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71. 시작과 끝은 사람이다(1)
딸칵, 왕호룽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웃음과 비슷한 것이 새어나왔다.
“천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준비했던 것들을 시작해라.”
“네, 회장님.”
몇 걸음 밖에서 부복하고 있던 이들이 움직였다.
한 명 한명이 큰 회사의 대표였지만 여기서는 그저 왕호룽의 부하에 불과했다.
“당에는 뭐라 전달할까요?”
“핑계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 그쪽은 중국의 세계화를 위한 발판으로 여기고 있을 테니 큰 반발을 없을 거다.”
“하지만 대표에 한국인이 앉는 걸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후후. 그 문제도 해결해 뒀네. 3년 활동 후 귀화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했지.”
“눈속임인 겁니까?”
“3년 후면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오를 거네. 그러니 자네는 자본을 확실하게 세탁해 둬. 후에라도 당에 덜미를 잡히면 안 되니까.”
왕호룽은 많은 것을 준비했다.
시련을 겪을수록 그의 사상은 단단해졌다.
그의 눈에서 중국은 이미 회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벼락같은 충격이 필요했다.
전 인민이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당을 속이는 일 따위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
“오후에 있는 약속은 취소할까요?”
“아니. 그건 가야지. 도박의 결과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 너절한 목숨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하니까.”
“준비하겠습니다.”
어차피 몇 년 남지 않은 목숨.
왕호룽에게는 잃을 것 없는 도박이었다.
#
왕호룽. 그리고 황천은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체를 설립하고 지부를 한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에 빠르게 올렸다.
대표로는 진호의 이름이 올라갔다.
이것 자체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등재된 단체라고는 해도 인력이나 시설 등이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디션이라.”
대신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시작을 알렸다.
그건 등재된 단체 이름으로 제작할 영화의 오디션.
생소한 단체에서 오디션을 연다고 하니 반응은 뚱했지만 대표 이름에 반응이 달라졌다.
“일종의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어.”
“오빠가 오디션 임원으로 참석하는 거지?”
“응. 그래야 사람들이 모이니까.”
거물급 스타의 오디션.
다른 건 전부 생소하지만 그 이름 하나로 도전하는 사람은 충분히 나왔다.
“이걸로 사람을 모아보겠다는 거야? 너무 대책 없지 않아?”
은서는 탐탁지 않게 반응했다.
오디션을 사람을 모아보겠다는 건 너무 1차원적 발상. 이름값 있는 스타들을 영입해도 모를 판에 너무 소극적인 행동이었다.
“이건 불씨일 뿐이야. 어차피 갈 길은 멀다고. 회사 간 협약도 안 끝났고, 새로 창설한 조직의 이름도 확정 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일단 작게 해보자?”
“실제로 황천에서는 물밑작업에 들어가 있어. 접촉한 배우가 여럿이고 그 중 일부는 확답도 받아 뒀지. 하지만 결국 중요 한 건 구심점이잖아.”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샘플을 보이자 이거네.”
“실제로 영화 시나리오와 제작 팀도 지원받았어. 제대로 된 설명도 적혀있지 않지만 모두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톱 급의 팀으로 꾸렸다.
당장 확충한 자본만 해도 천억 이상.
이건 불씨라고 말하기에는 스케일이 큰 작업이었다.
“그럼 최현석 대표님이랑 블루 아이는 어떻게 돼?”
“연합체계로 될 가능성이 높아. 자본을 투자하고 인력과 시설을 제공하는 거지. 기존의 활동도 그대로 유지하지만 주력 팀은 이쪽 위주로 돌아 갈 거야.”
“와. 본격적이네.”
“루카와 세미. 선아와 하윤이 등도 전부 이쪽 작업에 공동으로 들어가니까. 소속 연예인들에게는 나쁜 조건이 아니야.”
“우리 대표님하고도 얘기해 본다고 했지?”
“응. 국내에 있는 내로라하는 기획사와는 전부 접촉중이야. 긍정적인 반응은 썩 많지 않지만.”
쉽게 호응하기 어려운 계획이다.
연합체계라고는 하지만 중국 자본에 먹히는 모양새가 될 가능성도 있고, 포부가 지나치게 다가오기도 한다.
각자도생이 가능한 굴지의 기획사들은 굳이 모험수를 던질 필요도 없고.
그나마 중소 기획사에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이걸 일본하고 동남아 일대에서도 한다 이거지?”
“응. 서로간의 정보를 교류하고 인력과 노하우 등을 주고받는 거야. 취약한 문화 사업을 끌어 올리고 부족한 점은 상호 보완하는 방식이지.”
“그냥 말로만 듣기에는 좋아 보이네.”
“말처럼 쉬웠으면 이미 너나 할 것 없이 하고 있었겠지. 사람 수만큼 생각이 있는 법이야. 욕심도 많고. 이해타산에 예민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건 쉽지 않아.”
“그래서 왕 회장님이 오빠를 고른 거잖아.”
“그렇지. 그래.”
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이해관계를 한 점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영향력이 필요하다.
일본과의 분쟁을 종식시켰던 그 때처럼.
‘하지만 지금도 그런 게 가능할까?’
전생의 힘이 사라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리 진호라 해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빠. 괜찮을 거야. 난 오빠를 믿어.”
그런 진호의 손을 잡아주는 건 은서.
따듯한 체온에 굳어있던 진호의 얼굴이 풀렸다.
힘을 때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건 역시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일단은 오디션부터. 하나씩 해 나가자.”
“응.”
이제 시작이었다.
#
진호의 이름값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배우가 영화 제작이라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지만 일단은 도전하고 보는 것이다.
지망생은 많고 길은 좁은 법.
사람이 많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600명이 조금 넘는 건가.”
