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3. 하다 보니(1)
여민소가 고소를 취하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정황 증거밖에 없던 사건에서 핵심 인물이 태도를 바꾼 것이다.
증인으로 소환 된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첫 진술에서 구축된 상황 자체가 달라졌다.
결과적으로 진호의 무죄를 입증하는 길이 됐다.
“LGM대표 이강민 소환 조사.”
여민소가 마지막에 이강민을 끌어들인 덕분에 조사 범위가 확대되었다.
사건에 대한 모의가 진실이었는지, 그에 연류 된 사람은 더 없는지.
아직 시작도 안 한 LGM이 수사망에 올라갔다.
“야마코에서도 손을 뗐다는 말이 있던데.”
“부담스럽지. 한국 진출을 위해서 만들어둔 회사가 시작부터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데.”
“그럼 이제 끈 떨어진 상황인가?”
“LGM이 시작 전부터 그만은 사람들을 어떻게 영입했겠어. 야마코의 자본이 들어간 거지. 끈 떨어지면 볼장 다 본 거야.”
은서의 말대로 LGM은 공중분해 돼 버렸다.
이강민이 조사를 받고 투자자가 빠지자 이를 빌미로 소속 연예인들이 계약 해지를 주장한 것이다.
애초에 심지가 곧고 충성심 높은 이들이 아니었다.
갈아타는 건 누구보다 빨랐다.
“한 시름 놨네. 솔직히 어떻게 되는 건가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내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오빠도 좀 쫄았잖아. 아니야?”
“조금은?”
소문 하나에 훅 가는 것이 연예인이다.
진호라고 겁이 나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그보다 이강민에 대한 화가 더 컸을 뿐.
엿 먹일 생각을 한다면 역 먹을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제는 완전 좌우명처럼 굳어 버렸다.
“우리 언론들은 뭐라고 하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
“찬양 일색이지 뭐.”
편 갈아타는 것에 언론보다 빠른 조직이 있을까.
이미 성추행의 성 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웅적인 행보라며 진호를 추앙하기 바빴다.
“아이들의 영웅이라는데?”
“거창하기는.”
그야말로 거창했다.
#
진호는 스케줄을 조정했다.
성추행 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하루가 모자랄 만큼 연일 특종을 때려댔었다.
신경을 안 쓰고 싶어도 안 쓸 수 없는 환경.
이래저래 마음에 입은 상처와 피로가 상당했다.
“한 동안 쉬어라. 시나리오는 받아서 넘겨 줄 테니까, 그거만 살펴보고.”
“죄송해요, 대표님.”
“네가 뭘 죄송하냐. 이럴 때 잘 추슬러야 해. 사람이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면 지치는 법이야.”
최현석의 허락을 받아 휴가를 냈다.
스케줄이 줄줄이 쌓여 있었지만 일일이 연락해서 전부 미루거나 취소했다.
아쉬움에 한 소리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해를 해 주었다.
그들도 사람인만큼 진호가 멀쩡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아이 씨. 나도 오빠랑 같이 휴가가고 싶은데.”
“아직 촬영이 많이 남았잖아. 어딜 간다고 그러냐.”
“내 씬만 고속으로 찍어달라고 해 볼까?”
“아서라. 제대로 해야지. 괜히 연기 어설프게 하면 사람들이 욕해.”
“완전 아빠네, 아빠.”
은서는 같이 휴가를 가지 못해 아쉬워했다.
촬영 기간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 터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휴가는 어디로 가게? 고향 집?”
“잠깐 들렸다가 해외로 나갈까도 생각중이야. 아니면 좀 특별한 일을 찾아볼까도 하는데.”
“특별한 일?”
“진호 형, 나랑 봉사활동 가거든요!”
늘어지는 답을 하윤이 잡아챘다.
“봉사활동을 간다고?”
“저번에 고아원에 선물 전달했잖아요. 보답이라고 애들이 카드랑 보내 왔거든요.”
“아. 그 햇빛 고아원?”
“그곳 포함해서 몇 군데 갈까 생각 중이에요. 애들 보면서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고. 좋잖아요.”
“음. 좋긴 하네.”
