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5화 (95/103)
  • 허풍개 - [4]

    박애진이 칼을 가져왔다.

    아내의 칼, 그녀가 모산파에서 수련하던 시절에 쓰던 물건이었다.

    그 칼은 허풍개가 순순히 여기에 온 목적이기도 했다.

    허풍개는 그 칼을 잡는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포가 걷히고 맘속이 평온해지는 현상을 경험했더랬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박애진은 그 칼을 붙잡은 순간 허풍개의 표정이 눈에 띌 만치 편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방금까지의 우울한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허풍개는 잠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고해성사 좀 해도 됩니까? 뭐 조언이나 대답 같은 건 안 해주셔도 되고, 그냥 들어주시기만 해도 됩니다. 속내를 누군가한테 털어놓기만 해도 맘이 훨씬 편해진다던데.”

    갑작스러운 요청에 박애진은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제가 도움이 된다면야, 말씀하세요.”

    그리고 허풍개가 말했다.

    “나는 내 협행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내가 한 일들의 대부분은 강박증 때문에 벌인 일이거든. 내가 죽는 게 두려워서 공덕을 쌓는 데 힘썼고 내 죽음을 병적으로 신경 쓰다 보니 남의 죽음에도 신경을 쓰게 됐을 뿐이지.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놈의 강박증 탓에 사람들을 살려왔습니다. 그리고 정신병으로 인한 범죄는 죄질을 감경해주듯 정신병으로 인한 선행 또한 그 공덕을 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애진은 지금 말하는 것이 젊은 고수 무적무적자가 아니라 허풍개임을 짐작했다. 그녀도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그러니까, 백이십 살 협객이 말하고 있었다.

    한 명의 무림인이자 그의 먼 친척으로서, 그녀는 저 노인의 하소연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번에 하나를 깨달았는데, 그래도 그 모든 건 내가 한 일이란 겁니다. 정신병으로 죄 저지른 놈을 감옥에 보내진 않더라도 정신병동에 가두긴 하지요. 왜냐하면 피해자가 있으니까. 그 일을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어요. 그게 정신병자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허풍개가 웃었다.

    “강박증 탓이든 아니든, 그건 다 내가 한 거요. 그 공포 또한 내 일부였고 그 모든 공덕은 온전히 내 것이었어.”

    허풍개가 아내의 칼을 들어 올렸다. 그 검신에 자신의 평온한 얼굴이 비쳤다.

    “그래도 역시 궁금해지더군요. 그놈의 강박증이 없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비정상적인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나는, 깨끗한 머리로 판단할 나는 대체 어떤 선택을······.”

    그 눈이 감겼다. 그 앞에 칼날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일종의 검례를 취하더니, 허풍개가 눈을 떴다.

    “덕분에 답을 얻었습니다.”

    허풍개가 웃으며 말했다.

    “내 아내가 알려주는군요. 그녀는 언제나 내게 가르침을 줘.”

    오래전에 죽은 아내가 거론된 순간, 박애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다.

    허풍개가 고개를 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모산파의 사람들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함께 할 수 없게 돼서 말입니다.”

    그제야 박애진이 입을 열었다.

    “진인, 대체 무슨 말씀을······”

    “뭐 그래도 너무 큰 손해는 아닐 겁니다. 이미 제 덕을 본 게 꽤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이 칼을 받아주십시오. 여기 보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허풍개는 칼 두 자루를 내밀었다.

    한 자루는 방금 박애진이 가져온 태극검이요, 다른 한 자루의 칼 또한 태극검이었다.

    혼약의 증거로 아내가 선물해준 칼이었다. 부러질까 봐 실전에서는 쓰지도 못한 물건이다.

    박애진은 그것이 작별의 표시임을 눈치챘다. 떠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절세고수가 가버린다니? 모산파에 득 될 일없는 결정 아닌가.

    그러나 이내 박애진은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침묵했다.

    요새 명국의 무림인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의 무공 수련은 도가의 가르침보다는 스포츠 과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그녀는 사원 바깥에서 오신채는 물론 고기까지 즐기곤 한다. 그렇듯 그녀는 진지한 도교 신자가 아니다.

    그래도 지금은 도사답게도 예를 표했다.

    “원시천존(元始天尊)께서 가호하시길. 진인이시여.”

    허풍개가 또다시 웃었다. 마주 예를 표하며 말했다.

    “빈도는 덕이 없어 그런 과례를 받기엔 과분하군요.”

    “이제 떠나실 건가요?”

    “예.”

    “그럼, 배웅하지요.”

    허풍개는 안 그래도 되노라고 말했지만 박애진은 기어이 배웅에 나섰다. 모산파의 다른 인원들과 함께.

    저번에 떠날 때도 그랬듯, 지금도 연호되는 자신의 별호를 들으며 허풍개는 허탈하게 웃었다.

