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5화 (166/261)

#165화. 가족도 몰랐던 재능

윤서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정희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락이네 가족인가? 물어볼까?’

윤서혁이 입을 떼려는데 십사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진숙 이사의 얼굴이 보였다.

“윤 감독님.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박 이사님.”

윤서혁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정희진은 윤서혁이 내리자마자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윤서혁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정희진을 보며 생각했다.

‘성격 한번 급하네. 락이 친척이 맞구나.’

박진숙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윤서혁에게 프로필을 건넸다.

“오늘이 마지막 오디션이에요. 오늘까지 404호 여고생의 적임자를 구하지 못하면 그냥 2안으로 가요.”

윤서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박진숙이 건넨 프로필을 받아 들었다.

마지막 오디션이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가시죠.”

* * *

십오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락이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왔냐?”

“우리가 너무 늦었지? 내가 택시 타고 가자고 했는데 엄마가 계속 버스 타고 가자고 해서 늦었어.”

정희진은 엄마를 보며 눈을 흘겼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는데 뭐 하러 택시를 타?”

“버스 정류장이 멀잖아. 십오 분이나 걸었다고. 우리 네 사람이 길거리에서 버린 시간을 생각해 보라고. 암튼 못 말려.”

“시끄러워. 조용히 해. 남들이 쳐다본다.”

이락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이모 지혜숙과 정희진을 보며 웃었다.

“이모. 안 늦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락은 이모 지혜숙과 어머니 지영숙에게 다가갔다.

“엄마. 여기 좋지?”

“응. 예뻐.”

“그렇지? 예쁘지? 안은 더 예뻐. 가서 볼래?”

“응. 락아.”

이락은 어머니에게 달려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우선 회사를 한 바퀴 돌면서 보여 드릴게요.”

“오빠 자리도 있어?”

“난 회사원도 아닌데 내 자리가 어디에 있어?”

“그래?”

정희진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배우들이 연기 연습하는 공간이 따로 생겼어. 내 전용 자리는 아닌데 지금은 나밖에 안 쓰니까 거기를 보여 줄게.”

“연습실? 아이돌 가수 연습실 같은 건가? 나 볼래. 그거 먼저 볼래.”

“알았어. 이따 간다고.”

이락은 보채는 정희진을 달래며 회사 탐방을 시작했다.

지난주 시티타워로 이사 온 스타탄생은 십사 층은 레전드 필름이 사용하고 십오 층에는 스타탄생과 이번에 신설된 미디어팀이 사용한다.

빈선예가 꼼꼼하게 관여해서 그런지 멋들어진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정희진은 TV에서 본 게 많아서 그냥 멋지다며 좋아했지만, 이모님 가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락아. 회사가 되게 넓다.”

“그렇죠? 저도 이사하고 깜짝 놀랐어요.”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

“그럼요. 많죠.”

이락의 머릿속에 스타탄생의 조직도가 그려졌다.

대표님인 원세강.

매니저팀 팀장이자 이사 겸직인 강진석과 강진석이 이끄는 매니저팀.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장우재와 서유림.

그리고 최근에 영입한 허이정과 배진혁도 매니저팀이다.

기획팀 빈선예와 그녀가 영입한 이들이 세 명의 경력직들.

홀로 힘들게 일했던 경영지원팀의 이선아는 이번에 함께 일할 동료 두 명을 얻었다.

배우는 서이렌, 김이솔, 윤이슬 그리고 자신까지 해서 총 네 명이다.

마지막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미디어 제작팀.

이곳이 스타탄생의 그 어느 부서보다 인력이 제일 많다.

팀장인 이윤기 감독을 비롯한 윤서혁, 우연미, 서주희가 메인이고 그 외의 다른 인력은 지금 뽑고 있다.

머릿속에 스타탄생 직원들을 모두 그려 본 이락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많은데요? 우리 되게 큰 회사였구나.”

이락이 서이렌의 매니저로 들어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원세강, 서이렌, 빈선예 그리고 자신까지 해서 총 네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삼 년 만에 스무 명이 넘는 대식구가 된 것이다.

심지어 레전드 필름 직원 열다섯 명은 여기에 포함하지도 않았다.

