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 이렇게 한 걸음(2)
엑스트라라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대기 시간은 긴데 한 씬에 투입되는 집중력은 주연 뺨 칠 정도였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쏟아지는 시선은 또 얼마나 냉정한가.
아주 죽을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고생하셨어요. 돌아가는 길에 일당 챙기시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페이가 좋거나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차비나 될까 싶은 일당을 받아 쥐고는 진호가 나직이 한숨 쉬었다.
“아저씨. 실직자 그런 거?”
“응?”
현직 고등학생일까.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 있는 아저씨들이 종종 알바하러 오거든요. 주로 실직한 사람들. 아저씨도 그런 경우에요?”
“뭐, 어찌 보면 비슷하겠네. 이상하냐?”
“이상하다기 보다는 안쓰럽죠. 아저씨 달리기도 못하던데.”
“그걸 또 눈여겨 본 거냐?”
머쓱함에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할 거면 다음부터는 나이에 맞는 거 구해요. 너무 튀면 실수도 부각되고 다음부터 안 써주고 그래요.”
“그러냐? 그보다 넌 많이 해 본 솜씨던데.”
“저야 뭐 지망생이니까요. 밑바닥부터 열심히 구르는 거죠.”
“나이도 어린데 멋지네. 고등학생?”
“아뇨. 학교는 그만 뒀어요. 1년 전부터 엑스트라 뛰면서 연기 공부하고 있죠.”
가볍게 던진 질문인데 꽤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눈빛도 전혀 가볍지 않았다.
“집에서는 뭐라고 안 하냐?”
“뭐에요. 갑자기 꼰대질?”
“자식이 꼰대질이 뭐냐. 그냥 궁금해서. 그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는 선택이 쉬운 것도 아닐 텐데.”
“저도 쉽게 선택 한 건 아니에요. 부모님하고도 길게 얘기를 해 봤고. 학교를 다녀서 나쁠 게 없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이곳이 더 좋아요. 소중하고.”
“어린데 심지가 굳네.”
“자꾸 어리다 그러시네. 아저씨 자꾸 그렇게 말하면 애들이 꼰대라고 놀려요.”
“너도 아저씨라고 그러잖냐.”
“아저씨 맞구만.”
소년의 이름은 하윤.
툴툴 거리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통하는 구석이 꽤 있었다. 나이가 차서 연기에 도전한 진호나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연기를 시작한 하윤이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형이 밥이라도 사줄까?”
“자연스럽게 형으로 수정하시네요?”
“밥 먹기 싫은 거냐?”
“가요, 형. 근처에 백반집 맛있는 곳 있어요.”
어려서 그런지 사교성도 참 좋다.
능글능글한 하윤의 머리를 헤집으며 지노가 백반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와, 사람 겁나 많네. 오늘 밥차 안 왔나?”
백반집 안은 촬영팀으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때가 딱 점심시간과 맞기도 했지만 오늘은 도시락이나 밥차를 따로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려나?’
가게 안을 슥 둘러보며 진호가 고민했다.
“진호 씨! 진호 씨! 여기요, 여기!”
“응?”
그때, 누군가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가게 안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쳐다 볼 정도의 목소리였다.
“은서 씨?”
은서였다.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모인 자리 쪽에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이쪽에 자리 남았어요. 같이 먹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진호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제는 가게 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둘을 바라봤다.
“은서 씨도 이 드라마 출연하고 있었어요?”
“뭐야. 전혀 몰랐던 거예요? 난 또 알고 나온 줄.”
“전 그냥 박감독님이 한 번 해보라고 해서 지원했죠. 은서 씨가 나오는 줄 알면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달리기 말이죠? 푸훗. 그렇게 엉성하게 뛰는 사람은 또 처음 봤네요.”
두 사람은 주변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연극이 끝나고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그런지 상당히 반가웠다.
“아, 정신 좀 봐. 배고프시죠? 와서 같이 먹어요.”
