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3화 (3/178)

Chapter2. 새 술은 새 부대에(1)

진호는 사표를 제출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망설이는 사장과 싸우기 바쁜 팀장과 지연.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사, 사표를 내다니! 내가 미쳤나!?”

한때는.

지금은 아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 둔 지 정확하게 4시간 20분이 지난 시점.

진호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후회를 하고 있다.

“미쳤어, 미쳤어. 백수라니! 집에는 뭐라고 말을 하지? 이번 달 공과금도 많이 나왔는데!”

전생체험이 모두 끝나자 고양되었던 감정이 모두 풀렸다. 생각과 기억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랐다.

이따위 회사 때려치워 주지, 라던 당당한 마음이 지금에 와서는 오만으로 비쳐질 뿐이다.

겁이 나고 앞날이 두려웠다.

“······계속 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 맹덕.

삼국지에서 익히 보았던 바로 그 조조다.

왜 전생에 그런 인물이 불려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정과 마음가짐은 매력적이었다.

조조는 영활하고 오만하나 그만큼의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남을 지배 할 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 인물의 선악을 떠나서 지금의 진호에게는 그런 강렬한 마음이 필요했다.

“또 불러 낼 수 있지 않을까?”

진호가 바닥에 주저앉아 조조를 떠올렸다.

ko모 사에서 익숙해진 일러스트와 익히 알고 있는 에피소드를 머리에서 계속 굴렸다.

[······적벽에서 패한 조조는 병력을 수습하여 물러나는데······]

하지만 일전과 같은 일체감은 없었다.

삽화 북을 읽는 듯 한 옅은 체험감이 스쳐갔을 뿐이다.

“······끄윽.”

게다가 여파도 달랐다.

숙취마저 없던 조조의 체험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짧은 감상으로 발작 비슷한 증상이 찾아왔다.

황급히 약을 찾아 먹어 증상을 억눌렀다.

“왜지? 왜 다른 거지?”

진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생각을 이어갔다.

어릴 적 전생체험을 하고 난 뒤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증세와 함께 해 왔다.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변화가 생긴 이유.’

조조를 체험하게 된 것은 술집에서 지연과 만나면서부터.

갑자기 장수 한 명이 허상처럼 나타난 직후였다.

“상황이 비슷해서?”

조조의 체험에서 나왔던 인물은 아마도 조앙.

장수의 항복을 받고 난 뒤 추씨에게 홀린 조조가 가후의 계략에 당하는 순간일 것이다.

얼추 보자면 여자에게 얽혀서 속는다는 느낌은 비슷하다.

‘술도 잔뜩 마셨겠다. 조조와 흡사한 상황에 몰입하다 보니 그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라는 건가?’

앞뒤를 맞춰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하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생각 좀 해봐야겠네.”

어차피 당장은 시간이 남아 돌았다.

#

회사를 그만두고 일주일.

당장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던 두려움도 많이 희석되었다.

지금은 되레 일찍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기쁠 뿐이다. 밤늦게까지 하는 게임도. 밀렸던 드라마를 몰아 보는 즐거움도.

할 일 없이 뒹굴뒹굴하는 여유도.

“안 돼!”

자기 합리화를 하던 진호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일주일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수염은 거뭇거뭇하고 머리카락은 떡 져서 뭉쳐 있었다.

이래서야 시간 많은 게 의미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빨래하듯 머리를 감고 대충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래된 빌라 문짝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벌써 봄이었다.

쌍쌍이 팔짱 낀 연인들이 도처에서 발생 중이었다.

‘다시 돌아갈까.’ 항마력 부족에 잠시 망설이다 독하게 각오하고 인근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뇌가 썩어 갈 때는 신선한 바람이라도 집어넣어서 환기 할 필요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머리 좀 식힐까 하고 왔는데 인파가 스나미였다.

춘계 운동회를 하는 사람들에 나들이 나온 회사 직원들까지 때 맞춰서 몰려버렸다.

게다가 날 좀 풀렸다고 나들이 나온 가족까지 합치면 이건 숫제 여름 철 해운대였다.

“잠시 만요! 지나갈게요!”

이건 또 뭔가.

딱 봐도 20대 초반인 대학생들이 커다란 판넬 따위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가뜩이나 번잡하던 공원이 이 때문에 더 복잡해졌다.

“다 가져왔어?”

“어. 이거면 안 모자라지?”

“대충? 선배들한테 혼나기 전에 돌아가자.”

같은 과나 동아리 소속 같았다.

우르르 몰려와서 뭘 챙기더니 또 다른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공원 한 쪽에 놓은 야외 단상이었다.

지방단체의 행사나 공연 따위에 쓰는 공간이었는데 오늘은 비어 있었다.

“신입생부터 시작하자. 다들 단톡으로 전달 받았지?”

“네. 신입생에서 한 자리 뽑는다고 했죠?”

“그래. 이번에 배역 맡았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빠지게 됐거든. 특별히 신입생 중 한 명 넣기로 했으니까 다들 잘 해 봐.”

공연 비슷한 걸 준비하는 걸로 보였다.

멀찍이서 툴툴 거리던 진호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금슬금 다가갔다.

“후우. 근데, 선배. 꼭 이런 곳에서 해야 했나요?”

“왜? 창피하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그래서 하는 거야. 이 정도 시선에 쫄 거면 연기는 왜 해? 우리 동아리는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라고.”

