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위니가 소파에 길게 누운 채 고개를 들었다. 거실 풍경은 언제나 비슷했다. 물에 잠긴 듯 고요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우울했다.
“응. 아직 안 잤어?”
위니가 시계를 쳐다봤다. 11시…… 잠들기엔 이른 시간도,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위니는 내가 돌아오기 전에는 잠들지 않으니까.
“요즘은 일찍 들어오네.”
“별 다른 사건이 없으니까. 요즘은.”
“얼굴이…… 왜 그래?”
“별거 아니야.”
TV에선 이 시간쯤 하는 코미디 토크쇼가 한창이었다. 나를 우울한 눈으로 쳐다보던 위니가 TV로 시선을 옮겼다. 좀 전에 폭소가 한번 터진 때문이었다. 위니의 시선에서 놓여나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야? 그건?”
코미디 따위엔 별 흥미가 없는 위니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옷을 좀 샀어. 저기…… 워낙 다 낡아서 말이야.”
“옷을?”
놀라는 게 당연했다. 최근 1년 동안 새 옷이라곤 사 본 적이 없었던 데다, 쇼핑이라고 해봐야 할인매장에서도 막 입기 만만한 작업복이나 사 입는 게 고작이었던 내가 갑자기 시내에서도 옷값 비싸기로 유명한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있으니…… 사실은 내가 산 게 아니고 크롬웰이 사다가 쇼핑백 채로 떠안긴 거였지만.
“당신 것도 있어. 그러니까…….”
쇼핑백을 뒤져서 주황색 니트 셔츠를 찾았다. 내가 지금껏 위니에게 했던 어떤 선물보다도 예쁜 옷이었다. 물론 꽤 비싸기도 할 거고…….
“맘에 들어?”
위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내 마음도 조마조마했다. 실은 이것도 크롬웰이 넣어준 거였다. 위니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지만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겸연쩍었다.
“정말 예뻐.”
위니의 입가에 오랜만에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데이트 복장이 불량하다고 트집을 잡은 건 마키바 반장이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2주 전에 헤슬렘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나온 이후 딱 한번 만나서 무슨 5중주 실내악인가 뭔가 하는 음악회에 끌려가서 잠깐 졸다 나온 게 전부였다. 그날 그렇게 밍숭밍숭하게 헤어지고 나서 마키바 반장한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른다.
“이 망할 자식…… 너, 어젯밤에 잠 안 자고 무슨 짓 했어?”
헤슬렘이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며 나를 음악홀 앞에 버려놓고 휭 하니 가버리고 나서 곧바로 내 앞으로 굴러온 수사팀 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마키바 반장이 우악스런 손으로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잤는데요.”
벤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는 내 기분도 되게 이상했다. 잘된 것 같기도 하고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헤슬렘이라면 얼굴만 쳐다봐도 소화 불량이 될 것처럼 긴장이 되니까 그렇게라도 빨리 꺼져 주는 게 고맙긴 한데…… 한편으론 일방적으로 퇴짜를 맞은 기분이었다. 혹시 화가 나서 저렇게 가버린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싶은 것이…….
“그런데 왜 신성한 연주회에서 코를 곯아? 이 몰상식한 놈아!”
마키바 반장이 나를 차 바닥에 아예 내던지며 노성을 토해냈다. 5중주 실내악이란 게 하도 지루해서 잠깐 졸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적 없어요!”
내 대꾸가 떨어지자 감청담당 이토가 기다렸다는 듯 녹음테이프를 리플레이 시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바이올린 독주 파트였다.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 뭐, 거의 두 시간 가까운 공연 내내 내 귀엔 그 곡이 그 곡일뿐이었다. 클래식에 별다른 조예가 없는 건 일선 형사에겐 그다지 큰 흠이 아니다.
2, 3분 지났나? 그냥 쥐 죽은 듯 조용한 뮤직홀에 빌어먹을 바이올린만 낑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어쨌다고 이 난리냐? 슬그머니 부아가 나기 시작하는데 바이올린 독주에 한꺼번에 두 가지 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나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첼로 선율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드르렁…… 하고 코 고는 소리였다.
“헤슬렘한테서 다시 전화가 올까?”
마키바 반장이 굽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글쎄…….”
“사냥감을 꽤나 고르는 놈이잖아. 놈의 희생자 중에 저렇게 무식한 놈은 아마 없었을 거야.”
굽타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내 뒤통수를 슬슬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쪽 팔려서 살 수가 없다. 헤슬렘이 다시 전화를 해도 이젠 내가 만나기 싫다.
“너무 자책할 거 없어. 감청기가 바로 옷깃에 붙어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 코 고는 소리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거야.”
이토가 반장 눈치를 보며 슬쩍 거들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야 세상 모르고 잤으니 그뿐이지만 헤슬렘은 기분이 어땠을까……. 마키바 반장이 나를 노려보며 넌더리가 난다는 듯 온몸을 떨었다.
“헤슬렘이 이 자식을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그건 그간 저지른 살인 행각의 연장선이 아니라 그냥 열 받아서 우발적으로 그렇게 된 걸 거야.”
“그쯤 해둬.”
내 편 들어주는 건 굽타뿐이다.
“내 말이 틀려?”
“다 맞아. 그래도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감청 테이프는 아직도 끝이 안 났다. 연주회가 끝나고 예의상 쳐주는 심드렁한 박수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는 중이었다.
「어땠어?」
라고 헤슬렘이 물었다. 여태 코 곯고 자다가 박수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어…… 조, 좋았어요.」
라고 얼빵하게 대답했다. 쥐구멍이라 있으면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좋았다니 다행이지만, 나는 또 너무 내 취미대로만 끌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니에요. 저도 이런 거 좋아해요.」
마키바 반장은 이제 욕도 아깝다는 듯 체념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한동안 발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상투적인 질문인 것 같아서 이런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음악홀 로비에서 헤슬렘이 했던 말이다. 가슴이 설렐 만큼 친근한 어조로…….
「취미라든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주지 않겠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취미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런 질문을 누구한테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음엔 둘 다 즐길 수 있는 행사를 찾아봤으면 해서…….」
「죄, 죄송해요. 저는 별로…….」
별것도 아닌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버벅거리자 마키바 반장이 솟구쳐 오르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옆에 놓여 있던 빈 종이컵을 나한테 집어던졌다.
“대체 장가는 어떻게 갔냐?”
며칠이 지나도 헤슬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헤슬렘은 본래 사냥감한테 성급하게 덤비는 타입이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이 3개월 정도니까…… 약은 고양이가 생쥐 놀리듯 실컷 갖고 놀다가 싫증이 날 즈음에 해치워버리는 게 놈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니까 며칠 잠잠하다고 해서 그렇게 조바심 낼 일은 아니란 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이론과 많이 달랐다.
정말 내가 싫어진 걸까? 너무 무식하고 말도 안 통하니까 상대도 하기 싫어서…… 같이 다니는 것도 망신스러워서 그렇게 버리고 도망치듯 가버린 걸까? 이제 다시는 전화가 안 오는 걸까…… 내내 기분이 울적했다. 다 잡은 범인을 한순간 실수로 놓쳐버렸을 때처럼, 아니, 솔직히…… 짝사랑하던 여자한테 퇴짜 맞았을 때처럼.
“뭐해?”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쳤다. 돌아보니 하필 마키바 반장이었다. 옆에 비니도 같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비니가 아르바이트 나갈 시간이었다. 종일 넋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하루가 갔다.
“그냥…….”
어쩌다 보니 요즘은 헤슬렘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요상한 신세였다.
“헤슬렘한테선 연락 없어?”
비니가 반장 눈치를 슬쩍 보며 안타까운 듯 물었다. 요 며칠간 내가 반장한테 들들 볶인 건 온 세상이 다 안다. 웬만해선 다른 사람 걱정 잘 안 하는 루디조차도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잡도리를 당하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언제까지 그 자식 전화만 기다릴 거야? 놈이 안 움직이면 이쪽에서 대책을 세워야지.”
반장이 대뜸 내 뒷덜미를 움켜쥐더니 회의실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뭐 생각하고 계신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비니가 얼른 따라 붙으며 물었다. 여차하면 도움이라도 줄까 싶어 그런 모양인데……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비니의 징크스는 자신의 의지와도 무관할 뿐 아니라 반장의 주먹 따귀 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파괴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고맙다.
“꽃단장 시켜서 그 자식 집 앞에 던져 놓는 건 어때?”
“제 생각에는…….”
“뭐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반장님이 제이한테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
반장이 나를 놓고 비니와 마주 섰다. 마키바 반장은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생긴 것도 줄르 족 추장만큼이나 거칠게 생겼고, 실제 성격도 거칠다 보니 그 앞에서 까부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그런데 또 반면에 비니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도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편이었다.
