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37화 (37/178)

Chapter17. 조운의 창, 악공의 대금, 조조의 눈(1)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교외의 숲이었다.

수련원으로 쓰던 곳을 촬영으로 빌려온 것 같았다.

중간 중간 꽤 어려워 보이는 장애물들이 있었다.

“세팅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스텝들의 현장 세팅이 한창이었다.

아무리 게임이 진지해도 기본은 안전.

경주로 주변 잔가지를 치우거나 만약을 위한 안전 장비는 필요했다.

“저기, 진호 씨 쪽. 쿠션 더 깔까요?”

“그래야겠지? 나란히 뛰다가 다치면 곤란하잖아.”

“그럼 따로 준비 해 둘게요.”

“그래. 선호 씨는 워낙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진호 씨 위주로 좀 챙겨.”

진호의 귀에 스텝들의 대화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한 동안 산을 타서인지 귀도 밝아져 있었다.

“걱정 마세요. 살살 할 테니까.”

귀 밝은 건 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쭐한 얼굴의 박선호였다.

“게임은 공정하게 해야죠.”

“하하. 무리 안 해도 돼요. 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미리 말해서 편집 하시죠. 다치면 자기만 손해 아닙니까?”

“제가 질 거라고 단정하는 거 같네요.”

“굳이 홍보하러 나오신 분을 다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박선호가 씩 웃으며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얼핏 보기에는 진짜로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관찰력이라면 셜록 홈즈로 다져 놓은 진호다.

웃음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정도는 대번에 파악했다.

“잘나가면서 겸손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가 보네요.”

“그건 무슨 의미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만나는 놈들마다 이럴까.

아니, 어쩌면 이런 놈들을 만드는 연예계가 구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 바닥에서 누가 겸손과 예의를 우선시 하겠는가.

일단 뜨면 그 뒤가 없는 것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녹화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하지만 직시해 보자.

그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 진호 그 자신이다.

한탄하고 아쉬워하기만 할 건가?

“한 번 해 봅시다.”

결국 맞붙어 싸워야 한다.

#

게임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허리 높이의 허들과 물컹한 진흙.

중간에 놓인 외줄 타기 등.

예능 치고 확실히 난이도가 높았다.

선두로 나선 출연자들끼리 이리저리 엉키며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했다.

흉하지만 이게 이 예능의 맛이었다.

“슬슬 겁나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동네 놀이터 수준이죠.”

“이야. 연기 대신에 무술 연습부터 하셨나 보네요?”

“그런 거 없어도 이 정도는 거뜬하죠. 선호 씨. 무서 우면 포기해도 됩니다.”

“하하. 진호 형님. 오늘 처음 보는데 재미있는 분이시네.”

차례가 다가오고 진호와 선호가 트레시토크를 주고받았다.

분위기를 달구는 일종의 장작.

두 사람의 얼굴부터 PD의 표정까지 한껏 달아올랐다.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건 역시 이런 구도였다.

“좋아. 좋아.”

PD 윤길수가 손을 빙빙 돌렸다.

카메라가 두 사람을 교차해서 잡으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 올렸다.

선두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바통이 바뀌었다.

“다쳐도 난 모릅니다.”

“선호 씨야 말로 조심하길. 아이돌은 몸이 재산이잖아?”

“하. 진짜 재미있네, 이 아저씨.”

“그러게. 나도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이제 알아서.”

뒤쪽 대화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PD가 스텝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모두 오케이.

손을 딱 내리며 출발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뛰어나갔다.

#

프로그램 PD는 애초에 진호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드라마 반짝 흥행한 배우와 인기 절정의 아이돌.

누굴 더 띄워 줘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그렇기에 진호가 강경하게 부딪쳐 올 때 환호했다.

이거 좋은 그림이 나오겠다.

그런 생각이었던 것이다.

“자자. 허들 가자고.”

“넘는다, 넘는다.”

“빨라! 둘 다 빨라! 와!”

헌데, 막상 게임에 들어가자 상황이 좀 이상했다.

둘 다 놀랍도록 빨랐다.

거의 절정의 운동부 수준 속도.

PD는 이런 장면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박 선호는 고등학교 시절 육상부 출신.

진호가 따라붙는 모양새가 나와서는 안 됐다.

“저걸 저렇게 넘어!? 와, 씨!”

“스턴트맨 아니냐?”

“중간에 허들 잡고 뛴 거 봤어?”

거의 곡예 수준으로 허들을 넘는 진호.

중간에 허들을 손으로 짚고 뛰는 장면은 거의 무술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이거 이러다가 진호 씨가 이기겠는데?”

“야. 조용히 해. 그럼 그림 이상해지잖아.”

“뭐가 어때서 그러냐. 진호 씨가 이길 수도 있지.”

