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63화 (63/103)
  • 무적비비탄 - [6]

    영화 촬영 준비는 순조로웠다.

    연변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지라 삼십 년 전 한국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촬영장으로 삼기로 했는데, 시에서는 촬영하는 동안 길가의 사람들을 물려야 할 경우 공무원들이 나서서 통제까지 해주겠노라 약속해주었다.

    “이게 다 연변 장악하고 있다는 개방도들이 협조해줘서 그런 거지요? 대체 무슨 협상을 하고 오셨는진 모르겠지만 참 큰일을 해주셨······”

    감독의 아부를 흘려들으며 허풍개는 이도혁을 보았다.

    여기까지 운전해온 이상 이도혁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알아서 쉬라고 내버려 두었더니 그는 스태프들이 해야 할 이런저런 잡일을 거드는 게 아닌가.

    저런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뭔 짓인가. 감독도 부담스러웠는지 그만두라 말했더니 이도혁은 당당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무적비비탄의 팬이라서요. 이 영화 완성에 한 손 거들 수 있으면 이런 영광이 또 없을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게도 감독은 그 말을 듣고는 껄껄 웃더니 이도혁의 합류를 인정했다.

    “팬은 인정이지!”

    그러면서 감독은 웬 앨범을 이도혁에게 내주었다. 무적비비탄의 협행 기록 자료라고 했다. 두꺼운 그 책을 받아든 이도혁은 희희낙락했다.

    그 꼴을 쳐다보기도 싫었던 허풍개는 그냥 호텔에 틀어박혀 수련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니 촬영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가장 큰 스폰서, 그러니까 무림맹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대표로 온 것은 무림맹 위원 고진철이었다.

    허풍개의 방에 찾아온 고진철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거지 놈들이 여배우 담그려는 걸 막아주셨다고요?”

    “그랬죠.”

    “거지 놈들이랑 담판도 알아서 치러주셨고요. 이런 은혜를 또 어찌? 마침 여기 계셔주셔서 참 다행이기 그지없습니다.”

    비굴하기까지 한 말투요 태도였다. 무림대회에서의 꼰대는 온데간데없었다.

    요즘 무적무적자의 위상이 비현실적으로 치솟은 까닭일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인 데다 그 문파가 완전히 망해버린 고진철의 처지 때문일까.

    “위원씩이나 되는 분이 여긴 왜 왔습니까.”

    허풍개의 질문에 고진철이 대답했다.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을 들어서요. 왜, 김보영 그 여자가 박 회장한테 살해 협박을 당했다지 않습니까?”

    “그게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에요. 박 회장 그 양반이 무림을 지독하게 싫어하긴 하지만 그동안 무협 영화며 무협 소설까지 트집 잡은 적은 없었는데. 왠지 김보영에게만 트집을 잡았다면, 박 회장과 김보영 간에 무슨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직접 추궁해보려고 여기 왔습니까.”

    “예. 이미 김보영 그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박 회장은 이번 일을 배신으로 느끼곤 화내는 눈치더군요. 배신이라? 기존에 한 편이었던 경우에나 성립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박 회장은 김보영 그 여자의 협력을 받았던 것일지도······”

    “어쩌면 무적비비탄 대협과도?”

    허풍개가 슬쩍 물었더니 고진철은 애써 웃었다.

    “최대한 무적비비탄 대협께는 폐가 되지 않게 하지요.”

    “박 회장과 무적비비탄 사이에 무슨 연관이 밝혀진다 해도?”

    고진철도 박 회장과 무적비비탄의 연관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 무림대회에서 무적비비탄을 무림공적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떠들어댔을 것이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덮어야지요? 그런 식으로라도 빚 하나 갚을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정말 그래 준다면 안심이요, 만약 고진철이 조사 결과에 따라 맘을 달리 먹는다고 해도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

    무적비비탄이 무림의 배신자였음이 드러난들 무슨 문제인가? 자신은 곧 모산파에 갈 텐데.

    “그리고 이건, 이번 일에 대한 사례입니다. 약속한 것이지만 받아주시길······.”

    이후로 고진철이 목함 하나를 내밀었는데, 당연히도 무적무적자가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영약이었다. 허풍개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두었다.

    고진철마저 돌아간 뒤였다.

    또 한 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허풍개는 짜증마저 느끼며 누가 또 수련을 방해하나 보았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 강준만이었다.

    강준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해왔다.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지······?”

    *******

    허풍개는 강준만을 마주 보았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지금 강준만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세월 속에서 성격과 취미도 달라진 모양이었다.