“얘가 그 빌어먹을 음악회에 가고 싶어서 갔어요? 애초에 그 자식 매너가 꽝이잖아요! 데이트를 하려면 상대방 상태도 봐가면서 코스를 정해야지…… 자기 좋은 데만 끌고 다니는 법이 어디 있어요?”
비니의 어설픈 역성에 반장이 잔잔한 비웃음을 날렸다.
“연쇄살인범한테 바라는 것도 많다!”
“어쨌든…… 그런 데 가서 잠깐 존 게 죽을죄는 아니잖아요!”
“음악회는 빙산의 일각이야. 이 자식이 일에 초를 친 게 벌써 몇 번짼지 한번 따져볼까?”
이렇게 나오면 비니나 나나 할 말은 없다.
“반장님. 치사해요.”
“너, 죽고 싶냐?”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마키바 반장도 비니한테 섣불리 손을 대진 못했다. 반장이 만만한 나한테 다시 눈을 흘겼다.
“하고 다니는 짓도 그렇고, 꼬락서니도 그렇고 한심해서 정말…… 월급 받은 걸로 옷이라도 좀 사 입으면 큰일나냐?”
내 꼬락서니가 어때서? 바로 옆에 붙은 긴 거울에 얼른 전신을 비춰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무랄 데 없었다. 유행이랄까, 멋이랄까…… 그런 거 하곤 아무 상관없어서 그렇지 이 정도면 양호한 거다. 사복 경찰치고…….
“어쨌든 이제 와서 딴 놈으로 갈아치울 수도 없게 됐으니까…… 예절 교육을 제대로 받든가, 뷰티 스쿨에 등록을 하든가…… 이리 들어와 봐. 대책을 세워보자고!”
반장이 다시 내 뒷덜미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처음에야 얼떨결에 잡혀서 끌려 다녔지만 두 번은 안 되지……. 급한 대로 비니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비니를 앞세우자 마키바 반장이 본능적으로 흠칫했다.
“너 이리 안 나와?”
반장이 눈을 부라리며 곧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말로 하세요! 살인범한테도 이렇게는 안 하시잖아요!”
“연쇄살인범도 만정이 다 떨어져서 돌아서게 만든 놈한테 무슨 말이 필요해?”
진짜 인정사정없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속이 다 문드러질 지경인데…….
“이제 어쩔 거야? 그 망할 자식한테서 전화도 한 통 없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반장이 비니 머리를 확 밀어버리고 내 멱살을 다시 틀어잡는데 성공했다. 순간 울컥하는 심정에 반장한테 대들고 말았다.
“빌어먹을 전화! 내가 하면 되잖아요!”
「헤슬렘입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헤슬렘의 나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저기…… 제인데요…….”
「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고, 긴장되고…… 나도 모르게 손끝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하려고 준비해놨던 말들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저기…… 궁금해서 그냥…… 잘…… 지내시는지…….”
「잘 지내.」
“…….”
반장이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온몸으로 나를 닦달했다. 오늘 반장 손에 죽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날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전화 기다렸는데…….”
「사실, 좀 바빠.」
말투가 사무적이었다.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러세요……? 저기,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걸까요?”
「넌 어때? 잘 지내?」
“저야 뭐 항상…… 그렇죠, 뭐…….”
「다친 데는 없고?」
그 무심한 인사에 갑자기 심장에서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조금씩 다쳐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랬나요?”
긴장이 도가 지나쳐서 이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예의상 안부도 물어보고는 있지만 말투는 어디까지나 용건만 간단히 하자는 식이었다. 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태도가 변하니까 그것도 당황스러웠다.
「일하는 중이라 전화를 길게는 못할 것 같은데…….」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에 헤슬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언제 만날지…… 다음엔 제가 저녁이라도 사고 싶은 데요…….”
어떻게든 지난번에 실수한 걸 만회해보고 싶은 마음에 어설프게 덤벼봤지만 헤슬렘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미안해. 한동안은 틈이 안 날 것 같아.」
“그럼…… 언제쯤……?”
「잘 모르겠어.」
개인적으로 연애 경험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그냥…… 끝났다는 얘기다.
「지금 회의 들어가야 되거든. 나중에 전화할게.」
화가 울컥 치밀었다. 까짓 음악회, 고등학교 때 들었던 라틴어 수업보다 더 지겨운 바이올린 소리 들으면서 좀 졸았다고 이럴 수가 있나? 무안하고 당황스럽고, 막막하고…… 전화기를 손으로 틀어막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고…….
“그냥 솔직하게 얘기 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만나기 싫다고…….”
눈앞에서 손짓 발짓 해가며 쓸데없는 코치를 하던 마키바 반장이 동작을 딱 멈췄다. 말해 놓고 나서 나도 당황했다. 그리고 헤슬렘도 잠잠했다.
「……아, 미안해. 딴 생각을 좀 하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순간, 불 위에 올라간 찌개처럼 보글보글 끓던 속이 확 넘치고 말았다. 뭐가 어째? 딴 생각을 해?
“내가 말도 안 통하고, 음악이나, 그림이나…… 그런 걸 너무 몰라서 같이 다니기 쪽 팔린다고 말하면 나도 알아듣는다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리냐 하면…… 이제 너랑 끝이라고!”
그동안 내가 헤슬렘한테 잘한 건 없다. 멀쩡하게 갈 길 가는 차 앞에 뛰어 들어서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술 먹고 오바이트하고, 음악회 가서 코 골고 잤다. 만정이 다 떨어졌다고 해도 이해한다. 그런데…… 화가 치밀었다. 화가 나서 그렇게 전화를 끊기는 했지만 속이 쓰렸다. 자존심도 상하고 속상하고 섭섭하고…….
전화기를 내팽개치고 돌아서다가 간 떨어질 뻔했다. 반장이 옆에서 다 보고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마키바 반장의 얼굴은 보통 때 얼굴이랑 많이 달랐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지 저렇게 넋 나간 얼굴은 정말 무섭다.
“저, 저기요, 반장님…… 본래 데이트할 때는 작전상 밀고 당기고……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래도 친구라고 비니가 나서긴 했는데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반장은 비니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붙인 변명엔 대꾸도 없었다.
“게다가…… 제이도 화가 나니까…… 반장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이렇게 치사하게 바람맞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쁘고…… 또…….”
횡설수설하던 비니가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마세요! 반장님!”
이성을 잃은 반장이 총을 빼들었던 것이다. 난 이제 죽었다.
“야! 튀어!!”
비니가 반장을 온몸으로 덮치며 다급하게 외쳤다. 말 안 해도 튈 거다. 둘이 문 옆에서 비켜만 주면…….
“이거 안 놔? 니가 대신 죽을래?”
“진정, 진정하세요! 사람을 만나다 보면…… 싸울 일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마키바 반장이 턱을 한대 후려갈기는 바람에 비니가 말을 다 못 마치고 캑…… 비명을 삼키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뭐가 어째? 싸울 일도 있고 헤어질 일도 있어? 누가 그 자식이랑 연애를 하래?”
반장이 비니를 밀어내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변명이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별로 변명의 여지도 없었고…… 아닌 게 아니라 뭐라고 말 한마디 할 틈도 없이 인정사정없는 펀치가 날아들었다. 눈앞이 깜깜하고, 귀도 멍멍하고…… 깜빡 정신이라도 잃었던지 눈을 떠보니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반장이랑 비니는 바로 옆에서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반장이 명백한 살의를 품고 움켜쥐고 있는 총을 비니가 힘겹게 뺏어 들었다.
“글쎄, 이제 금방 전화가 올 거라니까요!”
“전화는 개뿔…… 그 자식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머저리한테 전화를 해?”
얼굴 반쪽이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총에 맞아도 이렇게 아프진 않겠다. 내가 정신 차리고 꿈틀거리는 걸 본 반장이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비니가 몸을 날려 반장 옆구리를 잡아챘다.
“일주일 안에 분명히 전화가 온다니까요? 본래 연애는 튕기는 맛이 있어야…….”
“웃기지 말고 저리 비켜! 나 저 자식이랑 얘기 다 안 끝났어!”
무척 고통스럽고 긴 얘기가 될 것 같은 예감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반장이 엉겨 붙는 비니를 뜯어버리고 나를 덮쳤다. 반장하고는 체급부터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나오면 깔리는 수밖에 없다.
“대체 이유가 뭐야? 백만장자에, 인물 좋고, 몸매 좋고, 취미도 고상하고…… 더 이상 뭘 바래? 니가 뭔데 그놈을 차?”
반장이 내 멱살을 틀어쥐고 울부짖었다.
