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인터뷰 (2)
“이리 와.”
“나?”
“그럼, 거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왜?”
“오라면 올 것이지, 말이 많아. 요즘 욕을 안 하니까 토 달기도 하고, 안 되겠어.”
난 지금까지 방송국 아나운서들이면 단아하고 예쁜 말만 쓰고 그런 줄 알았다. 얘가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래, 이리 와봐. 저기 카메라 보고. 나 지금 이시윤한테 까여서 기분 안 좋으니까 알아서 잘해라.”
왜 여기까지 와서 괴롭히니, 왜……. 에이전트 형이 너와의 전화도 못 받게 해서 그간 행복했는데… 왜…….
“이번엔 루다가 화제의 그분. 루다의 남자~ 김소전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미, 미쳤나……. 무슨 멘트가 그래?
“안녕하세요~ 뭐라고 부를까요? 김소전 선수? 이러면 야구 팬분들이 싫어할 거고. 여보? 자기야~ 낭군님? 낭군님 좋다. 낭군님, 루다 안 보고 싶었어요?”
어떡하지? 미국에서 아프면 병원비 많이 나온다고 그랬는데 큰일이다. 나 이제 영어를 떠듬 떠듬은 하지만 병원에서 할 정도는 아닌데… 어쩌지…….
“낭군님~ 대한민국이 우리의 사랑 때문에 발칵 뒤집혔어요~ 해명 좀 해주세요~”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얘는 미쳐도 곱게는 안 미치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이 아이를 어쩔꼬.
혹시 마이애미가 더워서 더위를 먹었나. 아… 그랬을 수도 있다. 한번 보자.
“봤죠~ 봤죠~ 우리 낭군님이 이렇게 자상하십니다. 여러분 여기 루다 이마에 손 보이시죠?”
열이라도 나는지 확인하려고 루다의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 이 정신 나간 것은 내 친절은 어디다 던져버리고 카메라를 보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아프냐?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래?”
하도 어이가 없어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반말이 튀어나온다.
“여러분 보셨죠? 우리 낭군님이 이렇게 친절해요. 루다 아픈지도 물어봐 주고, 뭐 잘못 먹었는지도 물어봐 주고 이렇게 친절한 사람입니다. 아셨죠~ 여러분~”
큰일이다. 이건… 답도 없다.
“한 달 만에 나타나서 뭔 헛소리야? 취직하더니 일 많아서 정신이 나갔어? 왜 이래?”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을 깜빡거리면 역겨운 표정을 짓는 루다. 너… 왜 이러냐?
“사실은 말이야. 이제서야 고백하려고 해. 보통은 남자가 먼저 하는 건데. 나는 내가 먼저 하려고. 너를 위해 준비했어. 이거 받아.”
뭐, 뭐냐……. 저것이 뭔 닭살 돋는 멘트를 하면서 작은 상자를 내민다. 얼떨결에 받긴 했는데… 상자에서 두려운 기운이 뻗쳐 나온다.
“뭐, 뭐냐? 이상자는?”
“열어봐.”
“뭐냐고.”
“반지. 오늘부터 우리 1일~”
나도 모르게 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냅다 집어 던졌다. 좀 과하게 던져지긴 했지만, 이게 무슨……. 이것이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떨어진 상자를 집어 드는 루다. 상자를 들어 올린 루다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보셨죠? 여러분, 저 지금 차였어요. 누구야? 루다랑 김소전이랑 사귄다고 한 거 누구야~ 나오세요~ 아~ 자존심 상하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앞뒤 설명이라도 해주고 뭘 해야지.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김소전 선수, 뉴스 안 봐요? 루다하고 열애설 난 거 몰라요?”
“엑~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어떤 XX가 남의 혼삿길을 막는 거야!”
앗… XX.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카메라 돌아가는데 자중했어야 하는데 하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니까 놀래서… 조심이 안 됐다.
“아… 진짜 너무하네. 저 지금 차인 거 맞죠? 여러분~ 루다가 김소전 한테 차였어요~”
너무한 건 네가 너무한 거지. 어떤 놈이 헛소문을 퍼트렸는지 잡으면 손가락을 분질러버린다.
“김소전 선수. 루다의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건 받으세요.”
오늘따라 감정 기복이 더 큰 루다가 아까 내가 내던진 상자를 다시 내민다.
“반지라며?”
