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2. 바보가 되는 법(1)
서덕찬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는 나이 50에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 위주로 작업을 하는 인물이었다.
큰 흥행작은 없지만 나름의 커리어는 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작품 중 입상 한 것들이 제법 존재했다.
특히, 담백한 연출은 다른 영화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허. 이런 거물이 우리 영화에 출연을 하겠다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부탁 할 건 없습니다. 출연 제의를 수락 한 건 아니니까.”
“아이고, 서 선생님. 왜 이러실까. 홍 진호입니다, 홍 진호. 두 번 살펴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거리 두는 서덕찬에 윤길상이 다급하게 말했다.
진호라면 억만금 들고 찾아와 캐스팅 하고 싶어 하는 배우다.
푼돈으로 출연해 주겠다는데 이걸 거부 하면 안 된다.
“길상이 자넨 좀 있어 봐. 이렇게 대스타가 갑자기 저예산 영화라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아이고. 무슨 바람이면 어떻다고 그럽니까? 황사도 좋고 태풍도 좋고 산들바람도 좋아요. 오면 만사 오케이지.”
“자네가 그러니까 만날 사기만 당하는 거야. 사람은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한다고.”
두 사람은 꽤 친한 듯 보였다.
꼬장꼬장한 건 감독인 서덕찬, 유한 것은 대표인 윤길상이었다.
“그러니까 홍 배우가 한 번 말해 보시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예산 영화까지 기웃거리는 거요?”
“할리우드 바람이 세게 들어서요. 좀 빼고 싶어서 왔습니다. 시나리오도 마음에 들고 잠시 가라앉기에 좋을 거 같아서요.”
“우리 영화를 쉼터로 쓰겠다?”
“조금 더 영화에 집중하겠다는 겁니다. 막대한 자본 없이 순수하게 영화에 집중 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크흠.”
서덕찬은 마뜩치 않은 시선으로 진호를 봤다.
이런 저예산 영화에서 메가폰을 잡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한 번 거쳐 가는 느낌으로 저예산 영화를 들리는 놈 치고 제대로 하는 놈을 본 적이 없다.
괜히 분위기만 흐리기 일쑤.
“거, 그럼 영화 주제는 알고 있소?”
“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가 오래전에 가출했던 여동생이 돌아오며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죠.”
“네. 맞습니다. 지적장애 청년. 그거 할 수 있어요?”
“해야죠. 연기라면.”
“말은 쉽지. 이미 스타덤에 오르신 분이 그렇게 험한 연기를 제대로 할까 걱정되네요. 우리 영화의 가장 핵심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이 여동생과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에 있습니다. 어설프면 맛이 안 나요.”
시나리오라면 정독을 해 둔 터라 진호도 알고 있다.
정신지체 연기가 가장 핵심이라는 것도.
“어설프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 화면에 멍청하게 나갈 수도 있다 이겁니다. 이미지 신경 안 쓴다 이겁니까?”
“평생 멋있는 연기만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슈퍼 스타가 뭐하러······”
“자자. 잠깐만요. 서 서생님도 흥분 좀 가라앉히고. 배우가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썽을 내실까. 일단 캐스팅 목록에 올려 두시고 직접 연기를 보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럼 되죠?”
결국 윤길상이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로서는 감독도 배우도 놓칠 수 없었다.
“그래. 그럽시다. 딱 일주일 후에 여기서 오디션 형태로 연기 좀 보자고요.”
“배역은 안 정해줍니까?”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입니다. 알아서 준비해 보세요.”
“까다롭네요. 그래도 뭐 감독님이 하라고 하면 해야죠. 일주일 뒤에 뵙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어려 울 수록 더 많은 연습이 될 터.
진호는 험한 길을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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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유예를 받고 진호는 고심했다.
지적장애아 연기를 하고자 한다면 전생에서도 분명 한 두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배역을 온전히 표현하기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지적장애 판정을 받은 주인공.
애지중지하던 여동생이 어느 날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 가출은 한다.
그리고 나이 서른까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것이다.
동네 꼬마들에게는 바보라 놀림 받고 심보 꼬인 어른들에게는 손가락질 받는 모습으로.
“직접 몸으로 부대껴 봐야겠어.”
역시 이럴 때 가장 빠른 건 직접 부대껴 보는 것이다.
진호는 곧바로 인근에 있는 시설을 검색했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들을 보육하는 시설이 제법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가장 눈에 먼저 띈 것은 ‘하늘의 집’이란 시설이었다.
거리도 가까운 편이고 시설 규모도 상당히 컸다.
“네. 한 가지 문의드릴 게 있어서요.”
조심스러운 노크.
촬영 학습 차 견학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
하지만 돌아온 답은 차가운 것이었다.
“우리 애들은 동물원 원숭이가 아닙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시설을 개방하지 않아요.”
진호는 아차 싶었다.
배역만 고려하다보니 시설의 취지와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에 걸쳐서 거듭 사과를 한 뒤 시설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배우는 게 아니야. 체험하자.’
배역을 위해서라는 생각은 일단 버려야 했다.
그런 목적을 두면 아이들에게 큰 실례였다.
지금은 그저 봉사활동을 통해서 아이들을 느끼는 것.
그 뒤에야 얻는 것이 있으면 연기에 쓰면 될 뿐이다.
“내일 바로 나가겠습니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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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집 원장은 진호가 달갑지 않았다.
간혹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시설을 찾는 연예인들이 있긴 한데, 제대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시늉만 내고 이미지 관리만 하고 간다.
그나마 시늉이라도 제대로 내면 다행.
괜히 연예인 왔다, 라는 소식이 흥분한 아이들을 두고 못된 짓만 해서 상처주기 일쑤다.
