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48화 (48/464)

# 48

48화 악마의 뇌, 악마의 혀 (1)

뉴욕에서의 회동 이후 독자 노선을 주창한 리숭민의 초기 기세는 막 LA로 거점을 옮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압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리숭민의 파워는 점점 약해졌고,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소수파로 변해갔다.

- 1995년. 독립50주년 기념 KBS다큐멘터리.

‘2차대전 속의 한국 국군. 그리고 정부의 비사’ 2화, ‘로스앤젤레스’의 내레이션 한 토막.

*    *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에 도착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의 주둔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은 소란스러워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상모략을 당해 강제로 축출되었다고 주장하는 리숭민은 ‘자유 대한 독립당’이란 단체를 만들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리숭민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임정을 지지하는 안창호 계열과 리숭민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충돌은 점점 격화되어갔다.

결국 미국 내 한인사회가 반절로 쪼개질 위기에 처하자, 김백은 리숭만에게 사람을 보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김백의 제안에 리숭민은 짧게 대답했다.

“정길수를 쳐내기 전까지 공존은 없다.”

리숭민의 대답에 김백은 난처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임정 내에서도 정길수와 고 제독으로 상징되는 21세기 한국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이를 자신들이 우위를 차지할 기회라고 여긴 이들은 거세게 김백을 압박했다.

“정길수를 쳐냅시다! 리숭민이 합류한다면 좌익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사소취대란 말이 달리 있는 것이겠습니까 ”

“저 어린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하지만 김백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봅시다.”

사실 김백은 리숭민을 좋아하지 않았다.

초기 임정시절에도 독불장군으로 유명했고, 단재 같은 이들은 리숭민을 또 다른 매국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리숭민이 다시 임정에 합류하면 가까스로 봉합한 임정 내부의 계파갈등이 또다시 타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취약한 자신이 리숭민에게 밀릴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정길수라는 존재가 자신과 임정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출발하기 전날 임정 각료회의에서 정길수는 자신에게 정식 직함을 줄 것을 요청했다.

“조금 생각을 할 시간을 주겠나 ”

시간을 번 김백과 각료들은 밤을 새가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생각과 달리 정길수를 제거하고 난 빈자리를 채울 인재가 없음을 알게 된 김백과 각료들은 결국 정길수에게 자리를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전시정부 통합정무 수석차관.

정 길 수.

‘전쟁이라는 국가비상사태에서의 국정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정부의 모든 부처 실무진을 통합 관리하는 수석차관’이라는 전무후무한 자리였다.

“민주주의 정부에서 이런 식의 몰아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전시 한정일세.”

김백의 짧은 대답에 정길수 역시 짧게 응수했다.

“최대한 빨리 제 직함 앞에 붙은 통합이라는 글자를 지우겠습니다.”

나중에 이 대화를 알게 된 벌레와 빨갱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권력이 어떤 것인 지 잘 아는 네가 그런 자리를 마다해 개가 똥을 끊지….”

“새끼들아. 나도 오래 살아야할 것 아니냐. 그리고 이미 준비는 다 해놨어.”

그리고 임정이 LA에 자리를 잡고 정부의 짜임새를 갖춰가면서 정 수석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벌레와 빨갱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서운 새끼!”

정 수석 차관의 준비는 자신과 함께 온 필코 마이닝의 실무진들을 정부의 각 부처의 실무진으로 박아넣어 ‘필코 마이닝화’ 시켜버리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리숭민은 같이하고 싶지 않은 이였기에 김백은 리숭민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단을 내린 김백은 정 수석차관을 불러 상황을 이야기하고 해답을 요구했다.

“…해서, 나는 리숭민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네. 하지만, 리숭민을 따르는 동포들의 반발이 걱정되는데 답이 있겠나 ”

김백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속담 말입니다.”

*    *    *

리숭민의 선전포고에 대한 정 수석차관의 응전은 ‘돈 풀기’였다.

정 수석차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투자회사의 설립이었다.

“투자회사 돈이 있나 ”

“설계도 팔아 번 돈이 있습니다.”

M47패튼의 설계도를 팔아 챙긴 500만 달러에서 우선 200만 달러를 빼내서 ‘KORAM Capital'이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한 정 수석차관은 우선적으로 한국군이 사용할 피복을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규모 이상의 자동차 정비소들을 인수해 한국군이 사용할 차량들의 개조를 떠맡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정 수석팀장은 LA에서 유명한 변호사와 회계사들을 회사의 간부로 고용했다.

그리고 그들이 부릴 중간 간부들과 회사원들의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텃세와 인종차별에 밀려 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 한국계 교민들로 채워 넣었다.

그 결과, LA지역 한인사회에서 임정에 대한 지지 세력이 점점 덩치를 키워갔고 충성도 또한 강화되기 시작했다.

“사업체 고용 현황을 보니 자리가 좀 남았는데, 자리를 비워 둔 이유가 있는 것인가 ”

임시 정부 각료회의에서 보고를 받은 김백의 질문에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자리에는 흑인들을 중점적으로 채울 예정입니다.”

