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1화 (172/261)

#171화. 미국에서 온 두 남자

얀 필립은 고개를 돌려 자신과 부딪힌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발 벽안에 예민하게 생긴 미남을 발견하자 얀 필립의 동공이 커졌다.

‘잘생겼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야. 내가 이 남자와 함께 서 있는 걸 보면 마크가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오게 생겼어.’

얀 필립은 한국으로 오면서 그의 상사이자 연인인 마크 핸슨을 떼어 놓고 오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례합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나요?”

대니 라모로는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떠듬거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 잘 보여요.”

얀 필립이 자리를 비켜 주자 대니 라모로는 방금 얀이 섰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핸드폰 카메라를 손에 든 대니 라모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광판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 전광판의 홀로그램 이미지가 바뀌며 서이렌이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아까는 긴 머리카락이었는데 이번에는 단발머리의 서이렌이 웃고 있었다.

“오 마이 갓!”

대니 라모로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연달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얀 필립도 바뀐 전광판 이미지를 보고 깜짝 놀라 대니 라모로의 곁으로 붙더니 그도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일면식도 없는 두 남자는 한참 동안 서이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서이렌 씨 팬이신가 봐요.”

“그렇습니다. 당신도 서이렌 씨 팬이신가요?”

“그럼요. 이렌 씨는 저의 뮤즈입니다.”

“그러시군요. 마찬가지예요.”

서이렌의 팬임을 숨기지 않는 파란 눈의 이방인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서이렌에 관한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쿨하게 헤어졌다.

“좋은 여행 하세요.”

“그쪽도 한국에 오신 일이 잘되길 바랍니다.”

얀이 준비된 리무진에 탑승하자 비서인 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오픈할 매장으로 모실게요.”

“잠깐만 톰!”

“왜 그러시죠? 얀?”

“잠시만. 톰. 나 전화 한 통화 좀 할게.”

* * *

전화를 받고 돌아온 빈선예는 나를 붙잡고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요. 대체 왜 할리우드에서 온 제안을 거절했어요?”

빈선예의 물음에 나는 잠깐동안 정신이 멍해졌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빈선예가 내 멱살을 잡을 것만 같았다.

“아깝지만 그렇게 됐어요. 이렌 씨가 절대로 못 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빈선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무서워지는데요?”

“대표님. 제가 진지하게 충고하는 건데요.”

“무슨 충고요?”

“대표님도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요.”

“예?”

“백 프로 세트 촬영이라면서요? 영화 찍는 데 삼 개월이면 끝난다는데. 그냥 같이 미국에 가요. 대표님이 간다고 하면 이렌 씨도 갈걸요?”

빈선예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빈선예는 다 알고 있었구나.

나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스타탄생도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경영은 강진석에게 맡기고 삼 개월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고민하고 계신 거죠?”

“그럼요. 이렌 씨한테는 정말로 좋은 기회니까요.”

“그럼, 뭘 망설여요? 대표님이 함께 가자고 하면 이렌 씨는 지옥도 따라갈걸요?”

“에이. 지옥은 좀 그렇네요.”

“사막에서 촬영하다가 열사병이 걸려도, 북극에서 촬영하다가 동상이 찾아와도 이렌 씨는 대표님만 곁에 있으면 웃으면서 연기할 사람이라고요. 제 말이 틀렸나요?”

빈선예의 말대로 서이렌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이렌은 이렇게 나만 생각해 주는데, 나는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놓치는 건 말도 안 된다.

가야지. 내가 따라가서 챙겨 주면 된다.

내 눈빛이 결연하게 바뀌자 빈선예의 입에 그제야 미소가 걸렸다.

임무를 완수했다는 후련한 표정으로 빈선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님. 저는 오늘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할게요. 얀이 온다고 해서 얼굴이나 보려고요.”

“오늘이 얀이 오는 날이군요. 그렇게 하세요.”

빈선예가 사라지자 나 혼자 남았다.

나는 닫았던 노트북을 열었다.

대니 라모로 감독에게는 이미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어제도 그에게 다시 생각해 달라는 메일이 왔다.

