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2화 (173/261)

#172화. 천재 감독의 구애

대니 라모로와 얀 필립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서이렌.

세 남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내가 두 남자 앞에 끼어들었다.

“이쪽은 세계적인 브랜드 도나텔로의 수석 디자이너인 얀 필립입니다. 도나텔로 서울 매장 오픈 기념 패션쇼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셨죠.”

얀 필립에 대한 짧은 소개를 마친 나는 쉬지 않고 얀 필립에게 대니 라모로 감독을 소개했다.

“이쪽은 칼레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프랑스의 천재 감독 대니 라모로입니다. 서울에는. 음…….”

나는 대니 라모로와 서이렌을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서이렌 씨를 영화에 캐스팅하기 위해 서울에 온 것 같은데요. 맞죠? 감독님.”

얀 필립이 대니 라모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서이렌이 나오기 때문에 칼레 영화제까지 찾아서 본 그다.

그제야 감독상을 받았던 금발의 잘생긴 프랑스인 감독을 기억해 낸 얀 필립의 표정이 풀렸다.

대니 라모로는 평범한 남자들처럼 패션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랐지만, 도나텔로는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셔츠도 도나텔로의 신상이었다.

얀 필립이 먼저 대니 라모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얀 필립입니다. 시청 앞 돈키호테의 감독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대니 라모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얀 필립은 그가 디자인한 신상 셔츠를 입은 대니 라모로를 보며 굳은 표정을 풀었다.

두 사람이 오해를 풀고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갑작스러운 대니 라모로의 출현에 놀라고 있었다.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직접 한국에까지 찾아오다니.

대니 라모로의 열정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서이렌에게 문 씨어터에 출연하자고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미국에 따라갈 거라고 했더니 서이렌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좋다고 했다.

인사를 끝낸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자신의 팬인 두 남자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두 분, 통성명은 잘 끝내셨나요? 그런데 이를 어쩌죠? 저는 이제 촬영장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중간에 잠깐 나온 거라서요.”

서이렌이 가야 한다고 하니 얀 필립과 대니 라모로의 얼굴이 굳었다.

“얀. 아까 말한 대로 쇼에 오를게요. 사흘 후에 봬요.”

“좋습니다. 이렌 씨. 쇼에서 입을 의상과 패션쇼 콘셉트는 써니를 통해 보낼게요.”

“오랜 비행으로 지치셨을 텐데 어서 숙소에 가서 쉬세요.”

“고마워요. 이렌 씨.”

얀 필립과 이야기를 마친 서이렌은 이제 대니 라모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서이렌을 향해 구애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대니 라모로에게 말했다.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나는 서이렌 씨만 할 수 있는 역이니까요.”

대니 라모로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서이렌을 향해 있었다.

그는 지금 영어를 배우는 중인지 발음은 어색했지만,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단순히 서이렌에 대한 호감만으로 이렇게 그녀의 캐스팅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 거다.

문 씨어터의 대본을 읽어 본 나로서도 같은 생각이다.

미스테리한 인물인 루나를 맡을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사람, 내 배우 서이렌밖에 없다.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그래도 이렌 씨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설득해야죠. 원 대표님이 아니라 이렌 씨를 직접 만나서 설득하려고 찾아온 겁니다.”

나 때문에 할리우드행을 거절한 서이렌이었지만 대니 라모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자 서이렌도 영화에 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혹시 이런 한국 속담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저, 그게…….”

대니 라모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영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운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서이렌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불어로 내게 말해 줄래요? 원세강 대표님께 한국어로 통역해 드릴게요.”

“그래 주실래요?”

대니 라모로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니가 서이렌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하자 서이렌이 곧 한국말로 통역을 했다.

“서이렌 씨는 나무가 아닙니다. 저는 열 번이나 서이렌 씨를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 직접 서이렌 씨를 보고, 제 진심을 담아 부탁할 생각입니다. 서이렌 씨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포기해야죠. 혹시 프랑스 명언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Aide-toi, le ciel t’aidera].”