“혼자서 심사하는 건 무리겠네.”
“회사에서 사람들이 도와주기로 했어.”
송학을 비롯해 팀 진호와 다양한 인원이 참석했다.
1차, 2차, 3차정도.
수가 십 단위로 줄어 들 때 까지는 진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심사를 해 주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옥석이라면 진호까지 오기 전에 떨어질 확률은 적었다.
“취재진도 꽤 모였네.”
“관심 갈 수밖에 없지. 드라마 끝내고 중국 다녀온 배우가 갑자기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까.”
“게다가 회사는 베일에 싸여 있고.”
“이래저래 떠도는 가십이 상당하다고.”
회사라고는 해 봐야 아직은 이름 뿐.
언론에서 파도 나오는 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디션을 어는 진호의 행각이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4차 심사 들어갑니다. 진호 씨. 여기부터는 참석해 주세요.”
“네, 네.”
그렇게 거르고 걸러서 4차 심사.
진호가 정해진 곳에 앉아 참가자 프로필을 뒤적였다.
상당수가 경력자였다.
연극무대나 드라마 등의 단역이나 조연 등으로 나왔던 사람들.
딱히 빛 볼 길이 마땅치 않다보니 지원한 것이다.
‘다 괜찮은 배우긴 하네.’
4차까지 올 만큼 나름대로 실력은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진만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주르륵 들어와 주르륵 연기하고 흩어지는 사람들.
진호는 수십의 사람을 차례대로 만나며 그들의 연기를 눈으로 지켜봤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소홀히는 하지 않았다.
그들도 절박해서 나온 만큼 대충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도 되려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응. 다들 실력은 좀 있는데 거기서 거기야. 특색 있는 연기도 없고 뭔가 툭 찌르는 느낌이 안 보여.”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합격은 안 된다.
진호는 냉정하게 평가했고 사람들을 걸러냈다.
최종까지 올린 사람이 전부 열 명.
그나마 추린 것이 그들이었다.
“오디션 끝나고 합격자 없다고 하면 언론이 좋아할 텐데.”
“끄응. 이것도 난감한 일이네.”
“왕 회장님한테 얘기해서 직접 배우를 보내라고 하면 안 돼?”
“안되지. 이번에는 내가 직접 사람을 뽑아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나타나야 하니까.”
“감독도 아니면서.”
“차라리 감독이라도 하면 좋지.”
어디까지나 프로젝트의 일환.
진호는 이번 영화에 어떤 쪽으로도 참여하지 않는다.
“······응? 형, 밖이 좀 소란스럽지 않아?”
“밖이? 어? 그러네. 싸움이라도 난 모양인데?”
오디션 장 밖에서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말소리는 분간이 안 되도 이게 대화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가 볼까?”
“응. 무슨 일인지 좀 확인해 줘.”
송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을 살폈다.
지원자 대기실 끝자락에서 누군가 경비와 다투고 있었다.
얼핏 보기로 30대 후반.
수염도 제대로 자르지 않은 중년 남자였다.
“아, 그러니까 누락 된 거라고요. 난 분명 지원을 했는데 왜 오디션조차 못 보는 겁니까?”
“어허. 위에서 확인해 보니까 이름이 없다지 않습니까. 뭔가 제출 할 때 실수가 있었겠죠. 소란 피우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지금 장난해요? 내가 이 오디션 이야기 듣고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더 소란피우면 경찰 부릅니다.”
경비의 윽박지름에도 남자는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꼭 오디션을 봐야 한다며 버텼다.
“아이고, 꼭 저런 사람들 있더라.”
“그러게.”
“응? 너도 나왔냐?”
소란에 결국 진호까지 밖으로 나왔다.
“저 사람 참가 목록에 없었던 거야?”
“글쎄. 경비가 말하는 거 보니까 위에서 확인해 본 거 같아. 그럼 없는 거겠지.”
“누락 된 건 아니지?”
“확인해 줘? 그냥 늦어서 땡강 부리는 거 같은데, 넘어가지?”
“그래도 절실해 보이잖아.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자.”
“그래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송학이 뒷머리를 긁으며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갔다. 경비와 남자 사이를 중재하고는 이름을 확인했다.
주최 측 직통 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이름 석 자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네. 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송학이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동명이인이 있었나 봐요. 지원하고 난 뒤 취소를 했는데, 거기에 지원서가 같이 쓸려갔던 모양입니다.”
“그거 봐요! 난 확실하게 지원을 했다니까!”
“크, 크음.”
경비는 무안해 하고 남자는 기세등등해졌다.
“그럼 저 오디션 볼 수 있는 거죠?”
“음. 일단 4차까지 전부 끝난 터라 중간에 끼어들기는 어려운데······”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 심사조차 못 받았다고요.”
“끄응. 잠시 만요.”
이럴 때는 결정권자에게 맡기는 게 답이다.
송학이 다시 돌아와 진호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럼 지원자는 맞네.’ 이를 확인한 진호가 잠시 생각하다 의견을 제시했다.
“지, 직접 말인가요?”
“네. 진호가 개별적으로 연기를 확인해 보겠대요. 그래도 되는 거죠?”
“그, 그럼요! 영광입니다, 영광.”
어차피 휴식 시간.
잠깐 짬 내어 사람 하나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4차에 걸러진 수많은 사람처럼 저 중년 남자도 가망성은 높지 않을 터.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이건 뭘까.
남자 주변으로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더위에 달궈진 철판의 연기와 비슷했다.
이와 비슷한 걸 전에도 본 적 있다.
하지만 힘을 잃고 난 뒤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
진호가 눈을 비비며 다시 남자를 살폈다.
‘뭐지, 이건?’
안개는 보다 뚜렷하게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