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77. 마지막 한 조각(1)
박종찬이 복귀하면서 촬영은 탄력을 받았다.
잔여 분량을 촬영하고 좀 더 세세한 편집 과정을 거쳤다.
다행이라면 홍보 영상이 나간 이후로는 유출본에 대한 반응이 약하졌다는 점이다.
두 영상의 화질 차이가 극심했던 터라 되레 비교로 인한 홍보 효과를 누렸다.
“추가 유출은 없네요.”
“아무래도 부담되겠지. 여러 곳에서 주시하고 있거든. 잡힐 위험성이 높다는 걸 스스로도 알 거다.”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 계속해서 주의해 달라고 하세요.”
경찰을 포함해서 사건을 여러 곳에 의뢰했다.
컴퓨터 좀 다룬다 싶은 사람도 여럿 고용했다.
계속해서 유출본이 나오지는 않는지 모니터링 하고 있다.
“그럼 이제 영화만 잘 마무리 하면 되겠네. 어느 선까지 찍었냐?”
“대부분의 촬영은 끝났어요. 다만, 몇 개 중요한 부분 촬영을 남겨두고 있는 터라 시간은 딱 잘라 말하기 어렵겠네요.”
“아직 중요한 촬영이 남아 있어?”
“네. 영화의 핵심 파트에요. 워낙 감정 소비가 많은 부분이라서 뒤로 빼 놨거든요.”
“그래? 그게 유출 안 된 게 천만 다행이다.”
“그러게요.”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남아 있다.
말한 것처럼 감정 소모가 극심해서 뒤로 빼 두었다.
하지만 이유가 딱 그거 하나뿐인 건 아니다.
‘아직 만족 할 만한 표현을 찾지 못했어.’
극의 대미를 장식 할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했다.
궁리하고 궁리하여도 떠오르지 않는 한 조각이었다.
“힘내라.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더 많은 궁리와 노력.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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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 석우는 시골 마을 출신이다.
어머니가 고향을 등지고 떠난 뒤 남편을 잃고 낙향하여 다시 고향살이를 하게 된 배경을 지녔다.
석우의 고향은 굉장히 배타적인 곳이었다.
지역 주민간의 유착이 심하고 외부에서 보면 이해하지 못할 관습도 더러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한 번 고향을 등지고 나간 석우의 어머니는 죄인이었다.
그렇기에 굉장히 모진 대접을 받았다.
병으로 시름시름 앓아 석우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넌 우리 마을 사람이지만 죄인의 자식 놈이다.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어른들이 말 하는 걸 따라.”
“헛소리 하면 매질 할 테니까 그리 알고.”
“네놈이 가 봐야 어딜 가겠다고? 고향 떠나면 넌 부랑아일 뿐이야. 마을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면 감사하다 생각하고 입 다물어.”
마을에서 공동으로 육아하는 아이.
말은 이렇지만 사실상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심심하며 매질하고 고역인 일들을 떠넘겼다.
개나 먹을 것 같은 밥덩이에 쓰러져 가는 집 따위를 은혜라고 재공하면서.
“쯧쯧쯧. 어찌 양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단 말이냐.”
“끼리끼리 어울리기나 하고. 눈깔 좀 보라고.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애미라는 년이 양놈하고 눈이나 맞아서.”
그러다 만나게 된 것이 안톤이다.
석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났던 어머니가 외국인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고 돌아왔다.
금발의 푸른 눈.
가뜩이나 폐쇄적인 마을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다.
온갖 핍박과 괴롭힘에 망가진 채 성장하게 됐다.
“나, 나. 안톤. 안톤이라고 해.”
“발음이 이상해. 난 석우야.”
“서, 석우. 석우. 나랑 같이 있어도 안 불쾌해?”
“전혀. 금발의 푸른 눈. 멋있어.”
나이 차이는 꽤 많은 둘이지만 금세 친해졌다.
석우는 안톤을 형처럼 대하고 안톤은 석우를 자신의 동생처럼 아꼈다.
지독한 마을에서 기댈 것이 서로밖에 없었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안톤이라고? 반가워요.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안서영이라고 해요.”
