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97화 (97/204)
  • 97화. 주장선출

    루다의 술주정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진짜 계약서가 돼서 나타났다.

    영어로 쓰여 있어서 뭐가 뭔지도 몰랐던 지난날의 계약과는 달리 한글로 깨끗하게 쓰여 있는 선수 대리인 계약. 이번엔 뒷장에 뒷장에 뒷장까지 꼼꼼히 보면서 묻고 또 묻는다.

    “나 계약 기간이 1년이야?”

    “어. 1년마다 갱신해야 해.”

    “그럼 전세 계약처럼 자동으로 연장돼?”

    “아니, 매년 계약해야 해.”

    “수수료가 5%? 내 연봉이 9천9백이니까 얼마냐……. 5백? 5백만 원 받자고 나랑 계약해?”

    “이번엔 더 받아야지.”

    “얼마나?”

    “최대한 많이.”

    “그게 얼만데?”

    “흐흐흐, 대표님이 4억 밑으로는 도장 안 찍으신다고 하셨어.”

    아… 에이전트 형……. 술 취해서 헛소리하는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어. 구단주 형이랑 친구일 때부터 알긴 했지만 정상인은 아니야. 어쩌다 수영이가 저 이상한 사람들하고 엮여서…….

    “가능하냐? 구단이 연봉 그렇게 쉽게 안 올려줘. 내가 구단에서 예쁨받는 선수도 아니고 그러다 괜히 찍힌다.”

    진짜 걱정이 돼서 물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회사, 동네 매니지먼 트회사 아니다. 메이저에서도 잘나가는 회사야.”

    믿어도 되나? 구단주 형이나 에이전트 형… 예술 영화 보는 안목은 인정하지만, 그거 빼면 사회 잉여들인데…….

    “진짜 괜찮은 회사 맞냐?”

    “진짜야. 나 미국 연수도 다녀오고 임수검이랑 밥도 먹었어. LA에서 임수검은 신이다 신. 그런 선수를 케어하는 회사야. 믿어.”

    임수검이 잘하는 건 아는데… 그건 임수검이고…….

    “그래도 나 너희 사장님에 대한 믿음이 별로 안 생기는데…….”

    “믿어봐. 너 어차피 이번에도 주는 대로 받을 생각 아니었어? 이번에 한번 해보고 맘에 안 들면 내년엔 계약 안 해도 되잖아. 나 보고 믿어봐.”

    막 믿음이 생기고 그러진 않지만, 어차피 올해까지는 주는 대로 받으려고 했었는데……. 수영이 얼굴 봐서 도장 한번 찍어준다.

    “자, 이제 나 너희 회사 소속 선수냐?”

    “아이고, 김소전 선수님. 계약하셨으니 식사하러 가시죠. 법인카드 받아놨습니다.”

    음… 좋군. 아주 좋아. 법인카드로 저녁이라. 기회다! 오늘은 소고기닷!

    * * *

    한국 시리즈 끝난 지 3일 만에 매니저 형한테 전화가 온다. 내일부터 고척으로 출근을 하란다. 시즌 끝나고 한국 시리즈도 끝났는데……. 내 시즌은 도무지 끝날 생각을 안 하는구나.

    날이 바뀌고 봉천에서 경준이를 기다렸다 고척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한다. 2호선 타고 가다 신도림에서 환승하는 사람 구경하기 딱 좋은 노선.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경준이와 앞으로의 각오를 다진다.

    “형. 대표팀은 달라요? 국가 대표면 지원도 빵빵하고 그런 거죠? 밥은 맛있게 나오겠죠? 형…….”

    지하철에선 귀에 뭐 하나 꽂고 문 옆에 기대서 눈감고 가는 게 국룰인데……. 이 시골 출신 촌놈은 매너 없이 지하철에서 쉬지도 않고 입을 놀린다.

    “경준아……. 지원 같은 거 없다. 그냥 가서 하는 거야. 나 봐라. 국대 가서 다쳐와도 딱 병원비 주더라. 심지어 성형비는 빼고 줬어.”

    “아… 맞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만 좀 궁금해해라. 넌 무슨 일 년 내내 궁금한 게 그렇게 많아.

    “형 성형했다는데 어디를 성형한 거예요?”

    “나? 여기. 이쪽 광대. 여기가 너무 주저앉아서 의사 샘이 올리면서 왼쪽이랑 완벽하게 균형을 맞춰줬어. 어때? 똑같지? 완벽한 좌우 대칭이다.”

    나를 한참 바라보는 경준이. 그래. 그 심정 알지. 너도 이런 데칼코마니에 빠져들 줄 알았다.

    “형… 진짜 대단해요. 좌우 완벽하게 못생겼어요. 이럴 수도 있구나……. 와…….”

