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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32화 (32/204)

32화. 기록 작성

1회에 8 대 0이 나온 경기.

이런 경기는 쉽게 쉽게 가야 한다. 그리고 경기가 쉬워지는 만큼 덕아웃 분위기도 이래야 한다.

“주장! 주장! 애들 분위기 이래도 되냐! 경철이가 내 배트 훔쳐서 나갔어!”

“좋은 건 좀 나누어 써요. 오늘 형님이 잘 치니까 기 좀 받겠다고 하는 걸 뭐라고 하세요.”

“야! 저거 내가 내 돈 주고 산 거야! 사서 써! 사서 쓰라고!”

“구단에서 사주는데 왜 자꾸 사비로 장비를 사요!”

“넌 몰라! 내 돈 주고 사야 빠따발이 받는 거야. 공짜는 공이 반밖에 안 날아가”

“막내야! 막내! 소전이 어디 갔어! 소전아! 어떻게 생각하냐? 내 말이 맞지?”

귀찮은 선배들. 만만한 게 막내지. 나는 오늘 같은 날 스탯 세탁해야 하니까 FA로 돈 많이 받는 너희끼리 노세요.

“저, 저… 저 막내 시키, 형이 얘기하는데 쌩까고 나가는 거 봐.”

“쟤 다음 타석이잖아요! 초코파이나 드세요.”

“그, 그럴까?”

3회 초. 10 대 0에서 남들 다 출루하는데 혼자만 출루 못 한 황경철이 훔쳐 간 배트로 장타를 때려 내고는 2루에 들어간다.

무사 주자 2루. 황경철이 발이 빠르진 않아도 주루를 못 하는 선수도 아닌데 타점이나 올리자.

시작부터 벌어진 경기에 드래곤스 선수들이 주자를 묶을 생각도 안 하고 정상 수비에 들어간다.

2루 주자도 리드를 길게 잡으려다가 수비수들이 완전히 빠지는 걸 보고는 적당히 리드를 잡는다.

3회 10점. 많기는 많은 점수긴 한데, 그래도 아직 3회인데. 벌써 경기 포기하고 지는 팀을 배려하는 불문율을 적용해야 하나 의문이 든다.

나는 어떻게든 더 치려고 노력 중인데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시는 포수가 또 말을 건다.

“또 왔냐? 좀 가라.”

“빨리 끝내고 가겠습니다.”

“너 때문에 선화가 뚜껑 열렸어. 선화 달래 주려면 오늘도 술 먹어야 하잖아. 이따 너도 와.”

이놈 확실히 술이 덜 깼구나. 상대 팀이랑 술을 왜 먹어.

“저 술 못합니다, 선배님.”

“오기만 해. 끝나고 연락할 테니까 구월동으로 나와.”

시즌 중에 술 마실 생각하지 마시고 야구를 하시라고요.

“주기명, 너나 잘해. 야구 잘하는 애 건들지 말고. 플레이볼~”

주심님, 감사합니다.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나이다.

- 3구 타격, 파울. 배트가 부러졌습니다.

- 슬라이더가 짧게 잘 떨어졌어요. 타자가 커트한 것만도 대단한 거예요.

아우 씨. 아까 홈런 쳐서 기분이 좋아진 방망인데 부러졌다. 잽싸게 덕아웃에 가서 새 방망이를 들고 왔다.

- 4구 타격, 파울. 또 배트가 부러졌습니다.

- 김혜산 선수, 공 좋아요. 이번 시즌 2차 3번 투수거든요. 어린 선수가 공을 씩씩하게 던지네요.

저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놈이 제법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던진다. 몸쪽으로 붙어와서 빠르게 대응한다고 하는데, 공회전이 좋아서 그런가 계속 배트 안쪽을 맞으면서 배트가 부러진다.

35인치 배트 주문 제작인데… 다 분질러 먹겠네. 내일도 경기해야 하는데.

안 되겠다. 나도 빌려오자.