“저 자리에 말입니까?”
“에이, 괜찮아요. 감독님 그런 거 신경 쓰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온 김에 다른 분들하고도 인사하고 그래요.”
은서는 머뭇거리는 진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저, 저기. 그럼 전 따로 빠져서 먹을게요. 진호 형은 가서 식사하세요.”
“아. 맞다. 여기 하윤이도 같이 가서 먹어도 될까요?”
“그 사이에 친구라도 사귄 거예요?”
“하하. 같은 엑스트라 출신이다보니.”
은서가 시선을 옮겼다.
하윤은 바짝 굳어 있었다.
엑스트라를 하면서 주연 배우와 대화 비슷한 걸 나눠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쪽도 같이 와서 먹어요.”
“제, 제가요? 그래도 되나요?”
“뭐, 어때요. 자리도 없는데 합석하고 그러는 거죠.”
“그래도 전 엑스트라고······”
그쪽은 주연 배우에 감독님도 있는 자리인데요?
은서는 뒷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의미를 간파했다.
그리고 하윤의 태도를 이해했다.
자기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테니까.
‘게다가 전이라면 나도 이런 제안 같은 건 안했지.’
급이 안 맞으니까.
엑스트라와 주연 배우들이 한 자리에서 먹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무명의 아저씨가 슈퍼스타보다 연기를 잘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엑스트라라도. 같이 연기하는 사람이잖아요?”
“······네. 네.”
뭔가 반한 듯 한 얼굴로 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 씨. 뭔가 좀 변한 느낌이네요.”
“응? 그래요? 나쁜 쪽?”
“아뇨. 좋은 쪽으로.”
“헤헤. 칭찬한다고 고기 더 주거나 그러진 않아요.”
진호도 조금 색다른 눈으로 은서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 연기를 할 때와, 오랜만에 다시 봤을 때의 모습이 전부 다 달랐다.
그리고 왠지 지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번 드라마 주연이에요?”
어깨를 나란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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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요. 그 무대를 감독님이 봤어야 하는데.”
한껏 들뜬 은서의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흘렀다.
감독은 제법 흥미로운 듯 응대했고 다른 배우들도 그럭저럭 분위기는 맞춰 주었다.
몇 명은 실제로 연극 무대 영상을 봤는지 박수까지 쳐가며 적극 동조했다.
“좀 그러네.”
“어. 불편해.”
하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감독의 반대편에 앉은 몇 사람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이번 드라마의 주연인 남일수가 그러했다.
그는 시청률 7%를 찍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1등 수상자. 앨범 판매는 지지부진했지만 드라마 몇 개를 하면서 선보인 연기력이 호평을 받아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벌써 ‘배우님’이라고 떠 받들어 주는 인물이었다.
‘엑스트라 주제에.’
그런 그에게 단역은 급이 안 맞는 사람이었다.
이런 관심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아예 연기를 본업으로 하려는 겁니까?”
툭 던지듯 질문을 했다.
“본업이라고 하면 다른 분들에게 민망할 따름이죠. 여기 하윤이만 해도 얼마나 열심인데. 전 이제 겨우 연기가 어떤 건지 체험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아. 엑스트라 수준으로 말이죠. 그 나이에 하기에는 꽤나 버거운 일일 텐데. 대단하시네요.”
이건 감탄의 의미가 아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 중 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남일수와 척지며 나설 사람 또한 없었다.
“버거워도 참고 하는 거죠. 여기 하윤이만 봐도 어린 나이에 이렇게 열심이지 않습니까.”
“하하. 누가 보면 그 엑스트라 소년이 그쪽 연기 선생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비웃음.
이건 선을 넘은 것 아닌가.
듣고 있던 은서가 발끈해서 일어나려 했다.
“네. 선생입니다. 저보다 단역 연기로는 선배 아닙니까. 달리기도 훨씬 잘 하고. 앞으로도 지도 편달 잘 부탁드립니다, 하윤 선생님.”
