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5. 태극기 휘날리며(2)
일본 언론에서도 진호의 방송 출연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행적을 시간 단위로 특종 취급했다.
그가 마신 물, 먹은 음식, 스쳐가며 본 잡지 등이 모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심지어 촬영을 앞두고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지 패널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프로그램까지 방영되었다.
“어마어마한 인기네요.”
그렇게 촬영 당일.
스튜디오가 있는 방송국 앞으로는 진호를 보러 온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인근 교통까지 방해가 될 정도였다.
“어제와는 상당히 다르네요.”
“어제요?”
“있어요, 그런 거.”
전날 로비에서 보았던 걸 되새김질 하며 진호가 차에서 내렸다.
엄청난 비명 소리와 플래시가 그를 반겼다.
방송국을 진입하는 장면도 촬영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곤니찌와. 곤니찌와.”
진호는 짧게 배운 일본어 인사말을 던지며 걸었다.
좌우로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인파를 막고 있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은 터라 줄이 출렁거렸다.
게다가.
[저 죠센징을 당장 내보네!!]
[일본 땅에서 한국인을 몰아내라!]
[우리 세금을 어째서 한국 놈에게 쓰는 거냐!]
팬들과는 다른 성격으로 모인 시위대도 상당했다.
팻말을 흔들고 마이크 폰으로 거칠게 소리쳤다.
경호원이 만류하고 팬들이 욕설을 쏟아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빠르게 걷죠.”
경호를 담당한 남자가 조언했다.
경호원 숫자라고 해 봐야 10명도 안 된다.
운집한 수백 명의 사람을 다 막는 건 불가능했다.
“괜찮습니다. 멀리서 짖는 개는 무섭지 않아요.”
“······말조심하세요. 저들 중에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내기 할래요? 멍멍 짖는 개들이 물 수 있는지?”
“진호 씨?”
진호는 겉에 두르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앞면에는 태극기가, 뒷면에는 광복절 그림이 박힌 셔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팬들은 쇼맨십에 환호했고 시위대는 분노했다.
이건 누가 봐도 도발이었으니까.
“칙쇼!! 죠센징 따위가 감히!!”
“죽여 버려! 저 새끼 끌어내!”
경호원의 조언대로 한국어를 아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팻말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진호 쪽으로 달려왔다.
팬들은 놀라고 경호원들은 긴장했다.
“괜찮습니다.”
태연한 건 진호 혼자였다.
그는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정말로 누군가를 헤칠 만큼의 살의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저 뒤틀려 있을 뿐.
불만에 대한 반응, 정치적인 쇼, 억울함, 막연한 분노 등.
공항에서 자신을 공격한 한 사람 만 못했다.
“할 말이 있다면 제게 직접 하세요.”
진호는 팬들을 물리며 시위대의 남자와 맞섰다.
묘한 박력에 경호원들조차 제지를 하지 못했다.
“죠센징은 일본 땅에서 썩 꺼져라!”
“전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당신들이 받들어 모시는 일왕의 초대로 말이죠. 그걸 부정하는 겁니까?”
“이, 일왕이라니! 천왕폐하를 함부로 평하지 마라!”
“그걸 부정하는 건 당신입니다만.”
되레 한 걸음 더 나섰다.
그러자 시위대 남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팻말 들고 분노하던 다른 시위대들도 비슷했다.
고작 한 명에 수십의 시위대가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직접 손을 댈 만큼의 용기도 없는 사람이군요. 당신들의 혐오란 건 고작 그 정도라는 겁니다.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으면 자신을 유지 할 수 없는. 불쌍한 족속들 같으니.”
“개, 개소리 하지 마! 죠센징은 일본의 해악이다! 일본의 정기를 빼앗아 먹는 기생충이라 이거야!”
“그게 싫으면 스크린으로 맞서세요. 대 일본이라 말하면서 고작 저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이이······!”
당당하게 말함에 한 점의 거짓이 없다.
일본의 누구도 진호가 근래에 이룩한 영화적 업적에 비교 할 수가 없었기 때문.
그건 팬이 아닌 시위대조차 인정하는 일이었다.
“언젠가 그 혐오의 옷을 벗게 됐을 때. 제 영화를 한 번 관람해 보세요. 그때는 팬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 상태로 진호는 시위대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분을 토하던 이들이었음에도 가로지르는 진호를 막지 못했다.
그건 양떼를 헤집어 놓는 늑대.
패주하는 적진 속 용맹한 장수의 걸음이었다.
“스고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다만, 팬인지 시위대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일본의 유명한 사람들은 죄다 모였다.
본래부터 게스트가 많은 방송이었는데, 진호가 출연한다는 얘기에 특집으로 편성을 한 것이다.
중앙에 진호가 앉고 패널이 30명 정도 빙 둘러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특별 손님을 소개합니다]
프로그램의 형태는 일종의 토크쇼.
연예계 가십 등을 패널에게 물어봐, 그 반응을 보고 즐기는 것이다.
가십의 정도가 꽤 자극적인 터라 일본 내에서도 말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여섯 번째 요원으로 돌아온 홍 진호!]
진행자의 말에 따라 Co2가 치솟고 핀 조명이 진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패널과 주변을 차지한 방청객들의 환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월드 스타야, 월드 스타!]
[영화에서 대단했지. 그런 연기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굉장한 수익을 올린 영화야. 일본 영화 수십 편을 더해도 부족할지 몰라]
패널들의 발언이 오디오를 탔다.
