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도움의 손길
- 엘리펀트의 1회 초 삼자범퇴로 마무리됩니다.
- 이시윤 선수 첫 경기부터 컨디션이 좋아 보여요. 이번 시즌 끝나고 메이저 리그 진출을 공언한 만큼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주네요.
- 이제 랩터스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1번 타자 김소전부터 시작됩니다.
- 김민중 감독이 이번 시즌 김소전 선수를 유격수로 고정시키겠다고 했거든요. 포지션이 고정되는 만큼 얼마나 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큽니다.
3층에서 펼쳐진 피켓을 보고 마음이 진정이 안 된다. 마운드의 투수가 삼진-1루 땅볼-삼진으로 끝내서 망정이지 나한테 공이라도 왔으면 에러할 뻔했다.
공수 교대 들어가면서 괜히 포X리 한 잔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본다.
- 엘리펀트의 선발 투수 그레이엄 선수입니다.
- 엘리펀트도 이번에 대형 선수를 잘 데려왔다는 평을 듣고 있어요. 150 정도의 빠른 공하고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주로 던지는 선수예요. 시범 경기를 통해서 이 선수의 낮게 낮게 떨어지는 포크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KBO에 적응만 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큽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여전히 마음속이 이랬다저랬다 안정이 안 된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괜히 뒤쪽을 바라보니 아까 피켓을 들었던 자리에 안전요원들이 둘러싸고 있는 게 보인다.
어쨌든 피켓이 안 보이니 좀… 숨은 쉬어진다.
- 김소전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난 시즌 2할 9푼 2리 홈런 19개를 때리면서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풀타임 2년 차에 접어드는 만큼 더 좋은 성적을 보여주겠죠?
-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즌을 거치면서 김소전 선수 분석이 많이 됐거든요. 지금 보세요. 1회 첫 타자로 나서는데도 엘리펀트가 과감한 시프트를 펼치고 있어요. 김소전 선수, 지금부터가 진짜 프로 생활의 시작입니다. 지난 시즌 데이터로 철저히 분석 당한 김소전이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가 궁금하네요.
타석에 들어가서 투수를 보는 데도 집중이 잘 안 된다. 내야 외야할 것 없이 1루 쪽으로 잔뜩 쏠린 수비수들. 보이긴 보이는데 마음이 진정이 안 되네.
- 초구, 스트라이크. 몸쪽에 붙이는 스트라이크. 김소전 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 공 좋죠. 김소전 선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이였어요. 저 정도 높이로 타자 몸쪽에 붙여버리면 좋은 타구 나오기 힘들거든요. 그레이엄, 좋은 공을 가졌네요.
생각을 정리한다.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경기 내내 이런 생각만 들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경기에 집중할 때. 집중하자, 집중.
- 2구. 이번엔 바깥쪽 꽉 찬 스트라이크. 김소전 선수 머리를 치네요.
- 들어오긴 했지만 높은 쪽 꽉 찬 공이였어요. 배드 볼 히터인 김소전 입장에서야 아깝긴 하겠지만 안 친 게 다행이었습니다. 지금 안 친 거 잘했어요.
여전히 집중이 안 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멍때리고 있는데 순식간에 지나간 공. 정신 차리라고 내 손으로 헬멧을 두드렸다.
- 3구, 볼. 주심 손 올라가려다 말았습니다.
- 낮았나요? 주심 낮았다고 봤어요. 지금 포크볼 너무 좋았거든요. 김소전 이걸 참아내네요. 지난 시즌 같았으면 여지없이 배트가 딸려 나왔을 텐데 이번 시즌 한층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네요.
투수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공이 지나가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 정신, 정신 차리자.
- 타자, 잠깐 타석에서 빠져나왔다가 들어갑니다.
- 그럴 만해요. 그레이엄 선수 공에 힘이 있어요. 생소한데 공에 힘이 있거든요. 차분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심호흡하고 타석에 들어가 보지만 여전히 몸의 떨림이 남아 있다.
- 낮은 공 연속으로 들어왔습니다. 4구, 5구 연속으로 비슷한 공이 들어오는데 타자가 참아냅니다.
- 오늘 주심이 낮은 쪽을 안 잡아주네요. 그레이엄 선수, 첫 타자부터 고생하고 있네요.
3-2 풀카운트. 타석에서 딴생각만 하고 있는데 볼카운트가 꽉 찼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닌데 일이 이렇게 되니 투수한테 좀 미안하네.
다시 타석에서 나와 몸을 한번 풀어보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또다시 뒤쪽을 향한다.
꽉 찬 경기장에 이빨 빠진 한자리.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떨군다.
“형~ 고맙습니다. 파이팅~”
피식 웃음이 났다. 다음 타자가 나를 보고 감사를 전한다. 아무래도 공 많이 보게 해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거… 내가 더 미안해서 어쩌나.
- 몸쪽. 빠졌습니다. 볼넷. 3-2 풀카운트에서 볼넷을 얻어내는 김소전.