아직 기회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 올해 일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문 씨어터는 올해 여름부터 촬영이다.

상반기에 작은 아씨들 촬영과 블랙마치의 촬영이 끝날 거다.

여름에는 오아시스가 개봉하는데 필름더플랫과 관계가 워낙 좋아서 우리 편의를 잘 봐줄 거니까 이것도 걱정할 게 없다.

하반기 일정은 아직 정해진 게 없지만, 우연미의 신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잘하면 우연미의 신작이 들어가기 전까지 할리우드에서 촬영을 끝마칠 수도 있을 거 같다.

올 한 해 일정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할 수 있어.

가자. 할리우드로.

* * *

얀 필립은 도나텔로 서울점으로 가지 않고 기사에게 부탁해 경기도의 종합 촬영장으로 왔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주차장에 도착한 얀 필립이 리무진에서 내렸다.

그의 눈빛은 서이렌과 재회할 생각에 반짝거리며 빛났다.

일찍 퇴근하려던 빈선예가 주차장으로 걸어왔고 차에서 내리는 얀 필립을 먼저 발견했다.

“얀! 어떻게 된 거예요?”

“써니. 오랜만이야.”

얀 필립은 빈선예의 영어 이름인 써니를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보기로 했잖아요. 말도 없이 왜 여기로 온 거예요? 길이라도 엇갈렸으면 어쩔 뻔했어.”

“보고 싶어서 왔지.”

“쳇. 나를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지? 이렌 씨 보러 온 거지?”

“아냐. 두 사람 다 보고 싶었어. 믿어 달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눈은 촬영장에 가 있는 건데?”

“하하. 들켰나? 이렌 씨는 저기서 촬영하는 거야?”

“응. 지금 한창 촬영 중이야. 근데 어쩌나? 외부인은 못 들어가.”

“그래?”

“당연하지. 오늘은 저녁에야 촬영이 끝날 텐데. 어쩌려고 말도 안 하고 왔어? 방금도 전화 통화해 놓고. 사흘 뒤가 패션쇼잖아. 바쁘지 않아?”

“깜짝쇼로 놀래주려고 그랬지. 그런데 쇼는 괜찮아. 한국 대행사에 다 맡겼어. 사실은 쇼 전날에 와도 되는데 일부러 일찍 온 거라고.”

“이렌 씨 보려고?”

“그럼, 당연하지.”

빈선예는 한결같은 얀의 서이렌 앓이가 너무 재미있었다.

“휴식 시간은 있을 거야. 쉴 때 여기로 오라고 문자 보내 놓을게.”

“역시 써니. 너밖에 없다. 사랑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빈선예는 원세강과 서이렌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냈다.

얀 필립이 촬영장에 왔다고 하니 둘 다 꽤 놀란 눈치였다.

“써니. 이것 좀 볼래?”

얀 필립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모델이 입고 있는 의상이 보였다.

“어라? 이거 한복이네?”

얀 필립이 보여 준 의상은 다름 아닌 한복이었다.

서양 의복과 한복이 결합 된 퓨전 드레스였다.

“이번에 한국의 한복 디자이너인 이혜윤 씨와 콜라보했어. 이 드레스가 이번 쇼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야.”

“예쁘다. 우리 이렌 씨가 입었던 한복이 생각난다.”

“나도 그걸 생각하고 만든 거야. 어때? 이렌 씨한테 잘 어울릴까?”

“우리 이렌 씨한테 안 어울리는 옷이란 건 세상에 없어.”

“오! 동감. 나도 같은 생각이야.”

빈선예와 얀 필립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주차장에서 서이렌에 대한 주접을 떨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렌 씨가 직접 쇼의 파이널을 서 주면 안 될까?”

“이렌 씨가 직접 런웨이에 선다고?”

“응. 이 의상을 입고 말이야.”

“좋은 생각이긴 한데…….”

빈선예는 얼굴을 구겼다.

사흘 뒤에 도나텔로 한국지점 론칭 기념 패션쇼가 열린다.

촬영 일정이 빡빡해서 패션쇼에 참관하는 단 하루 일정을 빼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런웨이에 서라니.