    ““無敵無籍者!”” ““無敵無籍者!””

    도가에서 이르길 이름에는 힘이 깃든다고 하나니, 별호에 무적(無籍)이 들어간 시점에서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허풍개가 모산파를 떠났다.

    *******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허풍개는 옛날에 도가 서적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불교는 비리비합(非離非合)을 주장한다. 비천한 육체와 고귀한 정신이 그 합쳐짐에서 벗어나는 것(非合)이야말로 이상적인 일이라고. 불교에서 삶은 비천한 것이요, 삶을 영원케 만드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불가 수행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도교의 주장은 역리역합(亦離亦合)이다. 정신과 육체를 뜻대로 나누거나(亦離) 계속 결합(亦合)하는 것 모두 이상적인 일이다.

    도교에서 삶이란 즐거운 것이므로 그 영속을 긍정한다. 그와 함께, 도가에서는 육체를 넘어선 정신의 초월 또한 긍정한다.

    도사의 정신이 홀로 천상에 올라가 버리든, 계속 육체와 함께 지상에 남든 모두 도가 수행자의 마음대로인 셈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마지막 순간에, 도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허풍개는 선택을 했다.

    *******

    돌아온 허풍개를 보고서 이풍이 눈을 껌벅였다.

    “형님, 모산파 간다고 안 했어요? 나도 나중에 오라매?”

    “그랬지.”

    “무슨 일 있었······”

    허풍개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오다가 들른 편의점에서 산 물건이 담겨있었다.

    “잔소리 말고, 나랑 술이나 한잔하자.”

    지금 뭐라고?

    “술? 형님 그런 거 안 드시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마셔보려는 거지.”

    이풍은 방금 돌아온 허풍개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놀랐다.

    “안주는요?”

    “그것도 사왔어.”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본 이풍이 어이없어했다.

    “김치? 누가 이런 걸 안주로 먹어요.”

    “밥도 사 왔어. 쌀밥.”

    “밥도 안주 아니요, 이 양반아······.”

    “그래서, 나랑 술 안 마실 거냐?”

    이풍이 술잔을 꺼냈다.

    “누가 안 마신대요?”

    그리고 둘이 마주앉았다. 허풍개는 눈앞에 차려진 김치와 밥을 향해 젓가락을 가져갔다. 먼저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런 맛이구나.”

    “그래서 처음 먹어보는 김치가 어때요? 맛있어?”

    허풍개가 툴툴거렸다.

    “너무 매워서 맛도 못 느끼겠구만. 한국놈들은 이런 걸 외국인한테 먹이고 그랬나? 하여간 다들 못돼처먹어가지고.”

    “이상한 소리 말고 밥이랑 드세요.”

    전자레인지에 데운 햇반을 뜯어 한 수저를 떴다. 흰쌀밥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약 백 년 하고도 오 년 만에.

    “밥은 맛있네.”

    “당연히 맛있죠. 그러니까 평소에 잘 좀 드시지.”

    햇반을 비운 다음에는 쨍그랑, 술잔을 부딪쳤다. 희멀건 막걸리가 술잔 밖으로 찰랑거렸다.

    술을 주고받다 말고 허풍개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잘 먹었다. 식도락도 별것 없네.”

    “아니, 삼겹살도 아니고 고작 김치 한 조각이랑 밥 드셔놓고 뭔 소리를 하신대.”

    이풍은 핀잔하다 말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진 모르겠는데, 아부지랑 대작하니까 좋긴 좋네요. 생각해보니까 이거 아부지랑 처음 술 마시는 거잖아?”

    “그러냐?”

    “그래요. 앞으로도 술 마실 거면 안주는 좀 다른 걸로 준비합시다. 잣이나 호두라도 잡숴요. 왜, 벽곡해도 견과류는 먹어도 되지 않나?”

    허풍개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이풍은 제 양아비가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덩달아 웃었다.

    “잘 컸다.”

    “예?”

    “잘 컸어. 쪼끄마던 애새끼가.”

    “언제는 대학 못 간 깡패 새끼라더니?”

    “아주 잘 컸어.”

    “형님, 취하셨네. 내공으로 취기 몰아내거나 뭐 못 그래요? 하기야 그런 것도 언제 마셔본 적이 있어야 가능한 건가?”

    “너야말로 취했다. 들어가서 자라.”

    이풍은 그 말대로 했다.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비틀거리며 침실에 들어가서는 바로 드러누워 곯아떨어졌다.

    술에 섞어둔 수면유도제가 효과가 있군. 허풍개는 할 일을 시작했다.

    *******

    이풍의 잠을 깨운 것은 등허리를 관통하는 따끔한 통증이었다.

    마치 몸속에서 번개가 달린 듯한 감각이 자는 도중에도 생생히 느껴졌다. 그러나 그 번개는 치명적이지 않고 따스했다. 마치 제 양아비가 치료를 위해 내뿜는 번개 줄기가 그렇듯이.

