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64화 (64/103)
  • 무적비비탄 - [7]

    해가 저물고 도시에 어둠이 깔렸다. 박 회장은 이런 시간대를 노리고 덮쳐왔을 것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두 대의 차량이 달렸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나올 법한 숨 막히는 추격전은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로가 막혀있었다. 뒤늦게 추격에 나섰음에도 이도혁의 차가 박 회장의 스포츠카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박 회장 저 양반, 진짜 미친놈이네? 다 보는 앞에서 사람을 납치해······”

    이도혁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허풍개는 이 상황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앞서 나눈 대화가 뇌리에 어른거렸다.

    강준만, 그 역겨운 새끼.

    ‘수명 연장하는 법이······ 다름이 아니고, 요새 백련교에서 유행하는 양생술이 있다더군요.’

    ‘백련교에서?’

    ‘막 이상한 건 아니래요. 왜, 백련교가 도교랑 불교랑 마니교랑 다 섞인 종교잖습니까? 그중에서 유독 도가적인 백련종 일파에서 퍼진 방법이라더군요.

    도가 수련을 한 고수들은 오래 살지 않습니까? 그게 다 도가 수련으로 쌓는 기가 수명을 늘려주기 때문이란 거지요. 그래서 기가 혼탁한 일반인들의 몸에 고수가 자신의 기를 전수해봤더니, 실제로 수명이 늘어났다는 겁니다. 백련교에서 부자들한테 돈 받고 내력전수해주는 과정에서 나름의 통계를 쌓았기 때문에 아주 믿을 만한 사실이라던데요.’

    ‘그래서, 나 보고 내력전수 해달라고? 당신 마누라한테?’

    ‘모든 내공을 전부 달라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냥 수명이 늘어날 만큼만요. 일반인에게는 많아도 고수에게는 적은 양의 기만 주셔도 충분할······’

    ‘내력전수 그거, 아무한테나 해주는 거 아니란 사실은 아나?’

    ‘저는 잘······’

    ‘쥐꼬리만 한 내공을 쌓으려면 수억 수십억 원을 써야 한다는 건 알고? 심지어 조금의 내공을 전수하더도 수명 또한 함께 깎인단 것도?’

    ‘제가 무림의 일은 잘 몰라서······’

    ‘잘 모른단 사람이 조사는 용케 잘해놨군?’

    ‘역시 안 되겠습니까?’

    ‘되겠나?’

    당시의 대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나 불쾌하다.

    인간의 몸은 수도꼭지가 아니다. 자신의 일부를 남에게 딱 필요한 만큼 내주기는 어렵다.

    비쩍 마른 사람에게 단백질을 보충해주겠답시고 근육질 장정이 자신의 살을 베어 먹이는 것은 단순한 영양분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를 베어낸 장정의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설령 살이 다시 차오른다 한들 흉터며 후유증은 어쩔 것인가.

    만약 허벅지 살이 아니라 손가락 따위를 잘라서 내주었다면, 그것은 곧 신체 일부의 영원한 손실이기도 하다.

    내력을 전수해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가진 기(氣) 모두가 아니라 일부를 주는 것마저 건강에 끔찍하게 해롭다.

    남에게 자신의 내력을 전수해주려거든 이미 체내에 동화되어 자신의 일부가 된 기를 내주어야 한다. 신체 일부를 잘라서 주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 과정에서 귀중한 진기(眞氣)가 줄어들 것이요, 그만큼의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괜히 월녀며 오은림이 내력전수를 해주겠노라 제안했을 때 거절한 것이 아니다. 내력전수를 해주자마자 죽을 것이 두려워 끝내 후계자에게 내력을 전수해주지 않고 죽는 고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강준만은 대화하는 내내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지 모른다는 듯, 선량하고 무지한 민간인처럼 굴었다.

    물론 허풍개는 그놈이 순진한 어린 양 따위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정말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만약 그 말을 따른다면, 사람 하나 살리는 일이니 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는 공덕을 쌓더라도 손해일 게 분명하다.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일단 살아남으면 잃는 것 없이 공덕을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수명을 깎아서까지 공덕을 얻으라니? 그것은 공과 관리에 따른 수명연장을 고려해도 너무나 큰 손해다.

    요새는 협행과 공덕의 중요성에 크나큰 의문이 드는 마당에······.

    애초에 얼마 못 산 애새끼 살리는 것도 아니고, 일흔 넘은 할멈 몇 년 더 살게 하자고 그러는 게 말이 되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허풍개는 백이십이 넘어버린 자신과 월녀를 떠올리게 되었다.

    크나큰 불쾌감에 허풍개는 이를 악물었다.

