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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47화 (147/170)
  • 147화

    “우리에게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나는 케투훌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내 물음에 눈을 착 내리깔며 답했다.

    “그들은 마물 수십 마리를 데리고 와서 그리 물었습니다. 당연히 제안이 아니라 협박하는 모양새였지요.”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우리도 놈들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마물들을 이끌고 있다지요. 그런 놈들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건 우리가 마물이나 다를 바 없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형편이 안 된다는 건 놈들이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는 뜻이겠군?”

    전략가든, 놈의 부하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이들을 그냥 놔뒀을리 없다.

    케투훌도 당장은 형편이 안 된다고 했었고.

    “그렇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저희에게 두 가지 조취를 해 두고 떠났습니다.”

    케투훌은 자신의 소매를 걷어 보였다.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그의 손목에는 ‘표식’이 있었다.

    일전에 화린이 당했던 바로 그 표식이었다.

    “이 산을 벗어나면 바로 이곳을 쓸어버리겠다더군요.”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우선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이어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랑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산의 뒤편에 대기하고 있는 마물의 군대지요.”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그냥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날 리가 없다.

    “그냥 물러난 게 아니군. 포기하길 기다렸다가 바로 집어삼키려는 거였나?”

    “그렇습니다. 저희가 이 산에 머물고 있다고는 하나, 바깥과 아예 교류가 없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전사들의 불만이 상당히 크지요.”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머물고 있다면 모를까, 강제로 갇혀 있다면 그 답답함은 더욱 커지리라.

    특히 이들은 그 ‘호전성’으로 유명하지 않나.

    남에 의해 그런 걸 강요당하는 것 자체가 큰 굴욕이었을 거다.

    앞에 있는 대주술사 쿠훌린의 영향력이 커서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결국,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시간 문제겠군.”

    “그렇습니다.”

    쿠훌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표식과 마물 군대.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긴 했지만…….

    ‘운이 좋군.’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이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따라오리라고는 생각 안 했다.

    어느 정도는 협상할 생각으로 온 것인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상대방에게 확실히 빚을 지워 둘 수 있지 않나.

    ‘뭣보다 전략가에게 훼방을 둘 수 있으니 더더욱 좋고.’

    놈이 마물 군대에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세력을 늘리려는 걸 알았다.

    게다가 그 짓을 하는 걸 바로 앞에서 목격했는데 마땅히 방해를 해 줘야 하지 않겠나.

    난 쿠훌린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 두 가지만 해결해 주면 되겠나?”

    내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부족원들을 모두 한곳으로 모으고, 마물 군대의 위치를 알려 줘.”

    그는 전보다 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뭔가를 시작하려는 줄은 몰랐나 보다.

    뭐, 깔끔하게 오늘이 지나기 전에 끝내고 푹 쉬는 게 편하니까.

    * * *

    “케르르를.”

    “케루?”

    너른 공터에 모인 고블린들이 저들끼리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난 임시로 마련된 단상의 의자에 앉아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이곳의 고블린들은 우리 고블린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지금 우리 고블린들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덩치나 신장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초반에는 그리 강인한 느낌은 아니었다.

    호리호리하고 키도 작다고 해야 하나.

    반면에 이곳의 고블린들은 키는 작긴 하지만, 뭔가 근육도 탄탄하고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산양을 타고 다녀서 그런지 유난히 허벅지가 굵기도 하고.

    ‘전사’ 느낌이 강하게 드는 고블린들이다.

    하긴 사람도 국가, 인종, 지역별로 다 생김새가 다른데 이들이라고 다를 리가 있나.

    난 인원이 다 모였다는 얘기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린을 처음 만났을 때는 표식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억누르는 것에 그쳤을 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웅-

    난 힘을 끌어 올렸다.

    파츠츠-

    전격이 튀어 오른다.

    웅성거리던 공터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난 날 올려다보는 고블린들을 보며 손을 뻗었다.

    과거 표식을 억눌렀던 기본 원리는 표식의 구동부에 내 힘을 끼워 넣어 그 효력을 약화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콰르르르릉-

    구동부에 내 힘을 밀어 넣는다.

    전격이 공터 전체를 아우르며 퍼져 나가고, 그것은 고블린들의 몸에 새겨진 표식으로 빨려 들어간다.

    강력하면서도 섬세하게.

    힘을 찬찬히 조종해 표식을 완전히 밀어내고 그 자리를 내 힘으로 채운다.

    파앗-!

    동시다발적으로 환한 빛이 피어오른다.

    우웅-

    난 힘을 더욱 끌어 올려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을 꽉 움켜쥔다.

    파앙-!

    황금빛의 가루가 피어올랐다.

    “후우.”

    난 가볍게 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고블린들은 그제야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케르를?”

    그들은 말끔해진 자신의 손목을 더듬거리며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난 쿠훌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다른 고블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목을 확인한 쿠훌린은 나를 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렇구려.”

    쿠훌린이 당황한 것도 이해는 간다. 표식은 본래 아주 고차원적인 주술의 일종.

