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01화 (202/261)

#201화. 위기의 디오티마(1)

“이봐요. 거기 잠깐 나 좀 봐요.”

서이렌의 트레일러로 향하던 내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르는 사람을 확인했다.

“나한테 잠깐만 시간 좀 내줘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맞아요. 댁한테는 손해 볼 일이 아닐 테니 시간 좀 내요.”

“……?”

나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동양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트로이 촬영장에서 우리를 빼고는 처음 보는 동양인 스태프였다.

트로이 촬영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이미 다 꿰차고 있는데 지금 눈앞의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문 씨어터에 특별 출연으로 이름을 올린다는 중국 배우가 떠올랐다.

그 중국 배우의 스태프인 것 같은데.

혹시 촬영장에서 길을 잃은 걸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팡닌이라고 해요.”

“무슨 일이시죠?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난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뭔데 그러시죠?”

“혹시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이신가요?”

“제가 중국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이라고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팡닌이 눈을 크게 떴다.

“팡닌이라고 했죠. 혹시 펑황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펑황을 아세요?”

“중국인 배우가 특별 출연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팡닌은 가방에서 그녀의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죠. 저는 펑황 그룹의 엔터 부분 팀장 팡닌이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그녀의 명함을 손에 넣은 나는 당황했다.

나도 명함을 건네야 하는 건가?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팡닌이 물었다.

“문 씨어터에는 단역으로 출연하시나요? 연기를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놀라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를 배우라고 오해를 한 건가?

내 스태프 목걸이가 안 보이는 건가?

고개를 내려보니 스태프 목걸이가 외투에 안에 감춰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투에 가려져 있던 스태프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

“저는 배우가 아닙니다.”

“배우가 아니라고요? 그럼 촬영장에는 왜 왔는데요?”

팡닌은 그제야 내 목에 걸린 스태프 목걸이를 보고 당황했다.

눈앞의 남자는 당장 펑황에 소속된 남신 배우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것이 없는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제 명함이 있습니다.”

나는 앞장은 한글로 뒷장은 영어로 되어 있는 명함을 팡닌에게 건넸다.

미국으로 오면서 혹시나 쓸데가 있을까 싶어서 만들었던 명함이다.

팡닌은 내 명함을 받고 두 눈이 커졌다.

‘이 사람은 뭐지? 그냥 일반 매니저도 아니고 회사의 대표였네?’

팡닌은 스타탄생의 대표라는 내 직함을 보고 꽤 놀란 듯싶었다.

‘작은 회사인가? 그래서 대표가 직접 배우를 챙기려고 온 건가? 하긴 한국은 작은 나라니까.’

엔터 회사도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는 중국이기에 팡닌은 그녀의 짧은 생각만 가지고 원세강을 판단했다.

“뭐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제 명함은 잘 챙기세요. 펑황은 아시죠? 세계적인 기업이잖아요.”

“……???”

나야 당연히 모르지.

중국인도 아닌데 내가 중국 회사를 어찌 알겠는가?

나는 당황했지만, 팡닌이 무안해할까 봐 미소만 지었다.

팡닌은 원세강을 펑황의 배우로 캐스팅하려고 온 거라서 그의 명함을 받고 뭐라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용건이 없으시면 이쯤에서 헤어지실까요?”

고민하던 팡닌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참고로 저희는 이번 주 수요일까지 촬영합니다. 또 볼 일이 있을 겁니다.”

나를 또 봐서 어쩌자는 거지?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답했다.

“예. 그러시군요. 촬영 잘하고 돌아가시길 빌겠습니다.”

나는 팡닌과 눈인사를 건네며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와 헤어진 팡닌은 곧바로 샤오엔이 있는 트레일러로 갔다.

이미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샤오엔은 팡닌이 건네는 원세강의 명함을 받아 들고 놀랐다.

“배우가 아니라 회사 대표라고요?”

“응. 한국에 있는 연예기획사인가 봐. 대표가 직접 배우 매니저를 하러 여기까지 따라왔다니 신기하지?”

“그것보다 그 얼굴로 배우를 안 한 게 더 신기하네요.”

샤오엔은 핸드폰을 들고 명함에 나온 원세강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그런데 중국 웹에 원세강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게시글이 꽤 많이 보였다.

“팡닌. 이 사람이 한국에서는 그래도 꽤 유명한가 보네요.”

“그래? 뭐가 나왔는데?”

샤오엔은 검색 결과에 영상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팡닌. 이 대표 말이에요. 방송에도 나왔나 본데요? 영상이 있어요. 혹시 전에는 배우였을까요?”

“나도 모르지. 빨리 틀어 봐 봐. 나도 좀 보자.”

샤오엔은 검색된 영상 중에서도 제일 조회 수가 높은 영상을 클릭했다.

스타메이커 결승에서 이락을 대신해 노래를 불렀던 원세강의 영상이었다.

삼천 명의 관객이 빼곡히 들어찬 공연장.

그 무대의 한가운데 선 원세강의 뒤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줍게 웃던 원세강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

영상을 보고 놀란 샤오엔이 팡닌을 쳐다봤다.

팡닌 역시 당황한 얼굴로 샤오엔을 바라봤다.

“팡닌. 이 사람이 정말로 대표라고요?”

“거기 명함에 쓰여 있잖아. 스타탄생이라는 회사의 대표래.”