    수십 년 전 무림맹에 밉보이는 일까지 감수하며 뼈빠지게 해낸 일이 이따위로 돌아올지는 미처 몰랐다. 아무리 협행에 보상을 기대해선 안 된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일 아닌가.

    두 대의 차량이 꾸역꾸역 차로를 나아갔다.

    슬슬 차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달리는 차들이 꽤 있었다.

    차량 두 대 모두 최대한의 속도를 내지는 못하고, 비슷한 속도로 쫓고 쫓기던 와중이었다.

    허풍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당연히도 박 회장의 전화였다.

    「왜 쫓아오나?」

    아직 헬멧의 음향 장치를 꺼두지 않은 모양이다. 휴대전화에 귀를 대고 있자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허풍개는 통화가 멀리서도 들리게 설정한 다음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박 회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차량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가 당신 약점 잡고 있단 걸 다시 떠올리게 해야 해? 내가 맘만 먹으면······」

    이후로 무슨 말을 해올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허풍개는 급히 휴대전화를 껐다.

    창밖을 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슬슬 연변시 중심을 벗어나 변두리에 가까웠다. 이제 좀 더 달리면 외곽이요, 드넓은 밭이 깔린 농촌을 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추격전 따윈 불가능하다. 속도제한까지 풀어뒀을 스포츠카를 따라잡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허풍개는 문득 생각했다.

    그냥 저대로 떠나게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무림맹 위원 고진철을 구하려고 일단 추격에 나서긴 했으니 무림맹에서는 따로 구해내지 못했다며 비난해오지 않을 것이다. 나서줬단 사실에 감사를 표하면 모를까.

    어차피 고진철은 모든 권세를 잃었는데도 부려 먹기 편해서 위원직에 앉혀뒀을 뿐인 쭉정이다. 애써 구해낸들 이득은 없고 박 회장과 부딪칠 걸 생각하면 손해만 막심한 일인데, 이 일에 보람이 있나?

    지평선 가까이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차도 이제 거의 없었다. 박 회장이 탄 스포츠카는 더욱 속도를 내어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이도혁이 중얼거렸다.

    “이대론 놓치겠는데······”

    허풍개는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보다 말고, 저도 모르게 내면의 칼을 움직였다.

    차량 밑에 붙여둔 태극검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스포츠카를 따라잡은 태극검은 그 지붕 위에서 칼끝을 아래로 향했다.

    태극검은 그대로 지붕에 살짝 꽂혔다.

    박 회장은 직접 보긴 처음인 어검술에 눈살을 찌푸리던 마당이었다. 백미러를 통해 검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말고 혀를 찼다. 대체 뭘 한 거지?

    한편 허풍개는 속으로 읊조렸다. 뇌위진동변경인.

    주문에 응하여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아직 가느다랗지만 전보다는 훨씬 굵어진 번개가 하늘에서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차량 지붕에 꽂힌 태극검을 향해서.

    번개는 보통 자신의 손가락을 향해 떨어지곤 했지만,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검이 손가락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확인해둔 바였다.

    천둥과 함께 스포츠카는 강렬한 섬광에 휩싸였다.

    어둠을 사르는 번쩍임, 눈이 따가울 정도였지만 이도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단순히 운전을 계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갖 기현상이 벌어지는 무림에서도 기적이라 불러야 할 장면을 똑바로 보길 원했다.

    아직 스포차카가 달리고 있었다. 허풍개는 또 한 번 주문을 외웠다. 뇌위진동변경인.

    또 한 번의 천둥 벼락과 함께 스포츠카가 번쩍였다.

    달리던 스포츠카의 표면은 완전히 전자에 감싸였다. 타이어를 통해 전기가 지면으로 빠져나가면서 차량 내부는 무사하지만 차량 자체는 그럴 수 없다.

    엔진이 망가지면서 시동이 꺼졌다. 스포츠카가 멈췄다.

    “와······”

    이도혁은 떨리는 손으로 차를 멈춰 세웠다.

    스포츠카에서 박 회장이 내렸다.

    헬멧을 쓰고 있는 탓에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몸짓은 보였다.

    박 회장은 방금 자신이 당한 일에 감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분노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기색이었다.

    결국에는 후자를 선택했다. 박 회장이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군. 어검술에 낙뢰까지 불러대? 아주 신선이 다 되셨는데.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게 됐으면서 기껏 하는 짓이 고작 깡패 두목 지키는 일인가?”

    허풍개도 차에서 내린 다음 주변을 살폈다.

    아직 도시 안이었다. 명국 영향권답게 연변의 사람들은 무림을 좋아했다.

    행인들이 다들 멈춰 섰다. 싸구려 스마트폰을 내민 채 방금 벌어진 장면과 앞으로 벌어질 장면을 촬영하기 바빴다.