“그 자식이 나를 찬 거잖아요!”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렸어야지!”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뭘 어떻게 매달려요?”
나도 반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실연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럼, 그 망신을 시키고 그만한 소리도 안 들을 줄 알았어? 잔말 말고 다시 전화해!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반장이 내 얼굴을 찍어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싫어요!”
반장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나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하는 얼굴이었다. 잠깐의 고민을 끝내고 반장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좋아. 맘 바뀌면 바로 말해.”
그렇게 말하고 반장이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돌망치같은 주먹으로 내 얼굴을 후려갈기기 직전에 반장이 멈칫했다. 회의실 한 구석을 굴러다니던 내 휴대폰이 요란한 발신음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반장의 눈짓에 비니가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왔다. 찍힌 번호를 보고 반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헤슬렘이었다.
「이봐. 그렇게 끊으면 어떡해?」
휴대폰을 귀에 대자마자 헤슬렘이 나를 조용히 나무랐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장이 여차하면 내 목숨을 거둬 갈 저승사자처럼 코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더 그랬다.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 내가 뭐 기분 상하게 한 거 있어?」
“나는…… 그러니까…….”
「나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사람들을 회의실에 앉혀 놓고 그냥 나왔어. 일본인들은 특히 시간 약속에 깐깐하단 말이야.」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그, 그냥…….”
「그냥?」
이렇게 나오니까 심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는 게 너무 없고, 또…… 술 먹고 셔츠에 오바이트하고, 음악회 같은 데 가서 졸고…… 코 곯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랬었지.」
역시…….
「하지만 그것 때문에 화난 적은 없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이 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이봐…….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니가 좋았어.」
나도 모르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놀라서…….
“또 뭐야?”
반장이 이번에야 말로 나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다행히 내가 동작이 좀 빨라서 반장은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안았고, 그 틈에 나는 문으로 달려가서 손잡이를 잡아 비트는데 성공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전화 자꾸 끊지 마.」
막 나를 덮치려던 반장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결국 앞으로 엎어졌다.
“죄송해요.”
「내일 회사 앞으로 올래?」
“바쁘다면서요?”
「보고 싶어.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까닭 모를 한숨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실은 지금 호흡이 좀 곤란하다.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내려다보니 반장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화 끊었다고 또 덤벼들까 봐 얼른 손을 내저었다.
“만나기로 했어요. 내일…….”
하지만 반장의 표정엔 변화가 별로 없었다. 되게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니도 좀 뻘쭘한 얼굴이었다. 다 놓친 줄 알았던 고기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 반응이 왜 이래? 궁금해서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으려니 반장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해졌다.
“설마…… 너, 그놈이랑 진짜 연애를 하는 건 아니지?”
대강 씻고 침실로 들어가자 위니가 사이드 테이블 제일 위 서랍을 닫고 돌아누웠다. 벌써 몇 개월째 위니는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잔다. 위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순간도 진실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위니를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기…… 그거 잘 들어?”
“응?”
“수면제…… 나도 하나 먹어 볼까 해서…….”
위니가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무슨 일 있어?”
많이 말랐다. 요즘 들어서 위니는 더 까칠하고 창백해졌다. 박꽃처럼 화사하던 그 예쁜 여자애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냥……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그래.”
“당신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
“내가?”
위니가 정색을 하고 나오니 공연한 말을 꺼냈나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최근엔 위니랑 어떤 대화를 하든 좋게 결말이 난 적이 없었다.
“어떨 땐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슬퍼 보이고…….”
“내가 그랬어?”
“꼭 잘 안 풀리는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잠시 할 말을 잊고 위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덩달아 위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러지 말고 한 알만 줘봐. 잠을 설치면 늦잠 자고, 그럼 또 반장한테 욕먹는단 말이야.”
위니가 건네준 수면제 한 알을 씹어 삼키고 돌아누웠다. 위니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헤슬렘의 그 속삭임이 귀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니가 좋았어…….’
그가 내게 했던 말 중엔 거짓말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꾸밈없이 진심을 말할 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당황스러웠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니가 좋았어 라니. 어떻게 그게 진심일 수 있을까? 그 나직한 울림에 손끝이, 그리고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잔인한 게임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렸다. 마키바 반장은 잘하면 오늘 거사를 치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큰 눈치였다. 하지만 그간의 데이터를 감안하면 시기적으로 좀 이르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잘해. 오늘도 초치면 넌…….”
헤슬렘의 회사 근처였다. 막 벤에서 내리려는데 마키바 반장이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보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건 일이지 데이트가 아니야. 특히나 오늘은 날씨도 별로 안 좋고…… 제발 부탁인데, 정신 똑바로 차려.”
굽타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아까부터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나도 헤슬렘을 만날 때마다 긴장은 하는데, 소화가 다 안 될 정도로……. 그런데 막상 만나고 시간 좀 지나면 술에 곤죽이 되거나 업어가도 모르게 곯아떨어지니 영문을 모르겠다.
헤슬렘의 회사 앞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헤슬렘의 희생자들이 비오는 날 많이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초여름 한낮의 비는 어디로 봐도 연쇄살인을 유발시키는 음산함 따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상쾌했다.
“오래 기다렸어?”
헤슬렘이 나타난 건 약속한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서였다. 들고 있던 커다란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지만 이미 온몸이 폭삭 젖은 후였다. 크롬웰이 신경 써서 골라준 디자인 근사한 청바지도, 네이비블루의 셔츠도 이젠 별로 볼품이 없었다.
“사무실로 올라오지 그랬어?”
헤슬렘이 손을 뻗어서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시원해서 좋은데요. 뭐…….”
헤슬렘의 손길을 슬쩍 피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나도 비는 좋아해. 공기가 한 겹 씻겨 내리는 느낌이거든.”
헤슬렘이 손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친근했다.
“얼굴은 또 왜 그래?”
어제 반장한테 맞은 자리가 아직 부어 있었다. 이런 건 붓기 빠지려면 며칠 걸린다.
“별 거 아니에요. 오늘은 어디로 데려갈 거예요?”
얼굴 대하고 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데 내가 땡깡 피워서 만나게 된 거니까…….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코스라도 있나?”
“음악회만 아니면 뭐든…….”
헤슬렘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웃음소리도. 그 얼굴도…….
“가볼 만한 데가 있긴 해. 하지만 오늘 것도 별로 재미있는 행사는 아니야.”
괜찮다. 수면제 먹고 10시간이나 자고 나왔으니까…….
헤슬렘이 미리 경고도 했고, 나름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지만 오늘의 코스는 5중주 실내악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것이었다. 헤슬렘이 나를 데려간 곳은 루소 박물관 별관에서 개최된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이른바 학술 세미나였던 것이다.
어쩌자고 나를 이런 데 데리고 오나…… [죽음의 신전 발굴에 관한 3차 보고] 라는 안내판 앞에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옷깃엔 배지를 가장한 송신기가 붙어 있는데 오늘도 졸았다간 헤슬렘이 나를 죽일 기회가 없을 거다. 마키바 반장이 선수를 칠 테니까.
“저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여기선 코 좀 곯아도 괜찮아. 발굴을 거의 내 돈으로 다 했거든.”
헤슬렘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돌겠네, 진짜…….
루소 박물관 본관도 두 번밖에는 안 가봤다. 별관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하는 덴가 했더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규모의 전시관이 있고 안쪽으로 세 개의 강연장이 있었다. 강연이나 발표회 같은 행사가 주로 열리는 것 같았다.
“헤슬렘 씨, 오셨군요.”
헤슬렘이 강의실에 들어서자 조그만 중년 남자와 덩치 좋은 여자 한 명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참석하기 어렵겠다고 하셔서 당황했었습니다. 이번 발굴에 가장 큰 후원을 해주신 분이신데…….”
“후원자가 나 혼자도 아니고…… 요즘이 좀 바쁠 때라서요. 어쨌든 시간 내길 잘한 것 같군요.”
헤슬렘이 강의실을 슥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죽음의 신전에 관한 3차 보고는 그다지 떠들썩한 행사는 아니었다. 강의실도 중간 규모 정도인데다 그나마도 분위기가 썰렁했다. 150명 정도는 너끈히 수용할 만한 규모의 세미나룸에 사람이라곤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70, 80명 내외였다. 그나마도 학자나, 학술지 기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몇 명 없고 강제 동원된(?) 관계자 친인척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뭐……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한 것도 아니니까…….”
헤슬렘이 나를 강의실 한가운데 명당자리에 밀어 앉혔다. 강연자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각도가 딴 짓 하기 불가능한 포지션이었다. 말은 태연하게 하지만, 실은 내가 또 드르렁거리며 잘까 봐 걱정되는 게 틀림없었다.