“아뇨. 처음 들어 봅니다. 무슨 뜻이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저는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노력해 보고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온 겁니다.”

대니 라모로는 제 뜻이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며 내 눈을 응시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진지하기 그지없는 대니 라모로를 보며 내 생각도 바뀌고 있었다.

꽤 괜찮은 남자네.

그때 내 핸드폰의 벨 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촬영장에서 온 전화였다.

“이렌 씨는 이제 정말로 촬영장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 말. 믿어도 되겠죠?”

“그럼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바로 연락드릴게요. 이렌 씨와 직접 대화할 시간을 드리죠.”

“감사합니다.”

나는 서이렌과 함께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주차장에는 빈선예와 얀 필립 그리고 대니 라모로 세 사람만이 남았다.

얀 필립이 다가오더니 대니 라모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에 묵으시죠? 제 차로 모셔다 드릴게요.”

“저는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면 됩니다.”

“써니가 그러는데. 여기는 외진 곳이라서 택시가 안 온다네요. 제 차를 타고 가시죠.”

대니 라모로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될까요?”

“우리는 뜻이 같은 동지 맞죠?”

“동지요?”

“서이렌 씨에게 구애하러 한국까지 날아온 남자들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건가요?”

대니 라모로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빈선예는 그런 대니 라모로를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보니 저 사람이 진짜 강적이네. 지형이는 아무것도 아닌데?’

* * *

서이렌은 다음 날 저녁 9시가 돼서야 촬영을 마치고 용산 시티타워에 도착했다.

나는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가 독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고 빠졌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했지만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아래층의 레전드 필름으로 갔다.

“고생하시네요. 형님.”

야근 중이던 강진석이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너야말로 고생이다. 이제 곧 조장훈 씨도 출근할 거고. 괜찮아. 할 만해.”

“블랙마치는 어때요?”

“너도 시간 내서 현장에 한번 가 봐. 희진이가 진짜 잘한대. 락이도 무대 체질이더니 희진이도 같은 핏줄인가 보다. 수줍어하면서도 막상 카메라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메라를 씹어 먹는다더라.”

“그래요?”

“그렇다니까. 아예 이참에 스타탄생이랑 정식으로 계약을 했으면 좋겠어.”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봐서 그렇게 하죠.”

“그나저나 TOP 미디어 소식은 들었냐?”

“TOP이 왜요?”

“그쪽도 좀비 영화를 준비하고 있대.”

“그래요?”

금시초문이다.

멜랑꼴리 다음은 KBC 창사특집 드라마라고 들었는데 영화도 하는구나.

심지어 우리와 같은 장르인 좀비 영화다.

“조만간 캐스팅 소식 뜰 거야. 내가 TOP으로 발령받은 천 대리한테 들은 거니까 확실한 정보야.”

“잘하면 같은 시기에 개봉하겠네요. 시기가 겹치게 되면 일정을 잘 짜야겠네요.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먼저 개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류작 같아 보일 수 있어요. 촬영은 우리가 먼저 했지만 누가 그걸 알아주겠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쪽 일정 나오면 거기에 맞게 우리 일정도 확인해 볼게.”

“부탁드립니다.”

“근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TOP 좀비 영화는 망할 게 분명하거든.”

나는 순간 악동 같은 미소를 지은 강진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걱정했던 멜랑꼴리도 잘됐잖아요.”

“그 좀비 영화 말이야. 시나리오를 누가 쓴 줄 알아?”

“저야 모르죠.”

“한지욱.”

“예?”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한지욱이라고?

“LOK와 TOP 미디어 대표. 한지욱이 쓴 대본이란다. 그것 때문에 TOP에서도 지금 말이 많대.”

“전혀 예상을 못 한 전개인데요?”

“걔가 언제는 예상 가는 행동을 했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였지. 암튼. 이번에 제대로 붙어서 한지욱이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거야.”

