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4화 (14/178)

Chapter6. 전화위복(2)

“남 일수?”

진호는 며칠 뒤 캐스팅 목록의 가장 마지막 사람을 전달받았다.

남자 주인공 역할에 배정 된 남일수였다.

“아, 진짜 어이없어서. 이 인간 연기 개똥인거 알면서 또 캐스팅을 한 거야?”

“어쩌겠냐. 지난 번 오디션 프로그램 후원이 어디인지 알지? AJ그룹. 그쪽 모델이 남일수잖아. 자기네 상품 조금이라도 걸쳐 있다 싶으면 마구 집어넣어서 돌리는 거잖아.”

대신 화를 내주는 건 은서와 아영.

동네 호프집에서 세 사람은 운동복에 모자를 푹 눌러 쓴 평범한 대학생 복장으로 만났다.

드라마 캐스팅이 확정되면서 은서의 구금령이 해제 된 기념이었다.

“그래서 작가님이 말을 아낀 거구나.”

“뭐, 발표야 지금 났지만 일찍 내정되어 있던 거겠죠.”

“세상에. 그럼 은서 언니는 연달아 그 인간하고 합을 맞추네? 와. 천생연분.”

“죽을래?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기름 붓지 마라.”

은서가 치킨무를 포크로 학살했다.

“진호 오빠는 어때요? 그 인간하고 트러블 있었는데. 연기하는데 뭐 문제없으려나?”

“있어도 어쩌겠냐. 연기는 연기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처음으로 비중 큰 역할을 맡았는데 겨우 그런 사람 하나 때문에 소홀 할 수는 없지.”

“오. 연기자 마인드. 멋있네.”

“응. 응? 잠깐만. 너 언제부터 진호 씨한테 오빠라고 부른 거냐?”

“연극 끝나고?”

은서가 포크에 꿰뚫린 치킨 무를 든 채 진호를 돌아봤다. 왠지 모를 박력에 진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씨. 나만 빼고 다 친한 거 같네.”

“흐흐. 언니 부러우면 이번 참에 진호 오빠랑 말 터요. 두 사람이 아마 두 살 차이? 맞죠?”

“어. 내가 28. 은서 씨가······”

“스물 넷.”

“스물 여섯.”

처음 건 은서 두 번째 건 아영이었다.

“연예인은 프로필 나이인 거 모르냐?”

“한 살이라도 어려지고 싶은 마음인 건 아니고요?”

“너, 치킨 집에 왜 포크가 많은지 알고 있냐? 술 먹고 너 같은 거 콱 찌르라고. 요것아. 어?”

“으아! 알았어요, 스물 넷. 이 언니 진짜 찌르려고 그래!”

그렇게 무력으로 정정 된 은서의 나이가 스물 넷.

“크흠. 그럼 나도 진호 씨······오빠라고 부르면 되나요?”

“배우 생활로 치자면 은서 씨가 선배인데.”

“오빠. 라고. 부르면 되나요?”

“······네.”

아니라고 하면 포크에 꿰인 치킨무가 될 판이다.

진호의 현명한 답에 은서가 방긋 웃었다.

“그럼, 진호 오빠. 이번 작품 잘 부탁해요.”

“어, 어. 은서 동생. 나야말로.”

“히히히.”

“와. 이 언니 취했다.”

소속사에 몰래 전화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영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다.

#

며칠 뒤 대본이 도착했다.

작품 제목은 ‘행운의 그녀’

손가락 반 마디도 안 될 만큼 얇은 대본이었다.

“이게 대본이구나.”

진호는 그 자체에 감탄했다.

실제로 대본을 받아보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확 났다.

자신의 이름이 뚜렷하게 박혀 있다는 사실도 굉장히 신기했다.

“대사와 지문. 이런 식으로 돼 있네. 와. 대본 숙지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구나.”

지문은 상당히 부실했고 대사도 뭔가 어색한 곳이 많았다. 예를 들어 웃으며 박수친다, 라는 지문 설명은 솔직히 그 자체만으로는 상황을 그리기 어려웠다.

어떤 얼굴로 웃는 걸까, 박수 치는 모습은 어떨까.

한 번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 전에 캐릭터부터 잡아야겠지.”

대본에 적힌 캐릭터의 이름은 전 남호.

나이 28살에 여주인공인 ‘미호’가 일하는 빵집의 주인이다.

기본적으로 잘 생긴 얼굴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

‘잘 생긴 캐릭터라면 나와는 좀 안 어울리는 거 아닌가?’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을 봤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 한 명이 비쳐지고 있었다.

