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스타탄생의 새 보금자리
나는 당황한 서주희에게 배우들을 소개했다.
“통성명은 안 해도 되겠죠? 어떤 일을 하시는 분들이신지 서주희 작가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서주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분들을 모르면 말이 안 되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대본을 읽자마자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작가님이 서울로 올라오시기 전에 팀을 먼저 꾸리고 배우분들께 대본도 보냈습니다. 이분들은 서 작가님의 대본을 보고 모두 하겠다고 나서 주신 분들이고요.”
“여기 계신 분들이 다요?”
“맞습니다. 작은 아씨들의 주역인 네 자매예요.”
“말도 안 돼.”
서주희는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네 명의 톱스타를 바라봤다.
이자현, 서이렌, 김이솔 그리고 윤이슬이 서주희 작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자현입니다.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대본을 봤어요. 이렇게 흡인력 있는 작품은 처음입니다.”
“저는 서이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본 잘 봤습니다. 원래도 작가님 팬이었는데 이번 작품으로 더 좋아졌어요. 꼭 이 작품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자현과 서이렌을 시작으로 네 명의 배우들이 각기 서주희 작가에게 인사를 했다.
서주희는 그녀들이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작은 아씨들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네 명의 여신이 그녀가 만든 작은 아씨들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그녀는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주희가 몸을 부르르 떨자 옆자리에 앉은 우연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농담을 건넸다.
“그거 봐요. 제가 선배님 대본이 대박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계약하고 저도 보조 작가로 써 주세요.”
“우 작가.”
나는 서주희와 배우들이 잠시 이야기하라고 두고 이윤기와 단둘이 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감독님. 이참에 스타탄생과 계약하시죠.”
“나 말이야?”
“어차피 KBC를 퇴사하는 거라면 딴 데 갈 것도 없이 저희와 계약하세요. 아시죠? 우리 회사에 우연미 작가도 있고 윤서혁 감독도 있는 거. 영화 제작은 레전드 필름에서 주로 하겠지만 드라마 제작은 스타탄생에서 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력을 뽑으려고 준비 중입니다.”
제작은 매니저로서 내가 꿈꾸던 마지막 한 조각이다.
영화는 레전드 필름에서 꿈을 이뤘지만, 레전드 필름은 사실상 다 차려진 밥상에 내가 숟가락만 얹는 수준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스타탄생에 제작팀을 만들어서 드라마를 제작할 거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지만 진짜로 일을 진행하는 건 내년이나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주희 작가의 대본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제작하는 첫 번째 작품이 서주희 작가의 작은 아씨들이 됐으면 한다.
“삼 년 만인가?”
이윤기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예?”
“LOK 나와서 회사 차린다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고작 삼 년 만에 드라마 제작까지 한다니 대단해.”
“다행히 좋은 분들이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감독님도 저 좀 도와주세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겸손한 건 여전하군. 그런데 이자현 배우는 어떻게 섭외한 거야?”
“대본을 보자마자 그 역에 이자현 배우님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동갑인 김이솔 배우님도 생각해 봤지만, 김이솔 배우님은 둘째가 더 잘 어울려요. 본인도 대본을 읽고 둘째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했고요.”
“이자현 배우와는 좋게 헤어진 모양이네. 연락하자마자 달려온 걸 보니 말이야.”
“이자현 배우님이 워낙 의리가 있으시잖아요.”
나는 이윤기와 대화 중에 힐끔 뒤를 쳐다봤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여자들끼리 모여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자현에게 전화할까 말까 고민하던 나였다.
결국 고심 끝에 오늘 아침, 이자현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는 대본도 보지 않고 바로 하겠다고 답했다.
이자현이 내게 이상하게 굴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김이솔이 사막을 떨쳐 낸 것처럼 그녀도 이제 나와 얽힌 과거의 앙금을 모두 떨쳐 낸 것 같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겠다는 말은 못 하겠고. 우선 계약서를 가져와 봐. 조건 보고 결정할게.”
“감독님.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일하는 데 아는 사이가 어디에 있어? 작은 아씨들 연출은 맡을게. 하지만 스타탄생 소속이 될지는 계약서 보고 결정할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아. 감독님.”