- 김소전 선수. 지난 시즌 단점으로 지적된 것이 출루율이 낮다는 거였거든요. 특히나 안 좋은 공에 배트를 내면서 볼넷이 적다는 게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었는데 이번 시즌 첫 타석부터 볼넷을 골라내는 모습을 보이네요.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않고 1루에 들어갔다. 이래도 되나 싶은데 1루로 가라니까 주섬주섬 장구를 풀어놓고 1루로 뛰어간다.
언제나처럼 1루수에게 꾸벅 인사를 전했더니 우리 팀 아킬레스건에 대한 질문이 들어온다.
“안녕하십니까.”
“마. 공이 들어오면 쳐야지, 그걸 기다리냐.”
“다음부턴 쳐서 담장 밖으로 넘기겠습니다.”
오늘 경기 시작 전부터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막 나온다.
“야구만 X같이 하는 게 아니라 점점 말도 X같이 하고 있네!”
“올해는 야구 잘하겠습니다.”
“잘하지 말고 못 하라고. 그건 그렇고 쟨 뭐냐? 어디서 굴러온 놈이 첫 경기부터 2번이야?”
“쟤요? 설명이 잘 안 돼요. 그냥 이상한 놈이에요.”
“아, 너 같은 놈이구나?”
갑자기 내가 왜 나와? 나랑 쟤를 어디서 같이 묶어?
- 노경준 초구부터 퍼 올립니다. 유격수 키를 넘겼습니다.
- 어린 선수가 과감하네요. 빗맞긴 했습니다만 초구부터 첫 타석부터 자기 스윙을 가져가네요. 이런 점이 랩터스의 무서운 점이에요. 벤치에서 작전을 많이 내지 않고 선수들이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놔두거든요. 이런 점이 나중에 큰 경기 할 때도 선수들이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어떻게든 포크볼을 존 안으로 욱여넣겠다고 계속 포크볼만 던지는 투수 놈이나. 내가 포크볼 치지 말랬는데 눈에 보인다고 냅다 방망이 휘두르는 타자 놈이나. 에효… 둘 다 그놈이 그놈이다.
1루에서도 보이는 손목 움직임. 타자가 절대 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맘 놓고 있는데 저 멍청한 놈이 그대로 퍼 올린다.
치려면 잘 치기나 할 것이지 어설프게 깎여 맞은 공이 애매한 높이로 힘없이 유격수 뒤로 향한다.
힘없는 공을 보고 뒤로 쫓던 유격수가 점프해 보지만 야속하게 글러브를 벗어나는 타구. 덕분에 1루와 2루 사이에서 간을 보던 나만 마지막에 죽어라. 2루로 돌진했다.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이따위 타구를 만들어 낸 놈에게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내니 1루에서 어린 노무 XX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저 XX가 죽을라고. 어디서 하늘 같은 선배한테 눈을… 확.
자기가 믿었던 포크볼이 계속해서 안 통하자 투수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괜찮은 구위를 가지고도 계속해서 포크볼만 고집하는 투수. 그런 그를 랩터스의 노련한 타자들이 차곡차곡 무너트린다.
- 김정하, 잘 맞은 타구. 중견수. 중견수에게 잡힙니다. 쓰리 아웃. 랩터스 1회 말 공격에서 4점을 뽑아내면서 산뜻한 시즌을 시작합니다.
- 지난 시즌 우 승팀답네요. 상대 투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레이엄 선수 좋은 공을 가지고도 어려운 경기를 하게 되네요.
내 머리는 어지럽지만, 팀이 잘 되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야구할 땐 야구만… 머리를 비우고 쉽게 쉽게 하자.
- 7회 초 엘리펀트의 공격 3번 김해영부터 시작됩니다.
- 이시윤. 오늘 컨디션 너무 좋아 보이죠. 첫 경기부터 이렇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면 이번 시즌 랩터스를 우승으로 끌고 가겠다는 약속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 6회까지 무사사구 2안타 무실점. 공 80개로 막아내고 있는 이시윤입니다.
- 랩터스가 이번에 외국인 투수 둘도 잘 뽑아왔다는 평이거든요. 거기에 이시윤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면 다른 팀들 쉽지 않겠어요.
투수가 마운드에서 경기를 지배해 버리면 수비수들이 별로 할 게 없다.
유격수임에도 오늘 공 한 번 나에게 오지 않았다. 좌타자 위주의 엘리펀트를 상대로 무수히 쏟아진 2루 땅볼. 유격수도 내야수인데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다.
- 김해영, 밀렸습니다. 유격수 전진. 공! 공 뒤로 빠집니다. 공 뒤로 빠지면서 엘리펀츠 이번 경기 처음으로 선두타자가 진루에 성공합니다.
- 유격수 급했죠. 좌익수가 친 타구가 느리게 오다 보니까 마음이 급했어요. 급할 필요 없거든요. 김해영 선수 발이 안 빠른데 천천히 해도 되거든요. 김소전 답지 않게 아쉬운 수비가 나오네요.