휴가라서 해변 리조트 등을 떠올렸던 은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늘어지게 쉬는 것도 좋지만 봉사활동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도 괜찮았다.
‘후일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낫네.’
선행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돼 있으니까.
“선물 보낼 거면 나도 보탤게.”
직접 가지는 못해도 이 정도라면.
은서도 한 손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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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다시 햇빛 고아원을 찾았다.
첫 방문 때보다 배는 많은 선물을 가지고.
저마다 따로 놀던 아이들이 선물이라는 이야기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도 제법 눈에 띠였다.
“아이고, 또 뭘 이런 거 가지고 오셨습니까.”
“나름 필요한 걸 좀 사왔어요. 근데 애들이 더 는 거 같네요?”
“네, 네. 며칠 전에 고아원 하나가 문을 닫아서요. 그쪽에서 애들이 몰려왔지 뭡니까.”
“아······고아원도 문을 닫고 그러나요?”
“뭐. 이쪽도 사정이 있죠. 문 닫기 싫다고 마음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닌 터라.”
기본적으로 고아원은 국가에서 운영한다.
형식적으로는 민간에 의탁하여 운영하고 있지만 결정권 자체는 국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아원의 숫자와 운영 형태는 결국 높은 곳에서 결정되는 정책을 따르는 법이다.
“갑자기 애들 숫자가 늘어나면 곤란할 거 같은데. 괜찮은 겁니까?”
“선생님들 숫자는 어떻게 맞추고 있는데, 아무래도 시설이 못 받쳐주죠. 확충을 한다고 해도 어디 뭐 한두 푼도 아니고 말이죠.”
“이런. 나라에서는 지원을 안 해 줍니까?”
“기존의 지원금은 그대로 나오죠. 다만, 이렇게 셈이 복잡해질 때는 시간이 많이 드는 터라.”
공무원의 행정이라고 말하면 너무 쓴소리일까.
정해진 예산을 두고 셈해야 하는 지방단체의 입장에서도 마음껏 돈을 옮길 수는 없다.
애초에 기획편성을 하고 행정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어디 마음대로 굴러가는 일일까.
위에서 ‘이거 옮겨라.’라고 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 공무원일 따름이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아이고.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고맙죠. 애들도 얼마나 좋아합니까. 저흰 그냥 이렇게 애들이 웃어만 주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까······”
희게 웃는 원장의 얼굴에 진호의 생각이 깊어졌다.
단순하게 봉사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왔을 뿐인데, 속은 그리 희망찬 것이 아니었다.
“일단 애들 얼굴부터 좀 보고 싶네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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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한 바탕 놀아주고 잠깐의 휴식 시간.
진호는 준비해 둔 도시락을 돌리며 짧게나마 쉴 시간을 잡았다.
“아이고. 애들이 뭔 체력이 이렇게 좋냐.”
“흐흐. 힘들어요?”
“힘들다마다. 이래서 애 낳고 키우는 어머니들이 체력이 좋은가보다.”
송학이 어깨를 두드리며 하소연했다.
진호와 덩달아 휴가를 쓰고 이곳까지 따라왔다.
괜찮다는 진호의 말에는 ‘나도 더 따라서 덕 좀 쌓자.’라며 기어코 한 손 거들었다.
“야야. 그래도 애들 저렇게 웃는 거 보니까 기분은 좋다. 사람들이 왜 봉사활동 나오는지 알 거 같아.”
“그러게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네요.”
“자식이, 편하긴. 너. 속에 걸리는 거 있잖아.”
“와. 형, 이참에 점집 차리시죠?”
“농담은. 내가 너 하루 이틀 보냐? 이젠 슥 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고.”
송학의 말에 진호가 머쓱하니 웃었다.
그의 말대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실 기부를 좀 해볼까 해서요. 고아원 형편 듣고 나니 마음 쓰이는 것도 있고.”
“시설에? 뭐, 좋지. 선행해서 나쁠 게 뭐가 있냐. 그게 고민이었어?”
“아뇨. 그런 것 보다······그냥 기부로 끝내도 될까 싶어서요. 왠지 돈으로 다 하는 기분 같기도 하고.”
“하이고. 넌, 뭔 걱정이 그렇게 많냐. 보다보면 너도 참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송학이 마시던 커피 빨대를 뽑아서 진호를 가리켰다.