“잘생김도 연기해야 하나?”

그게 되면 참 좋을 거 같은데.

얼굴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 보다가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칼 댈 거 아니면 당장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캐릭터의 성격이지.”

남호의 중요 포인트는 ‘소시오패스’라는 성격에 있다.

그는 어릴 적 사고로 성격장애를 겪으면서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지게 된 인물.

기본적으로는 타인을 도구로 밖에 보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여주인공인 미호.

아르바이트를 위해서 온 그녀에게 조금씩 끌리기 시작하며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 캐릭터로 성격적 결함과 여주에 대한 애정의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잭 더 리퍼는······사이코패스에 가깝지.”

같은 성격장애라 해도 성격이 다르다.

잭 더 리퍼가 파괴자라고 한다면 남호는 일종의 컨트롤러다.

타인을 이용하는 것에 능하고 사회적인 캐릭터로 위장하는 것에 달인인 것이다.

그 위장이 벗겨지는 건 오직 미호의 앞.

“위정자라는 걸까.”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상당수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남을 밟고 올라가는데 거리낌이 없고 정치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것에 능하다는 의미.

그런 인물이라면 상류사회에 숱하게 분포되어 있다.

‘조조일까?’

사회적 승자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성공을 위해 타인을 도구처럼 쓴다는 점 역시.

하지만 남호라는 캐릭터와는 무언가 괴리감이 있었다.

“미호에 대한 마음. 그녀를 생각 할 때만큼은 남호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야.”

한 여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

아니면 성격 장애에서 나오는 왜곡된 애정?

무언가 한 번에 캐릭터가 정의되지를 않았다.

— 무엇이 그리 걱정스러운 것이옵니까?

“······!”

순간, 목덜미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진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인을 발견했다.

어딘가 고혹적인 눈빛을 가진 여성이었다.

— 나라가 멸하고 세상이 몰락한다 하여도 소첩은 왕과 함께라면 그저 행복할 뿐이옵니다.

이것은 누구일까?

항우와 우희의 이야기?

— 오. 그대의 말은 언제나와 같이 달콤하구나. 나의 빛. 나의 영원. 나의 꽃. 달기여.

아니구나.

진호는 이름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항우와 우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지독한 애정사.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과 그의 애첩인 달기의 대화였다.

‘하지만 이게 어째서?’

남호와 주왕이라니.

두 인물이 어울린다는 것일까.

“······”

처음으로 전생 체험에 의구심을 품어보는 진호였다.

#

연기는 기본적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대사를 치는 상황, 표정, 몸동작. 모든 것은 그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가 바탕이 되어야 올바르게 나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진호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조금만 더 부드럽게 가는 편이 낫지 않아?”

대본 리딩 전 은서와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

짧게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몇 장면 대사 합을 맞춰 봤다.

“대외적으로 매력적인 사장이라 이거지?”

“응. 속마음은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포장을 하니까.”

“그래. 포장이라 이건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남호의 성격.

기본적으로 그는 멋진 남자의 표본으로 그려져 있다.

직원들에게 상냥하고 손님에게는 깍듯한.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냉정하게 찍어 내는 에피소드 이전까지는 완벽남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래야 되는데.’

진호가 전생 체험으로 가져온 주왕은 폭군 그 자체.

달기와의 향락에 빠져 신하들을 고문하고 죽이기를 즐겼던 인물이다.

극단적인 파괴 성향을 가진 인물과 남호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캐릭터에 설정을 더하는 것도 어려웠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허무감을 느낀 것은 ‘가능한 상상’

하지만 주왕에게 정치적인 가면을 씌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최고라 여긴 폭군에게 그런 상상은 어울리지 않는다.

“캐릭터 잡는 게 쉽지 않아?”

“아, 응. 성격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게 쉽진 않네.”

“소시오패스 성격의 매력남이라. 그냥 분리하는 건 어때? 평소에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하되, 중요 포인트에서만 성격을 드러내는 거야.”

“포장을 하자 이거지? 확실히 그렇게 하면 좀 쉬울 것 같긴 한데······”

드라마에서 요구하는 상업적 캐릭터의 느낌은 이해하고 있다.

매력적이지만 나쁜 인간.

여주를 휘두르며 남주에게 긴장감을 주는 캐릭터다.

은서가 말 한 대로 캐릭터를 분리해서 연기하면 상업적인 느낌 정도는 표현이 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진호는 내키지 않았다.

