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91화 (91/204)
  • 91화. 시즌 끝 (2)

    * * *

    이놈의 구단.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를 미워… 아니 미워하는 정도도 아니고 나를 증오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결과는 나올 수가 없다.

    리그가 박살 날 뻔한 대형 승부 조작 사건. 10위 팀 감독이 잡혀가고 외국인 투수가 같이 잡혀갔다. 랩터스 출신의 브로커가 잡혀가면서 각 팀에 있는 친한 선수들 이름을 전부 불러대고 연관 검색어로 뜬 선수들이 검사님들과 면담을 한다.

    이 사태를 처음부터 진두지휘한 랩터스도 감독이 저 브로커를 기자들 앞에서 폭행하면서 입건되어 조사를 받고 구단에서는 사과문을 가장한 자력 구제에 관한 법률개정 촉구문을 발표했다.

    그래……. 다 좋다. 나야 야구만 하니까 법을 바꾸시든 뭘 하든 다 상관없는데 왜! 나는 6경기 출장 정지고! 원 펀치로 조작범 강냉이를 털어버린 감독은 엄중 경고냐고!

    힘 있는 사람은 봐주고 힘없는 애들은 누르고……. 내가 더러워서 야구 잘하고 만다. 나 FA 때 봐라. 소닉스로 이적할 거야!

    가장 먼저 승부 조작을 신고하고 검거에 앞장서면서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진 랩터스를 제외한 다른 팀들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타이탄스는 박정환과 절친으로 알려진 최강훈이 종종 동료들까지 같이 다니면서 접대받고 돌아다닌 게 알려져 팀 전력 절반이 수사 기관에 끌려다니고, 타이탄스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팀들도 자주 외부에서 술 마시고 다닌 선수들 위주로 날카로운 조사가 이어진다.

    - 경기 끝! 랩터스 재규어스에게 연승을 거두면서 1위 자리에 복귀합니다.

    - 시즌 마지막에 랩터스가 완전히 살아났어요. 다른 팀들이 막기 힘들어 보여요.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소닉스도 승부 조작 여파에 휩싸여 경기력이 떨어졌다. 우리 팀 늙은 사자들은 이럴 때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낡아 버린 몸뚱이를 꾸역꾸역 움직여서 상대를 잔인하게 물어뜯는다.

    확실히 경험이라는 것. 그것도 이겨본 경험이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다. 시즌 내내 체력 고갈에 시달리던 할아버지들이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해 가는 모습. 보고 있기만 해도 배울 게 많다.

    내가 항상 지기만 해서 이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운이 넘치고 지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고 체력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다른 점은 남은 힘을 다 끌어올릴 때를 찾는 본능과 그럴 만한 체력이 없을 때라면 눈빛으로라도 상대를 겁먹게 만드는 아우라. 이겨본 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함. 그게 비법이었다.

    - 박요훈! 삼진! 몸쪽 꽉 찬 직구로 경기를 마무리하는 랩터스의 마무리 박요훈입니다!

    - 투수는 저래야 해요. 지금 143짜리 직구거든요. 구속이 아니라 기세로 상대를 눌렀어요.

    - 랩터스 4:3! 한 점 차 승리를 지켜내며 1위를 지켜갑니다.

    - 최근 랩터스의 경기력도 안 좋아요. 세부 내용을 뜯어보면 안 좋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선수들이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필요할 때마다 힘을 몰아서 쓰는 기분이거든요. 디펜딩 챔피언답네요.

    이긴다. 이겨 나간다. 옛날에 주먹에 우승 반지 끼고 인터뷰하던 선수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나도 세 개 정도는 껴보고 싶다. 하나는 있으니까, 두 개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아 아시안 게임 메달도 녹여서 반지로 만들까.

    “소전아, 감독님 면담.”

    원정 경기가 끝나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매니저 형이 감독님과 면담을 알린다. 왜지? 뭐 조사를 더 받아야 하나?

    “감독님. 김소전입니다.”

    야구보다 복싱으로 스타가 된 감독님을 보는 내 마음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독인데, 앞에서는 최대한 착한 척을 해본다.

    “오늘 고생했다. 6회에 잘 골랐어. 잘했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갑자기 볼넷을 칭찬하고 그래……. 나야 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공을 고른 건데……. 괜히 찔리네.

    “다른 게 아니라. 기인환 감독님 요청이 들어와서 너한테 말해 주려고 불렀다.”

    응? 검사님이 아니고 기인환 감독? 비밀번호 찍어대던 랩터스를 체질 변화하고 3연속 우승을 만든 기인환 감독? 감독 5년하고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서 나가신 분이 왜?

    “시즌 끝나고 아시아 프로 야구 챔피언십에 네가 나와줬으면 한다.”

    “제가요? 경험 쌓게 한다고 국가 대표 출신들은 안 나가기로 했던 거 아닌가요?”