변화가 생긴 건 마을에 발령받아 온 보건 선생, 안서영의 등장 이후.
그녀는 마을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안톤과 석우를 다정하게 대해 주고 마을 사람들의 핍박에서 보호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도 외부 인사인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마을을 쥐락펴락하던 이장의 아들.
그리고 그 친구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걷던 어느 날, 길 반대편에서 오던 안서영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되었다.
“안톤. 안톤. 미안해. 나는 견딜 수 없어······”
고작 한 마디의 말과 편지가 전부였다.
그녀는 목을 매달았고 안톤은 그 사실에 실성해 버렸다.
여기부터 안톤과 석우의 길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모. 모조리 죽일 거야. 다 죽일 거야. 그래야 해. 그래야 우리가 자유로워 질 수 있어.”
“안톤! 그러면 그 쓰레기들하고 같은 사람이 될 뿐이야! 선생님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
“다, 닥쳐! 닥쳐!!”
둘 다 안서영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망가져 있던 안톤의 경우는 데미지가 더 컸다.
그는 극단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몰래 농약을 모으고 호미와 낫을 숨겨 두었다.
“형을 이렇게 망가지게 될 수는 없어.”
석우는 이 사실을 알아채고 그를 막으려 했다.
그가 손에 피를 묻히고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꼴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은 한 번 더 꼬이고.
안톤은 석우의 손아래에서 죽게 된다.
“여기가 문제야.”
탁. 진호가 대본을 덮으며 한숨지었다.
표현의 한계에 봉착한 곳.
이 복잡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아직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떨까.
상상조차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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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진지하게 캐릭터를 다시금 살폈다.
어린 나이부터 마을에서 핍박받고 따돌림 당하며 힘들게 살아오던 청년.
그러다 만난 안톤와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망가지는 걸 눈앞에서 보고, 그걸 막으려 하다가 죽게 만들었다.
과연 어떤 감정일까.
“막막하구만.”
막연한 슬픔과 공허함만이 맴돌았다.
지독하게 부정적인 느낌의 생각만이 몸을 잠식했다.
죽이고 싶은, 죽고 싶은.
표출이 어려운 감정만이 계속해서 돌고 돌았다.
“아직도 구상중이냐?”
“건들이지 마!”
“······어?”
“아. 미안. 배역에 몰입해 있었던 터라.”
송학의 놀란 얼굴을 보며 진호가 사과했다.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간 감정이라 절제가 어려웠다.
“깜짝이야. 얼마나 심각하게 몰입을 했으면 그래.”
“해석과 표현이 막연하다보니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네. 갈피를 잡아야 하는데 마뜩치가 않아.”
“네가 그럴 정도야?”
“한 번 물어볼게. 만약 형이 친구도 없이 괴롭힘만 받으면서 자랐다고 쳐. 그러다 진짜 딱 하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거야. 거의 형제지.”
“응. 응. 그런데?”
“근데 그 친구가 안 좋은 일에 휘말려서 망가지기 직전이야. 살인도 불사하려는 거지. 그래서 형은 그 친구를 막으려고 노력해. 근데 일이 꼬여서 그 친구가 죽은 거야. 자기 때문에. 어떤 감정일 거 같아.”
“······와. 무슨 설정이 그따위냐?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버텨?”
송학이 어깨를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촬영장 오가며 대충 봐 온 건 있지만 이런 내용인줄은 몰랐다.
“못 버틸 거 같아?”
“어후. 모르겠다. 나 같으면 솔직히 견디기 어려울 거 같아.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죽는 거잖아. 유일했던 가족이 자기 때문에 죽는 다라. 이야, 좀.”
“극단적으로 갈 거 같다 이거지?”
“캐릭터 성격을 다 모르니까 확답은 못하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힘들 거 같아.”
진호가 고개를 젖히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
석우는 과연 보통사람일까.
어린 나이부터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 온 석우.
꾸역꾸역 견디면서도 인간성은 잃지 않고 있었다.
안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거 후에는 어떻게 되는데?”