“이 형이 그래도 너보다 몇 년 더 살았잖아. 그래서 조언 삼아 한 마디 하는데······짐 좀 덜어 내. 너 혼자서 다 이고 살 거냐? 기부하면 기부로 끝내. 돈 받은 사람들은 돈 받아 좋고, 준 사람은 줘서 좋고. 문제는 없어.”
“그······렇겠죠? 에휴. 이번에 된통 당하고 났더니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네요.”
“이 바닥이 그렇지. 아니, 이 바닥만 그렇겠냐. 사람 사는 게 다 더럽지. 다들 돈이면 친구니 가족이니 다 팔아넘기고.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여기가 지옥인가 싶기도 하다.”
“갑자기 회의론이에요?”
“근데 어쩌냐. 그런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사람인데. 다 바꿀 순 없어. 그냥 그 와중에서 좋은 거 찾아서 나누며 사는 게 최선이지. 착한 일은 착한 일이고, 나쁜 일은 나쁜 일이야. 단순하게 살아. 복잡하게 모든 걸 머리에 이고 살지 말고.”
툭툭, 두드리는 송학의 손길에 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고민이 있을 때 옆에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멍청아!”
그때였다.
고아원 앞 공터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마시던 커피를 놓고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아이들 몇이 패를 나누어 대치하고 있었다.
“뭐지?”
“애들끼리 싸우나 본데?”
“잘 먹고 놀더니 갑자기 왜 싸우는 거지?”
진호와 송학이 아이들 쪽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고아원 안쪽에서도 선생들이 뛰어나와 아이들 싸움을 말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 이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누가 뭐 장난감이라도 부러뜨렸어요?”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멍청아! 나가라고! 여긴 우리 집이야!”
원장의 답을 끊고 날 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소년이었다.
반대 편, 비슷한 또래의 소년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모양새가 싸움의 발단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만, 그만. 뭐하는 거니? 지금 손님도 와 계신데. 들어가서 씻고 잘 준비 해.”
“싫어요! 쟤들이 와서 좋아하는 이불 뺏어 갔단 말이에요!”
“뭘 뺏어가! 원장님이 나 준 거라고! 멍청아!”
“뭐야!? 누가 멍청이야! 이 돼지 같은 게!”
“야! 누가 돼지야!”
아이들은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원장을 비롯한 선생들은 난감한 얼굴로 계속 진호 쪽 눈치를 살폈다.
평소에는 좀 강경하게 나갔을 테지만 손님이 앞에 있으니 머뭇거리는 것이다.
“자자. 둘 다 그만. 친구한테 욕하고 그러면 안 되지.”
되레 진호가 나섰다.
씩씩거리는 두 아이 사이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쟤가 제 이불 가져갔다고요!”
“아니라고! 그거 내꺼야!”
“뭐야! 밖에서 들어온 주제에! 여긴 우리 집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집은······우리 집은! 으앙!”
한 아이가 울어버렸다.
그러자 소년과 함께 넘어온 다른 고아원 애들도 하나 둘 울기 시작했다.
집 없는 설움은 아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자자, 뚝. 왜 울고 그래.”
“여기 우리 집······훌쩍. 우리 집, 아닌데. 아는데. 자꾸 나가라고······흐윽. 크응.”
“그래. 서러웠어? 자꾸 나가라고 그래서?”
“네, 네. 흐윽. 훌쩍. 우리도. 집 있었는데. 다 있었는데······나쁜 놈.”
진호가 우는 아이를 다독이며 다른 소년을 봤다.
자기도 머쓱한지 얼굴은 붉히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넘어 온 아이들인데 그렇게 모질게 굴면 안 되지. 다 같은 친구잖아. 양보 할 건 양보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야지.”
“······내 이불인데.”
“이불이 필요하면 형이 사줄게.”
“어? 진짜요?”
“대신 한 가지 형이랑 약속하자. 아니. 약속 말고 형이랑 재미있는 거 하나만 하자.”
진호가 짧게 끊으려던 말을 늘렸다.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니까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너네, 연극 한 번 안 해 볼래?”
울던 아이마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