재미있는 건 스텝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진호를 응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선호는 지나치게 미남에 잘나가는 아이돌.

반면 진호는 그것보다는 모자란, 어딘가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빼어난 선호와 박빙의 대결을 벌리고 있으니 절로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반환점 돌았습니다. 넝쿨 타기인데······꺅!”

상황을 브리핑하던 작가 중 하나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넝쿨을 잡고 오르던 진호가 갑자기 뒤로 휘청거린 것이다.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선호 씨가 잡아당기지 않았어?”

“뭐? 뭐라고 했어?”

“조금 전에 넝쿨요. 선호 씨가 진호 씨 옷을 잡아당긴 거 같은데.”

“조용히 해. 다들 쓸 때 없는 말 하지 말고.”

PD가 스텝들을 조용히 시켰다.

다행히 진호는 넘어지지 않았다.

빠르게 균형을 잡고 다시 선호를 따라잡았다.

이 모습에 PD가 다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건 기대와는 다른 결과였다.

“둘 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와. 진호 씨가 월등하게 빠른데?”

“차이가 꽤 나잖아.”

어째서 저 인간이 이기는 걸까.

PD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

“아이고, 선호 씨. 고생했어요.”

게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PD는 박 선호를 찾아가서 직접 상태를 살폈다.

‘어우, 왜 저래.’라는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일이 가장 중요했다.

“PD님. 저, 이러려고 섭외하셨어요?”

“무슨 소리야. 이러다니.”

“저쪽. 홍 배우 말이에요. 저렇게 날고뛰는 거 다 알고 있었죠? 그래서 나 섭외해서 물 먹어보라 이거죠?”

“에이. 뭔 소리를. 애초에 우리가 섭외를 했나? 선호 씨 회사에서 연락을 해 왔지.”

“아 짜증나. 그럼 저 인간 대체 뭔데요? 나 고등학교때 육상 한 거 알죠? 왜 나보다 더 빠른건데요?”

그걸 PD가 알 턱이 있나.

그는 에둘러 답하며 그냥 선호를 다독이기만 했다.

팬덤 센 아이돌은 PD도 휘두르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 맞다. 있다가 점심 식사 미션 할 때. 장기자랑 같은 거 있죠? 그거 나랑 저 인간 붙여줘요.”

“중간에? 가능은 한데······진호 씨가 뭘 들고 온지는 알고 있어요? 전에 길거리 노래방에서 한 건데.”

“대금? 알죠. 상관없어요. 이번에 나오는 신곡 반주로 깔고 안무 할 거니까.”

선호도 그 프로그램은 봤다.

확실히 남다른 재주였다.

하지만 그래봐야 고리타분한 대금.

신곡 깔고 안무를 하는데 비교가 될 리 없다.

“확실하게 좀 해 줘요. 신곡 홍보 잘 되면 꼭 PD님 이름 넣어서 감사 영상 올릴 테니까.”

“역시 선호 씨가 뭘 좀 아네. 걱정 말고 있어. 내가 딱 분위기 잡아서 게임 돌릴 테니까.”

“그럼 PD님만 믿습니다.”

눈짓으로 인사하고 흩어지는 둘.

흔하디흔한 대화였다.

#

선호가 PD와 독대를 하고 있을 무렵.

진호는 나머지 출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야. 진호 씨 완전 다시 봤는데. 운동 좀 한다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건 뭐 운동선수여.”

“그러니까요, 형님. 난 무슨 축구 선수인줄 알았네.”

“와. 다리 한 번 만져 봐도 돼요?”

김의남을 필두로 한 출연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프로그램 연차가 벌써 3년.

운동선수나 준 프로급 인물들도 대거 출연했었다.

그 와중에서도 진호가 보인 실력은 발군이었다.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크. 그것보다 난 진호 씨가 저기 선호 저 친구 이겨서 기분이 좋다. 아까, 넝쿨 타고 오를 때. 뒤에서 잡아챘죠?”

“야야.”

“아, 왜요 형님. 솔직히 형님도 봤으면서. PD양반도 참 그런 거 있으면 자기가 말려야지. 경쟁 붙인다고 그냥 두면 쓰나.”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봤다.

PD가 함구령을 내리고 진호가 별 말이 없으니 유야무야 넘어갔을 뿐.

“솔직히 선호 그 친구. 좀 마음에 안 들더라. 겉으로는 실실 웃는데 인사도 썩 성의 있게 안 하고.”

“어. 형도 그렇게 느꼈지? 하여튼 요즘 애들은 좀 뜬다 싶으면 거만해서는.”

“지금도 봐봐. 다들 나와서 이렇게 쉬는데 PD랑 독대나 하고.”

