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이상하게 훌륭한
‘띠리리리’
휴대폰이 울린다. 나는 바지를 뒤져 내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전화를 건 것은 장 부사장이다.
“사장님.”
“네 부사장님.”
“블루E&M 안용균 대표가 방금 전 사의를 표해왔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초야로 돌아가겠답니다.”
“...그렇군요.”
결국 안용균 대표는 스스로 회사를 나가기로 한 모양이다. 늦었지만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다. 버텨봐야 의미가 없다. 지분이라도 쥐고 있었다면 이사들 설득하고 투자자들 설득해서 어떻게, 어떻게 반항이라도 해봤을 테지만, 지분 2% 쥔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네. 그런데 이상하군요.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다니...”
안용균 사장의 사정은 장 부사장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와 안용균 사장, 그리고 이걸 기획한 탁준기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풍문이 있긴 했습니다.”
“무슨 풍문이요?”
“그 안용균 사장이 저희한테 투자 받은 것을 후회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어째서요?”
“그 때, 안용균 사장 저희한테 투자받을 때 지분 절반 75억원 치를 저희한테 팔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게 두 배로 올랐으니... 본인 스스로는 아쉽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그게 지금은 150억이니까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애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한테 투자를 요청해놓고... 그랬단 말입니까?”
그 때는 돈이 없어서 벌벌 기어놓고, 이제 와서 회사가 잘 나가니까
‘그 때 안 팔았으면 지금 지분가치가 두 배 일텐데...’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물에서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격이다. 장 부사장은 신중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입니다. 사장님.”
“그러게 말입니다.”
방금 전까지 ‘장 부사장님도 진짜 그만둔 이유는 모르는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가 더 핵심적인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돈. 어쩌면 탁준기와 손을 잡은 게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블루E&M은 내가 인수한 뒤 2배로 주가가 뛰어서 최근 들어 횡보하고 있었으니까. 본인은
‘이건 제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런 말을 하곤 했지만 결국
‘지분이 낮아진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키지.’
그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래서 주식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고.
‘흠... 그런 것이었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 부사장이 내게 말해왔다.
“그러면 차기 CEO는 누구로 임명할까요. 사장님?”
차기 CEO. 나는 잠시 그 김정균이란 부사장을 떠올렸다. 전황이 바뀌는 것을 보고
‘저는 대표님 의견을 지지합니다.’
빠르게 내게 전화를 걸었던 그 사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바로 CEO자리를 줄 수는 없다. 안용균 사장 건을 통해 나도 느낀 바가 있다. 사람은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일단 부사장 대행 체제로 가는 것으로 하되... 이사회 열어서 대화도 나눠보고 천천히 뽑아보지요.”
“네 그러면... 이사들 명단이라도 추려서 보내드릴까요?”
“네 그리고 혹시 외부에서 괜찮은 사람 있으면 그것도 알아봐 주세요. 유러피안TV나 유투브 쪽에 경험 있으신 분으로.”
“네 사장님.”
장 부사장과 통화를 나누는 사이, 서 비서가 모는 차는 목적지. 국립중앙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서 비서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응 30분 정도 걸릴 거야.”
“네 사장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섰다. 장근이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는다. 나는 장근이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부터 보는 것 듣는 것 모두... 비밀이야.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사장님. 그건 경호원으로서 기본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녀석이 나의 경호원이라서 믿는 게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도장 동생이었고, 아버지의 제자라서 믿는 것뿐이다. 다른 경호원이었다면 아예 이 곳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몽마르뜨 공원 올라가는 길에 앞서서 그에게 말했다.
“아 참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누굴 만날 건데... 그 사람 봐도 너무 경계하지는 마.”
“어떤 사람 말씀이십니까?”
“키가 너랑 비슷한... 외국인이야. 조금 특이하게 생긴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 아니 이상한 사람은 맞는데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마지마. 그냥 다른 사람이나 신경 써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몽마르뜨 공원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잠시 크로우와의 첫 번재 만남을 떠올렸다. 한참 뜨겁던 7월 말을. 하지만 이제 8월 말이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로 한풀 꺾이고 청록색 일색이던 나무들도 조금씩 색이 바뀌어 있다.
‘이제 곧 가을이로군...’
여름의 끄트머리. 하지만 여름이 끝나기 전 내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탁준기 감옥 보내기’. 나는 공원을 올라가다 말고 잠시, 도로 반대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서울고등검찰청이 보인다. 정치 거물이나 대기업 총수가 잡혀갈 때 9시뉴스에 자주 나오는 바로 그 건물. 탁준기가 저곳에 들락거릴 날도 얼마 머지않았다.
나는 몽마르뜨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지난 번 크로우와 만났던 바로 그 벤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크로우가 나타났다. 다행이도 그 바보 같던 털옷은 벗은 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는 여전히 눈에 띄긴 했다. 그 인종을 알 수 없는 외양도 그랬지만, 행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싶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한 달 간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그 고전적인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이랬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급하게 말했다.
“일어... 일어나세요.”