“전에 밀림에서 사람이 죽었다던…….”
헤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당시 사건 연락을 받고 두서없이 공항으로 뛰쳐나가던 헤슬렘의 차에 받힌 덕에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 났으니까.
“지난달부터 현장은 철수작업 들어갔어. 더 이상 파봐야 해골밖에 나올 것도 없고…… 좀 있다 전시관에 가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금이 흔한 동네에서 찌그러진 금반지 한 개도 못 찾았거든. 게다가 발굴 책임자들이 비명횡사를 했으니…… ‘저주 받은 신전’이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지.”
“범인은…… 못 잡았죠?”
헤슬렘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잡아봐야 죽은 사람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도로공사 도중에 쏟아져 나온 해골 더미에 놀란 사람들이 주변의 울창한 숲을 뒤져서 찾아낸 것은 이름 모를 하얀 꽃으로 뒤덮인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달빛을 받으면 파르스름하게 빛이 난다는 그 꽃을 그 지역 사람들은 무나꽃이라고 불렀다. 그 언덕, 융단처럼 곱게 깔린 무나꽃 아래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신전이 있었다. 살육의 제단, 죽음의 신전이었다.
다행히 세미나는 그 원수 같은 5중주 실내악만큼 지루하진 않았다. 죽은 고고학자 중 한 사람의 미망인이자 연구 파트너인 유디트 보일 박사의 어조는 시종 차분했다. 전문적인 얘기가 많아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간중간 슬라이드를 곁들여가며 들으니 대강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갔다.
“……높이 2미터의 석축 위에 열여섯 개의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제단을 마련했는데 그 양식이 남미 인근에서 발견된 일반적인 신전의 건축 양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열주 기둥, 기둥 중심부의 조각상…….”
설명은 신전이라고 하지만 슬라이드 사진은 대부분 어떤 건축물이 있었던 사소한 흔적일 뿐이었다. 몇 층으로 쌓여 있는 석축 일부…… 무너져 내린 원형의 기둥 일부…… 정확한 연대조차 측정하지 못할 만큼 오래되었다는 신전은 이제 거의 자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신전의 규모와 출토된 유골의 숫자로 미루어 짐작하면 이 죽음의 부족은 꽤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후대에 별다른 문화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단기간 강력한 권력과 독특한 문화를 누리다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후계자를 잃고 실종되었는데…… 많은 고대 문명이 그렇듯 그 원인은 수수께끼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잔인한 전사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남은 것은 그들의 무덤뿐이죠.”
몇몇 노인들은 그들이 어린아이였을 때 지금의 그들만큼이나 나이 먹은 노인들이 들려준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낮에도 빛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한 밀림 숲 어딘가에 무나꽃으로 뒤덮인 신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그곳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나꽃 신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신의 이름은 잊었지만 신에 대한 두려움까지 잊지는 않았다. 숲을 소란하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 금해온 가장 엄격한 금기였다. 숲은 신의 영지, 신이 잠들어 있는 땅이었다. 그들은 그 이름 없는 신이 영원히 어두운 숲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기를,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슬라이드 화면에는 일전에 헤슬렘의 집에서 봤던 그 도깨비 얼굴도 여러 개 지나갔다. 얼굴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형체도 모르게 깨어진 것을 반 넘어 주워 붙여 놓은 것도 있었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고 닳아서 거의 무디어져 있는 것도 있었다.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오래 땅속에 묻혀 있던 거였다. 어쨌든 기분이 별로 안 좋다. 그놈의 조각상 때문에 놀란 걸 생각하면…….
“신전의 기둥마다 새겨져 있던 이 조각상들은 그 자체로 신전의 성격을 대변합니다. 잔인함, 공포, 죽음…… 이곳에 다른 상징은 없어요. 모든 것이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 뿐이죠.”
신전에서 발굴해낸 여러 가지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흙더미, 돌더미, 해골, 해골, 또 해골…… 알고 보면 고고학도 참 할 짓 아니다.
수십 명의 발굴 팀이 수년 간 정글을 뒤지고 축축한 땅을 파헤쳐서 찾아낸 유물은 보잘 것 없었다. 금반지는 고사하고 돌로 만들어진 것도 성한 게 별로 없을 정도였다. 고고학자는 슬라이드를 돌려가며 유물이라고 우기는데 내 눈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그거나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석판입니다. 신전 주변과 두 군데 매장지에서 모두 열네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원형대로 발견된 것은 한 개도 없지만…….”
원형은 고사하고 모든 것이 거의 자갈이었다. 개중엔 정말 눈물겨운 노력 끝에 조각 맞추기를 해놓은 것도 있긴 있는데…… 그래봐야 뭘 알아볼 만한 건 거의 없었다. 무엇인가 새겨져 있었던 희미한 흔적이 보일 뿐이었다. 서너 개 정도 되는 기호…… 혹은 그림.
“석판에 새겨진 기호는 모두 동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그 기호를 재구성할 수 있었죠. 이것은 무나꽃 신전에서 발견된 유일한 기호, 혹은 문자입니다. 아마도 섬기던 신과 관련이 있는 상징이었겠죠. 우리는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저 해골 밭을 뒤지고 뒤져서 흔적도 못 알아보게 부스러진 돌조각을 찾아내서 저렇게까지 재구성을 해내다니…… 정말 악착같은 사람들이다. 기호는 다섯 개였다. 세 개는 도형에 가깝고 두 개는 어떤 형상이었다. 하나는 두 개의 산, 나머지 하나는…… 잘 모르겠다.
“저거야.”
내가 잠잠하니까 또 자나 싶어 걱정스러웠던지 헤슬렘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뭔데요? 저게…….”
슬라이드에 비춰지고 있는 건 돌로 만든 상자였다. 비교 대상으로 반을 접은 신문을 옆에 놓고 찍었는데 바닥 면적이 쫙 펼친 신문 정도 되는 제법 큰 상자였다. 뚜껑과 4면에 뭔가 새겨져 있지만 역시 오랜 세월에 무뎌지고 깨져서 알아볼 수는 없었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투박한 석궤일 뿐이었다.
“현장에서 도둑맞은 거…….”
“저걸 들고 갔단 말이에요?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무겁지. 뚜껑만 들어 올리려고 해도 장정 두 명은 필요할 정도로…….”
상자가 목적은 아니었을 거다. 내가 비록 고고학 쪽은 깡통이지만, 그건 분명하다.
“안에 뭐가 들었는데요?”
“저거…….”
헤슬렘이 손가락으로 슬라이드 화면을 가리켰다.
“이것은 신전에서 북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매장지 근처에서 발굴된 유물입니다. 주 신전에 딸린 부속 건물에 따로 보관하던 일종의 성물함聖物緘이죠.”
헤슬렘이 가리킨 사진이 곧 커다란 클로즈업으로 바뀌었다. 칼이었다. 마녀의 손톱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그리고 송곳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여섯 개의 칼입니다. 발견자가…… 그러니까 제 남편이 ‘사신의 발톱’이라고 부르던 유물이죠. 신전에서 발견된 유물 중엔 가장 인상적이죠. 재료는 흑요석이고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스치기만 해도 손을 베일 정도로 예리합니다. 면도날 저리 가라였죠. 보관 상태로 봐서 아주 특별한 제사에 쓰였던 도구였을 겁니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이제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유물이죠. 이 칼들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표현할 말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저는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히 으스스했다. 스크린에 사진이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강의실 분위기가 썰렁해질 정도였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여섯 개의 칼은 눈에 띄는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예쁜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예쁘게 만들 의도 자체가 없었던 물건이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오로지…… 생명이 깃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단칼에 숨통을 끊어버리고자 하는 노골적인 살의뿐이었다. 하지만 저것도 전혀 돈 될 만한 구석은 없어 보이는데……. 손잡이 근처에 뭔가 장식이 붙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 상태는 그냥 날카롭게 잘 다듬은 돌칼에 불과했다. 대체 저런 걸 뭣 때문에 훔쳐 갔을까?
“뭐에 쓰는 물건이죠?”
헤슬렘의 서재에서 봤던 칼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었다. 거창한 석궤에 담아서 따로 보관한 것을 보니 다른 용도가 있는 모양인데…… 헤슬렘이 손에 보이지 않는 칼을 쥐고 자기 가슴을 푹 찌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얼굴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면서……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금방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금방 끝날 거야.”
헤슬렘이 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속삭였다. 농담으로라도 재미있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졸음이 쏟아질 정도는 아니니까 큰 불만은 없다.
“저런 건 그대로 묻혀 있는 편이 더 나았겠어요.”
좀 전부터 나오는 것은 각도를 달리 찍은 칼뿐이었다.
