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28화 (28/464)

# 28

28화 미루고 싶었던 조우 (1)

2차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아시아계 미국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미국사회, 정확히는 주류 백인 집단의 시각변화가 생겼다.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과 전쟁에 참전했던 소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그 변화로 인한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 대한민국 해군 9전단 소속의 군의관이라는 점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통령 전속 의학고문’의 자격을 받고 활동을 한 류호섭 중령, 이 한 사람이 없었다면 루스벨트가 마지막 임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의학계의 정설로 남아있다. 그리고 류 중령, 그 한사람으로 인해 이후 워싱턴의 정가와 미국의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져 버렸다.

- 2005년. 2차 대전 종전 60주년 특집 BBC 다큐멘터리.

‘2차 대전 음모론의 총아, 대한민국 해군 9전단’의 5화 ‘그들이 가져온 것- 대격변’의 내레이션 한 토막.

*    *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한반도함의 의무실 지휘장교인 류호섭 중령의 근황을 짧게 표현하자면 위와 같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루스벨트의 건강진단을 진행한 류 중령은 루스벨트와 매킨타이어 소장의 요청에 의해 워싱턴 D.C로 납치에 가까운 초빙을 당해야 했다.

워싱턴D.C.에서 자신을 초빙하고자 한다는 소리에 류호섭 중령은 고 제독에게 달려가 읍소를 했다.

“장비도 없이 청진기 하나 가지고 거기 가서 제가 무얼 하겠습니까 ”

“그러니까 자네가 가야 하는 걸세. 자네가 제일 경험이 많지 않은가 ”

“무리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선 꼭 해야 하는 일이야. 부탁하네. 워싱턴에 튼튼한 줄을 만들어야 앞으로가 편해져.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게 최우선으로 지원해주겠네.”

“…알겠습니다.”

고 제독의 간절한 부탁과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류 중령은 결국 보따리를 싸서 워싱턴으로 향해야 했다.

“이것이 텃세인가!”

워싱턴에 들어간 후 받은 첫 느낌은 백악관에 거주하는,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의사들의 적대적인 반응이었다.

‘아시아의 촌놈이 뭘 알겠어 ’

‘돌팔이 아냐 ’

‘매킨타이어도 다 됐군.’

차라리 저런 험담을 뒤에서나 하면 되었을 것을, 면전에서까지 듣게 된 류 중령은 이를 악물고는 샌프란시스코로 전보를 쳤다.

- 내 선실과 진찰실에 있는 서적들 다 보낼 것. 관련자료 찾을 수 있는 한 확보해서 보낼 것. 초음파 스캐너도 보낼 것.

백악관의 전신실을 나온 류 중령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젠 전쟁이다!”

*    *    *

자신이 배운 지식과 그동안 쌓아온 치료경험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거기에 루스벨트의 ‘대통령 전속 의료 고문’ 겸 ‘차석 주치의’라는 후광이 더해지면서 류 중령은 3월이 다 가기 전에 확고부동한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류 중령은 시간을 잃었다.

백악관에서 루스벨트의 상태를 살피거나 미국 의학계 원로들과 학술토론을 벌이고, 주말에는 워싱턴 정가의 이름난 이들을 상대로 왕진을 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던 류 중령은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자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내 낙이지….”

일주일에 한번 워싱턴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가하게 저녁을 먹는 것이 류 중령의 유일한 낙이었다.

“류 중령 아니신가! 이 자리에서 보다니 반갑구먼!”

“안녕하십니까 그레이브 상원의원님.”

초로의 백발신사가 인사를 건네자 류 중령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화답했다.

“이거, 중령의 처방을 따랐더니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아. 아주 고마우이.”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다 의원님께서 여태까지 건강관리를 잘 하신 덕이지요.”

서로에 대한 좋은 소리만 가득한 대화가 이어지던 가운데 그레이브 상원의원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로군. 그렇지 않아도 중령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싶은 이가 있어서 언제가 좋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Mr.리! 이쪽으로 오시게.”

“반갑소이다….”

옛날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고풍스런 한국말을 하며 나타난 백발의 노인을 본 순간 류 중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 리숭민이오.”

어떻게 저녁을 먹었는지도, 어떻게 백악관에 마련된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던 류 중령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이나 계속하고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가다듬은 류 중령은 숙소를 나가 지나가는 백악관 직원을 붙잡았다.

“샌프란시스코로 전보를 보내고 싶은데 전신실 지금 사용 가능합니까 ”

“지금 말입니까 ”

“지금 당장.”

류 중령의 단호한 목소리에 직원은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죠.”

그날 밤, 샌프란시스코.

세 들어 살고 있는 미 육군 항공대 기지의 전신국에서 보낸 전령이 고 제독을 찾아왔다.

“워싱턴에서 전문입니다.”

“고맙네, 하사.”

전령을 내보내고 전보의 내용을 확인한 고 제독은 혀를 찼다.

“쯧. 예상은 했지만….”

고 제독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당번병을 불렀다.

“가서 정 수석팀장을 좀 불러오게.”

-LSM contact. Help. ASAP.

“류 중령의 지원요청이로군요.”