하늘이 노랗다. 하다 하다 별짓을. 오늘 타격도 첫 타석 볼넷 말고는 삼진만 세 개 당하고 있는데 수비까지 이러면 망인데…….
허탈해하면서 마운드의 투수를 바라보는데 투수가 날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본다.
미안한 건 미안한데 시즌 첫 경기부터 에러도 좀 하고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볼 거까진 없잖아요. 무섭게…….
마운드에서 화가 잔뜩 난 투수가 더 이상 수비를 안 믿고 남은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워 버린다.
혼자서도 잘하면서 괜히 무섭게 굴어. 그래도 미안하니까 이닝을 마치며 돌아오는 길에 투수에게 다가가 석고대죄를 올린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세요.”
후배가 살기를 청하자 선배가 넓은 아량으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잠시나마 네 수비를 기대했던 내 실수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깜빡했다, 저놈. 입단할 때부터 본투비 미친놈이었었는데. 요즘 주변에 가짜 미친놈들이 많아서 방심했다.
나의 사소한 삽질에도 불구하고 개막전부터 승리를 챙긴 랩터스가 이번 시즌에도 어김없이 대권 도전의 야욕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내 머리는 복잡해진다.
1번 타자가 영 기운을 못 냄에도 홈 개막 2연전을 쓸어 담은 랩터스 사무실에 야구와 상관없는 일로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강 변호사님. 결론은 김소전 선수가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건가요?”
“결론은 그렇습니다.”
대한 그룹 법무팀에서 지원 나온 변호사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내게 빚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얼맙니까? 정말 우리 아빠가 2억 6천을 빚진 게 맞습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한번 변호사에게 확인해 본다.
“실제로 빌렸다고 추정되는 돈은 2천5백. 중간에 전문 사채꾼들 손에 몇 바퀴 돌면서 원금이 1억으로 바꿨는데 정확한 중간 과정은 법무팀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2천5백이 2억 6천이 됐다고? 이게 말이 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단장이 변호사에게 되묻는다.
“위조라도 한 건가요? 그게 말이 돼요?”
“실제 빌린 돈은 2천5백인데 마이너스 통장처럼 오픈으로 1억짜리 계약을 했습니다. 이걸 중간 과정 빼먹고 여러 사람 손 타다 보니까 최종적 채권자는 1억으로 인지하고 채권을 구입했습니다. 처음 판 사람이 잘못이고 산 사람도 잘못이 큽니다.”
이게 무슨…….
내가 어버버하고 말을 못 하고 있자 홍시 누나가 대신 이것저것 물어본다.
“해결 방법은요?”
“채무 확정 소송해야죠.”
“얼마나 걸릴까요? 그리고 정확히 얼마에요?”
“단계가 많아서 오래 걸리고 사실 2천5백도 줄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2천5백으로 확정된다면 4천9백 정도 될 겁니다.”
5천… 5천이라……. 연봉 받은 거 절반이 날아가네.
“제가 5천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될까요?”
“아니요.”
왜! 5천이라며! 내가 준다고! 우리 아빠가 빌렸다고 하는 거 다 내가 책임진다는데 왜 안 돼!
“제가 올해 연봉이 1억쯤 됩니다. 수당에 이것저것 하면 더 되고요.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이것부터 정리하겠습니다.”
내가 빚을 갚겠다는데도 앞에 있는 변호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한번 안된다고 한다.
“김소전 씨,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저쪽이 법원에 요청한 건 김소전 씨가 빚을 갚을 대상이냐를 물었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은요?”
“그다음에 김소전 씨가 상대가 주장하는 채권액이 맞는지를 법원에 물어야 합니다.”
아까는 5천이라며.
“그다음은요?”
“그다음에야 김소전 씨가 빚을 갚을 수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저들이 원하는 금액, 지금 다 갚거나 최소한 법원에 공탁해 놓고 시작해야 합니다.”
뭔 소리야. 돈 주겠다는데도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내 멍청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홍시 누나가 또다시 끼어든다.
“변호사님, 대충 얼마나 걸릴까요?”
“정상적이면 최소 2년 봅니다.”
“빨리하면요?”
“수수료가 채권액보다 클 텐데요?”
“그렇군요.”
“법무팀에서 소송 대행은 안 해주실 거죠?”
“개인사니까요.”
“위에서 찍어누르면요?”
순간 얼굴이 확 굳어지는 변호사.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하, 되는 거네요. 전화 한 통만 할게요.”
그룹 법무팀 변호사와 이야기 도중 전화기를 꺼내는 홍시 누나. 방금까지 까랑까랑하던 목소리가 습기 찬 목소리로 바꾸고는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한다.
“제가요. 부탁이 있어서요. 그룹 법무팀이 랩터스 일을 안 도와준대요. 홍지가… 너무 속상해서……. 네… 속상해요. 누구? 법무팀 강 변호사라는데요……. 저는 안 된대요… 네… 네… 믿어요…….”
홍시 누나의 전화 통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하던 변호사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받아보세요. 이 정도면 되는지 한번 보죠.”
누나, 역시. 내 생각해 주는 건 누나밖에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