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33화 (33/178)

Chapter15. 황천(1)

사람들이 괜히 연기 내공이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니다.

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이 연기.

작은 표정의 변화, 몸짓의 달라짐, 대화 톤의 수정 등.

사소한 변화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연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건 직접 경험하고 느껴야만 알 수 있는 영역.

실제로 진호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다.

전생을 깎아내어 캐릭터를 만든다 하여도 그 안에 디테일을 집어넣는 건 결국 그의 역할이었다.

지난 여정은 그에게 이런 경험을 불어 넣었다.

“씬 들어갑니다.”

영화 한 편을 위해 투자한 3개월의 시간.

그 기간 동안 정성스럽게 조각한 자신의 캐릭터가 온전하게 숨 쉬고 있었다.

말을 할 때 상대를 어떻게 보는가.

숨 쉴 때 소리는 어떠한가.

밥은 먹을 때 습관은 무엇인가.

잠은 또 어떻게 자는가.

하나하나 살을 붙여 올린 캐릭터는 생명을 얻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같은 대사를 해도 전과 달랐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보는 하늘도 그날 기분 따라 평이 다르지 않은가.

하물며 인생을 새로이 쌓아 올렸는데 같을 수가 없다.

말투, 시선, 손의 움직임.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완전히 새것으로 연기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감정 그대로 살려서.”

이젠 더 이상 카메라나 스텝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과 상대역만 존재할 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반응하고, 행동에 따라오고, 말에 대꾸하는.

마찬가지로 이곳에 남은 사람이었다.

진호는 절로 흥이 났다.

하지만 연기를 방해하는 흥은 아니었다.

가슴 저 안에서 들썩이는 그런 종류의 흥분.

담아 낸 걸 모두 토해내고 그 파도를 온전히 자신이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컷! 컷!! 스텝들 물하고 마른 수건! 빨리!!”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놀이가 끝났다.

퉁퉁 부은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상대 여배우를 보며 진호가 입술을 씹었다.

기쁘지만 모자란.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가 가슴을 간질거렸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최고의 연기였네!”

그건 진호만의 것.

크게 웃으며 어깨 두드리는 박종찬을 보며 진호도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진호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

촬영이 모두 끝나고 쫑파티마저 지나갔다.

매일같이 강행군으로 이어지던 스케줄이 뚝 하고 끝난 것이다.

어떤 말로는 휴식, 어떤 말로는 공백이 찾아왔다.

“그럼, 가 볼게. 당분간 휴가니까 푹 쉬어라.”

“네, 형. 형도 고생했어요.”

“고생은 무슨. 일은 네가 다 했는데. 하여튼 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게 제일이야. 마음껏 늘어지라고.”

두 달 전부터 호형호제하기 시작한 매니저 송학마저 떠났다.

촬영이 끝나고 당분간 스케줄이 없으니 일시적으로 휴가를 보낸 것이다.

“은서는······촬영 중일 테고.”

전화번호 목록에 있는 사람을 쭉 훑었다.

은서는 새로운 드라마에 들어가 한창 촬영 중.

아영이를 비롯한 동아리 사람들은 시험 기간.

딱히 연락 할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나도 참 인맥 없다.’

고향 친구나 회사 친구 같은 건 없다.

전에는 사람 피하기 급급했으니까.

텅 빈 연락처를 몇 번이나 긁어보다 포기했다.

“······그냥 쉬자.”

송학의 말대로 머리 비우고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재충전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고.

“······”

하지만 쉰다고 해도 어찌 쉬어야 할까.

진호는 바닥에 누운 채 묘한 감정을 곱씹었다.

약간의 아쉬움과 허무함.

타다 남은 잿가루 같은 까끌함이 느껴졌다.

‘이게 그 배우들이 앓는다는 후유증인가?’

드라마를 끝냈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는 몰입이 덜했기 때문일까?

지금 같은 응어리는 낯설고 불편했다.

우웅. 웅.

마침 걸려온 전화.

대출 전화라도 차라리 반가울 것 같다.

손을 냉큼 뻗어서 화면을 살폈다.

“대표님?”

푹 쉬라고 문자까지 남겨 둔.

최현석 대표의 전화였다.

#

“반갑습니다. 왕호룽이라고 합니다.”

최현석 대표의 연락으로 찾아 간 회사.

진호는 익숙한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어딘가 고급스러운 행색.