    “지금 리그 상황이 안 좋잖아. 그래서 KBO에서도 기인환 감독님한테 감독 자리 맡기고 선수 선발권도 전부 맡겼다. 감독님이 부탁을 좀 하시네.”

    아시아 프로 야구 챔피언십. 예전에 한국, 일본, 대만우승 팀들끼리 경기하다가 24세 이하 3년 차 이하 선수들 뽑아서 하는 정식 대회. 와일드 카드로 베테랑을 3명까지 더 뽑을 수도 있지만, 보상도 미미하고 어차피 우승은 일본인지라 유망주들 위주로 나가는 경기인데, 나 보고 나가라고?

    “감독님, 그거 시즌 끝나고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아시다시피 시즌 끝나고 과외 일정이 있는데요.”

    “일정은 좀 조정해야겠지.”

    “저 겨울에 할 거 많은데요.”

    짱구를 돌려보자. 저 대회 나가면 보상이라고는 FA 기간 인정 10일? 우승하면 10일을 더 주던가? 어차피 우승은 일본이니까 FA 10을 보상받자고 내 과외 시간을 날려야 해?

    시즌 중에 이미 라타 코치하고 연락하면서 준비한 타이밍과 바깥쪽 대처에 대한 훈련 스케줄이 한가득인데…….

    “꼭 가야 하나요?”

    “국가 대표니까.”

    아. 진짜… 국가 대표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있네. 나 군대 안 가지……. 가야겠네

    “가는데 조건 하나 얘기해도 됩니까?”

    “조건? 국가 대표 가는데 조건?”

    “국가 대표에 조건은 아니고 경준이 좀 데려가서 훈련 파트너로 써도 되겠습니까? 상필이 형도 배팅볼 잘 던져주시는데 아무래도 막 써먹기는 경준이가 편해서요.”

    미국 가서 훈련도 못 하는데 그냥 시간을 죽일 수는 없다. 내 훈련 노예라도 데려가서 굴려 먹어야지. 안 그래도 이놈 2군에 처박혀서 혼자 연습하려니 한계가 있는데 시즌 끝나고까지 이럴 수는 없다.

    “콜. 그런데 경준이를 훈련 파트너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네?”

    “경준이도 같이 가거든. 경준이 천방지축이니까 데려가서 잘 돌봐줘라.”

    이게 무슨… 국대를 뽑는데 왜 실력도 모자란 선풍기를 뽑는 거야? 올해 신인 중에 싹수 있는 애가 얼마나 많은데. 기인환 감독 선수 보는 눈 좋다고 하더니 완전 헛소문이었어.

    * * *

    -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 잠실에서 랩터스와 타이탄스의 경기를 보내드립니다.

    - 벌써 마지막 경기예요. 1위를 확정 지은 랩터스가 마지막까지 베스트 라인업을 들고나왔어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네요.

    시즌 후반 들면서 상대 팀들이 자멸해 주는 덕에 마지막에 스트레스 없이 1위 자리를 지켜냈다. 그러다 보니 감독님이 확장 엔트리에 신인들을 대거 올리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고, 그럴 때마다… 왜 내가 떠돌이인 건데!

    - 랩터스의 선발. 이시윤입니다. 시즌 34번째 선발 등판 경기입니다.

    - 포스팅으로 메이저 리그 진출을 선언했죠. 오늘이 정규 시즌에서 던지는 마지막 경기예요. 랩터스 팬들 아쉽겠어요.

    마운드에서 언제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모습으로 팬들한테도 시크한 모습만 보이던 나르시시스트가 웬일로 1루를 향해서 모자를 벗고 폴더인사를 한다.

    저…. 저 사람이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저 모습을 보니 진짜…. 마지막 같네

    - 삼진! 최강훈 공 세 개로 삼진. 시즌 마지막 경기 삼진으로 시작하는 선발 투수 이시윤입니다.

    - 저 공이면 메이저에서도 통한다는 확신이 드네요. 최강훈 선수, 전혀 반응도 못 했어요. 이런 공을 볼 수 있는 게 행운이에요.

    그래, 미국 가라. 저 정도면 신계에서 놀아야지. 여기처럼 사람이나 사람도 안되는 선수들이 뛰는 리그에서 놀면 안 되지.

    - 1회 초를 가볍게 마친 랩터스, 1회 말 공격이 시작됩니다.

    - 오랜만에 가동되는 김소전, 노경준 테이블 세터예요.

    - 컨디션 난조로 내려갔던 노경준이 다시 콜업된 이후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신인이다 보니까 한 시즌 치르는 경험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2군에서 잘 조율해서 올라왔어요. 큰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뒤에 라정안 선배가 있을 때는 그냥 내 생각만 하면서 야구 하면 되는데 뒤에 경준이가 있으면 생각할 게 많아진다.

    저 재능이 부족한 쩌리를 위해서 출루해야 하고 함부로 도루하지 않고 투수를 괴롭혀야 하고 그러면서 순간순간 타격 폼도 봐주면서 얘기도 해줘야 하고……. 저 XX 야구 언제 느냐…….