“왜? 맘에 안 들어?”
“무섭네요. 저걸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생각하니까…….”
“아니야. 저건…….”
헤슬렘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죽이는 칼이 아니야. 다른 용도가 있어.”
“소라도 잡았나요?”
내 질문에 헤슬렘이 소리 없이 웃었다.
“글쎄…….”
세미나는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났다. 신전의 주춧돌 사진이 끝도 없이 나올 때는 살짝 졸기도 했지만 성난 마키바 반장의 얼굴을 떠올리니 잠을 쫓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게다가 다행히도 보일 박사의 발표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발표회가 끝나고 나서 반쯤은 그냥 돌아갔고 나머지는 별관 전시관에 전시된 발굴 유물을 관람했다.
클로즈업된 사진으로 볼 때는 그럴듯해 보이던 것들도 실물은 그저 그랬다. 투박한 돌칼, 화살이나 창의 촉, 헤슬렘의 서재에 있던 것과 비슷한 조각상들…… 한마디로 몽땅 돌 부스러기였다.
“이거…….”
전시관 중앙에 놓인 돌 부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조각상마다 얼굴이 다 틀렸는데 이건 며칠 전에 봤던 것 같았다.
“당신 집에 있던 그거…… 아닌가요?”
“집에 있는 건 복제품이야.”
“훔쳤다면서요?”
“농담이었어.”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헤슬렘의 서재에 있던 그 불 뿜는 조각상이 훨씬 더 무섭고 진짜 같았다. 어쨌든 복제품이라니 유물 절도죄를 추가하기는 어렵게 됐다.
“훔칠 만한 배짱이 없었나요?”
“어차피 그냥 돌이야. 진짜니 가짜니 그런 건 의미가 없어. 그리고 사실…….”
헤슬렘이 좀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보일 박사를 힐끔 쳐다봤다.
“요만한 쪼가리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저 여자 손에 죽었을걸.”
이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보일 박사는 처음 봤을 때부터 건조하고 냉랭한 표정이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한 번도 그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저런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의 표정이 거의 저렇다.
“안 됐네요.”
“부정한 곳에 오래 머물면 좋을 게 없는 법이야.”
헤슬렘이 전시관을 건성으로 훑어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그때 봤던 그 칼이다.
“그럼…… 이것도 복제였나요?”
헤슬렘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니 손에 상처를 냈던 그 물건이야. 전시회 전까지 며칠 보관하기로 했었지. 공짜는 아니고 캠프 철수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시회가 끝나면 이건 박물관으로 갈 거야. 기약도 없이 창고 구석에 처박히겠지. 아무 가치 없는 돌덩어리가 대부분 그렇듯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고고학? 재미있잖아.”
“말고, 죽음에 대해서 말이에요.”
좀 뜻밖의 질문이라 그랬을까? 헤슬렘이 유리 상자에서 시선을 떼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관심 없어.”
이 남자는 거짓말을 할 때 특히 멋있다. 딱 잡아떼니 더는 할 말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헤슬렘이 내 등 뒤로 시선을 옮겼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훌륭한 논문이더군요.”
헤슬렘이 보일 박사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얼굴 그대로 박사가 헤슬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은 남편의 논문이죠.”
“부군과 램 박사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헤슬렘의 위로에 박사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친구 분이신가요?”
남편 얘기가 길어지는 게 싫었든지 박사가 좀 떨어진 곳에 얌전히 서 있는 나를 끌어들였다. 헤슬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또 거짓말을 했다.
“관심 있어 하기에 같이 왔어요.”
“전공인가요?”
보일 박사가 내게 물었다.
“아니오…….”
“일반인들이 관심 가질 만한 주제는 아닌데…… 지루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아, 아니…… 재미있었어요.”
얼결에 말을 뱉어 놓고 나서야 내가 헤슬렘만큼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박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재미라…… 어떤 부분이요?”
“전체적으로요. 그러니까…….”
예의상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은데, 워낙 생소한 분야가 되다보니 좀 전에 들은 말도 정리가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헤슬렘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심심해서 졸았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그 뾰족한 칼도 굉장히 인상적이고, 석판이요…… 그런 작은 조각을 어떻게 찾아서 다 맞췄는지…… 신기하더라고요.”
역시 한심해하는 눈치였다. 헤슬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옆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 작업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
“농담이죠?”
“사실이야. 일종의 산재産災 인정이 돼서 재단에서 치료비를 전액 부담하고 있어.”
헤슬렘이 정색을 하고 우겼다. 하긴…… 그 어수선한 해골 밭에서 그런 짓을 몇 년씩 해야 한다면 나라도 돌겠다.
“발굴 조사팀 연구원 몇 명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건 사실이에요.”
헤슬렘의 농담이 언짢았는지 박사의 얼굴이 이전보다 더 굳어 있었다.
“하지만 석판 맞추기가 너무 지겨워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두려움 때문이죠.”
박사의 시선이 전시관 안에 놓인 돌칼을 한번 차갑게 훑었다.
“그곳은 거대한 무덤이었어요. 집단 매장지 외에 어딜 파도 해골이 나왔죠. 예민한 몇몇에게는 아주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어요. 엘리엇이 힘들어 했죠. 누구보다도…….”
“그런 줄은 몰랐어요.”
헤슬렘이 내 어깨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내색을 안 했으니까요.”
처음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찬물을 들이부은 듯 썰렁해졌다. 박사의 눈빛은 복잡했다. 하지만 경찰서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 저런 눈빛, 저런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졸지에 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면 본래 온 세상이 다 원망스럽기 마련이다.
“가 봐야겠어요. 기자들하고 인터뷰가 있어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박사가 헤슬렘을 비껴 지나갔다.
“책임감 느끼지 말아요. 엘리엇은 당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니까…….”
저렇게 화가 나 있는 여자한테 자꾸 말을 시키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나 같으면 모른 척 그냥 보낼 텐데…… 아닌 게 아니라 돌아선 박사의 얼굴은 뭔가 울컥한 표정이었다.
“엘리엇은 거길 싫어했어요. 그 습한 공기, 텐트만 나서면 발에 차이는 해골들, 때때로 밀려오는 짙은 안개, 신전에서 나오는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 다 두려워했어요. 몇 번이나 떠나자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요. 나는 엘리엇의 죽음에 당연히 책임감을 느껴요.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흐느낌 같은 박사의 외침에 전시장을 둘러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박사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안녕히 가세요. 헤슬렘 씨.”
“닥터…….”
얼결에 헤슬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보일 박사는 지금 누군가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어 보였다.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다.
지난 1년 간 위니랑 무슨 얘길 해도 조용하게 마무리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뒷골목에서 빈총 들고 떼강도와 맞서는 것 보다 위니와 얘기하는 게 더 무섭다.
“상심이 컸나 봐.”
“왜 안 그렇겠어요?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을 별로 안 좋아했어. 볼품없고 소심한 남자였거든. 머리는 좋았지만…….”
헤슬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면서…… 얼른 손을 털고 박사가 사라지면 물어보려고 했던 걸 물어봤다.
“그래서 같이 잤나요?”
헤슬렘의 얼굴이 살짝 얼었다.
“어떻게 알았어?”
역시 반짝거리는 보물이 없는 박물관은 싱거웠다. 며칠 전에 굽타가 헤슬렘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게 이런 원시적인 제사 의식에서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나름대로 뭐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 해서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챙겨 봤지만…… 모르겠다.
좀 떨어진 곳에서 돌로 깎은 창촉과 화살촉을 들여다보던 헤슬렘이 다가왔다.
“이게 뭐 같아요?”
아까 슬라이드로 봤던 석판의 일부분인데…… 마지막에 새겨져 있는 기호가 분명히 보이는 건 이거 하나뿐인 것 같았다. 사슴뿔처럼 생긴 네 개의 가지가 뭔가를 감싸고 있었다. 안에 새겨져 있는 건…… 뭘까? 다른 기호들은 비교적 단순한 데 비해 이건 복잡하고 어딘지 눈길을 끌었다.
“보일 박사하곤 그렇게 심각한 관계는 아니었어.”
“알아요. 바람둥이가 다 그렇죠, 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달리 볼 만한 것도 없어서 유리 칸막이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석판을 들여다보며 빈정거렸다. 흔하고 흔한 게 중년의 불륜 남녀다. 심각한 불륜은 드물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무슨 뜻이야?”
“심각한 섹스는 없단 뜻이에요. 섹스는 길어봐야 20분이고, 하고 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는 않았어.”
헤슬렘이 투덜거렸다. 고개를 들어 엉망으로 깨진 석판 대신 헤슬렘의 눈을 쳐다봤다. 오래된 사진처럼 바랜 갈색 눈동자가 정말 고왔다. 헤슬렘도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리고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20분보다는 훨씬 길었어.”