이윤기가 나를 놀리며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도 업계 최고 대우로 이윤기를 모셔 올 생각이다.
“다음 달에 회사가 이사합니다.”
“이사를 가? 왜? 여기도 좋은데?”
“레전드 필름이랑 합치고 제작팀도 들어오고 하면 이 건물로는 부족하죠.”
“하긴 그렇겠군. 어디로 가려고?”
“주소는 따로 보내 드릴게요. 어차피 이제 스타탄생으로 출근하셔야 할 테니까요.”
“나 아직 결정 안 했어. 계약서 보고 한다니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도 그냥 주소만 보낼 겁니다.”
“자네도 대표 자리에 있더니 사람이 능글맞아졌네. 하하하.”
* * *
한지욱 대표를 만나기 위해 LOK에 온 박호중과 박상용이 로비의 카페에 먼저 들렀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박상용이 미간을 찌푸렸다.
“케켁. 깜짝이야.”
박호중도 커피를 마시다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어이쿠. 누가 담뱃재라도 털어 넣었을까요? 왜 이렇게 쓰죠?”
박호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시던 커피 잔을 멀리 밀어 놨다.
“그런데 감독님. 지금 KBC 창사특집 드라마를 준비 하기도 바쁜데 갑자기 새 영화라니 무슨 이야기일까요? 혹시 뭐 들으신 거 없습니까?”
박상용의 물음에 박호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은 게 있을 리가? 한지욱 대표를 봐야 뭐라도 먼저 듣지. 오늘도 봐. 지가 미디어에 오면 되지. 굳이 우리를 LOK로 불러들였잖아. 어디서 이상한 기획안이나 들고 온 거 아닌지 걱정이다.”
“그러게요. 저도 걱정이네요.”
약속 시간 전에 도착한 박호중과 박상용이 카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LOK에서 근무하는 매니저들이 티 타임을 가지기 위해 로비로 우르르 내려왔다.
음료를 시킨 매니저들이 박호중과 박상용이 앉아 있는 뒷자리로 모여 앉았다.
“어휴. 이 커피는 마셔도, 마셔도 익숙해지지 않네.”
“그러니까 여기는 커피 말고 과일 음료나 딴 거 시키라니까.”
“됐어. 난 커피 맛은 모르고 각성 효과 때문에 마시는 거라서 이게 효과는 직빵이야.”
“그렇긴 하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쓴맛이니까. 크크큭.”
그들은 모두 치프급 매니저들이었고 오후 세 시가 되면 이곳 로비에서 모여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그 소식 들었어? 스타탄생 이사한대.”
“어디로?”
“용산 시티타워.”
“뭐? 정말?”
“응. 2월 첫째 주에 이사할 거래.”
“어디서 들었어? 나는 금시초문인데?”
“내가 유스케이에서 일할 때 같이 일했던 동기가 알려 줬어. 걔도 이번에 스타탄생으로 이직했나 봐.”
“와. 시티타워면 여기서도 보이지 않냐? 원세강 대단하네. 시티타워에 입성하고.”
“들어 보니 레전드 필름이랑 다 같이 옮긴다고 하더라. 시티타워 층 두 개를 통으로 쓸 거래.”
“와. 사람 인생 한순간이네. 나는 여기서 담뱃재 탄 커피나 마시고 있는데 원세강은 회사를 키워서 시티타워에 들어가고. 강진석은 그 회사 이사로 잘나가고 있고. 씨발. 배 아파서 뒈지겠다.”
“그 소식은 들었냐? 원세강이 이제 드라마 제작도 할 건가 봐. KBC 이윤기 감독도 거기랑 계약했대. 업계 최고로 모셔 갔다는데?”
“누구는 회사 차려서 잘나가는데. 우리는 이게 뭐냐?”
로비에 모인 매니저들이 부러운 얼굴로 맛없는 커피를 들이켰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3팀 고중기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거기 요즘 사람 엄청나게 뽑는다는데. 나도 이력서나 한번 내 볼까?”