아무리 한지욱이 대표라 해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영화 제작에 검증도 안 된 시나리오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분명히 뭐가 되었든 장점이 있을 거다.

“그런데 너는 집에 안 가? 이제 퇴근해야지. 나도 퇴근할 거다.”

“사실은 형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말인데 그래?”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대니 라모로가 시나리오를 보내온 일을 털어놨다.

그의 러브콜을 수락하고 하반기에는 서이렌과 함께 미국에서 체류할 거라고 말했다.

내 예상과 달리 강진석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당연히 가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트로이 제작에 대니 라모로 감독 작품인데.”

“그래서 제가 앞으로 반년간 한국에 없을 겁니다.”

“내가 있잖아. 레전드는 박진숙 이사가 버티고 있고. 그리고 이번에 빈 팀장도 본부장으로 올릴 거라고. 걱정할 게 뭐 있어? 가야지.”

자신만만해하는 강진석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마워요. 형님.”

“너는 나를 한 번씩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더라. 그렇게 보지 마. 징그러워.”

“제가 그랬나요?”

“또 그 표정이네. 주인을 기다리는 시츄처럼 웃지 말라고.”

“제가 언제요?”

“방금 그랬다니까.”

강진석이 나를 놀리고 있는데 대화를 마친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가 레전드 필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표정의 대니 라모로를 보니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았다.

할리우드구나.

서이렌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어.

* * *

도나텔로의 한국 매장 오픈 기념 패션쇼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모델들은 오늘 입을 의상을 입고 런웨이를 걸었다.

한 시간 동안의 1차 리허설이 끝나고 모델들은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모델들을 위한 간이 화장대와 옷걸이가 주르륵 늘어서 있었고 출장 나온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있었다.

모델 에이전시, 라인의 톱 모델 진서현과 오민주가 함께 메이크업 의자에 앉았다.

“패션쇼에 대니 라모로 감독이 온다는 소식 들었어?”

“누구?”

“대니 라모로 감독 몰라? 잘생겨서 유명한 프랑스 감독 말이야.”

“우리나라 배우 이름도 못 외운다. 프랑스 감독을 어떻게 알아? 근데 넌 그거 어떻게 알았는데?”

“기사에 떴더라고. 얀 필립이랑 같은 비행기 타고 한국에 왔나 봐.”

먼저 메이크업을 끝낸 오민주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서이렌은 되게 웃긴다. 배우가 무슨 패션쇼의 피날레를 서냐?”

“그동안 피날레를 선 배우가 한두 명이야? 그러려니 해야지.”

“그래도 걔들은 리허설에 참석하는 시늉이라도 했잖아. 서이렌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어제 새벽에 와서 혼자 리허설했대.”

“새벽에? 왜?”

“지금 드라마를 찍고 있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던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조명 스태프 중에 내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걔가 어제 새벽에 한 리허설에 참여했대. 난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쁜데도 시간 쪼개 가면서 리허설을 한 거잖아.”

“쳇. 그 정도는 다 하지.”

“안 하는 사람도 있잖아. 지수연은 안 그랬다던데? 암튼 난 좋게 보여. 내 친구도 서이렌이 너무 멋있다고 칭찬하더라. 잘하더래.”

“잘해 봤자지. 모델도 아닌 배우인데.”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진서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먼저 가 볼게. 천천히 하고 와.”

“응. 먼저 가 봐.”

진서현이 떠나자 홀로 남은 오민주는 거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쟤는 대체 아는 게 뭐야? 지 혼자 착한 척은 다 하고 있어.”

목에 묻은 파우더 가루를 털어 내던 오민주가 혼잣말했다.

“고작 새벽에 짧게 리허설을 한 거로 워킹이 제대로 되겠어? 당연히 별 볼 일 없겠지. 웃기고 있어.”

마지막으로 메이크업을 확인한 오민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먼저 갈게요. 고마워요.”

오민주까지 사라지자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작게 속삭였다.

“총성 없는 전쟁터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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