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비밀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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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할 때 훈련 파트너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 크다. 그리고 그 파트너가 누구냐에 따라 얻는 성과는 덧붙여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시즌 시작할 때부터 노예 삼아 데리고 다니던 덩치만 크고 똥볼을 밀어서 던지는 멍청이 외야수. 심지어 BQ도 떨어져서 실전처럼 허를 찌르는 볼 배합 따위는 할 수도 없는 멍청이를 버리고 양키스에 4년간 4,800만 불 계약한 초특급 에이스와 개인 훈련을 시작하니 신세계가 열린다.
“선배님. 이제 겨울 시작인데 벌써부터 라이브 피칭이면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요?”
몸쪽 직구, 바깥쪽 체인지업, 그다음에 다시 짧게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하고는 억울해서 마운드에 있는 선배에게 물었다.
“라이브? 이게? 지금 몸 풀고 있잖아. 나는 제구가 안 좋아서 1년 365일 공을 손에 잡고 있어야 해. 마음 같아서는 지금부터 전력으로 던지고 싶은데 구단에서 참으라고 해서 참고 있는 거야.”
이게 참고 있는 거라고? 공이 무슨 바윗덩이처럼 날아오는데, 참고 있는 거라고? 안 참으면 포수 미트 찢어버리겠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지옥이다. 투수의 등 뒤에서 공을 보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 공을 상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타석에서 보니 공포 그 자체다.
기본적으로 150 후반의 빠른 볼을 주무기로 던지는 우완 정통파 투수. 탄탄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칠 테면 쳐보라고 때려 박는 보기만 해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친 듯한 회전이 걸린 공이 제멋대로 들어온다.
직구라고 알고 배트에 시동을 걸다가도 마운드 위 미친 X의 정교함 따위는 약 팔아먹은 와일드한 투구 폼을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츠러든다.
멍청하게 초구를 흘려보내고 난 뒤 배트로 머리를 때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절대 쫄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음 직구를 때려내려고 배트를 내밀면 내 눈앞까지 다가왔던 공이 배트 앞에서 가라앉으며 바깥으로 도망간다.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디셉션이라고 하는 숨김 동작이 좋은 투수들은 똑같은 폼으로 똑같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다양한 공을 던져서 타자를 속이는 게 정석이거늘……. 저 미친X은 너무나도 과격한 폼 때문에 던지는 모든 공의 릴리스 포인트가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직구와 변화구 메커니즘 차이로 인한 구종별 경향이라는 게 있어야 마땅하거늘, 워낙에 제 X대로 던지는 놈이라 그런 것도 없다. 그냥 던지는 순간까지 뭘 던지는지 알 수가 없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하나의 공이 더 남아 있다. 사람이라면 저런 XX 맞은 공을 여러 개 던질 수는 없는 법. 투수를 노려보고 관심법으로 양자택일을 하고는 타격에 들어간다.
나를 동네 똥개만도 못하게 보는 투수 놈. 타자가 그렇게 만만할 때는 직구를 던지는 법. 너는 무조건 실투를 한가운데 던질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고는 공을 기다린다.
세게 던지기 위해서 몸을 뒤로 확 젖혔다가 넘어오는 상체. 이런 유형의 투수가 한둘도 아니고 적응을 못 할 투구 폼도 아닌데 뒤로 넘어갔던 팔이 탑 포지션에 올라왔을 때 높이가 아까랑 조금 또 다르다.
보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투구 폼. 어찌 저딴 자세로 리그를 씹어 드셨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지금은 들어오는 공을 때려야 한다.
바깥쪽 아웃 코스에서 좌타자 몸쪽으로 빨랫줄처럼 날아드는 공. 몸쪽으로 쏠리긴 했지만 분명 존 안에서 움직이는 공을 못 때리면 안 된다.
저 좋은 공은 분명 떠오를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날아오는 공 궤도에 맞춰 배트를 던진다.