프로그램 특성 상 작은 속삭임도 전부 오디오에 잡혔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셔서 대표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야말로 좋은 자리에 나와 영광입니다. 즐겁게 촬영하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이야, 목소리가 좋네요]
시작은 가벼웠다.
분위기 좋게 덕담을 주고받은 뒤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내용을 진호에게 설명했다.
패널들도 ‘팬입니다.’, ‘영화 잘 봤어요!’ 등의 훈훈한 말을 주로 건넸다.
[듣자하니 방송국에 들어오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하던데요?]
[팬들이 많이 나와 주셨더라고요]
[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하던데. 맞나요?]
하지만 이내 프로그램의 본성을 드러냈다.
사회자의 눈이 돌변하고 패널들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절 싫어하시는 분들도 꽤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온 것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군요]
[그럼 그 사람들과 한 바탕 싸우고 온 건가요? 주먹으로 팍팍?]
[하하, 설마요. 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말로 잘 설득하니 전부 자리를 비켜 주더군요. 어렵지 않게 통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이 설득인가요? 도발을 거하게 했다고 하던데. 일본에 진호 씨 만 한 연기자가 없다고 했다나?]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
패널 중 하나가 넌지시 던진 질문이었다.
프로그램은 이런 식이었다.
[설마요. 일본에 훌륭한 연기자 분들이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많은 분들을 존경하고 있죠]
[그럼 그 발언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걸 싫어하시기에 정 그러면 절 내쫓을 만큼 스크린을 장악하라고 한 거죠]
진호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꼬우면 실력으로 이겨라?]
[한국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사랑합니다. 자유경쟁 시장에서 이 현상이 싫다면 경쟁력을 키워서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둘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애니메이션은 여러 회사의 총합과 같은 거고 진호 씨는 개인 아닙니까?]
[그 분에게는 제가 일본 영화의 총합보다 나은 존재로 보였나 보네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패널이 똥 씹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오늘 녹화가 굉장히 길어 질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개전의 북이 울렸다.
#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지나갔다.
한, 일 연예계 소식들을 비롯해서 방송가에 떠도는 찌라시들도 상당수 등장했다.
패널들은 꽤 자극적으로 반응했다.
이들은 진호의 입에서 최대한 자극적인 발언을 뽑아내는 것이 목표.
도발도 하고 회유도 하고 낚시질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진호는 능숙한 대응으로 빠져나갔다.
애초에 목표가 자신인 걸 알고 있으니 집중만 잘 하면 걸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진호 씨가 오늘 입은 의상도 일한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건가요?]
[제 자격은 둘째 치고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아서 오지 않았습니까. 나름대로 한국을 대표한 입장이 된 것입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문양을 가슴에 품고 있음에 문제 될 것은 없죠]
[하지만 등 뒤의 그림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요?]
[생각해 보니 방송 날짜가 광복절과 맞닿아 있더군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약하자는 의미에서 입었습니다]
진호는 등을 카메라 쪽으로 돌려서 보여 주었다.
광복절이 수묵화 형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건 좀 아쉽군요. 한국 입장이야 이해를 하지만 저희 쪽에서는 꽤 아픈 기억입니다. 굳이 그걸 그림으로 그렇게 가져왔어야 하나요?]
[아픈 기억이라. 그래서 잊고자 하는 겁니까?]
[전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굳이 그 아픈 기억을 되짚어 낼 이유는 없죠]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아이들은 잘못을 해서 유리병 따위를 깨뜨리면 일단 울고 봅니다.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며 아픔을 먼저 피력하려는 거죠]
몇 몇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진호를 외면했다.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기억하고 반성하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분명 구별되죠. 광복절 그림을 보는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굉장히 무례하군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일본의 미덕이라 그랬죠. 길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도, 어떤 일을 행함에도]
[그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근데, 왜 그 예의가 과오에는 포함되지 않습니까?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 사과하고 반성하며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진호의 어조가 더욱 강해졌다.
통역을 담당하는 사람의 얼굴이 곤란해졌다.
번역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 내 이리 감옥에 갇혔다 한들 마음만은 드넓은 하늘 위를 거닐고 있다. 광복을 부르짖고 민족의 얼을 논함에 있어 고작 쇠창살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까.
찡, 하게 전해지는 누군가의 감정.
인생의 굴곡, 경험, 피 묻은 감정 등이 소나기 아래 놓은 노송처럼 빠르게 젖어갔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현자의 덕목이라 배웠습니다. 일본이 선진국이고 뭇 나라의 귀감이 되고자 한다면 잘못에서 눈을 돌리지 마세요]
통역 없이 진호의 입에서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사회자를 비롯한 패널들 모두 깜짝 놀랐다.
발음이 현지인의 그것처럼 매우 정확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친구가 된다면. 진정한 우방의 이름으로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때는 등 뒤의 그림을 아픔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에 와서 일본어로 우리에게 훈계를 하는 겁니까?]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손님 된 도리로 입에 안 맞는다 하여도 약은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이라니!]
[건방진!]
숫제 싸움이라도 일어 날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패널뿐만이 아니라 방청객들 중 일부도 험한 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런 거친 분위기 속에서도 진호는 뒷짐만 진 채 묵묵히 앞을 응시했다.
태풍 속 노송처럼.
[더 물어 볼 것이 있습니까?]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