헤슬렘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비명횡사를 하는 건 아니었다. 헤슬렘에게는 수년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얼마 전에 실종 소동을 일으켰던 엘리스 스톤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경찰이 그에 대해 조사는 많이 했지만 알아낸 건 얼마 없는데…… 희생자를 선별하는 기준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만나다 취향 틀리고 무식하다는 게 들통 나면 퇴짜를 맞고 목숨을 건지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보일 박사나 엘리스 스톤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입장이 달랐다. 어떻게든 헤슬렘의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켜서 이 멋진 가면 밑에 웅크리고 있는 살인마를 끌어내는 게 내 임무였다. 그러자면 갖은 아양을 다 떨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자꾸 시비만 걸게 될까?
“어쨌든 사랑했던 건 아니잖아요.”
“맞아. 그런데 사랑은 뭐가 그렇게 심각해?”
“심각하죠.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상처가 오래 가니까…….”
헤슬렘의 시선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그 언짢은 표정에 놀라서 얼른 다시 석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실 석판 따위엔 전혀 관심 없지만…… 바보! 멍청이! 헤슬렘이 몇 년 전에 깡마르고 성깔 사나워 보이는 고고학자랑 놀아난 게 대관절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 이거…… 뭐 같아요?”
할 말이 궁한 나머지 석판에 새겨진 마지막 기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나를 쳐다보는 헤슬렘의 눈빛은 아직도 좀 그랬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건 아무도 그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 아득한 고대의 유물이었다. 물어봐야 헤슬렘이 알 리가 없다.
“그건 손이야.”
헤슬렘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동안 실수한 것도 있고 해서 ‘아…… 그렇군요.’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안 보였다.
“내 눈엔 뿔 난 복숭아로 보이는데요?”
“복숭아랑 심장이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심장이요?”
헤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을 움켜쥔 손…… 그게 신의 이름이야.”
그토록 무자비한 전사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라…… 심장을 움켜쥔 손…… 인간의 더운 피로 시뻘겋게 물든…… 헤슬렘을 보다가 다시 글자를 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헤슬렘을 쳐다봤다. 화가 나 있어서 그럴까? 서늘한 그 시선에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만 나가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떨고 있는 내 등을 헤슬렘이 툭 쳤다. 시계를 힐끔거리는 걸 보니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헤슬렘은 요즘 회사일이 바빴는데 나 때문에 시간을 낸 거였다.
“죄송해요.”
속에서 올라온 한기 때문에 팔에 솜털이 다 곤두섰다.
“뭐가?”
헤슬렘은 이제 그렇게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뭐, 그렇게 부드러운 얼굴도 아니지만…….
“보일 박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거요.”
“상관없어. 그런 건.”
“나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다시 보니 헤슬렘은 묵묵히 서서 내 얘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얘기…… 해도 되나?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이런 데서 당신을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 옆에는 또 어떤 여자나, 아니면 남자가 있을 거고, 우린 그냥 지나치든가 아니면 안부인사 정도 주고받고…… 그리고 가던 길을 갈 거고…… 그러면 아마 당신 친구가 ‘그 사람 누구였어?’ 라고 물어보겠죠. 당신 대답은 좀 전에 했던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을걸요. ‘전에 좀 알던 앤데…… 별로 심각한 사이는 아니었어.’”
보일 박사의 메마른 눈동자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두려움, 원망, 미련 같은…… 여자는 본래 복잡하다. 헤슬렘에게는 박사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이었을지 몰라도 박사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나를 힐끔 쳐다보던 냉정한 시선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희미한 질투를 나같이 성격 투박한 경찰관이 어떻게 읽어낼 수 있었을까? 똑같은 감정을 나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안다.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는 거…… 재수 없어서 요번에 헤슬렘 체포에 실패를 하고 다음에 또 어디선가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 해도, 헤슬렘과 같이 있는 사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지 헤슬렘이 바람피운다고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나도 모르겠어.”
이 남자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내 눈을 바로 쳐다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하고 난 공통점도 별로 없고 사실은 친한 사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만나자고 하면 만나주고 고리타분한 행사에 군소리 없이 따라 다니긴 하지만…… 니 진심은 아직 모르겠어. 넌 게이도 아니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내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게…… 불안하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대판 싸우고 헤어질 수도 있고. 니 말대로…… 그런 식으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겠지. 잘 알겠지만 바람둥이란 게 본래 좀 그렇거든. 주기가 일반인들보다 짧아.”
니콜라스 헤슬렘을 알게 된 후 거의 처음으로 이 자식을 꼭 체포해서 시립 형무소 흉악범 전용 독방에 처넣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 감방에 갇힌 헤슬렘이 옛날 애인들한테서 온 편지나 뜯어보는 음산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헤슬렘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 그때 내 옆에 있는 게 누구든 간에 너보다 더 귀엽진 않을 거야.”
“귀엽게 봐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사실이 그런 걸 뭐…….”
헤슬렘이 시간을 보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나가면 이른 저녁을 먹을 수 있어. 여덟 시까지는 다시 들어가 봐야 되거든.”
밖으로 나와 보니 제법 드세던 빗발이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비에 젖은 초여름 오후는 그저 청량하게만 느껴졌던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제법 울적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날씨, 이런 시각에 헤슬렘이 으슥한 뒷골목이나 비장의 지하실 같은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면 마키바 반장이 쾌재를 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간 곳은 그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별로 재미없었지?”
간단한 저녁을 주문하고 난 뒤 헤슬렘이 오늘의 코스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괜찮았어요.”
“지난번에도 대답은 그 비슷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번엔 졸지 않았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다. 졸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피곤하긴 하지만…… 부옇게 흐린 눈을 비비고 헤슬렘을 쳐다봤다. 보통 때와 같았다. 차분하고 몹시 깊어 보이는 눈동자였다.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눈인데……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문득, 아까 박물관에서 봤던 그 음산한 눈동자가 떠오른 때문이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난 몇 년 간은 진짜 나쁜 놈들을 볼 기회가 많았다. 그런 놈들은 대게 눈빛부터 살벌했다. 증오와 분노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눈동자도 봤고, 아예 감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소름 끼치는 눈동자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까 신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앞에서 봤던 니콜라스 헤슬렘의 눈동자는 뭔가 달랐다. 그 음습한 눈동자에 비한다면 이전에 봤던 어떤 흉악범의 것도 인간적이라고 할만 했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희생자들은 이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전혀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을까?
“슬퍼 보여.”
“내가요?”
헤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얼굴이 슬퍼 보이는 건 슬픈 생각을 하기 때문이야.”
“사실은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웨이터가 와인과 전채요리를 가져오는 바람에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헤슬렘은 와인만 한 모금 홀짝거렸을 뿐 접시엔 손도 대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었다.
“내 생각을 하면 슬퍼져?”
“잘못 본 거에요. 슬픈 생각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해줄래?”
그건 좀 곤란한데…….
“그냥…… 섹시하다고 생각했어요.”
대강 얼버무리자 헤슬렘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넌 거짓말 할 때가 제일 귀여워. 잘 못하거든.”
“…….”
할 말 없을 땐 그저 먹는 게 최고다. 피곤하기도 하고, 기분도 울적해서 저녁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정으로 샐러드 한 접시를 다 긁어 먹었다. 곤란한 건 접시를 비우고 나서도 할 말이 없고…… 헤슬렘은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거였다. 불공평하다. 나는 거짓말인 거 알아도 그냥 넘어갔는데…….
“실은…… 아까 잠깐 화가 났던 것 같아서, 그 생각 하고 있었어요. 눈빛이 무시무시하던데요.”
“화를 자주 내지는 않아.”
“당신 사생활이나 과거에 잠깐 만났던 여자 일을 따질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만나다가 죽여버린 사람들에 대해선 꼭 따져봐야겠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났던 건 아니야.”
“그거 외에 당신을 화나게 할 만한 실수가 또 있었나요?”
기억이 없다. 하지만 말이란 아무 의도 없이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곤 한다. 위니도 나도 그런 식으로 서로를 많이 다치게 했다.
“사랑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상처가 오래 간다고…… 서글픈 표정으로 말할 때 기분이 좀 그랬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무슨 뜻일까?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헤슬렘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누굴 그렇게까지 사랑했었던 거야?”
얼마나 오래 헤슬렘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주 잠깐이었을 거다.
“질투하는 척하지 말아요. 안 어울리니까.”
“질투?”
헤슬렘이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반문을 한 게 아니라 그냥 한번 되뇌어본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말인 것처럼…….
