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본 게임을 위한 대비(4)
나는 탁문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여간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다니까.’
겉으로는 이 사람처럼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없다. 내가 까마귀 꿈에서 그의 살인교사를 보지 않고, 이곳에 초청 받았다면 아마
‘이 사람은 진짜 믿을만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일단 감사의 인사로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탁문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눈인사로 그걸 받았다.
‘음...’
예전 그 까마귀 꿈을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웃을 때마다 가식적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마네킹이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짓고 있다고 느껴진 달까. 나는 들고 있던 칵테일을 홀짝 마시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이 모임의 다른 CEO들은 하나씩 약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호탕하거나, 지나치게 과시적이거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거나, 지나치게 고고하다든가, 지나치게 신중하다던가. 하지만 그건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간적인 면모기도 했다. 수조, 수십조 자산을 가진 부자들이었지만 하지만 탁문수는 그런 것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컴퓨터를 상대하는 느낌. 그는 아마도
‘출신이 그래서 그런지 일반인들이 뭘 좋아하는 지 잘 아네. 역시 대단해!’
허준익이 그 말을 했을 때,
‘가서 한상훈에게 위로를 한다. 그러면 나는 한상훈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라고 빠르게 생각하고 움직였을 것만 같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유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인간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여간 특이한 인물이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생각했다.
‘내년 4월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그 때 일정표에 써두었던 초성암호를 생각했다.
‘ㅌㅇㄱㅇㅈ’
유럽에 갔을 때 휴가에서 봤던 첫 번째 뉴스는 바로 그것이었다.
‘수연그룹 탁우경 회장 위중. 심장마비로 의식 잃어.’
정정하던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죽음의 위기에 빠지면, 그도 인생에서 거대한 시련에 맞부딪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탁우경이 죽으면 50%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야하니까. 현재 탁우경 회장의 자산은 밝혀진 것만 10조원이 넘었다. 탁문수에게 알짜 기업을 분사해서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상속세를 회피하고는 있었지만 그 많은 돈을 넘기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아마 한 10년은 더 살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손가락에 손꼽히는 부자도 죽음의 손길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물론 당장 죽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탁우경으로 계속해서 검색을 해본 결과
‘탁우경 심장마비 원인은 급성 심근경색.’
‘탁우경 회장 서울대병원 VIP실에 입원. 운신불편, 의식은 살아 있어.’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고도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얼마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저 늘 여유 있는 탁문수의 입꼬리에서 미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흐음...’
나는 나머지 칵테일을 모두 비우면서 탁문수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사촌지간이라서, 서로 닮아서 그런 것일까. 그를 보다보면 묘하게 탁준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탁준기가 조사했던 자료, 거기 쓰여 있던 유언과도 같은 메모도 생각이 난다.
‘탁우경이 죽을 때 그 때 핵폭탄을 터뜨린다.’
내년 4월과 7월 하여간 바빠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
나는 용의 입에다가 손을 가져가보았다. 입에서 나오는 물은 많이 뜨겁다.
‘너무 뜨겁게 했나?’
나는 이어서 야외 노천탕에 손을 넣어 보았다. 부는 찬바람에 그 물이 조금 식혀져서인지 노천탕 물은 딱 적당하다.
‘됐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여기 준비됐어.”
그렇게 말한 다음 입고 있던 가운을 던져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딱 알맞게 뜨끈하다.
“크으...”
나는 동네 아저씨들처럼 소리를 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2월. 겨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뜨끈한 노천탕의 열기 덕택에 나는 알몸으로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영이가 두 손에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어때 오빠 따뜻해?”
그녀는 기다란 타월 하나를 걸치고 있을 뿐이다.
“빨리 들어와 안 들어오면 감기 걸린다. 너.”
“응 잠시만.”
아영이는 내 옆에 들고 온 쟁반을 놓는다. 일본어가 쓰인 호리병과, 사이다 캔, 그리고 어묵꼬치가 담긴 그릇이 올려 져 있다.
“뭐야 이건?”
“왠지 노천탕이라고 하면 일본 생각나서. 그래서 준비해왔지. 뜨거운 사케에 어묵탕입니다. 대표님.”
“아아 그래. 어울리네.”
아영이는 타월 묶는 부위에 다소곳이 손을 대고 탕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잔에다가 사케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래서 13억불가지고 뭘 할 거야 이제?”
나는 그녀에게서 잔을 받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13억불 아냐. 13억8천만불이야.”
나는 반대로 사이다 캔을 따서 그녀의 잔에다가 사이다를 따라주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그렇게 숫자가 커져도 구별이 가나봐?”
“그럼. 8천만 달러면 천억 원인걸.”
나와 아영이는 야외 노천탕에서 서로 잔을 부딪친 다음 들어있는 사케를 원샷했다. 뜨거운 불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나는 그 불같은 기운을 내뱉으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제 오후, 나는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가 가지고 있는 현영제약 지분을 화이자에 13억8천 달러에 매각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처음 온 제의는 13억 5천만불 14억 5천만으로 불러봤다가, 미래에 ‘결렬’이라고 나오기에 14억으로 불러봤더니 13억8천만에 다시 제의가 왔다. 나는 거기서 더 끌지 않고 매각 결정을 내렸다.