하지만 당사자인 진호는 여유로웠다.
비웃음을 가볍게 흘리며 하윤에게 농담까지 건넸다.
발끈해서 일어나려던 은서가 되레 민망해질 정도였다.
“이야. 좋은 말이네요. 단역이라도 선배는 선배. 배울 게 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요.”
“그러게요. 방금 그 말 멋있었어요.”
“와. 훨씬 어린 아이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다니. 방금 그 말 나중에 써먹어도 될까요?”
게다가 주변 반응마저 순풍처럼 부드러웠다.
감독은 감탄하고 주변 몇 몇 배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날 선 남일수의 비아냥만 우습게 돼 버렸다.
“······”
남일수가 입술을 꽉 씹으며 진호를 노려봤다.
속이 끓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단역 따위가 감히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준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배우님’소리를 듣는 사람 아닌가.
“그렇게 연기에 열정이 있으시면 배역 몇 개 더 따도 되겠네. 안 그렇습니까, 감독님?”
그렇기에 단역이 왜 단역이고 주연이 왜 주연인지 가르쳐 줄 심산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대사 없던 단역 분량에 말이지? 흠. 괜찮겠네.”
남일수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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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엑스트라 중에도 나름의 급은 있다.
완전히 무리에 묻혀서 대사도 없이 스쳐만 가는 엑스트라가 있다면 화면에 얼굴이 잡히거나 한 두 마디 대사가 있는 엑스트라도 있다.
본래 진호가 맡은 배역은 전자.
“대사는 짧아요. 어떻게? 난 유단자인데. 이게 전부에요. 주연인 일수가 숨겨왔던 실력을 뽐내면서 학교 일진을 때려잡는 씬이죠.”
하지만 이번에 받은 건 후자였다.
본래는 우르르 쓰러지는 엑스트라 무리 중 하나였던 배역에 대사를 하나 준 것이다.
화면도 주연 등 쪽에서 정면 샷이 들어오는 한 컷이 배정되어 있었다.
“평소에 깔보던 주연에게 당하는 장면이라 이거죠?”
“네. 화가 나면서도 어이없는. 약간은 황당해 하는 느낌으로 대사를 쳐 주면 됩니다.”
“이 씬 전에는 대사가 없었죠?”
“하하. 이번에 수정한 거니까요.”
“그럼 너무 튀면 안 되겠네요.”
진호도 남일수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걸 제안했는지 정도는 대충 알고 있다.
자신과 투샷을 때리면서 굴욕감을 느껴라, 라는 유치한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상이 유치하든 아니든 덕분에 한 씬 딴 건 사실이다.
이걸 허투루 낭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가볍게 해볼까요?”
“아. 잠시 만요.”
진호가 눈을 감고 생각해 봤다.
평소 업신여기던 인간에게 크게 당하는 상황.
과연 어울리는 전생이 누가 있을까.
— 대한 독립 만세!
순간 화약 냄새와 함께 어딘가 뜨거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진호는 짧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휘날리는 태극기와 당황한 듯 보이는 일본군의 모습들.
— 감히 조센징 따위가!?
그리고 진호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일본어였다.
당황과 두려움. 불신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확실히 감독이 요구하는 상황과는 딱 맞아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일본 놈이라고!?’
그것도 상황을 보자면 일제치하시기.
그냥 전생이구나, 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찝찝한 그런 상황이었다.
“진호 씨?”
“아. 네. 준비 됐습니다.”
그 순간, 진호의 어깨에 감독의 손이 닿았다.
화약 냄새와 끝없이 이어지던 독립 만세 외침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전생의 느낌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황망하고, 놀랍고, 두려운.’
일본인의 입장이 되어 보니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의 눈에서 본 독립 투쟁은 굉장히 극렬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감히 들고 일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조선인들은 약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들불과 같은 투쟁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겠어요?”
“네.”
진호는 이미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
주인공을 괴롭히는 일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