이락이 놀라고 있는 사이 정희진이 이락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여기가 배우들 연습실이야?”

“어?”

정희진은 연습실이라고 쓰여 있는 방문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들어가 보자. 나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그래. 들어가자.”

* * *

새로 꾸려진 미디어팀에서는 지금 작은 아씨들 제작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미디어팀의 팀장인 이윤기 감독 옆에는 엔진의 박주호 대표가 앉아 있다.

박주호 대표는 엔진의 심종혁 팀장과 함께 제안서를 확인했다.

나는 박주호 대표가 제안서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박주호 대표님. 다 보셨으면 이제 답을 주시죠.”

“그러니까 스타탄생이 드라마 제작은 처음이니까 우리와 협업하자는 거지?”

“인력을 완벽하게 꾸리고 시작하면 좋지만, 세상에 완벽한 건 없죠. 경력자를 데리고 와도 단숨에 팀이 꾸려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 근데 이제 스타탄생이 드라마 제작팀 꾸리게 되면 엔진과 경쟁사인 건 알지?”

“선의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오늘 이야기가 잘 마무리된다면 경쟁자라기보다는 조력자가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하는데?”

“예쁘면 함께하시는 겁니까?”

“하하. 그래도 신중히 생각해 봐야지.”

박주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협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이 기획이 너무 괜찮단 말이야. 캐스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쳤고 말이야.’

하지만 박주호를 제일 흔드는 것은 원세강이었다.

‘원 대표와 함께 가는 게 좋은데. 누가 채 가기 전에 내가 침 발라 놔야 한다고.’

박주호는 원세강이 스타탄생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는 작품마다 대박이고, 손대는 투자마다 대성공에 레전드 필름과 합치고 그가 가장 깊게 관여한 작품인 구원의 밤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

‘그동안 내가 원 대표랑 좋은 관계였으니 나한테 먼저 제안했겠지. 원 대표는 숨겨진 미다스의 손이야. 누가 채 가기 전에 내가 낚아채야지.’

결심을 굳힌 박주호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거절을 못 하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유플릭스 투자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그쪽도 관심을 가지더군요. 내일 이곳에서 유플릭스 대표와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

“최동석 대표가 직접 온다고? 그 양반 엉덩이가 무거울 텐데. 나도 실무자들만 만나 봤지. 대표는 못 봤다고.”

박주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관심은 무슨. 거기도 우리처럼 난리가 났겠군. 유플릭스 대표가 직접 온다는데 말해서 뭐 해.’

“그럼, 함께 가기로 했으니 박주호 대표님도 내일 미팅에 함께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나까지?”

박주호는 놀라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못해 광대가 씰룩거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드라마 제작은 내가 훨씬 더 많이 아니까 내가 같이 들어가서 도와줄게. 걱정하지 마.”

박주호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커피 맛이 좋네. 하하하.”

회의를 끝내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자 심종혁 팀장이 박주호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말해 봐요.”

“사실 이번 합작은 우리가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닙니까? 스타탄생이 감독, 작가는 물론 모든 기획을 하고 우리는 인력만 대주는 꼴이잖습니까? 아무리 우리 이자현 배우님이 그 작품에 출연한다고 해도, 업계 최고의 스태프를 가진 엔진인데. 너무 밑지는 장사 같아서요.”

“심 팀장. 사업은 길게 보고 하는 거야.”

“예?”

“스타탄생을 보라고. 지금 기세가 하늘을 뚫고 있다고. 이대로 대기권 바깥까지 이탈하게 생겼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 우리가 거절하면 다른 제작사 알아보겠지. 이번 작품이 잘되면 계속 그쪽이랑 일하지 않겠냐고?”

“그런 거였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심종혁은 그제야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플릭스가 요즘 잘나가니까 최 대표가 깐깐하게 군다는데. 내일 미팅 자리에서 내가 분위기를 주도해야겠어.”

“그럼요. 원 대표는 아직 풋내기이니까요.”

“엔진으로 빨리 돌아가자고. 준비할 게 많아.”

“예. 대표님.”

