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에이영
나는 달력 앱을 보았다.
‘ㅇㅅㅇㄹㅁㄴ ㅅㅈ’
이미 여러 번 보면서 암기를 해놓았기 때문에, 딱 보면 안다.
‘알스알루미늄. 수주공시 오케이.’
카이게임즈 인수를 목표로 삼은 뒤, 나는 여느 때보다도 바쁘게 살았다. 놀랍게도, 돈 때문에. 플레티넘, 마스터등급 이후 사실 돈이 문제가 될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엔 조금 마음이 급했다. 그것도 사실 돈 때문이다. 더 돈을 벌고 싶어서. 돈의 마력이란 참 요상하다. 돈 많은 부자도 안달이 나게 만드니까.
‘그러면 5일까지 대신전지 매도하고 다음에 알스알루미늄 사는 걸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사장님. 부사장님입니다.”
“응 들어오시라 그래.”
곧 장 부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손에 캐리어를 든 채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장 부사장은 나대신 상해로 출장을 갔다 오기로 했다. 카이소프트의 모회사인 Zhiyan Limited에 다녀오기 위해. Zhiyan Limited는 한국에 지사가 있긴 하지만, 의사결정권자는 중국 본토에 있었다.
‘카이게임즈 지분을 매입하고 싶습니다.’
는 우리의 말에
‘그럼 중국으로 오세요.’
라는 응답이 왔다. 그래서 장 부사장이 직접 갔다 오기로 한 것이다. 협상을 하자고 했더니 테이블을 깔았다. 그 말은 매각의사가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쪽에서 비싸게 불러도 최대한 합의를 보는 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사장님”
나는 이번 거래가 성사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 쪽도 팔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현명하게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3년 전과 다르게... 그쪽도 한한령에 피해를 입고 있을 테니까요.”
“네 사장님 저도 그 쪽을 중점적으로 파 보겠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한한령이었다. 한한령으로 막힌 분야는 대표적으로 관광업과 게임,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문화 컨텐츠 산업이다. 관광이야 중국인들이 한국 와서 돈 쓰는 거니 막으면 한국 밖에 손해를 볼게 없고. 엔터테인먼트나 게임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와 수입 해다 파는 거니 막으면 손해를 볼 사람은 한국 밖에 없으니까. 얍삽하게 그런 쪽을 집중적으로 때린 것이다.
반면, 반도체나 전자부품과 같은 물품은 그대로 두었다. 왜냐하면 관광이나 문화 컨텐츠 수입은 단순히 한국만 돈을 가져가는 분야인 반면에 반도체나 전자부품 같은 것은 중간재 역할이 커서 그걸 다사 되파는 자신들에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너 나한테 왜 이랬어? 사과해!’
화를 내면서도
‘이건 내가 가져갈게. 하지만 이건 안 돼’
아주 교묘하게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그 과정에서 중국에서도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 문화 컨텐츠 사업에서 한국 기업에 투자한 회사들. Zhiyan Limitied가 그런 케이스다. 한국 게임을 가져다가 중국에 수입해 팔고, 로열티를 주면서 다시 그걸 자신이 가져가려고 한국 회사를 샀는데, 한국 게임 최근 한한령으로 한국 게임 수입이 막혀버린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었어. 그 쪽도 안달이 나 있을 테지.’
그게 내 생각이다. 물론 ‘판타지 워 그라운드’의 잠재력을 보고 조금 더 홀딩을 할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사람들 역시 이게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이 나리란 건 모를 것이다.
‘아마 가격을 조금 더 부르는 수준이겠지.’
그 정도라면, 내가 돈을 더 벌어서 충당하면 그만이다. 나는 ‘판타지 워 그라운드’가 출시될 때까지 최대한 돈을 벌어들이기로 했다. 일단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증자로 카이게임즈를 사고, 나머지 내 돈으로 또 카이게임즈를 더 산다. 이건 초대박 상품이니까. 이번 기회는 내 자산을 천억.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면... 마스터 등급 뚫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돈만 있으면 어차피 인수는 절차의 문제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띠리리리~’
한 번 더 전화기가 울렸다.
“사장님.”
“응”
“주문하신 벤틀리 왔답니다.”
“아... 그래?”
지난번에 OH엔터테인먼트 인수를 한 뒤에 계약했던 벤틀리가 이제 온 모양이다. 옵션 찍는 곳에 모두 체크를 해버려서 4억 가까이 들었는데, 카이게임즈를 사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마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른 건 지른 것이다.
“그럼 퇴근 할 때, 인수하러 가자.”
“네 사장님”
*
나는 내 새 차가 된 벤틀리 벤테이가를 보았다. 살짝 가벼운 느낌의 포르쉐와 다르게 다소 중후한 멋이 있다. 좋긴 좋은데,
‘이거면 카이게임즈 주식을 몇 십만 주 더 샀겠지.’
그런 생각이 조금은 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간 돈 한 푼 못쓰고 살다 죽는다. 딜러는 내게 다가와 굽실대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모델이 워낙에 인기가 좋아서 주문이 밀렸습니다. 사장님”
최저 3억 4천이나 하는 차인데. 주문이 밀려서 이제 왔단다. 역시나 경기가 나쁘다 나쁘다 하는데 그건 서민들한테나 통하는 것 같다. 나는 날개 달린 ‘B’문장이 새겨진 차 키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이거 타고 퇴근 할게. 서 비서도 퇴근해.”