    그것을 파훼하기 위해선 당연히 매우 높은 수준의 주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꼭 주술을 써서 파훼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주술’이라는 것은 힘을 섬세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든 방법의 하나.

    그 힘 자체를 조종할 수 있는데 굳이 주술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 이제 마물 놈들이 모인 곳으로 가지.”

    쿠훌린은 내 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훌린은 부족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남아 있기로 했고, 아까 전 주술사와 몇몇 전사들이 안내해 주기로 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주술사와 전사들은 이미 나를 경외감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바로 부족의 뒤편으로 빠져나가 산을 탔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고 나자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했다.

    애초에 부족이 정상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상에 오르고 나자 반대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있군.”

    난 곧바로 마물들이 모인 곳을 발견했다.

    용안을 펼치고 있어서 그런지 한 곳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크룩과 케륵도 그것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

    난 주술사와 전사들에게 말했다.

    “마물들을 모두 죽이고 올 테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거라.”

    굳이 이들을 데리고 갈 생각은 없다. 방해만 될 테니까.

    “가자.”

    난 바로 등을 돌려 앞으로 몸을 날렸다.

    “예! 크루룩!”

    크룩과 케륵 또한 바로 몸을 날려 나를 따라왔다.

    바로 전력으로 힘을 발산했다.

    콰르르르릉-!

    전격이 퍼지고, 하늘은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내 몸은 허공을 날 듯이 활강한다. 한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가 뇌기가 충만해졌을 때 마물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쏟아져라.”

    우르르르르릉-!

    어느새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번쩍-!

    이어진 섬광.

    수십 줄기의 번개가 바로 지면을 강타한다.

    -키에에에에에엑-!

    곧바로 지면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역시 한 번에 안 죽는군.’

    그렇다는 건 마물이 첫 공격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소리.

    난 창을 꽉 움켜 쥐고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런 나보다 앞서서 누군가가 마물이 있는 곳에 발을 디뎠다.

    콰아아아앙-!

    정확히 말하면 마물들을 짓밟았다고 해야겠다.

    크룩은 어느새 또 능력이 진화했는지 전보다 덩치가 더 커져 있었다.

    “크라아아아아아-!”

    크룩이 함성을 지르며 발을 휘두르자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간다.

    그 아래에 있을 마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떨어져 내리는 내 시야에도 마물 수십 마리가 하늘을 나는 게 보였다.

    ‘몇백 마리는 됐겠는데?’

    난 빠르게 그들을 훑었다.

    생각한 것보다 규모가 더 크다.

    ‘단순히 이 산 하나만을 노리고 온 건 아니겠군. 다른 곳도 동시에 포섭하거나 침략하려던 건가?’

    군단 규모라기엔 수가 적고, 단순히 이곳을 노리고 왔다기엔 수가 많다.

    동시에 다른 곳을 노렸을 확률이 높다.

    -크아아아앙!

    지면에 거의 근접했을 때 어떤 커다란 마물이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놈은 크룩을 향해 뛰어오른 듯 보였는데, 애석하게도 놈은 나와 더 가까웠다.

    난 그대로 창을 아래로 내려 찍었다.

    쾅!

    -켁-!

    놈이 뛰어 올랐던 속도보다 빠르게 바닥으로 쳐박혔다.

    난 그대로 놈의 몸을 향해 착지했다.

    콰직-

    발바닥에 느껴진 기분 나쁜 촉감과 함께 놈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어디 보자.’

    여전히 마물의 수는 약 백오십은 남은 듯 보였다.

    그것도 제법 강한 놈들로만.

    아마 약한 애들은 처음 벼락을 쏟아부었을 때 다 죽었겠지.

    “마하툴! 베아! 크루테! 솔!”

    곧이어 허공에서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그우워어어어.

    바로 내 발밑에 있던 마물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케륵의 장기인 사령술이었다.

    난 주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수백의 시체를 보았다.

    ‘어마어마하군.’

    난 케륵의 성장에도 새삼스럽게 놀랐다.

    본래 그의 능력은 기껏해야 수십의 시체를 되살리는 데에 그쳤었다.

    그렇기에 약한 놈들 몇 명보다 강한 괴수 한 마리씩을 소환했던 거고.

    근데 이 정도로 성장했다면…….

    ‘거대 괴수를 수십은 부릴 수 있겠군.’

    케륵과 크룩 모두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이들이 이렇게 성장한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강해진 만큼, 이들도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기분 좋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이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게 간단한 보조만 할 요량으로.

    파츠츠측-

    아주 조금만 힘을 썼다.

    * * *

    “다 끝났다.”

    “예?”

    “끝났다고.”

    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술사에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주술사는 마물들이 있던 곳을 보고, 다시 나를 봤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통에 크룩이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확 들이밀어야 했다.

    “허억!”

    주술사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참. 첫인상과 다르게 참 마음이 여린 놈인가 보다.

    난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놈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대주술사에게 약속의 대가를 받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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