연극 동아리였던 모양이다.

진호는 아예 단상 근처 풀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주변을 보니 비슷한 호기심으로 다가온 커플 등이 이미 여럿이었다.

확실히 민망할 만큼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다시! 감정을 담아서!”

“발음이 엉망이잖아! 그렇게밖에 못해?”

“대사 까먹을 거면 하지 마.”

대학교 동아리 연습 치고는 꽤나 빡빡했다.

특히 눈썹이 빳빳한 여자 선배가 그러했다.

발음, 연기, 대사 등.

허술한 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사람이 보든 말든 대놓고 지적했다.

“다들 제대로 안 할래? 연기가 그렇게 만만해? 동아리 들어왔으니까 대충 하고 말 생각인 거야?”

“······죄송합니다.”

“몰입을 하라고. 캐릭터에 이입을 해. 그 캐릭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고찰 없는 연기는 속 빈 강정이라고.”

작정하고 말을 쏟아냈다.

신입생들은 바짝 얼어 서 있기만 하고 동기나 선배 급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진지함이 과한 상황이었다.

“몰입이라.”

하지만 진호에게는 딱 와 닿는 말이었다.

캐릭터에게 이입을 한다.

감정을 이해하고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는 한 사람이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진호가 조조를 체험하였던 것처럼.

“확실하게 하라고. 이 사람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위해서 자식마저 버릴 각오가 된 인물이야. 그런 각오가 어디 간단 할 줄 알았어?”

그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배역에 대한 설명인 모양이다.

자식마저 버릴 각오가 된 인물.

그 정도의 충정이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 저는 여기까지 입니다. 장군께서는 절 버리고 가세요!

“어?”

진호가 눈을 깜빡였다.

예의 단상 위로 허름한 우물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핼쑥한 표정의 중년 여인도.

— 부인!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상공께 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디 제 아이를 잘 부탁 합니다.

— 미부인!!

우물로 몸을 던지는 중년 여인.

동시에 진호의 몸과 겹쳐져 있던 무언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을음과 먼지로 몸이 더러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용맹한 얼굴.

“조운!?”

“그렇지 조운 같은 사람.”

답이 들여 온 건 다른 사람의 입이었다.

진호가 눈을 깜빡이며 그 소리를 쫓았을 때는 이미 미부인은 사라지고 난 뒤.

후배들을 닦달하던 여자만이 진호의 시선 끝에 남아 있었다.

“누구······?”

어색한 침묵만 남았다.

#

서한대 연극 동아리 ‘창궁’의 회장 윤 아영은 약간의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사람들이 빤히 보는 이런 공개 무대에서 연습을 진행 한 건 면역력을 키워주기 위함.

시선을 견디고 연기에 몰입 할 수 있게끔 후배들을 독려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외부인이 끼어 드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과 합을 맞추며.

“저기, 죄송하지만 따로 연습을 하는 상황이라······”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말을 건넸다.

“조운 같은 사람이라면 어찌 했을 것 같습니까?”

“네?”

“주인을 위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인물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하리라 봅니까.”

하지만 상대는 수습되지 않았다.

되레 연극 상황을 짚어가며 묻기까지 했다.

어릴 적 깡패로 전전하다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 준 한 남자에게 의탁한 인물의 이야기.

오래된 방직 공장에 힘을 보태 일을 하다가 사기꾼과 깡패에 은인이 몰린 상황이었다.

“뭐, 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구하려고 하겠죠.”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말입니까? 단순하게 그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다?”

“아마도······?”

아영은 자신이 이걸 왜 답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나마 답이라면 눈앞의 남자가 너무 강경하다는 것 정도?

답을 하지 않으면 달려 들 것 같은 기세였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마음먹은 사람의 각오는.”

진호는 아예 단상 위로 올라갔다.

호흡은 상당히 거칠었다.

지금 그에게는 우물 위로 몸을 던진 미부인과 눈앞의 아영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한 겁니다. 자신이 행하는 말, 행동, 생각까지. 그렇기에 망설임이 없고 두려움이 존재하는 않는 겁니다. 그냥 지키겠다, 라는 표면적인 레벨이 아니라는 거죠.”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아영에게 훌쩍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불을 토할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

만약 지킬 수 있었다면.

주군을 위해 미부인과 아두를 모두 구할 수 있었다면.

천길 불구덩이라도 두려울까.

이억만리 가시밭길이라도 고통스러울까.

“꺅!”

“······아!”

순간, 짧은 비명에 진호의 이입이 깨졌다.

몸 한 가득 느껴지던 조운의 감정이 사라지고 깊은 탈력감이 몸을 휘어 감았다.

이번에는 조조 때와는 달랐다.

매우 짧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저, 저한테 왜 이래요?”

그리고 그제야 눈앞에 쓰러져 있는 아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질린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몰입했던 모양이네요.”

천천히 주변 상황도 인지가 되기 시작했다.

아영만이 아니라 같은 동아리 학생들도 진호를 괴이쩍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회사원들도 ‘뭐하는 거야?’라는 눈으로 진호를 봤다.

제 3자의 시선에서는 어디까지나 난입객에 불과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호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는 없었다.

허리가 부러져라 연거푸 사과를 한 뒤 꽁지 빠지게 현장을 도망쳐 나왔다.

얼굴은 붉고 창피함에 심장은 미칠 듯 뛰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