그러자 크로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하고 일어섰다. 나는 슬쩍 떨어져 있는 장근이 눈치를 보았다. 평소 표정변화가 별로 없는 장근이도 크로우를 보고는 조금 놀란 눈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보였다. 괜찮다는 뜻으로. 그런 다음 크로우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 현대식 인사 있죠? 간단히 목례하는 거.”
“네 대표님.”
“그렇게 인사합니다. 피차.”
“네 대표님.”
“앉으세요.”
나는 손짓으로 벤치를 가리켰다. 크로우는 똑같이 그 자리에 앉는다. 나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조사는 어땠습니까? 잘 됐나요?”
내 물음에, 크로우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그런데 그게 두툼하다. 거의 봉투가 터질 지경. 나는 그걸 뜯어 잠시 열어보았다. 안에는 A4용지가 쌓여 있다. 본래 여기서 바로 내용물을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무리일 것 같다. 이걸 다 읽어보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 같다.
‘유능하긴 유능한 것 같은데...’
영 센스가 요상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일단...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이메일 쓰실 줄 아시죠?”
내 말에 그가 답한다.
“네 물론입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에게 왠지 당연한 것 같지 않아서 물어봤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이렇게 말고 이메일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받는 건 조금... 번거롭기도 하고, 종이 낭비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크로우는 처음으로, 내 요청을 거부했다.
“왜지요?”
“저희는 의뢰인을 직접 만나서 정보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건 룰입니다.”
“아... 그래요? 룰?”
“네. 저희 크로우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룰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마스터크로우께서 정한... 그리고 마스터 크로우께서는 조금 고전적인 수법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정보를 줄 때는 반드시 정보요청자를 직접 만나서 정보를 전해줘야 합니다. 이메일 뿐만 아니라 손으로 쓴 편지를 우편으로 보낸다던가 그런 것 모든 게 일체 불가능하게 되어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그런 점도 정말... 까마귀 같네요.”
내 말에 크로우는 잠시 눈을 내려 깔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지금 깨달았습니다.”
뭐 어찌되었든, 룰이 그렇다니 수긍을 할 수 밖에 없다.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나는 다시 그 보고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양은 많지만 그래도
‘비상건설 주가조작 사건의 개요. P11.’
‘자살한 강주혁 기자의 사정. P132’
이런 식으로 목차가 정리되어 있긴 하다. 필요한 것만 보려면 금방 볼 것이다. 나는 그 문서들을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크로우 씨”
“네 대표님. 이번 달 맡기실 일은 따로 없으신가요?”
“...네 아직 생각해둔 게 없네요.”
그건 그랬다. 막 탁준기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 뭐가 부족한지 알아야 더 시키던가 할텐데, 아직 그런 게 없었다. 이번 보고서를 읽어보고 다시 부르던가 할 것이다.
“이번 달 안으로 꼭 부르겠습니다. 일단 쉬고 계세요.”
“네 대표님.”
나는 그 문서봉투를 들었다. 그런데 그제야, 지난 번 생각이 났다.
‘다음번에는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이야기해야지.’
그래서 나는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하려고 했다.
“아 참.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그런데, 그는 또 어느새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역시 공원 전부에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멀리 서 있는 장근이를 불렀다.
“얘 장근아.”
“네 사장님.”
곧 장근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나랑 같이 있던 남자... 어디로 갔는지 못 봤니?”
“...네. 잠깐 바깥쪽을 경계하느라...”
“음... 그래에...”
역시 사라지는 것 하난 신출귀몰하다. 어찌되었든 됐다.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이미 얻었으니, 뭐 먹고 싶은 게 있는 지는 다음번에 천천히 물어봐도 될 것이다. 어차피 매달 한 번은 꼭 불러서 쓰게 될 테니.
*
집에 돌아온 나는 바로 크로우의 보고서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크로우의 보고서는 놀라운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당연히 프린트된 줄로만 알았던 이 보고서의 글자들은 프린트된 것이 아니라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쓴 것이었다. 글씨들은 정갈했지만 서로 미세하게 조금씩 달랐다. 다 한 글자 한 글자 붓 펜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쓰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뭐야? 이건? 이것도 그 고전적인 룰인가?’
이 방대한 양을 모두 펜으로 썼다니, 타자를 치는 것보다는 몇 배는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참... 말 그대로 기자로군. 고전적 의미의 기자.’
요새 간단한 스포츠 기사 정도는 AI가 쓰는 것에 비하면 이건 완전히 사람의 수작업이다.
‘참 대단해...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리고 둘째는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유능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물어본 것 중에 ‘어떻게 이걸 알았을까.’싶은 내용들도 쓰여 있었다. 그 괴상 쩍은 외모, 행동과 비견하는 괴상한 수준의 정보력이다.
‘고객센터의 말이 맞았군...’
나는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내용만 있으면 탁준기를 지옥에 보내는 건 매우 쉽다. 워낙에 상세하게 범행사실이 적혀 있어서. 탁준기 본인 더러 쓰라고 해도 이렇게 정확하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여간 여러 모로 이상하다니까... 이번 것은 이상하게 훌륭한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 보고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