    “자문도 끝나니 할 게 없지요? 이것 좀 드셔보셔요. 제가 직접 따서 끓인 건데······”

    강준만은 몸소 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그러는 태도가 실로 정중하고도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허풍개는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저 이용당했다고만 느꼈는데. 그래도 도움을 청한 당사자로선 나름대로 고마워하긴 했던 것일까?

    허풍개가 차를 홀짝이던 중에 강준만이 말을 걸어왔다.

    “저, 아내가 있는 거 아시지요?”

    허풍개가 말을 받았다.

    “알지요. 대본에 그분 배역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대협께서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요. 요새 그이가 오늘내일하는데, 혹시 좀 봐주실 수······”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을까?

    허풍개는 마음속에 돋아나려는 불쾌감과 실망감을 빠르게 억눌렀다.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잠시 후, 허풍개는 강준만과 함께 그의 아내 곁에 앉았다.

    허풍개는 삼십 년 전, 조수석에서 말없이 떨고만 있던 조그만 여자를 기억했다.

    그녀 또한 늙었다. 그 쪼그라든 몸은 이불 속에 힘없이 파묻혀있었다.

    허풍개는 그녀의 맥을 짚고, 그 온몸에 흐르는 기를 보았다.

    진맥을 마친 허풍개는 강준만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허풍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한테도 보였습니까?”

    “예. 심장질환에 골다공증에 뭐에······ 대충 뭉뚱그려 말하자면 노환이라던데요.”

    “제 보기에도 그렇군요.”

    강준만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몇 살 차이 안 나는데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에요! 전 아직 늙어죽을 정도는 아닌데 제 마누라는 왜 벌써······”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까요. 생활 습관은 물론 유전적으로도 저마다의 수명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알기론 없군요.”

    강준만의 아내는 기가 허약해져 있었다.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선천진기(先天眞氣)가 쇠해있었는데, 이것은 대라신선이 오더라도 고칠 수 없을 것이었다. 노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강준만이 말했다.

    “제가 듣기론, 방법이 있다고 하던데요······”

    노화를 누구보다 신경 쓰는 노인으로서 허풍개는 그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방법? 알려줘 봐요.”

    강준만은 예의 ‘방법’을 말했다.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는데, 그것은 나름의 화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듣고 난 허풍개의 반응은 그가 의도한 바와 달리 격했다.

    “되겠나?”

    대뜸 하대가 튀어나왔는데도 강준만은 뭐라 따지지 못했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웅얼거릴 뿐이었다.

    “제발······”

    “되겠어?”

    방금까지만 해도 어조의 변화가 없던 허풍개의 목소리에는 이제 짙은 감정이 묻어나왔다. 분노, 그리고 분노였다.

    “삼십 년 전에 이미 무리하게 도움을 받아놓고 그딴 걸 요구해? 이미 도움을 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군. 도움 주길 좋아하는 호구한테서 또 도움받는 게 당연하다 이거야. 그렇지?”

    “그게 아닙니다. 전 그저······”

    “꺼져.”

    “제발요, 대협. 저는 좆같은 놈이라도 제 마누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발······”

    “꺼져!”

    허풍개가 이어서 뭐라 소리치고, 강준만이 뭐라 변명하려던 차였다.

    저 너머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의 대화를 묻어버릴 만치 끔찍하게 거대한 소리였다.

    “‘꿇어―!’”

    그 소리는 호텔 밖에서 울리고 있었는데도 귀를 아프게 찔러올 만큼 크고 날카로웠다.

    소리에 실린 기를 감지한 허풍개는 눈을 크게 떴다.

    소림 사자후였다. 그리고 한국말로 저런 사자후를 지를 법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

    이미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 마당이다. 심지어 무림맹 위원까지 와있는 마당이므로 촬영장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개방 거지에 무림맹의 무림인까지 촬영장을 지키고 섰다. 품에 권총 한 자루씩 넣고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웬 차가 내리는 게 보였다. 척 보기에도 고급 차였다.

    경비를 서고 있던 무림인은 눈을 크게 떴다. 또 무슨 귀빈이 왔나 싶어 정중하게 인사하려던 차였다.

    차에서 내린 거한을 본 무림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 거한은 이 미터가 넘는 키였는데, 단순히 그것만이라면 별로 놀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키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한의 차림새였다. 거한은 시커먼 타이즈 위에 시커먼 방탄복과 여러 장구를 찼다. 시커먼 장갑까지 껴서는 온몸의 피부를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무슨 슈퍼히어로 같기도, 거기에 밀리터리를 섞은 것 같기도 한 저 특징적인 차림새를 몰라보는 무림인은 한국에 없다.

    “당신?”

    그러나 함께 경계를 서고 있던 거지 둘은 저 거한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거지 둘이 거한을 가로막으려 했다.