무작정 덕아웃으로 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제일 좋아 보이는 배트에 손을 뻗었다.

“야! 안 돼! 안 돼! 그건 안 돼! 그거 하나 남았어! 안 돼! 나 다음 타석에 써야 해!”

배트를 뽑아 들지도 않았는데 덕아웃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거 형. 후배가 쓰겠다면 좀 빌려줘. 내가 사줄게.”

“안 돼! 저거 수제라고! 주문 넣었는데 내일모레나 돼야 온단 말이야. 나 저거 없으면 못 쳐! 소전아, 내가 오늘 밥 사줄 게 저건 봐줘라.”

내가 뭘 먹을 줄 알고 밥을 사주신데? 인천에 뭐가 맛있더라? 시청 앞에 비싼 한정식집 있는데 경기 끝나고도 하나?

오늘 얻어먹을 비싼 밥을 생각하며 급한 대로 내 배트 케이지에 들어 있는 일반 배트를 꺼내 들었다.

이런… 이거. 그 XX가 준 건데…….

지난 시즌 1군에서 쫓겨날 때 나 대신 올라간 최강훈이가 선물이라며 준 배트. 연습용으로 들고 다니는 게 지금 손에 잡혔네.

아, 몰라. 그래도 기본은 되는 배트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김소전 다시 타석에 들어서서 5구 맞겠습니다.

5구, 타격. 우익수 앞에 안타!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황경철 3루 돌아 홈. 득점! 랩터스 11점을 만들어 냅니다.

- 오늘 김소전 아주 좋아요. 벌써 3안타 경기죠. 1번 타자로 나와서 자기의 역할을 120%를 해주고 있어요.

- 김소전, 오늘 3안타 3루타 하나. 만루 홈런 하나. 그리고 깨끗한 우익수 앞 단타. 선수가 알지 모르겠지만 사이클링 히트까지 하나 남았습니다.

- 그렇죠. 2루타 하나 남았네요. 이제 3회에요. 기대를 해봐도 되겠어요.

앗싸. 타점이다. 오늘 5타점 경기. 연봉 오르는 소리가 짤랑짤랑 들리는구나. 1번이 좋네. 나는 1번이랑 잘 맞는 거 같다.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동안.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간 뒤 타자들이 차례로 아웃을 헌납하며 이닝이 끝났다.

1루에서 장비를 코치에게 벗어주고 수비 나오는 선수가 글러브를 가져다주길 기다린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우익수가 가는 길에 글러브를 가져다줄 줄 알았는데 3루수 주장 라정안이 친히 2루 베이스 가까이 와서 장비를 건넨다.

“잘하라고 인마! 형이 글러브에 기 좀 불어넣었다. 가봐.”

그럼요. 저야 어련히 잘하겠습니까.

글러브를 가져다준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수비하러 뛰어갔다. 오늘 잔디도 쫀쫀하니 아주 마음에 든다.

- 랩터스 오늘 수비도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회에 빗맞은 내야 안타 하나 말고는 드래곤스 타자들, 공에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 이시윤 선수, 제구가 완벽한 선수가 아닌데 오늘은 제구마저도 훌륭해요. 드래곤스는 오늘 힘든 경기네요.

에이스가 나와서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경기.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편하기 그지없다. 괜히 억지로 뭐 하나 더 해보겠다고 아등바등 안 하고 순리대로만 해도 충분한 경기.

중견수 자리에서 편안히 선발 투수의 투구를 감상한다.

- 삼진. 투 아웃. 3회 투 아웃까지 삼진 네 개를 뽑아내고 있는 이시윤!

- 저런 공은 칠 수가 없어요. 타자 무릎을 완벽히 파고들어 가는 공이거든요. 타자 배트가 나오지도 못했어요.

- 자, 이제 타순이 한 바퀴 돌았습니다. 1번 타자 김민구.

한 바퀴는 투수가 힘으로 찍어 눌렀고 이제 두 바퀴째인데 투수가 어떻게 던지시려나.

- 스윙,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스트라이크 두 개가 올라갑니다.