붕!
공이 사라졌다.
“야! 너 나 무시하냐? 제대로 안 해?”
뭐라고 제대로 안 하냐고? 지금 공이 사라졌는데?
“이건 무슨 공인가요? 공이 오다 사라졌습니다.”
“슬라이더잖아. 미국 가면 커터를 던져야 한다고 그래서 슬라이더를 비슷하게 만들어봤다. 아직 어설픈 거 아니까 괜히 속아주는 척하지 말고 제대로 해.”
머리가 복잡해진다. 저놈의 무기는 150이 넘는 떠오르는 직구, 130대의 각도 큰 12 to 6 커브, 140 초반의 휘어 나가는 슬라이더, 120대의 역방향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인데……. 이것만 해도 타자의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그것도 모자라 140 후반의 짧게 떨어지는 종 방향 슬라이더를 추가시켰다.
그래. 이런 건 빨리 큰 무대로 나가야지. KBO에 있는 건 재능 낭비다. 진짜 재능 낭비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다시 던져주십시오, 선배님.”
“그래! 네가 제대로 좀 해봐. 이 공 하나 넘기면 내가 호형호제를 허락해 주마.”
호형호제? 나 너 같은 미친 X이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라이브 배팅. 다음 시즌 양키스의 4선발이 대충 스트라이크 존을 4분할해서 공을 던진다. 공 하나하나가 포수의 미트를 찢을 듯 강력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종종 한가운데 몰리는 공도 들어온다는 것이지만 비슷한 확률로 타자의 머리를 향해서도 들어오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공을 적극적으로 노릴 수도 없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 투수한테 슈퍼스타병 들어 대충대충 야구 한다는 욕을 먹어가면서 배트를 돌리고 또 돌린다.
포스팅으로 미국 진출한 투수가 MLB 적응의 부담감을 떨쳐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상대에게 전력을 다한다.
영문도 모른 채 집에도 못 가고 미국으로 끌려온 어린 선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양키스 4선발의 노예가 되어 투수의 마지막 불안 요소를 파헤친다. 남들과는 다른 시계를 돌리는 두 개의 야구 재능이 세상에 지금껏 보인 적이 없는 재능을 터트리려고 한다.
“저 둘 대단하네요. 투수야 이번에 양키스랑 계약하면서 분석을 좀 했는데 타자도 대단합니다. 코치님이 대단한 선수를 키워내셨네요.”
“선수랑 합이 잘 맞았습니다.”
훈련장 뒤편에서 어딘지 모르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두 사람이 선수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눴다.
한 명은 LA에서 타자를 봐주기 위해 날아온 더그 라타 코치, 다른 한 명은 시애틀에서 투수를 봐주기 위해서 날아온 캐일 버디라는 피칭 디렉터.
최신 과학이 총동원된 장비를 사용해서 선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서로 간의 승부에 빠져서 야수성을 뿜어내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저 선수가 4,800만이라는 게 믿기지 않네요. 저 공이 시즌 베스트라고 해도 사이영 컨텐더예요.”
“동의합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는 하는데 저 타자는 저 공을 어떻게 치고 있는 겁니까? 저 선수는 왜 빅리그 진출을 안 하는 겁니까?”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당장 빅리그에 가져다 놔도 최고의 타자가 될 기량인데 KBO에서의 성적은 신통치 않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런 선수가 성적이 신통치가 않다니요. 코치님의 기준이 너무 높으신 거 아닙니까?”
타자를 지도했던 코치가 리그 성적이 안 좋다고 이야기를 하자 전혀 믿지 못하는 피칭 디렉터가 의문을 제시한다.
