들은 계속해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어찌나 많이 날아다니는지 거대한 공간 자체를 가득 채운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체처럼 쓰러진 사람들을 지나 허풍개는 계속 걸었다.

    복도를 걸으니 CCTV가 보였다. 허풍개는 그 카메라 렌즈를 피하지 않았다. 대놓고 이 얼굴을 보라는 듯, 렌즈에 시선을 응시했다.

    지금쯤 저 너머에는 보안의 책임자들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그중에 박 회장도 있을까?

    그렇다면 박 회장은 저 너머에서 이 쭈글쭈글한 얼굴을 보고 있을 것이다. 펴진 부분만큼이나 접힌 부분이 많은 몰골이 보이겠지.

    과연, 그가 이쪽의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당연히도 박 회장이었다.

    「당신, 미쳤나?」

    허풍개가 말을 받았다.

    “미치긴.”

    「뭘 했길래 노화가 그 지경으로······ 내가 수명이랑 정체를 가지고 협박했더니 아예 배수진을 쳐버린 건가? 협박이 더는 먹히지 않도록? 어떻게 그딴······.」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걸까. 횡설수설하는 박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기야 협박을 했더니 아예 협박의 내용을 실행에 옮겨버린 상황 아닌가. 도저히 상종 못 할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보일 것이다.

    상대방의 목소리와 달리, 허풍개는 담담하게 말했다.

    “의뢰를 받았어.”

    「뭐?」

    “의뢰를 받았다구. 알겠나?”

    무적비비탄은 의뢰를 실패한 적은 있어도 도중에 포기한 적은 없다. 박 회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CCTV를 향해, 그 너머에 있을 박 회장을 향해 허풍개가 말했다.

    “못다 한 의뢰를 마쳐야겠다.”

    「미쳤군, 정말 미쳤어······」

    박 회장은 이 상황에 협박이나 회유 따윈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뭔 수로 그럴 것인가?

    박 회장은 다만 이쪽에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었다.

    「개자식,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하지? 그깟 협박 좀 들었다고 그리 굴욕적이었나? 내가 그럼 깡패 나부랭이한테 제발 얌전히 계시라고 애원이라도 할 줄 알았어? 뒤지려면 혼자 뒤질 것이지, 돌아버린 늙은이가······」

    통화가 끊겼다. 아무도 듣지 않는 가운데 허풍개가 홀로 뇌까렸다.

    널 위한 거다, 어린 것아.

    *******

    모든 TV가 긴급속보로 밤중의 습격 사실을 알렸다. 대기업 본사 건물에 들이닥친 습격범의 정체는 무림인임에도 세간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무림인의 별호, 무적비비탄이 자막에 빨간 글씨로 떠올랐다.

    한편 대해 그룹 경호팀의 일원 이도혁은 수면 중이었다. 자는 중에 울린 벨소리에 황급히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예, 이도혁입니다.”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튀어와!」

    “예?”

    「빨리!」

    *******

    허풍개는 복도를 걸었다.

    서둘러야 한다. 경찰이 올 테니까. 동네 파출소에서 순경 몇 명을 보내는 게 아니라 방탄복과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버스에 가득 태워서 보낼 것이다.

    이미 습격을 해본 적이 있는 전과자로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능한 빨리 모든 일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지금껏 수련해온 경공이 무색하게도, 그 걸음의 속도는 빠른 걸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몸이 무거워도 너무 무겁다.

    노인에게 무공을 팔려는 문파들은 기의 축적을 통해 노화를 극복할 수 있노라 꼬드기던가? 만약 그 노인이 영약을 잔뜩 섭취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데다 재능까지 넘친다면 그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그리 돈과 시간을 써가며 노력하더라도 기어이 폭삭 늙어버린 몸에는 그조차 소용이 없는 법이다.

    지난 백 년 넘게 늦추려고 애써온 노화가 찾아온 지금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60kg도 되지 않는 몸뚱이를 끌고 다니기가 이토록 힘겨울 줄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젊은 몸으로 멀쩡히 걸어 다녔기에 지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젊음의 회복에 집착하던 구자성의 심정을 알겠다.

    상단전에 가득 찬 원기 덕에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지만, 정작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팔다리를 몇 번 휘젓지도 않았는데 벌써 힘겹다.

    저 너머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허풍개는 그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BB탄을 날리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일사불란한 발소리, 경비원들이군. 방탄조끼에 보호구를 차고들 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본 다음 보호받지 않는 부위에다 탄을 날리는 게 낫겠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과연 경비원들이 달려와 테이저건을 겨누었다. 그들은 경고도 없이 발사했다.

    허풍개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여유를 부리기 위해서, 그리고 회피를 위해 거세게 움직였다간 깎여나갈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

    젊은 절세고수 무적무적자라면 저 하수들 사이에 번개처럼 뛰어들어 모조리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만 늙은 고수 무적비비탄은 그러지 못한다. 허풍개는 원래도 큰 동작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지금 무적비비탄의 모든 동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적이다.

    그래서 너무 약해졌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잃은 만큼 얻는 것이 있는 법이다.

    허풍개는 날아오는 전극들을 태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에 지속해서 번개가 흐르는 것 같았다. 상단전에 가득 찬 원기들이 신경의 한계를 넘어 정신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지 않더라도 이쪽으로 날아오는 모든 것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 모두를 지배할 수 있었다.

    탁,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중에서 전극과 BB탄이 부딪쳤다. 허풍개는 손가락을 단 한 번 튕겼을 뿐인데도 여러 발 발사된 전극이 모조리 땅에 떨어졌다.