“받으라고요.”
“받으면 오늘부터 1일이라며?”
루다가 다시 카메라를 보며 한탄을 한다.
“여러분~ 루다가 이런 취급을 받습니다. 이거 어째야 할까요?”
어쩌긴 어째. 나 좀 놔두고 그냥 가라. 왜 여기까지 와서 괴롭혀.
“상자 좀 열어보세요.”
“왜. 너 내 스타일 아니야.”
“하하. 오늘 카메라 꺼버리고 싶네요. 김소전 선수 마음 다 알았으니까 상자 좀 열어주면 안 될까요?”
“왜?”
“열기만 해! 좀 열기만 하라고!”
급기야 화를 내는 루다. 한마디 더 했다간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아 눈물을 삼키며 상자를 열었다……. 루다를 닮은 아이는… 안 되는데…….
“랩터스 구단주님이 주시는 특별 우승 반지입니다. 김소전 선수의 반지를 루다가 직접 가져왔는데…….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자 안에 2027 우승이 쓰여 있는 반지가 곱게 들어 있다. 그 반지를 보니 지난 시즌이 하나하나 머리에서 흘러 지나간다.
벌써 두 번이나 했지만 또 하고 싶어진다. 다음 시즌에도 이 좋은 팀원들이랑 똘똘 뭉쳐서 다시 한번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어진다.
이 반지… 마법의 반지로구나. 내가 야구를 열심히 하게 해주는 마법의 반지
“와… 오늘 루다가 여러 번 자존심 상해요. 여러분 김소전 선수가 반지 보는 거 보이시나요? 아까 루다를 바라보던 눈빛하고 비교 한번 해볼까요? 비교되죠? 해도 너무 하지 않습니까?”
나만의 세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앞에서 이상한 것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집중하게 못 하게 방해를 한다.
반지 줬으면 이제 좀 가지…….
“김소전 선수, 우승 반지가 그렇게 좋아요?”
“좋아요. 좋지. 이거 보고 있으면 지난 시즌이 다 생각이 나거든. 개막전 첫 타석부터 한국 시리즈 마지막까지 다 생각이 나. 어린이날 나랑 캐치볼 했던 랩린이도 생각나고 소닉스에 홈런 치니까 눈물 흘리던 아저씨도 생각나고, 너무 좋아.”
반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포기를 모르는 루다가 또다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자, 이제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우승 반지와 이루다. 둘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반지.”
“와~ 1초라도 생각은 하고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생각을 왜?
“너무 고민할 게 없는 문제라서요. 그런데 너 오늘 왜 이러니? 진짜 어디 아파?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너 내 스타일이 아니야.”
이제는 카메라 앞으로 뛰어가는 루다. 루다가 참지 못하고 샤우팅을 질러댄다.
“자! 자 보셨죠? 몰랐는데 김소전 선수 나쁜 남자예요. 지금 확인 사살하는 것도 보셨죠? 아, 자존심 상해. 이런 경우 처음이에요.”
저렇게 카메라에 얼굴 들이밀면 화면에 이만하게 나오는 거 아닌가? 쟤는 얼굴이 작으니까 괜찮은가? 아무리 봐도 저 카메라 꺼지면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저걸 영정 사진으로 써도 되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루다가 지금부터 선언하겠습니다. 김소전 선수가 루다를 받아줄 때까지 루다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겠어요. 열애설이 사실이 되게 만들고 말겠습니다~ 여러분~”
미, 미쳤다……. 아까까지는 티 안 나게 미쳤다면……. 지금은 확실히 정신이 나갔다. 119… 아니지, 여기는 911 불러야 하는데……. 나 영어를 못하는데 어쩌지?
“다시 한번 알려드릴게요. 기자님들, 정정 기사 써주세요. 루다와 김소전이 열애가 아니라 루다가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겁니다, 기자님들~”
루, 루다야……. 네 혼삿길이 막히는 건 내가 알 바 아니다만… 왜 나까지 끌고 들어 가냐…….
“하지만! 루다를 사랑하는 야구 팬 여러분~ 김소전의 마수에 걸린 루다를 구하기 위해 와주신다면 루다의 사랑이 바뀔지도 몰라요~ 김소전 선수보다 잘생겼거나 야구 잘하는 용사님이 계신다면 루다를 구하러 와주세요~”
방송국은 얘를 왜 뽑았을까? 뽑고 싶어서 뽑은 걸까? 아니면 방송국을 망하게 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얘를 집어넣은 것일까……. 방송국 하나 없어지면 야구 전 경기 중계에 문제가 생기는데 어쩌지…….