“그러게요. 믿을 수가 없지만 저 선수, 리그에서 3할도 못 칩니다. 저 선수의 성적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KBO 리그를 잘못 판단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3할이요? 98마일 패스트볼을 치다가 75마일 체인지업을 커트하는 선수가 3할을 못 친다고요? 지금 보셨습니까? 93마일 슬라이더를 잡아당겨서 2루수 뒤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리그에 82마일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가 14승을 했다는 리근데 저 선수가 3할을 못 친다고 하니까요.”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처음 들은 피칭 디렉터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자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코치가 듣기 편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도 버디는 여기에 맞춰서 디렉팅해 주면 되지 않아요? 난 저 타자가 그 무서운 KBO에서 3할에 30홈런을 치게 만들어야 한단 말이오. 나 보면서 용기를 가지세요.”
라타 코치의 말에 용기를 얻은 디렉터가 경험 많은 라타 코치와 함께 한국에서 온 무서운 선수들을 다시 한번 정밀하게 살핀다. 그렇게 관찰된 정보를 가지고 선수들에게 다가가 선수들의 훈련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둘만의 훈련이 진행되다 두 선수 공통의 에이전트 회사에서 붙여준 전문가가 투입되어 훈련이 진행되니 거칠었던 훈련이 세련되어지고 효율이 올라간다.
투수의 성향을 고려한 피칭 디자인이 완성되어 가는 동안 타자의 레그킥도 앞으로 차는 동작을 수정하여 한 동작 안에서 다양한 구속을 때려낼 수 있게 바뀌어 간다.
KBO 최고의 재능 둘에 미국 최고의 재야 고수 둘이 합심하여 만들어가는 비밀 과외 수업.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선수들이 휴식일도 없이 훈련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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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문 훈련장에서 시간과 분을 쪼개가며 훈련을 하던 어느 날. 관계자 외엔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던 훈련장의 문이 열린다.
마이애미의 뜨거운 햇살을 등지고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짜고짜 선수들에게 향한다.
“안녕하세요~ 루다의 스프링 캠프의 이루다입니다. 여기는 KBO 최초로 메이저 리그 최고 명문 구단 양키스로 진출한 이시윤 선수가 훈련하고 있는 마이애미의 훈련장입니다. 뜨거운 날씨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시윤 선수가 보이는데요. 루다가 가서 인사를 나눠볼까요?”
라타 코치님한테 내 자세를 분석 당하는 것도 모자라 피칭 디렉터라는 사람까지 나타나 나를 분해하는 바람에 신경이 예민한데 어디서 이상한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온다.
벌떼 중에 한가운데 키 크고 늘씬하면서 머리 긴…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불길한 기운이 이쪽으로 돌진해서 온다.
무서운 기운. 피해야 하는데… 늦었다.
“이시윤 선수~ SBC의 아프로디테~ 루다예요~ 정든 KBO를 떠나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게 되셨는데요~ 이시윤 선수를 못 봐 아쉬워하는 팬들께 한 말씀 해주실까요~”
저 눈치 없는 것……. 시윤이 형, 오늘 오전에 나한테 홈런 한 방 맞고 기분이 정말 안 좋은데… 하필 이 타이밍에 허가도 안 받고 인터뷰를…….
못생겼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딱하다.
“구단과 협의되지 않은 인터뷰는 안 합니다.”
역시! 그 정도 돼야 메이저리거지. 그럼. 그럼 구단과 협의되지 않은 인터뷰를 막 하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루다가 너무 팬이라 무작정 뛰어왔어요. 그러지 말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허락받고 오세요.”
얼쑤~ 잘한다.
“저 여기까지 왔는데 팬들께 한마디만 해주시면 안 돼요? 한마디만 해주시면 여기서 끝. 나머지는 쟤로 분량 채울게요~”
어디서 눈을 깜빡이면서 혀짧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건 예쁜 애들이 해야 먹히는 거야.
“항상 응원해 주시는 팬 여러분께 감사하고 메이저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뭐, 뭐야? 저 형… 넘어간 거야?
“끝? 끝인가요?”
“끝.”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투수. 투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이에나가 한껏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