- 오늘 구위가 너무 좋네요. 이럴 땐 힘으로 이겨 내려고 하지 말고 우선 맞혀야 할 거 같아요. 힘 대 힘으로는 어렵겠습니다.

편안하다. 편안해도 너무 편안하다. 투수가 찍어 누르니 할 일이 없구나.

회사에서 월급 도둑질하는 기분이 이런 거겠구나.

- 3구, 쳤습니다. 빗맞은 타구 내야, 내야. 잡을 수… 잡을 수… 중견수 김소전! 잡았습니다. 쓰리 아웃. 김소전 텍사스성 타구를 잡아냅니다.

- 이건 아무도 못 잡는다고 봤거든요. 김소전의 첫발. 첫발 스타트가 정말 어마무시하네요. 감독 머리 좀 아프겠어요.

아오, 저 배트 각도가 이상하다. 저 봐, 저 봐. 저럴 줄 알았어.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지 못하고 그대로 던져 버린다.

저건 무조건 힘이 안 실린다.

달려든다. 타자의 배트가 나오는 걸 보고 앞으로 뛰었다. 빗맞으면서 애매한 타구가 애매하게 높이 떠서 애매한 위치로 낙하한다.

“비켜! 마! 마! 마! 마! 마!”

공만 보고 몰려드는 내야수들을 향해서 소리를 치고 앞발을 높이 들면서 미끄러져 들어간다.

타격에서 별다른 기술이 없었지만 수비할 때 앞으로 달려들면서 안 다치고 공을 잡는 내 시그니처 슬라이딩이다.

턱!

글러브에 공이 걸렸다. 미끄러지는 탄력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야간 경기 새까만 하늘.

폭신한 잔디 위에 누워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야구. 재밌다.

일어나려는 나를 백업 들어온 2루수 민수경 선배가 손을 당기며 일으켜 세워 준다.

등록 선수 최단신 민수경. 키는 내 반만 한 선수가 낑낑대며 나를 끌어당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 혼자 일어날 수 있지만, 선배가 도와준다는데 마다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선배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잘했어, 내 새끼.”

진짜 내 허리에나 올 만한 꼬꼬마 선배가 조막만 한 손으로 내 궁디를 팡팡해 준다.

저… 선배……. 이뻐해 주는 건 알겠는데……. 그림이 좀… 별로 일 거 같아요.

오랜만에 조용히 4회가 넘어가고 5회 2사 주자 없이 다시 타석에 나간다.

바뀐 투수는 우완. 오늘 왼손 투수 공도 잘 보이는데 패전 처리 오른손 투수는 뭐……. 오늘 스탯 제대로 세탁한다.

“소전아. 3루 갈 수 있는데 괜히 2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애한테 좋은 거 알려준다, 진짜. 소전아. 홈런이 나오면 2루까지는 밟고 3루를 밟지 말고 홈을 밟아. 그러면 2루타야.”

“그게 뭔 소리야! 야구를 열심히 해야지!”

“아이고, 이 형이 이래서 세상을 어찌 살아. 비난은 짧고 기록은 영원하다. 몰라?”

“어쩐지 네놈이 그래서 역대 병살 1위구나. 기록 때문에 일부러 한 거였어.”

“지금 그 말이 왜 나와! 잘 치니까 2루 땅볼이 많아서 그런 거잖아!”

“아, 발은 빠른데 일부러 천천히 뛴 거였어? 그랬어?”

야구 선수로 치면 환갑이 지나가시는 노인분들이 덕아웃 뒷자리를 노인정 삼아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의 내 기록. 3루타, 홈런, 안타.

2루타… 하나 남았네.

대기 타석에 들어가려다 말고 몸이 굳어 버린다. 내가 그걸 할 수 있다고?

사이클링 히트, 히트 포 더 사이클. 한 경기에 안타-2루타-3루타-홈런을 전부 때려 내는 기록.