웨이터가 주문한 요리를 들고 나타났다. 새우, 파프리카, 각종 향신료를 같이 볶은 쌀 요리였다. 이름이 그럴듯해서 시킨 건데…… 씁쓸한 풀 냄새가 났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 위험한 남자한테 위니 얘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허브로 범벅된 볶음밥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더부룩한 속에 깔깔한 쌀밥 한 접시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우겨 넣는 동안 헤슬렘은 우아한 자태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러다 무슨 말을 꺼낼까 속이 타들어가던 차…….
“인간은…… 좋아.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때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껴. 그런데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
“마치, 자신이 외계인이라도 된다는 투네요.”
“그랬나?”
헤슬렘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리고…… 사랑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건…… 그래.”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데 헤슬렘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간의 말투나 행동이나…… 이거 혹시 진짜로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었던 건 몽땅 다 착각이었나? 슬그머니 김이 샜다. 그렇다고 여태까지 좋아한다고 했던 거 다 뭐냐고 따질 수도 없고…….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그런 건 알아. 하지만 사랑은 뭔가 다른 것처럼 얘기하잖아. 별로 관심은 없지만, 가끔 궁금해.”
“언젠가는 당신도 좋은 사람을 만나겠죠. 누구나 한번은 하게 된다니까…….”
또 거짓말을 했다. 솔직히…… 이 남자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개과천선하는 꼴을 보느니 흉악범 전용 감방에 처박혀서 벽이나 쳐다보면서 늙는 걸 보고 싶은 게 내 진심이다.
“니 얘길 해줘.”
“안 할래요.”
“왜?”
“질투할 테니까.”
와인을 들이키던 헤슬렘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와인이 길을 잘못 들어선 모양이었다.
“질투 같은 거, 하고 싶어도 못해.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니까…….”
그렇지 않아도 없던 입맛이 딱 떨어져서 숟가락을 내려놨다. 다시 보니 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얘기해주자. 뭐 그렇게 별스런 연애도 아니었으니까.
“어떤 여자예요. 예쁘고, 다정하고…….”
헤슬렘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한 쌍이었겠군.”
“고등학교 동창이었죠. 당연한 얘기지만 나 같은 남자애는 여자친구 사귀기가 힘들어요. 동양인이고, 고아원에 있는 걸 모두 다 아니까…… 혹시 호감 같은 걸 느꼈다고 해도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가 말을 걸었어요.”
헤슬렘이 잔을 내려놓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쳐다보지도 않고 옆으로 밀쳐놨던 접시에서 구운 버섯 한 개를 꾹 찍어서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좋았겠군.”
꼭 투덜거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외할아버지가 날 고아원에 버리고 떠난 이후로 날 사랑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친구는 많았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말을 하거나 얼굴을 쳐다볼 때 가슴이 두근거리진 않잖아요. 모른다니 말인데…… 사랑은 정말 달라요. 그 앤 언제나 날 지켜봐주고, 걱정해주고…… 내가 잘못하는 게 있어도 내 편을 들어줬어요. 좋은 거 이상이었죠. 별로 심각한 관계는 아니었어…… 같은 말은 할 수 없어요. 정말 사랑했으니까…….”
헤슬렘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질투하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듣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던 사이가 어쩌다 파탄이 났지?”
지난 몇 년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다. 내가 답을 찾았던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죠. 어떤 일이든…….”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뿐인데 가슴이 아릿하니 아파왔다.
“모르죠. 살다 보면 또 누군가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 여자만큼 나를 사랑하지는 못하겠죠. 나도 마찬가지고…….”
“됐어. 그만해.”
헤슬렘이 포크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툴툴거렸다.
“왜요?”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어.”
제법 내리던 비가 이제 거의 그쳤다. 한 꺼풀 씻겨 내려간 느낌의 서늘한 바람이 거리를 훑고 지나갔다. 식당 주차장까지 짧은 거리를 앞장서서 걷는 헤슬렘의 등을 쳐다보면서 걸었다. 밝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아무렇게나 날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헤슬렘이 갑자기 돌아섰다. 하마터면 머리로 헤슬렘의 콧잔등을 들이받을 뻔했다.
헤슬렘이 나를 가만히 밀어냈다. 기분이 한번 꼬이더니 쉽게 풀리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랑 얘기를 해달래서 해준 죄밖에 없다. 탱탱 부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나왔다. 헤슬렘이 그런 나를 못마땅한 눈길로 노려봤다. 이렇게 삐져서 가버리면 마키바 반장이 싫어할 거다. 하지만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남자의 화난 얼굴은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웃는 건 보기 좋으니까.”
생각해보니 이렇게 웃어 본 것도 오랜만이다.
“덕분에…… 오늘 재미있었어요. 고마워요.”
“난 별로였어.”
헤슬렘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렸다. 삐진 얼굴도 색다른 매력이 있어서 좋긴 하지만 이러면 곤란하다. 에프터는 어쩌고?
“사랑의 체험 수기를 듣고 싶어 한 건 당신이었어요.”
“얘긴 잘 들었어.”
“질투 같은 거 안 한다면서요?”
“그런 거 아니야. 시간이 돼서 회사에 다시 들어가는 거야.”
헤슬렘이 짜증을 냈다. 아무리 봐도 질투 같은데…….
“그럼…… 또 언제 만나요?”
“당분간은 바쁠 거야.”
헤슬렘이 차 문을 열어젖히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게 질투가 아니면 대체 뭐냐? 믿은 내가 병신이지. 남자의 질투는 보통 얼마나 오래 갈까……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평생 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타! 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그건…… 됐어요.”
버스 정류장이라면 바로 코앞에 있고 지하철역도 멀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에 수사팀 벤도 돌아다니고 있을 거고…….
“그럼 좀 비켜줄래?”
계속 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자 헤슬렘이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이러는 게 어이없고 화도 나지만 싸울 일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헤슬렘의 차는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내가 차창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좀 전부터 얄미운 소리만 쏟아내고 있는 헤슬렘 입술을 깨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모르면 모른 채로 살아요. 그게 당신 성격이면 어쩔 수 없죠. 난 사랑을 하게 되면 할 거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빠질 거고, 또…… 사랑이 끝난 다음에도 오래 못 잊을 거예요. 본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나도 어쩔 수 없어요.”
“별로…… 정신이 나갈 정도로 빠진 것 같지는 않은데…….”
헤슬렘이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쪽 생각이고…… 나는 정신이 나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다. 연쇄살인범인 걸 뻔히 알면서…… 더 붙어 있다가 무슨 짓을 할지 무서워져서 차에서 떨어졌다.
“당신한테도 나쁘지만은 않을걸요. 당신이 날 차버리고, 까맣게 잊은 다음에도 난 당신을 기억하고 가끔 그리워할 테니까…….”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얼마나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하진 않을 거다. 헤슬렘의 시선이 다정다감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제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비긴 걸로 쳐요. 당신도 전에 멋대로 한번 했었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지루한 음악회나 전시회 같은 데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면 전화해요. 언제라도…….”
“난 이제 너랑은 그런 데 안 갈 거야.”
속으로 움찔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왜요? 이제 겨우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거짓말하지 마.”
헤슬렘이 나를 노려봤다.
“어떻게 거짓말을 안 해요? 우린 데이트 중인데.”
헤슬렘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하지만 결국은 말없이 차창을 올렸다. 그리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핀 도심을 향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비가 막 그친 봄날 저녁의 바람이 취할 것처럼 달콤했다. 헤슬렘의 차가 사라져간 거리를 쳐다보다가 가슴이 갑갑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현기증이 났다. 마주 오던 남녀 한 쌍이 비틀거리는 나를 피해 멀찍이 돌아서 지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방향도 없이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가슴이 마치 내 것이 아닌 듯 설레기도 하다가 다음 순간엔 숨이 막힐 정도로 우울하기도 했다. 어떤 게 진짜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적한 뒷골목 쪽으로 접어들자 저만치 안쪽에 벤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좀 떨어진 곳에서 두 남자가 담배를 한대씩 나눠 피우고 있었다. 이 험한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아저씨들의 표정이 어째 좀…… 그랬다. 어둡다고 해야 하나?
“그 여자는 만나봐야 별 도움 안 될 거야. 전에 그 가수도 그랬고…… 여자들은 헤슬렘한테 불리한 얘기는 절대로 안 해.”
반장이 굽타에게 투덜거렸다.
“그건 알아. 하지만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학술적인 의문에 대한 자문을 구할 수는 있겠지.”
“그 신전인지 뭔지는 몇 천 년 전에 허물어진 거라면서?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예수는 2천 년 전에 살았었어. 야훼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의 신이었고…… 인간은 수 천 년 전부터 믿었던 신을 아직까지 믿고 있어. 그럼 헤슬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반장이 다가가는 나를 힐끔 돌아봤다.