“일종의 폭동을 일으켜. 마을에 남아 있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불러서 자유의 행진 비슷한 걸 하지. 죽은 보건 선생의 친구의 도움으로 외부 경찰도 불러오고 대대적으로 사건이 조명 받는 거야.”
“무슨 프랑스 혁명 같다?”
“축소판이지.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의 걸음. 현 정국을 비꼬기도 하면서.”
“흐음. 그럼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영웅이라 이거지?”
“응. 주인공 보정이라는 느낌이기도 한데, 충분히 설득력은 있어. 이 정도는 되어야 체제를 엎을 수 있으니까.”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석우는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럼 애초에 난 사람이라는 걸까?’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그렇게 빼어난 인물이었다면 노예 생활을 어떻게든 청산하고 탈출했을 테니까.
이건 보통의 사람이 영웅으로 탈바꿈 하는 내용이다.
누구라도 압제를 떨치고 일어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내용.
“지독한 슬픔 속에서 길을 찾는다. 분노와 슬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밑바닥으로 끌고 갈 때도 그는 일어설 것을 다짐하는 거야.”
“분연히 일어나다. 이런 느낌이네.”
“음. 음. 지독함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는 과정. 영웅 서사에 필요한 필연적인 고통.”
“장엄하네.”
“슬프지.”
과연 석우는 영웅이기를 바랐던 걸까.
그가 원한 건 형제 같던 안톤의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힌 거 같아. 고마워 형.”
“흐흐. 이 정도 가지고 뭘.”
진호 자신에게는 안톤이 송학일까?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대본을 펼쳤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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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이대로 자는 거야?”
조금 늦은 저녁.
스케줄을 마치고 은서가 진호의 집을 찾았다.
사방이 어지럽혀져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게 다 뭐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오던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날림 글씨로 무언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석우. 괴로움. 분노. 이게 다 뭐람?’
두서없는 단어 나열이라 알아보기 어려웠다.
총총 걸어가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수습했다.
“······와. 이거 전부 캐릭터 시트구나.”
모아놓고 보니 이해가 됐다.
바닥을 싹 덮고 있던 종이들은 배역인 ‘석우’에 대한 다각도 분석 시트였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설정을 잡아서 그가 어떤 식으로 성장했을지를 가상으로 구현해 본 것이다.
마치 RPG게임에서 로드를 반복하는 것처럼.
수십, 수백 개의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래서 송학 오빠가 가보라고 한 건가? 어휴. 고생도 보통 고생이 아니네.”
그녀도 배우인 만큼 배역에 대한 공부는 한다.
배경을 이해하고 설정에 살을 붙여서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해 본 적은 없다.
이건 그냥 배역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배역의 삶 자체를 처음부터 재조명 하고 있었다.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갈 수 있는 걸까.
“으, 으응······어? 은서 왔어?”
“응. 조금 전에. 집이 개판이라서 치우고 있었지.”
“하하. 미안. 배역 연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진호가 깨어났다.
머리는 까치집에 눈에는 눈곱까지 잔뜩 끼어 있다.
근데도 은서 눈에는 그 모습이 멋이기만 하다.
열심히 일하는 남자는 멋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까지 배역에 파고 드는 배우를 어떤 사람이 흠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빠.”
“응?”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뭐래.”
“그러다가 다른 여자가 홀딱 반해서 달려 들까봐 그렇지.”
“갑자기?”
“응. 갑자기.”
실없이 웃던 그녀가 멍한 진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뭐지, 이건?”
“수고했다고.”
“오늘 좀 두서없다?”
“헤헤. 방이 어지러우니까 나도 그런가봐. 우리 어지러운 성인끼리 잠깐 누웠다가 갈까?”
“이런 응큼한 아가씨를 봤나.”
진호가 폭 쓰러지는 은서를 품에 안았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갔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그런 냄새였다.
“그래서 오빠. 성과는 있었어?”
“응.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거면 됐네. 오빠 기준이면 세상 그 누구보다 높을 테니까.”
하하. 진호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이 정확했다.
더 이상, 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만족할 연기가 나올 거 같다.”
더 없는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