마치 더러운 걸 보는 듯 한 시선.
불쾌한 표정.
날카로운 목소리 등.
그들은 별 것 아닌 일이겠지만 당하는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였다.
“제가 전화 드렸던 진호입니다.”
“······네. 영화 때문에 아이들을 관찰하고 싶다고요?”
“아, 그건 제가 실언했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배려했어야 했는데.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말뿐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말투.
진호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따라갔다.
“일단 한 가지 당부해 둘게요. 여기 애들 모두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상처입지 않을 권리가 있어요. 영화니 뭐니 목적은 둘째 치고 아이들에게 상처 입히는 짓은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저도 한 때 정신병력 문제로 병원을 오가곤 했습니다. 주변의 시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는 잘 알고 있어요. 주의해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두고 보겠습니다.”
원장은 진호를 원장실로 안내했다.
시설은 여러 개의 동으로 구별되어 있고 그곳마다 별도의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진호는 그 중 하나를 골라서 가야 했다.
“어디가 가장 일손이 딸리나요?”
“일손이 가장 부족한 건 아무래도 D동이죠. 지적장애가 가장 심한 애들이라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호기는 좋은데 초보가 감당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행동 조절이 잘 안 되는 터라 보기 힘든 모습도 많이 볼 겁니다.”
“예를 들자면······?”
“충동 조절이 안 되는 아이들은 갑자기 화를 내기 일쑤죠. 밥을 먹다가 던지는 건 기본이고 대변 활동을 마구잡이로 하기도 해요. 그렇지 않을 때는 참 착한 애들이지만······”
지적장애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시설 내 D동에 위치한 애들은 개중에서도 중증.
자가제어가 쉽지 않은 아이들 위주로 위치해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어렵다고 뺄 수는 없죠. 하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전 모르는 일입니다.”
원장은 진호를 D동 봉사인원으로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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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꽤 힘들 거예요.”
진호는 D동 담당 인원들과 먼저 인사를 했다.
10명이 한 반이었고 이에 두 명의 담당인원이 있었다.
10명에 두 명이면 은근 많아 보이는 숫자였지만 일이 일이다 보니 그 둘도 부족했다.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일단은 애들 말을 되도록 잘 들어 주세요. 말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렇군요.”
“그리고 되도록 아이들을 시야에 두도록 노력하셔야 해요. 급발진 하는 게 특기거든요.”
추가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듣고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선임 교사가 먼저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빙 둘러 앉아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흔히 볼 법 한 그런 장면이었다.
“애들아 안녕. 오늘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어.”
“아, 안녕. 진호 샘이라고 해. 잘 부탁해.”
“와아! 못생겼다!”
“와하하하하! 코가 이상해!”
“진호 샘! 진호 샘! 태균이가 자꾸 밥 뺏어먹어요!”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일단 보자마자 선빵 날리는 아이부터 금방 치근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선임 교사 뒤로 숨는 아이까지.
같은 지적장애 아이들이라고 해도 성격은 전부 달랐다.
“저기, 선생님. 저쪽에 있는 아이는 누구죠?”
개중에서 진호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었다.
구석에 혼자 쪼그려 앉아서 곁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아이.
“선우에요. 이 선우. 저 아이는 친해지기 쉽지 않을 겁니다. 시설 내에서도 원장님을 포함해서 겨우 몇 명만 겨우 말을 트거든요.”
“아. 그렇군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그랬나? 어머님 일 끝나고 돌아 올 때 아니면 웃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겁니다.”
구석에 숨어 주변을 살피는 모양새가 겁 많은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자, 일단 지금은 일과 시간이니까 저희 일부터 보조해 주세요.”
“아, 네. 뭘 하면 되죠?”
“춤 좀 추시죠?”
“······하하.”
진호는 아이들 동요에 이렇게 많은 춤이 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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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의 놀이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중식이다.
이때가 시설 직원들이 가장 예민해지는 시간이다.
충동 제어가 어려운 아이들은 밥에 욕심이 많고 사고 치기가 일쑤였다.
“태균아. 선생님이 밥 먹을 때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자, 앉아서 얌얌 하자?”
“하지만, 하지만! 내 소시지보다 석우 소시지가 더 크단 말이에요! 나, 소시지!”
“태균아. 선생님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지? 자꾸 그러면 저녁에 소시지 안 준다?”
“으아아아! 선생님 나빠! 태균이는, 태균이는 소시지 먹고 싶은데!!”
기본적으로 이런 모습.
화를 못 참은 태균이 급식판을 집어 던지자 이에 다른 아이들도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반찬이 날아다니고 고성과 비명이 방을 울렸다.
나름 베테랑인 직원들조차 이런 난장판은 쉬이 제어하지 못했다.
“다들 여길 봐!”
그때, 진호가 아이들 중심으로 나섰다.
손에는 두 뼘 정도 너비의 손수건을 든 채.
“선생님이 마술 보여줄게. 다들 자리에 앉자.”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아이들은 전부 귀를 기울였다.
식판을 던지던 아이들까지 모두.
“빙 둘러 앉아 봐. 이거 엄청나게 신기한 거야.”
진호는 능숙하게 손수건을 털어 동전 하나를 꺼냈다.
전생에 유명했던 마술사의 손동작을 빌려온 것이다.
아이들을 속이는 것 정도는 쉬웠다.
‘이 틈에 치워주세요.’
다른 직원들에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우?”
그리고 이렇게 모인 아이들 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선우가 고개를 든 채 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석에서 미동도 안 하던 아이가 움직인 것이다.
‘마술을 좋아하는 건가?’
진호는 묘하게 힘을 들어가는 걸 느꼈다.
“자자. 더 신기한 마술이야.”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