    어? 경비들은 기겁한 와중에도 계속해서 테이저건을 쏘아댔지만 허풍개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이 흉악한 습격범임을 아는 상황이므로 손은 아예 주머니에 넣었다.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도록, 최소한의 동작으로 탄을 연달아 쏘았다.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였다. 수에서 밀리는 마당이었지만 이쪽의 화력이 압도했다.

    한 호흡마다 경비들이 두셋씩 쓰러지는 가운데, 기어이 몸에 다가온 전극이 있기는 있었다.

    허풍개는 그 역시 피하지 않고 손을 휘둘러 낚아챘다.

    전극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제압했―”

    신경 신호와 같은 전류가 손을 타고 흘렀지만, 그 순간 반응을 보인 것은 명중에 기뻐하는 경비원뿐이었다.

    허풍개의 몸에는 번개가 흐르곤 했다. 이 정도의 전류쯤이야.

    전극이 꽂힌 채로도 다가오는 허풍개를 보며 경비원이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몸 또한 굳어버렸다. 양옆에 서 있던 동료 둘과 함께.

    경비팀이 전멸하는 데는 불과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허풍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무표정하고도 태연하게, 눈에 띈 사람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면서 걷고 또 걸었다.

    다시 되뇌는 것이지만 서둘러야 한다.

    몸에 남은 진기가 별로 없다.

    자신은 딱 필요한 양만 아슬아슬하게 남겼다. 오늘 밤의 싸움을 벌일 만큼만. 그 기마저 전부 몸에서 떠나버리고 나면······.

    허풍개가 엘리베이터 앞에 가닿았다. 그리고, 제기랄.

    과연 경비팀의 대응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들의 가동이 모조리 중단된 것을 확인한 허풍개가 신음했다.

    계단으로 가야겠군. 오르는 것마저 중노동일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계단 턱에 다리를 놓은 순간 무릎이 삐걱거렸다. 물속에서 뛰려고 발버둥 치는 기분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CCTV를 의식하고 있기에 그것을 티 내지는 않았다. 저들이 보고 있을 테니까. 사파 무림인은 그 어느 순간에도 약한 모습을 내보이면 안 되는 법이다.

    *******

    허풍개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춰 섰다. 저 위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 남자가 저 앞을 가로막고 섰다.

    허풍개의 반쯤 감긴 눈에 막대한 기가 비쳤다. 경비팀의 누군가는 아닌 모양이지. 고수였다.

    이쪽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중얼거렸다.

    “무적비비탄.”

    그 손에는 길쭉한 일본도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허풍개도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강남제일검.”

    제 별호가 불린 게 의외인 걸까? 강남제일검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를 기억하나?”

    허풍개는 얼마 전에도 만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무적비비탄으로 행세하는 마당이잖은가.

    저 남자를 수년 만에 만난 무적비비탄처럼 말했다.

    “물론 기억하지.”

    뭔 말을 하는지 들어야겠다는 듯, 강남제일검은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의외였다. 저 미친놈이라면 바로 칼부터 휘둘러오리라고 생각했는데.

    계단을 오르느라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허풍개가 천천히 말했다.

    “거기서 만난 놈 중에 실력이 가장 출중했지.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쓰러뜨려야 했는데. 장갑도 그래서 벗고 탄을 날렸고. 혹시 아팠다면 미안하군.”

    “그래?”

    강남제일검이 중얼거렸다.

    “그랬단 말이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려는 듯, 강남제일검은 가만히 서서 잠시 멈춰있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이번에도 장갑을 벗을 건가?”

    허풍개는 저번 대결에서 저 남자를 상대로 장갑을 벗지 않았다. 빨라진 탄속으로 탄을 날렸다간 크게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손가락에 힘이 없다. 탄속마저 확연히 줄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그러지.”

    허풍개가 면장갑을 벗은 순간, 강남제일검이 웃었다.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웃더니,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허풍개의 손에서 탄이 발사되었다. 다음 순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간 BB탄 두 발이 강남제일검의 칼날에 정확히 잘려가는 것을 허풍개는 똑똑히 보았다.

    기어이 다가온 강남제일검이 칼을 휘둘렀다.

    허풍개는 그와의 접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칼질. 후속 동작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휘두름이 크고 빠르게 허풍개를 덮쳤다.

    그에 맞서 허풍개는 태극권의 자세를 취한 채 손을 뻗었다.

    칼과 손바닥이 충돌하는 그 순간, 강남제일검은 화산파의 스승이 해준 조언을 떠올리고 있다.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그 고수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거나, 아예 인정을 받아내라고. 그리하여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는 순간 자신의 경지는 또다시 상승하리라고 말했다. 모름지기 무공의 수련은 신체 기술의 단련일 뿐만 아니라 마음수련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겠다. 족쇄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뻗어나간 검격은 스스로 믿기지 않을 만치 빠르고도 강맹했다.

    충분히 강하고 빠른 한 번의 일격이면 복잡한 변화 따윈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저 큼지막한 일본도의 일격이 그러했다. 절세고수가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칼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흘려보내는 데 성공한 허풍개가 속으로 신음했다. 손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억······.”

    한편 큰 공격을 실패한 대가로 강남제일검은 반격을 당했다. 손바닥에 배를 얻어맞은 강남제일검이 땅을 굴렀다.

    구르기를 멈추고 천장을 바라본 다음에는,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허풍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기를 집중하여 출혈을 막은 다음 혀로 핥았다. 쓰라린 손바닥 위에 면장갑을 덮어 상처를 가린 다음 계속 걸으려던 그때였다.

    공기 중에 미약한 매화 향기가 풍겼다. 박 회장이 다가왔나 싶어 허풍개는 저 너머를 살폈지만 그의 기는 주변에 없었다.

    매화 향기는 등 뒤에서 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허풍개는 계속 걸었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