“흑인들을 ”

“예. 어차피 미국의 계층 구조를 보면 백인과 기타 유색인종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백인, 그 다음이 흑인, 그리고 아시아와 히스패닉 등과 같은 기타 인종으로 서열이 나뉘게 됩니다. 이 서열은 특히 도시지역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미리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비워둔 자리의 절대 다수는 최하층 노동자들 아닌가 ”

“세계 어디를 가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지금의 자신들보다 더욱 나은 위치로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최하층의 노동자지만 그들은 우리가 준 월급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세운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 이들은 우리를 좋게 볼 것이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우리들을 좋게 보겠지요. 그리고 세대가 지나면 한국에 우호적인 정치적 지지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자리를 잡게 될 한인들만으로는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했네.”

정 수석차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김백과 각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백과 각료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본 정 수석차관은 초대장들을 꺼내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행사에는 꼭 참석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무엇인가 ”

“저희 가운데 한명이 이번에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아, 그 친구 ”

정 수석차관의 설명에 김백이 아는 체를 하고는 초대장을 펼쳤다.

“'Park Energy& Electric'이라… 꼭 참석하지.”

사흘 뒤, LA외곽의 공장지역에서 나름 성대한 창업식이 열렸다. 50만 달러라는 거액이 투자된 대형 공장이었기에 캘리포니아 주 부지사와 LA시장, 그리고 LA지역의 유지들까지 참석한 행사였다.

정 수석차관이 물 만난 고기처럼 바쁘게 움직이며 김백을 비롯한 임정의 각료들과 캘리포니아와 LA지역 정치인들과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동안, 벌레와 빨갱이는 박인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돼지머리 갖다놓고 고사라도 지내면 좋겠지만, 1942년의 LA에서 그랬다가는 당장 난리가 날테니, 그게 좀 아쉽네. 어쨌거나 사업 잘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네 사업체가 제일 큰 한인사업체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친 친구들 자리 마련해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 제 동료들 아닙니까 ”

“진짜 고맙다. 고마워! 내가 꼭 술 한 잔 사마!”

진심으로 박인수에게 감사를 표하는 벌레와 빨갱이였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짧은 전투에서 중경상을 입은 10명 가운데 4명이 영구적인 신체 손상으로 인해 전투불가 판정을 받았다. 실의에 빠진 그들을 위해 원 수석치프와 송 사장을 비롯한 필코 세이프티의 간부들은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고민 끝에 미국 본토에서 보급과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4명 가운데 두 명은 그 자리를 고사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시작할 돈은 있고 ”

“…….”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벌레와 빨갱이는 창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던 인수에게 부탁을 했다. 부탁을 받은 인수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고, 두 사람을 총무와 재고 관리 매니저로 고용했다.

한참동안 감사의 인사가 오가고 난 다음에야 벌레와 빨갱이는 인수의 사업을 화제로 올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걸로 사업을 할 생각을 했냐 ”

“동감이다. 건전지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건전지는 전자 공학이 아니라 전기 공학 아냐 ”

“그게 중학교 때 기술 과목 선생님이 애들 잠 깨라고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말이에요…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필리핀에서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그 때 그렇게 동동 떠다녔던 거냐 ”

“아하하하….”

“어쨌거나 돈은 될 것 같냐 ”

빨갱이의 물음에 인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미국 시장에 팔리는 건전지들과 달리 누액이 거의 안 되고요. 생산단가도 싸요. 시장성은 좋습니다. 특히나 한국군에서 구매를 결정해줘서 당분간 버틸 힘도 생겼고 말입니다.”

“그럼 네가 우리한테 술을 사야 되는 것 아냐 ”

“그런가요 아하하하!”

박인수가 특허를 등록-등록하기 전 확신을 구하고자 시중에 파는 건전지들을 종류별로 구해 단면을 확인해야 했다-하고 생산을 시작한 건전지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는 박물관급 구식이지만 1942년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패러다임을 부순 신제품이었다. 기존 건전지의 단점이던 누액의 발생을 획기적으로 줄임과 동시에 고가재료인 아연의 사용량을 줄여 단가까지 낮춘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당연히 한국군이 구매를 확정지었고, 누액의 발생을 줄였다는 점에서 미군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19세기 말에 상품이 나오기 시작한 건전지인데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한 사람들이 없었을까 ”

인수가 처음으로 아이템을 공개했을 때, 벌레와 빨갱이가 동시에 품은 의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정 수석차관이었다.

“싸니까. 그리고 누액 같은 문제는 조금만 신경 쓰면 되니까. 그리고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건전지가 들어가는 제품들 대다수가 랜턴 같은 싸구려 전기제품들이니까.”

*    *    *

정 수석차관이 말한 ‘돈 풀기’의 효과는 예상보다 빠르게 그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 고정적인 급여가 나오는 일자리가 생기자 많은 한인들이 리숭민의 ‘자유 대한 독립당’의 조직에서 빠져나와 임정 쪽 조직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3년 말 무렵이면 리숭민은 극소수의 친위 세력만이 존재하는 소수파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1942년 현재, 단지 리숭민의 세력이 약해졌을 뿐 그렇게 될 거라고까지 예측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 수석차관만 제외하고는.

*    *    *

“LA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이리 주게.”

비서관이 가져온 보고서의 내용을 죽 읽어 나가던 FBI의 후버 국장은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로군.”

서류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에드가 후버 국장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길수, 그자… 악마의 뇌라도 가진 건가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