박주호 대표가 탄 차량이 지하 주차장을 떠날 때쯤 스타탄생 회의실에서는 나와 강진석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주호 대표가 예상외로 너무 쉽게 오케이를 했는데? 안 그러냐? 엔진 인력과 인맥을 이용하는 거니까 우리가 얻는 게 훨씬 많잖아. 능구렁이 같은 박 대표가 협상안을 조정하려고 들 줄 알았는데. 대박이다.”

“그동안 엔진과의 관계가 좋았잖아요.”

강진석은 예상외라며 놀랐지만 나는 왠지 이번 거래가 통할 것 같았다.

“야. 너 왜 그렇게 웃냐? 넌 이미 박주호가 오케이 할 거라고 예상했던 거냐?”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너 진짜. 아무래도 수상해. 뭔가 있단 말이야. 너 원래 일은 잘해도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었잖아. 너 진짜 성격 많이 변했다. 스타탄생 차린 이후에 확 달라진 거 같다.”

“원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하는 겁니다.”

“또 그 말이냐? 말 돌리기는.”

“일어나시죠. 블랙마치 오디션도 이제 끝났을 겁니다.”

“진짜로 말 안 해 줄 거야? 너 혹시 용한 곳이라도 다니는 거 아냐? 나도 좀 알려 주라.”

* * *

이락이 정희진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상대역 대사 좀 맞춰 줄래?”

정희진은 블랙마치 대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오빠는 출연 안 한다며?”

“카메오로 나올 거야.”

“오빠가 무슨 역으로 나오는데? 좀비 영화라고 했잖아. 설마 좀비인가?”

“장난치지 마. 사람들 구하다가 죽는 특수부대 막내 역이야. 비중은 얼마 안 되는데 초반에 주인공 여자아이를 구하고 바로 죽는 임팩트가 있는 역이라서 내가 맡았어. 같이 대사 좀 맞춰 보자. 내가 연습실 장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 줄게.”

“이렇게 막 나한테 대본을 보여 줘도 돼?”

“다 보여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여기야. 봐 봐. 할 수 있겠어?”

“당연히 할 수 있지. 나 이래 봬도 대정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주연도 맞았어.”

“어이구. 알았다고. 그러니까 해 보라고.”

대본을 건넨 이락이 카메라를 세팅하러 일어섰다.

이락이 알려 준 부분은 단순했다.

특수부대 막내가 숨어 있는 여주인공을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가 옥상에 숨어 있던 좀비에게 목을 물리는 장면이었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돌아온 이락이 웃으며 말했다.

“나 시작한다.”

“잠깐 오빠. 이거 대사만 읊어? 아니면 진짜 연기하는 것처럼 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이락은 리모컨으로 카메라를 동작시키고 배역에 몰입해서 연기를 시작했다.

총을 들고 건물을 수색하는 연기하던 이락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는 건물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이락은 긴장한 눈으로 정희진을 쳐다봤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정희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갑자기 책상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쟤는 연기를 하라고 했더니 왜 갑자기 숨는 거야?’

이락은 자신이 연기하는 중임을 까먹고 책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책상으로 정희진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책상 뒤에서 머리와 옷을 손봤는지 방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정희진이 아니었다.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헝클어트리고 입고 있던 외투를 어깨로 내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정희진을 보며 이락은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이락이 놀라서 아무 말이 없자 정희진이 갑자기 애드리브를 하기 시작했다.

신고 있던 컨버스를 벗어서 손에 든 것이다.

이락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서 제정신을 차렸다.

이락은 그제야 까먹고 있었던 대사를 쳤다.

“안심해요. 내가 구해 줄게요.”

“필요 없으니까 꺼져.”

정희진은 사회성이 결여된 404호 여고생에 빙의라도 한 듯 까칠하게 답했다.

그런데 처음 하는 대사치고는 발성도 좋고 감정은 더욱 좋았다.

이락은 정희진의 눈빛에 놀라 또다시 멈칫했다.

“괜찮아요. 난 군인입니다. 진짜로 구해 주러 온 거예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웃기지 말고 꺼지라고.”

정희진이 대사를 내뱉자마자 탁 소리와 함께 연습실 앞에 큰 소리가 났다.

이락과 정희진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이락과 정희진을 보여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이대로 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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