한 명이 물꼬를 트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왔다.

다들 연예계 짬밥만 십 수 년씩은 되는 사람들이다.

선호의 태도가 어떤지는 곁눈으로만 봐도 알았다.

“전 괜찮습니다. 저 나이 때 아이돌이면 한창 승부욕 타오르고 그럴 때죠. 그나마 나이 좀 더 먹은 제가 참고 가야죠.”

“크. 우리 진호 씨. 아주 진국이야. 내가 처음 올 때부터 알아 봤다니까.”

“그러니까. 드라마 연기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고.”

“흐흐. 이거 칭찬만 듣다가 얼굴이 다 닳아 없어지겠는데요?”

진호가 능글맞게 반응했다.

이제 이런 사회생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대응 할 수 있었다.

아니, 차라리 쉬웠다.

“맞다. 조금 있다가 자리 옮기면 점심 대결이죠?”

“어. 못 이기면 굶으니까 제대로 해야 해. 뒤에서 따로 챙겨주고 그런 거 없어.”

“아, 그럼 이거 어쩌나. 우리 팀 선배님들만 식사를 하게 될 거 같은데.”

“어쭈? 우리가 그냥 질 거 같냐?”

“흐흐. 제가 특별한 걸 준비해 왔거든요. 점심 식사를 못하게 될 거 같으니까 미리 사과의 인사 올리겠습니다.”

진호가 반 농담 식으로 반대 팀 출연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이거 기대 반 걱정 반인데?”

“밥은 못 먹어도 되니까 어디 그 특별한 거 한 번 보자고.”

“대신 어중간하면 나중에 혼난다. 알았지?”

“네, 선배님들. 기대를 반드시 충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준비라면 차고 넘치도록 해 왔다.

진호는 점심을 자신했다.

#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녹화에 들어갔다.

팀 별로 미리 섭외해 놓은 한식집으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부터 녹화를 시작한데다 땀나게 뛴 덕에 모두 허기진 상태였다.

“밥 좀 먹고 합시다!”

“연예인의 식사권을 보장합시다!”

“하하. 다들 식사하실 때가 됐죠?”

익숙한 듯 출연자들이 징징거리고, PD가 이를 받았다.

한 끼 식사권이 달린 게임.

한식집 앞쪽 공터에 쭉 자리를 잡고 팀 별로 대결 구도를 이루었다.

“우리 팀은 선호가 나간다고. 가라, 아이돌. 가서 밥을 가져오라고.”

“그쪽이 아이돌이면 우리는 배우다. 진호 씨 자신 있죠?”

양 팀 팀장들은 포켓몬 대전을 하는 것처럼 대표를 한 명씩 내보냈다.

진호와 박선호였다.

두 사람은 공터 중앙에서 마주 섰다.

“홍 배우님.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셨나 봐요?”

“그냥 숨쉬기 정도죠. 아까 전 게임은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배우님이라 그런지 아주 대사가 찰지네.”

“즉흥연기는 기본 아닙니까.”

서로간의 견제가 팽팽했다.

두 사람 모두 지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번에는 제가 이겨야 할 거 같네요. 선배님들 또 굶겼다가는 큰 일 날 거 같아서요.”

선공은 박선호가 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주자 준비했던 MR이 나왔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신곡이었다.

“오. 이거 무슨 노래야?”

“이번에 나올 노래 선 공개입니다. 선배님들 굶길 수는 없어서요.”

“어이구! 선호야! 우리 선호 장하다!”

“이겼다. 끝났어. 선호가 신곡 틀었으면 이야기 끝난 거지.”

팀원들이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쿵쿵, 하고 떨어지는 비트 속에서 박선호가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확실히 인기 아이돌인 이유가 있었다.

화려한 스텝에 현란한 몸동작.

잘 춘다, 라고 평가받는 아이돌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주변 스텝들도 ‘오!’하며 낮게 감탄했다.

“이야. 이건 좀 어렵겠는데.”

“그렇죠? 신곡 가지고 안무하는데 어떻게 이기려나.”

“진호가 져도 그냥 다독여 주자고. 이런 쪽에서 아이돌 이기는 건 힘들잖아.”

진호 쪽 팀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신곡을 선 공개로 들고 나와서 아이돌이 춤을 추는데 이걸 꺾으라는 건 무리였다.

밥은 못 먹겠지만 뭐라 하지는 말자.

나름 너그러운 분위기였다.

“후우. 후우.”

그리고 그 무렵, 박선호의 춤이 끝났다.

가쁜 숨을 토하며 진호를 쏘아봤다.

시선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네 주제에 이걸 이길 수 있겠느냐?’

진호는 피식 웃었다.

“쉬는 거 없이 바로 갈게요.”

허리춤에서 대금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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