게다가 주변 동행도 범상치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의 검은 정장 외국인들이 우연히 찾아온 방문객은 아니지 않겠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진호라고 합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정말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그럼요. 제가······아. 그러고 소속을 깜빡했군요. 황천에서 나왔습니다.”

“황천. 그 회사 말이군요.”

이번 영화를 제작 할 수 있게끔 도와준 중국계 회사.

진호도 관계자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기대 많이 했습니다. 진호 씨. 드라마, 한 편도 빼먹지 않고 전부 다 봤습니다.”

“중국에서 말인가요?”

“네. 연기. 훌륭했습니다. 많은 배우들의 귀감이 될 수준이었습니다.”

몇 마디 나눠보니 조금은 중국인 티가 났다.

“그보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진호 씨.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네. 며칠 전에 마지막 촬영 분까지 끝냈습니다.”

“하하. 잘 됐군요. 그럼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 괜찮습니까?”

“시간을 보내요······?”

“아. 말이 이상합니까? 휴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진호 씨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습니다.”

말은 이해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진호는 문맥을 납득하지 못했다.

황천에서 나온 사람들이 갑자기 휴가를 같이 보내자?

중국에서는 원래 그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음. 그렇군요.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진호 씨 팬입니다. 드라마를 봤을 때도 감명을 받았고 이번 촬영 분에서는 더욱 놀랐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촬영분을 보셨다고요?”

“네. 제가 만드는 영화이니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만드······설마. 그쪽이 황천 회장님의 첫째 아드님?”

“하하. 지금은 제가 대표로 있습니다.”

말쑥하게 웃는 모습에 진호가 깜짝 놀랐다.

말이 쉬워서 대표지, 황천은 중국에서도 이름 꽤나 날리는 회사다.

자본 규모를 따지자면 국내에서 비견 할 그룹을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런 거대 집단의 대표가 자신을 보러 날아왔다?

부담이고 뭐고, 그 이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국. 크고 강합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약합니다. 고유의 것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것, 일본의 것, 미국의 것.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훌륭한 배우는 많이 있습니다.”

“아뇨. 저는 사람을 잘 봅니다. 제 눈에 진호 씨 만큼 훌륭한 재목은 없습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 자세, 표현 등. 배울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고 싶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벗을 사귐에 있어 제약을 두지 말라. 오직 그 사람의 됨됨이만을 따져라. 이것이 부친의 가르침입니다.”

거 참 잘 가르쳤다.

진호는 속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부호라 해서 어느 정도는 색안경을 쓰고 봤던 것이 사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참 진국이었다.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진호 씨. 저와 시간을 보내겠습니까?”

“······”

슬쩍 옆을 보니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이는 최현석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진심을 떠나서 이런 걸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가 봅시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

휴가 계획이 정해졌다.

#

진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용기를 타 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행기 자체가 처음이었다.

여권은 만들어 두었지만 언제 쓸 일이 있었던가.

그 처음이 수백억을 호가하는 전용기였을 뿐이다.

“이쪽입니다.”

공항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서 기다림 없이 별도의 출구로 나가서 커다란 비행기에 올라탔다.

좌석은 누워도 충분할 정도로 넓고 비행기 안에는 커다란 라운지 홀과 미니바도 구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아래쪽에는 당구장 같은 놀이 시설도 있었다.

아마 진호가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 있었다면 훨씬 더 크게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멋모르는 놈이 더 용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진호는 그저 전용기가 좋구나, 라며 입만 벌리고 돌아다녔을 뿐이다.

“진호. 내 전용기. 마음에 듭니까?”

“어······하하.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거라서요.”

“오, 그렇습니까? 이거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가 내 것이라.”

“내 것. 그러니까 이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해외를 갈 때면 애용합니다.”

얼마입니까, 라고 물어보려다 진호가 참았다.

지금도 충분히 물정 모르는 얼굴일 것이다.

여기에 촌놈 한 스푼 더하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 왕 대표님.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왕 대표. 불편합니다. 진호 씨. 저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납니다. 편하게 왕 형으로 불러 주세요.”

“······농담이시죠?”

“하하. 진담입니다. 회사. 많은 사람들이 왕 형이라 부릅니다. 왕 따거. 친근하고 좋은 호칭입니다.”

“네, 네네. 왕 따거.”

엄지손가락 하나 올려주며 따거라고 하니까 좋아라 웃었다.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진호는 쉽사리 정할 수 없었다.