세이버메트릭스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대단한 기록은 아니고 운이 좋았던 거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 운이 오고 잡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한 경기에 4안타 경기만 만들어 내는 것도 대단한데 사이클링 히트라니…….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2루타. 무조건 친다.

“그냥 좀 들어가. 형 공 받기도 힘들다. 경기 빨리 끝내자.”

“안 됩니다. 저 오늘 해야 할 게 생겼습니다.”

“11 대 0에서 뭘 더 해? 가만히 삼진 먹고 들어가.”

“2루를 가야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꼴통 XX. 사이클링 히트 하겠다고 상대 팀 포수한테 도와달라면 내가 도와주겠냐? 싫어, 인마. 그냥 걸어 나가.”

후배의 간절한 마음을 몰라주는 포수가 투수에게 멀리 도망가는 공을 주문한다.

- 초구 볼. 많이 빠졌습니다. 거르려는 걸까요?

- 지금 기록을 보면 3루타-홈런-안타가 나왔거든요. 대기록까지 2루타 하나가 남았어요. 투 아웃에 주자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싫어도 드래곤스는 승부를 해야겠죠.

패전 처리로 올라온 투수에게도 딱히 투쟁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포수의 리드에 맞춰 최대한 정확히만 던지겠다는 모습. 결국은 포수를 설득해야 한다.

“하나 주세요. 2루까지만 가겠습니다.”

“미친X. 넌 그냥 걸어 나가.”

2구. 1구보단 조금 안쪽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멀다.

- 박승도 선수, 갑자기 제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 김소전 선수가 나오면서부터 제구가 흔들리지요. 하위 타선과 상위 타선의 무게감이 이렇게 다릅니다.

“살짝 칠게요, 살짝. 아니, 그냥 2루만 돌고 3루는 천천히 가다 죽을게요. 하나 주세요.”

“한마디만 더하면 나 일어나서 받는다. 조용히 나가.”

공을 때리고 싶어도 때릴 수 있는 공을 던져 줘야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도망가면 타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자포자기. 그냥 조용히 나가야겠다.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으니 공이 한가운데로 날아온다. 던지는 순간 흔들리는 투수의 눈빛. 이건 실투구나.

긴장도 안 하고 몸에 힘을 빼고 있다가 날아오는 공을 향해 스윙을 시작한다. 가운데 몰린 공을 완벽한 타이밍에 펜스까지 날려 보낸다.

욕심이 없는 삶. 명상의 힘이 이렇게 발휘된다.

- 펜스 직격. 타자 주자 2루까지. 2루까지 들어갑니다. 김소전 2루타. 5회 초 랩터스의 김소전 선수가 사이클링히트를 완성합니다.

너무 잘 맞았다. 너무 잘 맞은 타구가 뜨지도 않고 라이너로 날아가 펜스를 직접 때리고 떨어졌다.

3루를 바라보긴 했지만, 2루에서 멈췄다. 타구가 너무 빠르고 드래곤스의 중계 플레이가 완벽해서 멈췄다. 절대 기록에 욕심이 있어서 멈춘 게 아니다.

1루 측 홈 팀 관중석이 침울한 가운데 3루 측 원정 관중석은 북치고 나팔 불고 미쳐 날뛴다.

몇몇 소수의 단장 아웃 마스크를 착용한 얼빠들은 여전히 냉랭하지만, 걔들을 제외하고는 내 이름을 목이 터지라 외쳐 주고 있다.

야구 잘하니까 이런 기분이구나. 2루에 들어가 타임타임을 부르고 내 보호 장구를 받으러 온 1루 코치가 축하한다며 등을 토닥여 준다.

나도 모르게 코치님을 안아버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프로에 와서 뭔가 큰 기록을 남긴 적이 없는데, 나도 이제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뭔가가 생겼다는 마음에 감정이 복받친다.

당황하면서도 내 등을 토닥여 주는 코치님. 감정을 진정시키려 다시 코치님을 꽉 끌어 안았다.

“타자 아웃! 공수 교대.”

주심의 아웃 콜에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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