“낭군님~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낭군님의 폐관 수련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그… 이상한 호칭 좀 빼면 안 될까요?”
“왜요? 좀 설레요? 루다한테 막 설레요?”
“아니! 아니라고!”
또다시 카메라로 달려가는 루다. 이쯤 되니 루다가 참 안쓰럽다. 점점 느끼는 건데… 쟤 미친 게 아니라 타고난 관종이 인기 좀 얻어보려고 무리수 두는 것 같다. 돈도 많은 게 먹고살려고 노력 많이 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시윤 선수와의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상을 쉽게만 살아 성격이 상종을 못 할 천방지축이지만 머리 자체는 나쁘지 않고 야구를 보는 눈도 어지간한 해설자보다 훨씬 뛰어난 루다가 시윤이 형의 훈련 상황을 집요하게 물어본다.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도 웨이트하고 라이브 피칭한 게 대부분인지라 딱히 해줄 말이 없다.
그런데도 오늘 이후 후환이 두려우니 최대한 자세히 말해 준다.
“그럼 김소전 선수가 이시윤 선수의 공을 담장 밖으로도 넘겼다는 이야기네요.”
“그렇긴 한데, 몇 개 안 됩니다. 대부분 외야 뜬공이에요. 전 아직 멀었습니다.”
“와, 여러분 보셨죠. 이게 우리 낭군님입니다. 존 안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공을 외야로 띄우는 선순데 겸손하기까지 해요.”
이제 포기다. 답이 없다, 답이. 얘랑만 있으면 진이 쭉쭉 빠진다.
이시윤으로부터 시작됐던 이야기가 차츰차츰 내 이야기로 옮겨온다.
“지난 시즌 초반이 아쉬웠어요. 초반에 성적이 조금만 더 나와줬으면 3할 30홈런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게 아쉽습니다. 타율 1푼, 홈런 1개가 실제 생산성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록이라는 게 영원히 남는 것인데 못해서 아쉽습니다. 다음 시즌엔 꼭 3할 30홈런 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혼자 들떠 원맨쇼를 펼치면서 내 이야기를 끌어내던 루다의 목소리가 살짝 바뀐다.
“지난 시즌 신인왕을 탄 김소전 선수의 연봉이 9천9백만 원이었습니다. 아시죠?”
그걸 모르겠냐? 내 연봉인데?
“알고 있습니다.”
“올해는 얼마나 예상하세요?”
그래도 올해 지난 시즌보다 타율도 오르고 홈런도 10개나 더 쳤는데…. 많이 주지 않겠냐?
“많이 받았으면 좋겠지만 연봉에 관해서는 에이전트에게 모두 위임했습니다. 저보다 제 가치를 더 완벽히 파악하시는 분들이니 적당한 금액을 받을 거라 확신합니다.”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에 살짝 스쳐 지나간 미소. 너 무슨 꿍꿍이냐?
“에이전트. 말 나온 김에 에이전트사 얘기 좀 해볼까요?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 에이전트인 박현민 대표께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셨어요.”
뭐, 뭐냐, 불안하게……. 현민이 형은 구단주 형보다 더 불안한데…….
“FA 때 팀을 떠날 수도 있다고 말했었는데 사실인가요? 선수랑 협의된 사항인가요?”
시상식에서 뭔 FA 이야기를 해. 아직 FA 하려면 몇 년이 남았는데…….
“연봉 협상은 전부 에이전트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전 랩터스가 좋습니다. 리그에 다른 훌륭한 팀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팀을 이긴 랩터스입니다. 랩터스에서 오래 야구 경기를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FA 돼서 10억, 아니 5억… 아니지, 그땐 애들도 크니까 천만 원 더 줘도 더 주는 데서 야구 해야지.
* * *
리그에 비활동 기간이 시작되는 날 신문에 당혹스러운 기사가 올라왔다.
[랩터스 김소전, 이적하고 싶다]
풀리지 않는 외부 FA 문제를 싸 들고 있는 랩터스의 단장이 출근하자마자 기사를 써 재끼고 있는 기래기님의 대뇌 망상을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