    - 시프트를 무시하는 김소전! 우익수 앞 안타!

    -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풀 스윙으로 잡아당기네요. 후반기 들면서 선구안까지 갖춰나가는 모습이거든요. 이 선수가 3년 차 선수예요. 어디까지 발전할지 무섭습니다.

    - 발전 가능성만 보면 더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2번 노경준, 무사 주자 1루에서 타격을 준비합니다.

    - 야구적으로 보면 김소전과 상당히 다른 선수입니다만 결과는 똑같아요. 우타석에서 김소전처럼 풀스윙으로 시프트를 박살 내는 노경준이에요.

    감독이 쓸데없이 강한 2번이라는 이상한 이론에 심취해서 멀리 치는 것 말고는 쓸데가 없는 멍청이를 꼭 2번에 박아넣는다. OPS고 뭐고 우선 맞춰야지. 에효… 내가 전생에 뭔 죄를 그렇게 많이 졌다고…….

    - 김소전 리드를 길게 가져갑니다.

    - 김소전의 리드가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아요. 저러고도 사니 참 할 말은 없어요.

    무게 중심을 최대한 1루에 실어놓고 투수에게 주문을 건다. 직구! 직구! 넌 직구를 던져야 한다.

    - 1루 견제. 투수 콜린스, 1루에 강한 견제구를 던집니다.

    -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요. 김소전 리드만 크지 도루 시도 자체는 많지 않거든요. 특히 노경준 앞에서는 거의 뛰지 않아요.

    깜짝 놀랐네. 그런 견제로 나를 묶을 생각이라면 틀렸다. 왜냐하면 나 애초에 뛸 생각이 없거든.

    - 타이탄스 배터리, 사인이 길어집니다. 콜린스 투구! 공 빠집니다. 공 뒤로 빠졌습니다!

    직구 던지라니까 왜 떨어지는 공을 던지고 그래. 던질 거면 주자를 포기하고 편하게 던지든가. 억지로 슬라이드 스텝을 빨리 가져가려니까 제구가 안 잡히지.

    나야 고맙지만.

    - 주자 2루 밟고 3루까지 달립니다. 3루~ 3루~ 주자 3루에서 세잎! 와이드 피치에 두 베이스를 이동하는 김소전!

    - 타이탄스 지금 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이 나왔어요. 배터리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원 바운드 튀는 거 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달리면 주루 코치를 바라봤다. 과감한 주루 사인으로는 전 세계 누구에게도 안 밀리는 3루 코치가 3루를 가리키면서 손을 미친 듯이 돌린다.

    공이 멀리 튀었는지 모르겠지만 코치가 돌렸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린다. 달려서 성공하면 내가 잘한 거고, 실패하면 코치가 돌렸다고 뒤집어씌우면 되니까.

    2루를 크게 밟고 3루를 향해 직선으로 달린다. 3루 코치의 바깥쪽 슬라이딩 사인. 마지막 스텝에 몸을 외야 쪽으로 날리면서 왼손을 크게 편다. 손에 감기는 베이스의 느낌. 베이스를 손으로 감고 몸이 돌아간 후에야 엉덩이에 태그가 들어온다.

    - 무사 주자 3루. 원 볼. 타석에 노경준.

    - 타이탄스 선수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오늘 결과랑 상관없이 가을 야구를 못 가기 때문에 이번 시즌 팬들을 보는 마지막 경기예요. 좋은 모습 보여줘야 해요.

    안타 하나, 폭투 하나에 팀 분위기가 확 죽었다. 이럴 때 타석에 우리 팀 할아버지들이 들어왔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고 뜯을 상황. 그런데 타석엔… 하룻강아지네…….

    에효. 넌 맞추기만 해라. 땅볼이든 뜬공이든 맞추기만 하면 무조건 홈에 뛰어들어 가준다.

    - 볼. 노경준, 공을 오래 보고 있습니다.

    - 2군 다녀온 이후 참을성이 늘었어요. 전반기 같았으면 저 공도 배트가 나왔을 거거든요. 이제 투수 비슷하게는 던져줘야 합니다.

    오… 공 2개 정도 빠지는 공을 참았어. 참은 건지 딴생각하다 못 친 건지 모르겠지만 참았어. 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 5구 타격!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좌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투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투런포를 쏘아 올리는 노경준!

    - 1회부터 타이탄스 무너지네요. 이게 이번 시즌 랩터스 야구에요.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놓치지 않고 잡아채거든요. 랩터스 강하네요. 정규 시즌 우승 팀답습니다.

    야, 이 XXX야! 형은 안타 치고 투수 괴롭히고 슬라이딩하고 생쇼를 해서 꾸역꾸역 3루까지 왔더니 그걸 그냥 넘겨!

    홈런 칠 거면 얘기를 해야지! 괜히 힘들게 뛰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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