“네 사장님”
나는 새 차. 벤틀리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벤틀리는 확실히 강남에서도 ‘길을 비켜주는’차였다.
‘내가 먼저 갈래.’
서로 기 싸움을 할 상황이면 대개
‘먼저 가시지요.’
같은 응답이 온다.
‘편하군.’
돈이 많다는 게 행복을 뜻하지 않는다지만, 확실한건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는 하다. 길에서든, 집에서든. 돈이 있으면 편하다. 나는 새 차를 타고 우리집 오피스텔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각종 고급차들이 즐비한 우리 오피스텔 주차창에도 벤틀리는 희귀하다. 부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하차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런데
“에이영”
요상한 목소리가 주차장 안에 울려 퍼진다.
‘뭐야?’
하는 순간
“에이영!”
그 목소리가 더 들려온다.
‘에이영이라니? A0?’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키가 큰 금발 여인이 차문을 붙잡고 소리를 치고 있다.
“에이영!”
뭔가 괴상한 상황이다. 나는 그쪽에 다가가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금발 여인은 염색을 한 게 아니었다. 진짜 백인이다. 피부는 하얗고 코는 높고 크고, 전형적인 백인 미녀다. 키는 나보다 살짝 작은데, 다리는 나보다 더 긴 것 같다.
‘무슨 모델인가?’
내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데
“에이영!”
그녀가 한 번 더 소리쳤다. 뭔가 다급한 것 같은 목소리다. 나는 더 가까이 가보았다. 지금보니 그녀는 차문을 잡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보조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라?’
보조석에 있는 사람은 나도 아는 얼굴이다. 집주인. 이아영.
‘아...’
나는 이제 깨달았다.
‘에이영이 아영이었구나.’
아영을 영어로 쓰면 ‘Yi A Yeong’정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이 그걸 발음하면 ‘에이영’정도가 될 것이다. 백인 미녀는 계속해서
“에이영!”
그녀를 흔들며 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의식이 없어보인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그런데, 더 가까이 가보니 술 냄새가 풍겨온다. 종류는 특정지을 수 없지만, 어쨌든 미세한 알콜냄새가 난다.
‘뭐야? 취했어?’
지난번에도 언젠가 낮에 술 먹고 들어오는 걸 본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그렇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발 미녀가 나를 보고는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영어로.
“Can you help me?”
자신은 이아영을 옮길 수 없으니 대신 도와달라는 것 같다.
“Yes Sure”
나는 그녀 가까이 다가가 등을 내주었다. 금발 아가씨는 내가 그녀를 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가 내 등에 업히면서 그녀의 향수냄새, 술 냄새, 긴 머리카락, 그리고 등에,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촉감 등등이 한꺼번에 전해져 온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조금 무거웠지만, 유도로 수없이 남자들을 업치고 다녔던 내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엎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왔다. 금발 아가씨는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의 상승 버튼을 눌렀다.
‘띵~동’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금발 미녀는 내 등에 업힌 이아영에게 영어로 말을 건넸다.
“A Yeong Where is your address?”
하지만 이아영은 완전 인사불성이다. 아예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녀 대신 층 수를 말했다.
“Twelfth floor”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머뭇거린다. 발음이 이상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한국식 주입식 영어교육의 폐해를 그대로 받아서 읽기, 듣기는 준수한 편이지만, 말하기 쓰기는 완전 젬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Twelfth floor’
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전에, 그 백인 미녀는 12층을 눌렀다.
‘뭐야 알아 들었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게 물었다.
“How do you know?”
처음 보는 사람이 지인 주소를 아니까 조금 수상해 보였나보다. 나는 집주인이 그녀고 그녀 옆집에 살고 뭐하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매우 짧게 그리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I’m a neighbor”
“Ah~ okey”
이웃사람이라니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는 이아영을 들쳐 업은 채로 내 집 옆으로, 그녀 집 앞으로 왔다. 그런데 다시 난관이 생겼다. 바로 집 비밀번호. 이건 나도 모른다. 나는 백인 아가씨에게 말했다.
“I don’t know the password.”
“Ah...”
그녀 역시 당황한 모습이다. 집에 데리고는 왔는데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내가
‘일단 우리 집에라도 데려 가야하나?’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백인 미녀가
“Hmmm. Wait a minute”
앞으로 나서더니 문 밖의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525720’
나는 나도 모르게 그걸 봐버렸다. 그런데 비밀번호를 누르고 별표를 누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 오피스텔은 모두다 끝에 별표를 찍어야 되는데...’
아니나다를까
‘띠~디~’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표시음이 나온다. 백인 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Isn’t this it?”
이게 아닌가. 같은 뉘앙스다. 그녀는 다시 한 번
‘525720’
를 찍고 가만히 있었다. 조금 있으면 다시 한번
‘띠~디~’
틀렸다고 나올 판이다. 보다 못한 나는 그녀 대신 별표를 눌러주었다.
‘525720*’
그러자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녀는 놀란 듯 내게 말했다.
“Oh! thank you”
그런데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소는 모르면서 비밀번호는 알아?’
어찌되었든 일단 그녀를 집 안에 데려 가야한다. 나는 이아영을 들쳐 업은 채로 그녀 집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