    “당신, 누구요? 멈춰봐.”

    그러나 거지들이 제지하거나 검문하기도 전에 거한이 먼저 움직였다.

    거한의 발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거한은 거지 둘의 앞에 당도했다. 거지들은 눈을 크게 떴을 뿐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거한이 거지 둘의 배를 연달아 쳤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꽤 멀리 있던 무림인의 귀에도 들렸다.

    거한은 이미 무력화되었을 텐데도 거지 둘의 배를 치고 또 쳤다. 일부러 죽일 생각은 없지만 딱히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주먹질은 거지 둘이 축 늘어져서야 끝났다.

    긴장감과 공포심을 억누르기 위해 무림인은 호흡을 골랐다. 주저하거나 손대중할 엄두 따윈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절세고수가 들이닥친 마당이니까. 무림인은 급히 총을 꺼내 들고는 소리쳤다.

    “정지! 다가오면 쏜다!”

    거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거한을 보며 벌벌 떨던 무림인은 기어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 결과라고는 ‘탕’하는 총성뿐이었다. 거한이 손을 두 번 휘두르자 발사된 총알은 온데간데없었다.

    손으로 잡았나? 씨발놈의 절세고수 같으니······.

    하기야 다른 곳에 맞혔더라도 대단한 피해는 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거한은 방탄복은 물론 사지를 보호하는 보호장구까지 끼고 있다.

    게다가 짐작이 맞다면, 저 시커먼 타이즈는 아마도 천잠사로 만들어진······.

    눈 깜짝하기도 전에 거한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 무림인의 머리에 천둥이 쳤다.

    “억―.”

    큼지막한 주먹이 무림인의 배에 꽂혔다. 무림인은 구토하며 무릎 꿇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세 명이 쓰러졌지만 거한은 셋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있는 촬영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한의 차림새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감독을 포함한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거한은 당당하게도 계속 걸어가 사람들의 중심에 섰다.

    “누구요?”

    거한은 지금 시커먼 헬멧을 썼다. 헬멧은 반투명하여 내부에서는 바깥이 보일지 몰라도 바깥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수상한 일인데, 심지어 헬멧의 하단에는 웬 스피커 비슷한 음향 장비까지 달려있었다.

    그 쓰임새를 모두 알지 못했지만, 잠시 후에는 모두 알게 되었다.

    ‘흐으읍’. 거한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근육으로 가득 찬 거한의 가슴이 모두의 눈에 보일만치 부풀어 오르더니, 그 성대가 폭발적인 소리를 토해냈다.

    “‘꿇어―!’”

    한 마디 거대한 외침 후로는 ‘꾸우우우우욿어어어어어어’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던 모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가까이 있던 사람부터 몇 미터 멀리 있던 사람들까지 풀썩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내 기절하거나 지면에 엎어진 사람들은 경련하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방금 그게 소림 사자후란 것을 알아차린 것도, 이 와중에 멀쩡한 것도 나름대로 고수인 고진철뿐이었다.

    고진철 또한 멀쩡하지는 못했다. 그 귀에서 피가 흘렀다.

    고진철은 귀에서 메아리치는 이명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박 회장?”

    거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진철은 몸을 떨며 계속 물었다.

    “박 회장님이요? 여긴 왜? 진짜 김보영이 족치시려고? 직접 와서 이러시면······”

    뒷말은 이어나가지 못했다. 고진철의 입보다 박 회장의 주먹이 훨씬, 훨씬 빨랐다.

    고진철의 허리가 뒤로 젖혀지더니 입에서 토와 침, 피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고진철의 얼굴에 대고 박 회장이 윽박질렀다.

    “나 박씨 아니야, 이 깡패 두목 새끼야.”

    박 회장은 고진철이 노인이란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부터가 노인 아닌가.

    주먹질에 발길질,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지더니 박 회장은 고진철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자기 차가 있는 곳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박 회장은 쓰러져서 부들거리고 있는 김보영과 눈이 마주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박 회장과 허풍개의 눈이 마주친 것은 박 회장이 고진철을 차 뒷자석에 던져넣은 뒤, 자기는 운전석에 탑승한 그때였다.

    허풍개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박 회장, 정말 여기에?”

    헬멧 때문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박 회장은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 차가 출발했다.

    “무슨, 무슨 일이야?”

    잠시 후, 이도혁이 다른 곳에서 짐을 나르다가 부랴부랴 뒤늦게 달려왔다. 이도혁이 현장을 보고 기겁했다.

    한편 허풍개는 가장 사태가 심각한 사람들을 응급조치하길 마친 상황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바로 지시를 내렸다.

    “일단 운전해요. 쫓아가야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