“그럼 전 왕 형이라고 부를 테니, 말을 편하게 해 주세요.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연장자인데.”

“아. 나 늙어 보입니까? 슬픕니다, 그건.”

“뭐 겉보기로는 비슷한 나이 같아요.”

“하하하. 좋습니다. 좋아. 나 진호 아우에게 말 편하게 한다.”

“······네. 왕 형님.”

그룹 대표와 호형호제하게 생겼으니 좋은 걸까.

진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보다 우리 어디 가는지 말 안 해 주실 건가요?”

“아. 그렇지. 우리 지금 파티 간다. 파티.”

“파티? 무슨 파티요?”

“진호 아우 촬영 끝난 파티. 베가스 홀을 통째로 빌렸다.”

“베가스요? 라스베가스?”

“다른 베가스도 있나?”

라스베가스는 커녕 제주도도 가 본 적 없는 진호다.

첫 해외 진출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었다.

“재미있을 거다. 친구들을 잔뜩 불렀거든.”

“친구들이라면······?”

어째 이번에도 보통 사람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제임스 터너. 스티븐 말머. 론 위너······”

“자, 잠깐만요. 지금 그 이름들 진심이에요?”

“하하. 난 해외 스타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더 많이 있지만 오늘은 적게 부른 거다.”

지금 왕호룽이 언급한 이름들은 영화계 거물들이었다.

지식이 얄팍한 진호마저 전부 알 만 한 이름들.

해외 영화 소식이라고 검색하면 한 자리씩 전부 걸리고도 남을 것이다.

“가자. 즐거울 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진호는 대학축제에 끌려간 중학생 남자의 기분으로 웃었다.

#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티였다.

왕호룽의 말에는 단 한 점의 허풍도 없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홀에 명품으로 도배한 인간들.

해외 영화에서나 보던 스타들과 감독.

심지어 유명 스포츠 스타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이 진짜일까.

진호는 볼을 한 번 꼬집어 봤다.

“소개하지. 이쪽은 한국에서 온······”

보는 것 만해도 이럴 지경인데.

왕호룽은 한 술 더 떴다.

파티장 내를 돌며 진호를 사람들에게 소개시켰다.

영화관에서나 보던 그 배우들이다.

영화제에서나 모습을 보이던 감독이다.

영어로 뭐라고 쏼라쏼라 떠드는데 귀에 안 들어왔다.

그저 왕호룽 곁에서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파티는 좀 마음에 드나?”

“······이런 파티를 자주하는 겁니까?”

“하하. 기념 할 일이 있으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본래, 사업은 인맥에서 나온다고 하잖아.”

“그렇죠. 그렇기야 하죠.”

그렇다고 해도 이런 파티라니.

지금 모인 사람의 몸값만 환산해도 블록버스터 몇 편은 나올 것이다.

진호는 몸이 붕붕 뜨고 볼이 뜨거웠다.

“왕 형. 왕 형.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파티장을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누군가 왕호룽에게 친근함을 보이며 다가왔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잘 생긴 남자였다.

“오. 이거 배 배우님 아니신가.”

“하하. 오랜만에 왔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나야 언제 나와 같지. 이번에도 멋진 보석 하나를 발굴하고 왔다고.”

잠깐 말을 섞고 왕호룽이 진호를 소개했다.

배 배우라 불린 남자는 그런 진호를 유심히 살피더니 어딘가 묘한 얼굴로 웃었다.

“한국에서 왔습니까?”

“네. 혹시 그쪽 분도 한국인?”

“나 몰라요? 배 석준. 붉은 나무들, 꽃잎 한 잔. 이런 영화에 주연으로 나왔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식견이 부족해서.”

“······이야. 내가 식견까지 필요한 사람이 됐나. 이거 왠지 서럽네.”

“하하하.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이 친구. 진짜야.”

툭툭 치며 웃는 왕호룽을 남자가 잠시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런가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스쳐갔다.

어딘가 조금 이상한 태도였다.

“왕 형님. 저 분도 한국에서 활동하던 배우였습니까?”

“전에는. 지금은 인기가 식어서 아쉬울 따름이지.”

“그렇군요.”

“아, 진호 아우. 나 잠깐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자유롭게 놀고 있어. 술만 과하게 하지 말고.”

“아, 네. 편하게 일 보고 오세요.”

때마침 왕호룽이 일을 보러 떠났다.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티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칵테일을 홀짝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몇 마디 더 섞어보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