평범하게 매력적이고 착한 성격의 남호는 남호가 아니다. 소시오패스적인 에피소드를 통해서 반대 성향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상업적인 캐릭터.

평소에도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이 묻어나야 완벽한 남호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가 보네. 오늘은 그냥 좀 쉴까?”

“아니야. 조금만 더 맞춰 보자. 일상 파트는 넘기고 너랑 대면하는 장면. 1화 마지막이 처음이었나?”

“아니. 둘이 처음으로 만나는 건 미호가 남주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횡단보도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미호가 돕는 거지. 그 장면을 오빠가 보는 거고.”

“그렇지. 그때 남호의 생각은 꽤나 냉정한 것이었고.”

소시오패스는 타인을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여긴다.

그렇기에 필요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호의 선행 역시 남호의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일.

둘의 첫 만남은 이런 캐릭터의 입장 차이에서 시작이 된다.

“한 번 해 볼래?”

“대사 없이?”

“응. 둘이서 조금 떨어져 있고. 나는 이렇게 횡단보도에서 할머니를 돕는 거야.”

은서가 의자를 끌어 진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시늉을 했다.

‘무가치한 일.’

진호가 눈을 깜빡이며 남호의 캐릭터에 이입을 했다.

순식간에 주왕의 생각과 감각이 그의 몸으로 전달되었다.

눈앞에서 그려지는 건 남을 돕는 미호.

그리고 그것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주왕이었다.

“······”

저런 하잘것없는 짓은 그만 두어라.

주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것.

자신은 세상 만물보다 월등한 존재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존재가 다 자신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생과 사도 마찬가지.

“오빠, 팔.”

누군가를 구하는 것도 자신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세상은 모두 손아귀 안에 있으니까.

고작 한 명의 생사여탈 정도는 우스운 일이다.

이 작은 계집을 보라.

고작 손을 움켜쥔 것에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왕의 위업이다.

왕이 가진 힘이다.

왕이 해야 하는······

“오빠, 손!”

“아!”

흠칫 놀라며 진호가 손을 놓았다.

주왕의 환상이 깨어지며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노려보고 있는 은서.

벌겋게 물든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 미안. 괜찮아?”

“손목 끊어지는 줄 알았다고.”

“정말 미안. 너무 몰입을 했던 거 같아.”

“아니, 무슨 몰입을 했는데 그래? 남호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잖아.”

“그렇지. 남호는 이런 캐릭터가 아니지.”

주왕과 남호는 확실하게 다르다.

진호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전생 체험으로 주왕이 나타난 걸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전생체험이 제공하는 인물은 상황에 맞물리는 존재.

이 드라마에서 진호가 그려낼 캐릭터였다.

“아, 설마.”

“왜? 뭔데 또? 이상한 거면 나 이번에는 도망 갈 거야.”

“아니, 그런 거 말고. 내가 왜 몰입을 이상하게 하는 건지 알 거 같아서.”

술집에서 조조는 지연을 탐했다.

야외무대에서 조운은 충정을 입증하고 싶었다.

잭 더 리퍼는 자신이 왜 살인마인지를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진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남호는 소시오패스적인 캐릭터지만 진호는 그를 다른 방식으로 본 것이다.

왕. 폭군.

모든 걸 가지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인물.

‘남 일수 때문이구나.’

그가 얼마나 엉망이고 별 볼일 없는지는 상관없다.

그는 주연이고 진호 자신은 조연이다.

게다가 극중 캐릭터 역시 여주인 미호를 가져가는 건 남일수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 내재적인 바람 때문에 몰입이 어긋났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극중 남호는 미호를 두고 경쟁을 하지만 결국 끝에는 포기하는 캐릭터잖아. 근데 난 그게 싫었던 거지. 특히 주연이 남일수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미호를 쟁취하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어긋난 캐릭터에 몰입을 한 거야.”

“아······그러니까 나 때문에?”

“어. 널 가지려는 욕심이······응?”

말을 늘어놓던 진호가 문뜩 이상함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은서가 있었다.

목덜미부터 손등까지 전부 붉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 그 캐릭터가 말이야. 캐릭터라.”

“어. 어어. 나도 알지. 캐릭터. 남호 말하는 거지.”

“응. 그거 맞지. 남호. 남호 얘기니까.”

기묘한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난 뒤 침묵이 내렸다.

괜히 더 어색하기만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으, 응. 아하하. 다음에 하자. 다음에.”

“그래. 어. 그래야겠어.”

덕분에 둘만의 짧은 대본 리딩이 끝나고 말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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