    “하… 내리자.”

    순간 매라는 이름의 정의를 실행하고 싶었지만, 절대적 미의 기준을 모르는 멍청이에게 매도 아까워 참았다. 절대 징계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이제 제법 찬 바람이 부는 날씨지만 고척의 돔구장은 포근하다. 반쪽짜리니, 뭐니 해도 따뜻한 실내에서 야구를 한다는 것만으로 축복이다.

    여기서 뛰는 선수들은 뜨거운 여름에도 에어컨 맞으면서 홈경기를 뛰는데……. 그러니 성적이 좋지. 잠실도 뚜껑 덮어줬으면 좋겠다.

    하나둘씩 도착하는 선수들. 운동장에서 인사하던 사이들이지만 한팀으로 만나니 느낌이 새롭다. 그리고… 너희들, 왜 다 나한테 폴더로 인사를 하냐.

    “다들 집합!”

    빳빳한 새 국가 대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였다. 옹기종기 모인 선수들 앞에 현역 때부터 얼굴로 야구 하던 감독이 나타나 간단한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나를 가리킨다.

    응? 왜?

    “우리 주장을 뽑아야 하는데 감독이 지정해 주겠다. 여기서 프로 생활 가장 오래 한 김소전이 주장이다. 다들 박수!”

    뭐, 뭐야? 내가 뭐? 주장? 아저씨,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 아니에요? 전 학교 다닐 때도 주장 같은 거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전 특기가 감독 피해서 짱 박히기인데요…….

    “오늘은 간단히 투수조, 야수조 나눠서 간단히 몸 풀면서 코치님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고, 주장은 나 좀 보자.”

    저,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주장이라니요. 저 감투 쓰는 거 싫어해요.

    축 처진 어깨로 끌려들어 간 감독실. 살면서 감독과의 면담에서 좋은 결과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던지라 몸이 경직되면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진짜… 주장 싫어요.

    “김소전, 우리 처음 보지?”

    반칙. 나이 먹고도 나만큼 잘생겼는데 목소리도 좋다. 이러니 아직도 아줌마들이 따라다니지…….

    “전 TV에서 많이 뵀습니다. 감독님으로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역시. 알아서 자기 일을 하는 혓바닥. 최근에 수영이 만나면서 소고기로 기름칠을 한 효과가 나타나는구나.

    “하하하. 김민중 감독이 너 생긴 거랑 다르게 뱃속에 시커먼 게 수십 개는 들어 있다고 하더니 진짜구나. 하하하!”

    시커먼 게 수십 개가 들었다니요. 저는 투명한 사람입니다. 거짓말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몸 상태는 어때?”

    “한국 시리즈 끝나고도 경준이랑 훈련 계속하고 있어서 좋습니다.”

    “아, 맞다. 라정안이는 주장 잘하고 있어? 그 칠칠치 못한 놈이 주장한다니 내가 걱정이 많다. 우승 파티는 잘했어? 랩터스는 파티하려고 우승하는 팀인데 그 코흘리개가 막걸리나 사주고 그런 건 아니지?”

    막걸리? 라정안 선배가 막걸리? 무슨 소리지……. 야구 선수는 몸이 재산이라면서 30년산 미만으로는 술 냄새도 맡지 말라는 사람인데?

    “나 있을 때 정안이가……. 내가 그때 그 꼴통을……. 새벽 다섯 시에 숙소에 들어와서는……. 선배한테 대들어서…….”

    선배들이 주장한테 개과천선했다고 놀리던 게 진짜였다고? 정말 그 정도 찌질이가 지금 저렇게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것처럼 행동한다고?

    “그랬던 놈이 주장이라니, 시간 많이 지났다. 하하.”

    웃음이 나오나요? 전 지금 주장의 이중인격에 충격을 받았는데……. 주장… 나한테 맨날 궁상떨지 말라고 구박하더니 자기는 더했었어……. 복수하고야 만다.

    “그래서 말인데, 소전이도 정안이처럼 우승 팀 주장이 되어줬으면 한다.”

    우승 팀 주장… 꼴찌팀 주장도 해본 적이 없는데 저한테 왜 그러세요.

    “감독님. 제가 아직 제 앞가림도 힘듭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날 보고 씩 웃는 대표팀 감독.

    “어쩔 수 없다. 네가 나이가 제일 많아. 3년 차 이하만 뽑는 대회에 너 말고 다 1, 2년 차 선수들이라 네가 제일 선배다. 네가 해야 한다.”

    그런 게 어딨어요. 라정안 선배도 이제 30인데 주장하는데. 주장 나이대로 하는 거 아니잖아요.

    내가 여전히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자 감독이 여전히 웃을 띄고는 이야기를 한다.