전보의 내용을 확인한 정 수석팀장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수석팀장의 말에 고 제독은 계속해서 혀를 찼다.

“그렇게 피해왔는데 결국은 만나게 되었군.”

“당연한 일이겠지요. 간단히 표현해서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의 절반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명함까지 파가지고 다닐 정도의 정치적 야망도 있는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임정은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까 ”

“2월 20일 중경을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 아직… 답답한 노릇이지.”

임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답답해지는 마음을 풀기 위해 물을 연거푸 마신 고 제독은 말을 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함대가 출항을 해야 하는데. 갔다 돌아오는 동안 이 작자가 무슨 농간을 벌일지도 몰라 걱정일세.”

“차라리 함대가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함대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쓸데없는 접근을 막을 수 있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준비가 되는대로 다시 워싱턴을 가야겠군요. 육군 재건문제도 있고, 맨하탄 프로젝트도 있고 말입니다.”

“나도 이번 출정 건과 육군 재건문제로 워싱턴에 가야 하는데, 이틀 안으로 가능하겠지 ”

“…가능할 겁니다.”

언제나 높으신 분에 맞춰야 하는 아랫사람의 비애를 느끼는 정 수석팀장이었다.

*    *    *

“젠장… 거머리가 따로 없어.”

백악관의 휴게실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던 류 중령은 리숭민을 떠올리며 박박 이를 갈았다.

얼마 전,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리숭민은 류 중령과의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숭민이 류 중령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진주만 공습이 있기 전에 출간한 ‘Japan inside out'이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예언서‘ 취급을 받으며 히트를 친 덕에 리숭민은 워싱턴 정가에 얄팍한 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야망이 강했던 리숭민은 더욱 강하고 튼튼한 끈을 얻고 싶었다.

“미국이 참전하기로 한 이상,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단지 시간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야. 패전을 한 일본은 조선을 토해내야 할 것이 분명하고, 내가 조선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하고 튼튼한 인맥을 만들어야 해.”

미국 정가를 상대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노심초사하던 리숭민의 귀에 대한민국 9전단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다.

리숭민의 추종자가 처음 9전단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을 때 리숭민은 코웃음을 쳤다.

“대한민국 해군 9전단이라고 임정에 해군을 만들 능력이 있다고 보나 삼류 언론의 거짓기사에 놀아나지 말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용감한 퇴각(brave retreat)’이라 불리게 된 맥아더의 필리핀 철수과정에서 9전단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기사가 주요 언론에 실리게 되자, 사실임을 확인한 리숭민은 하늘을 보며 만세를 불렀다.

“하느님이 내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하지만 리숭민이 제 9전단과 접촉은 쉽지가 않았다. 1월 중순이 되면서 9전단이 맥아더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것이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들을 환영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은 리숭민은 환영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계속해서 불발로 끝나버렸다. 그 이후, 9전단의 함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군항과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육군항공대 기지를 찾아가 면담을 요구했지만 경비를 담당한 미군은 이를 불허했다.

답답해진 리숭민은 그동안 친분을 쌓은 정치인들에게 찾아가 하소연을 했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9전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외부와의 접촉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 역시 임시정부의 요인이오!”

리숭민이 강하게 어필을 했지만 미국의 정치인들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9전단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

계속해서 접촉이 무산되자 리숭민은 9전단의 존재에 대한 의심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그들이 왜 나를 배척하는 것인가 진짜 임정의 군인들인가 아니면 미국의 위장부대 ’

의심에 빠진 리숭민이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하원의원 한 명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거 아시오 대한민국 9전단의 의무장교 한명이 백악관으로 왔답니다. 그것도 꽤 높은 자리로 왔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

정보를 얻은 리숭민은 그 의무장교와 만나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모조리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들어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점점 더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9전단의 군의관이 루스벨트의 차석 주치의라고 거기에 루스벨트의 건강을 호전시켜 ”

“그 콧대 높은 미국의 의사들이 그 사람 앞에만 가면 설설 긴다고 아니, 노트까지 펼쳐놓고 필기하느라 바쁘다 ”

“9전단이 가지고 온 영상물과 동행한 여성 가수들이 백악관을 녹였다 영부인과 펄 벅이 아예 매니지먼트를 전담해서 상류 계급의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 ”

하나씩 새로운 소식들이 들어올 때마다 리숭민은 점점 더 필사적이 되어갔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엮어낸 끈 가운데 가장 굵직한 끈인 그레이브 상원의원을 찾아갔다. 그동안 쌓아온 친분과 한인동지회를 통해 확보한 정치자금을 통해 리숭민이 얻은 것은 류 중령의 단골 레스토랑에서 류 중령과 ‘우연한’ 만남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식사자리에서와 그 이후에 보여주는 류 중령의 반응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만나자는 의사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류 중령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리숭민을 피하고 있었다. 결국, 리숭민은 사석에서 분통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 리숭민이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석이고 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대표란 말이다!”

분노한 리숭민은 한인신문에 격노에 찬 사설을 써댔지만, 결국은 작디작은 한인교포 사회 속에서만 난리가 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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