연습도 못 하고 런웨이에 설 수는 없었다.

얀 필립은 어두워진 빈선예의 표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안 될 거 같아?”

“쇼 당일에만 간신히 일정을 뺐거든. 런웨이 준비할 시간이 없어.”

“이렌 씨라면 그냥 무대 위를 걷기만 해도 환상적일 거야. 연습 같은 건 필요 없어.”

“그게 말이 그렇지. 한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도나텔로 패션쇼인데 연습도 하지 않고, 그것도 파이널을 서라니. 안 돼. 욕먹기 딱 좋아.”

“난 괜찮은데. 내 쇼잖아.”

“안 돼. 이렌 씨가 완벽주의자야. 준비가 안 되면 무대에 안 오르려고 할걸?”

빈선예의 단호한 대답에 얀은 풀이 죽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때 주차장에 도착한 나와 서이렌이 얀 필립의 뒤에 가서 섰다.

얀 필립은 서이렌이 도착한 지도 모르고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이렌이 얀의 뒤로 가서 작게 속삭였다.

“무대에 오를게요.”

“어?”

눈이 동그래진 얀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과 두 눈을 마주친 얀이 놀라 외쳤다.

“이렌 씨!”

“오셨다는 문자를 받고 바로 달려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얀.”

“이렌 씨. 보고 싶었어요.”

얀 필립은 작은 아씨들 촬영을 위해 게임 폐인 천재 해커로 변신한 서이렌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쩜 뿔테 안경도 너무 잘 어울리네요.”

“얀은 언제나 좋은 이야기만 해 줘서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누가 서이렌 씨한테 나쁜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얀. 나 무대에 설 수 있어요. 설게요.”

“정말요?”

“그럼요. 연습 같은 건 안 해도 됩니다. 그날 가서 동선만 확인하면 돼요.”

“오. 너무 좋아요.”

서이렌이 쇼에 선다고 말하자 빈선예가 미간을 찌푸렸다.

빈선예가 내 옆으로 붙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이 이렌 씨 좀 말려 봐요. 얀은 지금 콩깍지가 씌어서 안 먹힌다고요. 어떻게 연습 한번 없이 당일에 쇼에 올라요? 잘못하면 욕먹어요.”

“괜찮습니다.”

“예?”

빈선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괜찮다고요?”

“이렌 씨라면 누구보다 잘할 거예요.”

당연한 것 아닌가?

그녀는 마네킹이다.

아마 쇼에 오르는 그 누구보다 런웨이를 잘할 거다.

아예 쇼를 집어삼키고 오면 왔지, 실수할 리가 없다.

“빈 팀장님 말씀대로 우리 이렌 씨가 완벽주의자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준비된 모델이니까요.”

“어라? 혹시 미국에서 모델 일을 했나요? 그런 거구나. 맞죠?”

“뭐. 그런 셈이죠.”

“어쩐지. 거적때기만 걸쳐도 우리 이렌 씨만 태가 달랐던 이유가 있었어.”

나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하는 서이렌과 얀 필립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누가 보면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난 줄 알겠다.

다른 남자들이 서이렌에게 친근하게 굴면 기분이 확 상하고 짜증이 났는데 이상하게 얀 필립만은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때 주차장에 인천 번호판을 단 택시가 들어왔다.

이런 곳까지 택시가 올 리가 없는데 뭐지?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택시를 바라봤다.

우리 바로 앞에 선 택시에서 단출한 짐을 가지고 한 남자가 내렸다.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택시에서 내린 그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대니 라모로 감독이 서이렌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직접 한국에 왔구나.

서이렌을 캐스팅하려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대니 라모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얀 필립은 긴장한 채 대니 라모로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은 공항의 그 사람이잖아. 왜 나를 따라온 거죠?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누군데 우리 이렌 씨랑 손을 잡고 있는 겁니까?”

얀 필립은 서이렌과 마주 잡고 있던 손을 일부러 더 꽉 쥐며 대니 라모로를 노려봤다.

서이렌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서이렌 덕후가 불꽃 튀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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