    “김민중 감독이 소전이 뭘 결심시키려면 힘들지만, 결심만 하면 잘한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가 보네. 주장 못 할 것 같아?”

    “주장을 해본 적도 없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진짜 감투 쓰고 그런 거 싫다. 안 했으면 좋겠는데.

    “부담 가질 거 없어. 너 노경준이랑 잘 지내잖아? 선수들 전부 경준이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너보다 야구 잘하는 선수 없다.”

    야구 잘하는 선수가 없다니요. 재규어스 155 던지는 황윤찬도 있고 워호스 노래까지 6툴 내야수 박민기도 있는데! 아니면 썬더스의 시간 여행자 우타 거포 장수완! 그래 얼굴도 45살은 먹은 거 같고 얘가 딱이네. 얘 시켜요.

    “경준이랑 서로 배우는 사이입니다. 제가 뭐 알려주고 하는 거 없어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어디서 주섬주섬 꺼내는 파일들. 그걸 내 앞에 늘어놓고는 계속 웃으면서 말을 건다.

    “김민중 감독이 너랑 말하면 힘들다더니 이해가 확 되네. 하하하.”

    힘들다니요. 감독님은 나만 보면 말이 너무 많아서 내가 도망 다니는데.

    “여기 내가 만든 선수별 리포팅 자료. 네가 리포팅 자료 분석하는 데 탁월하다고 들었다. 보고 선수들 좀 봐줘라. 코치들이 하는 얘기하고 선수가 해주는 얘기하고 다르잖아.”

    다른 팀 선수들 리포팅 자료. 국가 대표 감독이 만든 리포팅 자료. 분명 우리 팀 거하고 크게 차이는 없겠지만 개인이 직접 만든 거면 분명 다른 의견이 있을 텐데…….

    그게 심지어 국내 세이버메트릭스 최고 권위자인 랩터스의 잠실 예수 기인환 감독의 리포트……. 봐야 한다. 저건 봐야 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급한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고는 감독 손에 들려있는 파일을 뺏어 들었다. 가장 위에 있는 이름, 김소전. 겉으로는 내색 안 하는 척하면서 바쁜 손놀림으로 파일을 넘긴다.

    이 사람… 나만 보고 살았나 내 전 경기 로그와 타격 폼을 쪼개서 사진으로 배열해 놓고 컨택 시 손목의 회전 방향까지 각도별로 찍어놓았다.

    이런 사진은 구단만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나?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타격도 모자라 수비 성향과 송구 시 탄착점까지 분석해서 정리해 놓았다. 아마추어 같던 랩터스 전력 분석의 기틀을 이 사람이 세웠다고 하더니 이건 우리 전력분석팀보다 더 집요한 것 같다.

    아, 이… 이때 송구 에러는 1루수가 외국인 그놈이 미트질을 잘못해서 내 실책으로 잡힌 건데, 왜 내가 잘못했다고 써놓은 거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변태적인 플레이를 하는 김소전이라는 선수에게 빠져들고 있는데 마지막에 어쩐지 첫 장에 있을 듯한 페이지가 보인다.

    [김소전(랩터스 NO. 75)]

    MLB SCALE

    HIT(타격) : 45(60)

    POWER(파워) : 40(50)

    RUN(주루) : 70(75)

    ARM(송구) : 70(75)

    FIELD(수비) : 80(80)

    OVERRALL : 61(68)

    총평

    지금껏 본 적 없는 재능을 낭비 중. 투수로 진로를 잡았어도 대성했을 재능. 고교 시절 혹사로 어깨 부상 경력이 있으나 재발의 우려 없음.

    향후 메이저 리그 진출이 확실함. 현재 유격수로 출전하고 있으나 포수 제외 전 포지션 수비가 메이저에서도 리그 최상급.

    1루까지 3.6초, 시도 횟수가 적으나 단독 도루 능력이 있으며 95% 이상의 성공률, 도루 능력뿐만 아니라 수비를 압박해 상대 실책을 유도하는 주루 플레이를 함.

    투수 출신으로 강한 송구를 하며, 외야에서 스텝을 하면서 송구 시 60미터 이내에서는 주자를 묶는 수비를 함.

    내야 송구 시 억지로 자세를 오버핸드로 만들며 강한 송구를 하는 경향이 있음. 내야에서 수준급 키스톤을 만난다면 개선의 여지가 있음.

    빠른 공에 매우 강하나 타격 메커니즘 상 높은 쪽과 바깥쪽 타격의 약점이 있음, 파워는 있으나 변화구 대처에 부담을 가지는 모습을 보임.

    소심한 성격 탓에 타격에 한계가 있음.

    뭐? 뭐라고? 누가 소심해? 이 아저씨가 말 함부로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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