첫째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고, 둘째 이제 현금으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았다. 결과적으로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는 텐센트에게 카이게임즈를 매각하고 받은 돈 2조원에 이어서 화이자로부터 1.5조원에 달하는 거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총 3.5조원. 이정도면 다음에 있을 전투에서 쓸 탄약은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영이는 내게 오뎅 꼬치를 건네며 말했다.
“그래서 13억8천만 불로 이제 뭘 할 건데?”
“글쎄... 다른 곳에 투자 해야겠지.”
“음 또 투자야?”
“그럼. 돈이란 건 가만히 있으면 썩기 마련이거든.”
부자에게 가장 큰 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세금, 둘째는 인플레이션. 세금은 들어올 때 많이 나가지만, 가만히 있을 때 나가는 비용이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가만히 있어도 돈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자들은 절대로 현금을 많이 오래 가지고 있지 않는다. 대부분 빚을 지더라도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에 투자한다. 나가는 이자보다, 자산 가치 상승분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영이는 내게 물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벌어서 뭐할건데?”
단순하지만 꽤나 본질적인 질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첫째 목표는 한국에서 제일 부자가 될 거야. 그래야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지 않겠어? 일단 거기까지는 달려나갈 생각이야. 그 다음은 그 때 생각하고.”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살짝 지난 번, 가든 로얄의 모임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정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음. 그래 좋아. 이번엔 뭘 살 건데?”
“음... 이번에는 뭘 산다기 보단... 팔 생각이야.”
“판다고?”
“응. 금융 상품 중에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파는 것도 있어. 먼저 팔고 나중에 사서 갚는.”
“으음 그래? 그게... 공매도 라는 건가? 아쉽네. 사는 거면 나도 따라서 사볼까 했는데.”
하여간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그 이야기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서. 투자라는 게 누구 따라한다고 돈 벌 수 있는 게 아니야. 잠깐은 벌 수 있어도 나중에는 결국 잃게 될 걸. 아가씨는 다음 달에 우리 집 갈 준비나 잘 하셔요. 그게 제일 좋은 투자니까.”
아영이는 비어있는 내 잔에 다시 사케를 따라주며 말했다.
“흐음 알았어.”
그 사이 나는 그녀가 해다 준 오뎅을 하나 씹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더 맛있다.
“와 이거 맛있네?”
“그치? 맛있지?”
요리학원 반년 차. 아영이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미술을 전공한 게 손재주에 도움이 됐는지, 이쪽에 나름 소질이 있었다.
“응 이거 우리 부모님한테 해주면 바로 합격 받겠다. 요리 솜씨 좋다고.”
“그러시려나?”
“응.”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나저러나 부모님은 이제 내 말이라면 거의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건물 크게 하나 사드리고 노후 보장까지 완벽하게 해놓아서 아들 말이라면
‘그래 그렇게 하렴.’
보통 그렇게 흘러갔다. 물론 며느리 감 맞이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긴 했지만, 두 분도 아영이를 보면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든다. 요새 아영이는 내게 정말정말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부모님 눈이라면 분명 그것을 캐치하실 것이다. 아영이는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그럼 내려갈 때 반찬 몇 개라도 해 가볼까? 드셔보시라고?”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우리 부모님은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도 사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 애정이 담겨 있지 않다나... 그래서 며느리가 직접 이렇게 밥이란 반찬 해주는 걸 보시면...”
그런데 그 때였다.
‘띠리리~’
용머리 뒤편에 놓았던 내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걸 들어보았다. ‘장 부사장’ 통화 버튼을 눌러보니, 장 부사장이 헐레벌떡 소리를 쳤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 일? 무슨 큰 일?’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큰일이 날 일은 없었다. 진짜 큰일이었으면 내가 이미 알았을 것이다. 미래뉴스를 통해서.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장 부사장님 무슨 일이신데요?”
“아... 아마존에서, 아마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퓨쳐싱크를 인수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아... 그거로군.’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다음.
“정말요? 아마존에서요?”
라고 소리를 쳤다. 하여간 평범한 척 하기가 제일 힘들다. 내가 놀란 듯 맞장구를 쳐주자 장 부사장은 더더욱 흥분을 해 말했다.
“지난 번 실리콘밸리 컨퍼런스에서 아마존 내 상급 임원이 퓨쳐싱크의 기술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흥정을 하기 위해서 아마존 M&A팀이 곧 한국으로 넘어올 거라고 합니다.”
나는 노천탕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아 그래요?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이제 곧 팔려고 했는데.”
나는 이번에는 더 질질 끌지 않고 바로 매각 절차를 밟기로 했다. 이제 2020년에서 2021년으로 해가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그러면 저희 측에서도 바로 M&A 협상팀 준비해보겠습니다.”
“네. 부사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나는 휴대폰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영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나는 한 손으로 아영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찰랑거리는 사케 잔을 들며 말했다.
“다 좋게 풀리고 있다는 말이야.”
“흐음. 오빠는 정말 지는 적이 없네?”
“그렇게 이름을 지어놨잖아. 인빅투스. 불패라고 나는.”
그러면서, 나는 두 번째 사케 잔을 들이켰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불을 뿜는 용이 승천을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