    허풍개는 평소 사람들의 시선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존재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박 회장이 아무리 막 나가도 사람들 앞에서 칼질하진 못할 테니.

    과연 박 회장은 검을 차고 있을 뿐 뽑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박 회장의 저 차림은 익숙하다. 소싯적에는 저 차림으로 직접 무림인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다 박쥐 회장이란 별호를 얻은 양반 아닌가.

    그때 몇 번 충돌해보았건대, 방탄복에 방검복까지 입은 것과 다름없는 저 차림새는 반쯤 무적이다. 저 상태로 칼까지 휘두르면 결코 이길 수 없다.

    칼을 쓰지 않는다고 이길 수 있단 건 아니지만 어쨌건.

    허풍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저 남자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가장 잘 싸워냈을 적에도 무승부가 고작이었다.

    긴장감을 억누른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허풍개가 말했다.

    “데려가서 뭔 짓을 하려는지 모르니까 이러지. 협박은 김보영한테 했다더니 고진철은 왜 데려가나? 데려가서 죽이려고?”

    박 회장이 대답했다.

    “그럼 안 되나?”

    “안 되지, 그럼.”

    “고진철이, 이 새끼가 관악파 대빵으로 있으면서 파묻은 연놈이 몇 명인지 아나? 이 인간 말종을 구하겠다고 날 패겠다고?”

    허풍개는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은근슬쩍 장갑을 뺐다. BB탄의 질감을 확인하고는 기습적으로 탄지공을 날렸다.

    탁, 하고 날아간 BB탄은 이도혁과 구경꾼들에게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그러나 총알만큼 빠른 것은 아니요, 그 정도면 절세고수에게는 반응할 만한 속도다.

    과연 박 회장은 쉽게도 손으로 낚아챘다.

    “씨······”

    그러고는 욕설을 지껄이며 BB을 놓았다. 찌릿했을 것이다. BB탄에 담아둔 전기가 효과가 있었다.

    아주 잠시 움찔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허풍개는 싸움의 준비에 나섰다.

    낚싯줄을 꿰어둔 BB탄을 저 위로 던졌다.

    전신주의 피뢰기에 닿은 BB탄이 줄과 함께 한 바퀴 회전했다. 전신주에 줄이 단단히 연결된 것을 확인한 허풍개는 줄을 잡아당겼다.

    경공을 발휘하여 전봇대 위에 안착했다. 이 역시 무림에서 보기 드문 묘기였다.

    “오!”

    허풍개는 자신을 노려보는 박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위치에서 BB탄을 일방적으로 쏘아대기만 하면 된다. 방탄복이나 보호장구가 감싸는 부분엔 효과가 없겠지만, 나머지 부분에는 먹힐 테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자니, 박 회장이 달려오고 있었다. 연달아 탄을 날려 보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날아간 BB탄을 어깨의 방어구와 헬멧으로 받아내면서 돌진하는 박 회장은 전차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전신주 앞에 도달해서는 진각을 밟았다.

    콘크리트 가루가 휘날리며 파문이 일었다.

    박 회장의 정권이 전신주를 강타했다. 전신주가 뽑혀 나갈 듯 흔들렸다.

    이어서 박 회장의 양쪽 주먹이 전신주를 연달아 두들기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무신론자라던가? 불심(佛心)이라고는 쥐뿔도 없을 텐데도 그 소림 무공의 수양만은 끔찍하게도 깊다. 사자후도 그렇고, 금강권 또한 어느 소림사 무예승을 데려와도 이 정도의 성취를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주먹질 한 번 한 번에 전봇대가 흔들리다 못해 부서질 듯 돌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전신주가 기우뚱했다.

    허풍개는 속으로 경악하며 다른 위치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웬 건물 위에 줄 꿰인 BB탄을 던지고는 거기 몸을 날리려던 차였다.

    “‘내려와―!’”

    박 회장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다행히 지금은 음향 장치를 꺼두었는지 구경꾼들이 기절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허풍개가 경공을 위해 몸에 퍼뜨려둔 기가 흩어지고 말았다.

    허풍개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 회장이 달려왔다. 떨어지느라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저 주먹을 맞았다간 바로 끝장날 것이다.

    허풍개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떨어지는 몸의 위치를 바로하는 와중에 양손이 어지럽게 섞이면서 태극을 그렸다.

    반쯤 성공한 건곤대나이, 날아오던 박 회장의 주먹은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박 회장은 밀려난 반동으로 한 번 더 주먹을 뻗어오는 게 아닌가. 막 발이 땅에 닿아 자세가 불안정했던 허풍개는 방어할 생각을 버렸다. 역으로 손바닥을 뻗었다.

    크로스카운터였다. 서로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진 절세고수 둘은 땅을 구를 듯하다가 낙법을 펼쳐서는 똑바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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