고중기의 발언에 다른 매니저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들 뭘 그렇게 봐?”
“원세강이랑 강진석을 뒤에서 그렇게 씹고 다녔는데 무슨 염치로 스타탄생에 이력서를 넣어? 양심에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내가 뭘?”
“고 매니저. 잊었어? 지난번 취임식에서 강진석이 와서 고 매니저랑 최 매니저한테 경고하고 갔잖아. 우리는 다 이직해도 고 매니저랑 최 매니저는 안 되지.”
동료들이 뭐라고 하자 고중기는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인상을 구겼다.
* * *
약속 시간이 다 돼서 엘리베이터를 탄 박호중과 박상용은 아까 로비 카페에서 들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윤기 감독이 스타탄생에 영입됐어? 그 꼰대가 뭐가 좋다고 업계 최고로 모셔 가? 진짜 웃기네.’
박호중은 그가 무시했던 이윤기 감독이 최고 대우를 받으면서 스타탄생과 계약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우연미를 놓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으면 나도 드라마 대박 나고, 우연미 연줄 타고 스타탄생이랑 계약했을 수도 있잖아. 아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이게 다 서주희 작가 때문이야. 괜히 서주희에게 꽂혀서 작가 바꾸고 그 난리를 떨었다고. 그나마 서주희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작품 활동 못 한다고 하니까. 그건 쌤통이다.’
박호중은 과거를 떠올리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옆에 서 있는 박상용도 굳은 얼굴로 딴생각 중이었다.
‘레전드는 갈수록 잘나가네. 용산 시티타워라. 이럴 줄 알았으면 좀만 더 버틸걸. 연봉 올려 받을 생각에 괜히 섣불리 이직했어.’
두 사람은 그들의 잘못을 후회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한지욱은 박호중과 박상용이 저기압이라는 걸 못 알아채고 눈치 없이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표님.”
“안녕하셨습니까. 대표님.”
“자. 여기 앉아요. LOK 대표실은 처음이죠?”
한지욱은 한껏 들뜬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한지욱은 왜 이렇게 들뜬 거야? 진짜 좋은 작품이라도 건졌나?’
박호중은 의심을 한 채 자리에 앉았다.
“제가 외부에서 미팅이 있어서요.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 한번 보시죠.”
한지욱이 박호중과 박상용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대탈출]
육십 년대에 나왔던 할리우드 유명 영화와 똑같은 제목의 시나리오를 보고 박호중과 박상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호중은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 시나리오를 첫 장을 펼쳤다.
그런데 시작부터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건. 설마…….’ 놀란 박호중이 한지욱을 바라봤다.
“제 친한 동생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 중입니다. 좀비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같이 작업한 겁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꽤 잘 빠졌어요.”
“…….”
박호중과 박상용은 말이 없었다.
좀비 영화라니.
한지욱이 갑자기 이렇게 엉뚱한 소재와 스케일이 큰 영화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시나리오만 좋고 자본만 충분하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박호중은 다시 시나리오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을 넘길수록 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박상용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짜깁기네. 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장면이야.’
박호중은 더는 읽을 용기가 안 나서 시나리오를 못 넘기고 있었다.
그때 박상용이 시나리오의 앞장에 작게 적혀 있는 작가 이름을 박호중에게 넌지시 보여 줬다.
[작가: 데이비드 조, 한지욱]
박호중은 쌍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씨발. 지금 장난해?’ 용산 시티타워에 새로 둥지를 튼 스타탄생에 이락의 식구들이 놀러 왔다.
정희진은 드넓은 로비를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와. 되게 넓어. 엄마. 여기 장난 아니야.”
“그만 좀 뛰어다녀. 우석이가 기다릴 테니 빨리 올라가자.”
정희진의 어머니인 지혜숙은 날뛰는 정희진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희진의 아버지 정호택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도 화려한 건물 외관에 꽤 놀란 듯했다.
“엄마, 엘리베이터도 되게 넓지? 내 방보다 넓은 거 같지 않아?”
“희진아. 좀 조용히 해. 다른 분도 계시잖니.”
지혜숙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승객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너무 시끄럽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