    눈을 뜬 이풍은 제 아비가 보이자 눈을 깜박거렸다.

    “나 자는 중에 뭐해요? 내 몸에 손 얹으시고······”

    이풍의 물음에 허풍개는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다시 자.”

    “아니, 뭔 수로······”

    “자라니까.”

    물론 이 상황에 잠들기는 어려웠다. 이풍은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제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기겁했다. 눈을 굴려보니 제 몸 곳곳에 침이 꽂혀 있었다. 제 양아비가 꽂아둔 게 분명했다.

    이 양반이 지금 뭘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감기 걸렸어?”

    “씨발놈. 나 출소했을 땐 나 맞느냐고 지랄하더니 지금은 예리하네.”

    “빵에 있으면서 전화 한 통 안 하셨으니까 그랬지. 지금이야······”

    말하다 말고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시선이 허풍개의 얼굴에 향해있었다. 어두운 와중이지만 눈이 이미 어둠에 적응되었기에 그럭저럭 잘 보였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팔십에서 구십 세는 되어보이는 늙은이가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풍의 목소리가 떨렸다.

    “얼굴이, 왜 그래?”

    허풍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풍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 최근에 그걸 해준 적 있다고 했던가?

    “내력전수 해줬어요?”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람이한테?”

    “어.”

    “갑자기 왜······”

    “허공에 흘려버리기는 아까우니까. 그리고 네가 영약을 먹이려거든 지 입에 넣는 게 아니라 딸애 먹이고 싶다고 했잖니.”

    “아니······”

    “그래도 역시 너한테 안 주긴 그렇더라구. 그래서 반은 바람이 주고 반은 너 주기로 했다. 네 혈도에서 막혀있던 부분을 뚫었어. 이젠 영약 먹어도 효험이 있을 거다.”

    “딴소리 말고, 지금 대체 왜······”

    이풍이 계속해서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허풍개는 한 번의 웃음으로 그 모든 항의를 흘려보냈다.

    조용히 눈 감은 채, 내면의 기와 그 움직임에 집중했다. 앞서 잠든 이바람에게 해주었듯, 제 몸의 기를 이풍의 몸에 흘려보냈다.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서, 한 줌을 제외한 모든 기를 흘려보냈다.

    딱 한 줌, 정말 한 줌을 제외한 모든 기였다.

    진기가 흘러가버려서 생긴 빈자리에 원기가 차올랐다. 태초의 기다. 혼원의 일기.

    몸속 거의 모든 기가 원기로 전환된 가운데, 체내 신이었던 내면의 번개마저 원기로 화해 녹아내렸다.

    그리고 번개는 그와 함께 녹아내린 모든 기와 합쳐져 다른 모습을 취했다.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신(神)이 탄생하는 것을 허풍개는 보았다.

    몸이 혼원의 일기로 가득 찬 순간 내면에 강림하는 신, 제일존군(帝一尊君)이다.

    그 신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완전히 늙어버린 육체와 달리.

    어릴 적 자신의 모습임을 허풍개는 알아보았다. 열다섯 살 자신의 모습, 도사로서의 모든 것을 시작한 당시의 자신이 내면에 웅크렸다.

    저것은 월녀가 그랬듯, 자신의 영혼이 저 위로 승천할 때 취할 형상일까? 알 수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것이 미지였다.

    “남겨둔 계좌 확인하고. 여러모로 미안하다. 그리고······”

    “아버지?”

    여전히 당황스러워 하는 이풍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내 새끼.”

    그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풍개가 집을 나섰다. 이풍은 떠나가는 제 양아비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

    대해 그룹의 경비팀은 가히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 보안의 삼엄함은 가히 총기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인 군사 시설에 비교할 수준이다. 그룹의 회장, 박 회장은 소년 시절부터 무림인들이 습격해오리란 걱정에 시달렸다. 그 강박증이 건물의 보안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해 그룹 본사 입구의 경비요원은 웬 노인이 다가왔을 때, 멍하니 있지 않고 그 신분을 물었다.

    “누구십니까? 신분과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노인이 대답했다.

    “무적비비탄.”

    경비요원은 그 별호를 알았다. 그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긴 왜?”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간악한 부호를 응징하러.”

    그 말만으로도 경비요원은 눈앞의 늙은 고수가 좋은 의도로 오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어딘가에 긴급신호를 보내려는지 그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허풍개는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어이 경비요원이 벨을 누른 뒤에야 손가락을 움직였다.

    탁, 하는 소리가 나더니 경비요원의 몸이 굳었다.

    “저 위에 회장놈 계시지?”

    허풍개는 방해받지 않고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주머니 속 BB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 짓거리를 하는 건 두 번째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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