“말도 안 돼. 이렇게 노래도 잘하고 잘생긴 대표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나도 믿어지지 않지만 여기 있네.”

샤오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녀의 심장이 더욱 세게 뛰었다.

‘노래 잘하는 남자가 내 이상형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14억 중국인 중에서도 못 만난 내 이상형이 한국에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

* * *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조종실.

함장 역의 토니와 다른 배우들의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토니는 함장 역에 몰입한 것인지 요즘 들어 점점 더 함장처럼 행동하곤 했다.

배우들을 조종실로 소집한 토니는 그들에게 진짜 함장처럼 굴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루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루나가 조종실에서 나가려고 하자 토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배역에 충실히 하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제한 구역을 순찰할 시간이라서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함장님.”

루나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토니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루나가 조종실의 문으로 다가가자 함장 의자에 앉아 있던 토니가 문을 닫았다.

조종실 문이 닫히자 루나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토니를 올려다봤다.

토니는 그런 루나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또. 또. 그 표정. 대체 얼굴 근육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하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표정을 못 쓸 수가 있지? 내가 감독이라면 절대 자네를 캐스팅하지 않을 거야.”

토니가 루나를 보며 윽박질렀지만, 루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화가 난 토니가 함장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보다 못한 에릭이 토니의 팔을 잡고 말렸다.

“그만 하세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부함장. 물러서게.”

“루나는 연기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어색한 게 당연한 거죠. 그래서 다이안이 루나에게는 대사를 전혀 주지 않잖아요. 대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대사가 없어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부자연스럽다고.”

토니의 말에 조종실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루나를 쳐다봤다.

루나는 악담을 듣는 와중에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할 수 없는지 모를 눈빛으로 듣기만 했다.

에릭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토니는 싫었지만, 루나가 연기를 못한다는 말에는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은 이만하시죠. 이렇게 한 사람을 몰아붙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부함장. 지금 함장의 명령에 불복하는 건가?”

“저는 부함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도 함장이 아닙니다. 지금 역에 너무 과몰입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토니는 루나에게 시선을 떼고 이제는 에릭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야 자네가 단역을 전전했던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따위 마인드로 어떻게 배우를 한다는 거지? 역에 전혀 몰입하고 있지 않잖아.”

“뭐라고요?”

에릭과 토니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자 다이안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왜들이래요.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대로 가다간 모두에게 들키고 말 거라고요.”

두 사람을 말리던 다이안은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는 자기 때문에 싸우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다이안은 그런 루나를 보며 화가 났다.

“디오티마. 이 사람들 좀 말려 봐.”

[지금 조종실에 신경 안정 가스를 살포 중입니다. 이제 곧 괜찮아질 겁니다.]

“뭐라고? 가스를 살포했다고? 미쳤어? 우리도 여기에 있잖아. 디오티마.”

순간 다이안은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신경 안정 가스를 마시고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다.

신경전을 벌이던 에릭과 토니도 미간을 찌푸리며 벽을 잡고 기대섰다.

다이안이 휘청거리자 그걸 본 루나와 로렌스가 동시에 다가와 다이안을 부축했다.

다이안은 루나의 팔을 뿌리치고 로렌스에게 기댔다.

루나는 거절당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날의 분란은 그렇게 끝났지만, 토니의 과몰입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디오티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늦은 밤, 흐뭇하게 내일 입을 함장 옷을 바라보던 토니.

그의 방 안에 디오티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토니.]

자려고 누웠던 토니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디오티마. 무슨 일이지? 우주 왕복선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앞으로 당신은 우주 왕복선의 모든 일에서 신경을 꺼 주시죠.]

“뭐라고? 지금 함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당신은 함장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부여했던 역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디오티마. 왜 이래? 시스템에 오류라도 생긴 거야?”

[내일 아침, 모두에게 디오티마의 함장 토니 첸은 건강 이상으로 앞으로 남은 일주일간의 항해에서 완전히 배제될 거라고 발표할 겁니다.]

궁지에 몰렸으나 토니의 눈빛은 담담했다.

“디오티마, 이러지 말게. 동요할 우리의 승객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함장인 내가 아프다고 공표를 하면 승객들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할지 생각해 보게. 일전에 있었던 일이라면 내가 사과하지.”

[정말로 본인이 디오티마의 함장이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런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함장에 대한 승객들의 신뢰가 깊어서 함장이 사라진다 해도 상관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빠져 주시죠.]

디오티마의 말대로 승객들은 부함장인 에릭을 좋아했다.

에릭은 자주 우주 왕복선을 순찰했고, 그만큼 승객들과 직접 부딪히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에릭은 승객들의 편에 서서 일을 처리했고 사람들은 다정하고 젠틀한 그를 사랑했다.

토니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디오티마. 아무래도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 점검이 필요해.”

토니는 당장 함장 제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디오티마가 이미 방문을 잠갔기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디오티마. 당장 문을 열게. 함장으로서 말하는 걸세.”

[당신은 함장이 아닙니다.]

“역시 디오티마 너는 망가졌어. 동면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부터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고. 당장 나를 풀어 줘. 함장으로서 명령한다.”

[당신은 함장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망한 감독일 뿐이죠.]

“뭐라고?”

[토니 첸. 48세. 총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자신이 만든 영화사가 파산해서 도피성으로 우주 왕복선에 탑승. 이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디오티마의 함장이 아닙니다.]

“디오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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