“그래봐야 망상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에 불과해. 망상도, 미치광이도 대단할 건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나를 대하는 두 사람 반응이 평소 같지 않았다. 보통은 마키바 반장이 나를 잡아먹을 듯 화를 내고, 굽타가 말리고…… 그런 패턴이었는데 우선 반장이 너무 차분했다. 근래엔 별로 못 보던 모습이라 낯설고 어색했다.
“수고했어.”
반장이 툭 던지듯 말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아니면 이 사람이 어디 아픈가 싶어서 빤히 쳐다보자 반장이 짜증을 냈다.
“근데 언제 또 만날 건지 약속을 좀 잡고 헤어지면 큰일 나?”
그게 좀 걸리긴 했는데…… 들어서 알겠지만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쨌든 반장이 평상시 컨디션을 회복하자 굽타 선배도 자기 역할을 기억해내고 나랑 반장 사이를 막아섰다.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분위기 괜찮았으니까 금방 전화하겠지 뭐…….”
굽타가 차분한 음성으로 반장을 달랬다. 글쎄, 언젠가 전화가 오긴 하겠지만 그렇게 금방은 아닐 거다. 다음 주? 아니면 다음 달? 대화 녹취만 들으면 어떨지 몰라도 사실…… 분위기가 그렇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자네…… 전화왔어.”
마키바 반장이 귀찮은 얼굴로 양복 안주머니를 뒤져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 꺼 아닌데?”
마키바 반장과 굽타가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보니…… 내게 맞았다. 게다가 찍혀 있는 건 헤슬렘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나 다음 주까지는 계속 바쁠 거야. 다음 주 주말쯤이면 시간이 날 것 같은데…… 괜찮아?」
마키바 반장과 굽타가 보는 앞에서 이런 전화를 받으려니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다음 주…… 주말이요.”
「만나서 뭘 할지는 니가 정해.」
“에?”
「주말에 보통 하고 노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런 거 없는데…….
“저기…….”
당황해서 반장과 굽타를 쳐다봤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도 유명한 일중독이었다. 휴일에 뭘 하느냐고 입을 벙긋거려봤는데…… 역시나 낮잠과 밀린 빨래라는 영양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볼래? 축구 경기는 어때? 아니면 놀이공원이라도 가든가…….」
다 좋다. 하지만 그간의 우아한 이벤트와 비교하면 너무 대중적이고 평범했다. 그리고 무시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놀이공원 가자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낚시 어때요?”
「낚시 좋아해?」
사실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어렸을 때 낚시광인 아버지를 따라서 일요일마다 낚시터로 끌려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것뿐이다.
“그냥…… 어떨까 해서요.”
“좋아. 니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전화를 끊자마자 마키바 반장이 인상을 확 구겼다.
“낚시?”
“…….”
“헤슬렘이랑 다음에 만나서 낚시를 하자고 한 거야? 지금?”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낚시할 줄 모른다는 거 빼고.
“첫 번째 장인이 낚시광이었어. 새벽같이 물가에 나가서 하루 종일 낚싯대 끄트머리만 노려보다가 돌아왔지. 꼭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폭행 피해자처럼 말이야. 고기가 도망갈까 봐 숨도 크게 못 쉬고, 그 습기…… 데이트 코스로는 최악이야.”
그런 줄 몰랐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필이면 왜 그거야?”
“밀린 빨래를 같이 하자고 할 수는 없잖아요?”
대꾸하기 무섭게 반장이 믿을 수 없는 스피드로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아까부터 느끼던 건데 화내는 얼굴도 보통 때랑은 달랐다. 뭔가 수심 어린…… 그런 얼굴이었다.
“그럼 딴 걸로 바꿀까요? 축구 경기나 놀이공원 같은 걸로…….”
반장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답답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다그쳐 물었다.
“알아서 해. 그런데 너…… 진심은 아니지?”
진심은 무슨…… 당연히 아니죠. 라고 대답해야겠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반장이 내 멱살을 놓고 물러섰다. 완전히 질린 표정이었다.
“경찰관 짬밥 22년 먹도록 이렇게 황당한 경우 처음 봐. 어쩔 작정이야? 그런 놈한테 진심이 되면 어쩌자는 거야? 딴 건 다 그만두고라도…… 넌 유부남이야! 더구나 니 마누라는 경찰관 부인 중에서 제일 예쁘잖아!”
“일에는 지장 없도록 할게요. 그러면 되는 거잖아요?”
내 어설픈 변명에 반장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니가 그놈을 진짜 좋아하는데 어떻게 지장이 없어? 우린 그 자식을 잡아서 전기의자에 앉힐 거란 말이야!”
“알아요.”
“아는데 어떻게 일을 이렇게 만들어?”
그동안 말로는 둘이 진짜 사귀네, 어쩌네 했어도…… 마키바 반장은 수사관이 연쇄살인범에게 홀딱 반하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상상하기엔 성격이 너무 고지식하다. 놀라는 것도, 나를 비난하는 것도 당연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곧이어 날아올 반장의 살인 펀치를 기다리고 있는데 굽타 선배가 나를 사정거리 밖으로 끌어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뭐해? 처음부터 제이는 헤슬렘 상대로는 무리라고 했잖아. 그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일대일 몸싸움이 무리라는 소린 줄 알았어!”
마키바 반장이 버럭 소리쳤다.
“능력도 있고 성실하고, 보기 드물게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중년 아저씨 취향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저 중년 아저씨 취향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리긴 했지만…….”
내 볼멘소리에 반장이 눈을 번뜩였다. 반장의 성격과 평상시 태도로 봐선 분명히 몸을 날려서 나를 덮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내 기대에 못 미쳤다. 반장은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다가, 머리를 벅벅 긁다가…… 안절부절 못하더니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벤을 집어타고 가버렸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 나랑 굽타만 남겨 놓고…….
“저는 반장님도 눈치는 채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굽타하고 큰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어쨌든 집에는 가야 되니까…….
“마키바는 본래 그런 쪽 눈치는 꽝이야. 살인사건도 치정 관련이면 약 먹은 쥐처럼 엉뚱한 데만 쑤시고 다니거든.”
그런 줄은 몰랐다. 워낙 경력이 화려하니까 어떤 종류의 사건이든 올 클리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반장이 대단한 수사관이란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다. 본래 강력범죄는 치정관련보다는 돈이나 원한 관련이 훨씬 많다.
“놀라기도 했지만…… 마키바는 네가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설마요?”
여기서라면 버스를 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위니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 그 작고 우울한 아파트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거리였다. 위니가 항상 혼자 있는 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집안을 가득 내리누르는 납덩이같은 공기를 생각하면 가끔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앞으로 니가 겪을 고통에 대해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키바뿐일 거야.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
“반장님이요?”
놀라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반장님이 남자랑…….”
“그런 건 아니야.”
굽타 선배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주로 부유층을 상대로 장사하는 클럽의 마담이었어. 마약, 매춘, 여러 가지 부정한 거래…… 마키바는 살해된 무기상 사건을 조사하다가 그 클럽에 드나들게 됐는데, 그 여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마키바 반장과 도발적이고 위험한 미녀라니…… 그림이 전혀 안 그려진다.
“마키바도 젊었을 땐 멍청했거든. 그 여잔 닳고 닳은 창녀에, 성격도 음침하고…… 별로 마키바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어. 하지만 누구한테 반한다는 게 전후 사정 따져가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여자는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어. 마키바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 그런데도 개인적으로 여자를 몇 번 만났던 것 같아. 아마 여자가 사건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속였겠지.”
저만치 떨어진 정류장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반이나 빈 채 손님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수사를 하면 할수록…… 정황이 좋지 않았어. 피살자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 중 하나가 그 여자라는 게 거의 확실했거든. 마키바한테는 그 며칠이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겠지. 하지만 결국 그 여자 손목에 직접 수갑을 채웠어.”
“반장님답네요.”
버스가 멀어져 가는 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굽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바도 많이 힘들었어. 여자는 1급 살인사건의 종범으로 7년형을 받았고 5년 정도 살다가 가석방됐지. 하지만 헤슬렘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마키바도 나도 네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각오는 하고 있어? 그저 마음이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실은…… 아무런 각오도 없다. 가슴 아픈 일이라면 꽤 겪어봤는데 그럴 때마다 각오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닐을 잃었을 때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오닐을 죽인 놈을 내가 죽여버렸다는 사실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내 손으로 죽이는 건 얼마나 다른 일일까? 헤슬렘이 잔인한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이 그때 가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반장님이 견딜 수 있는 일이면, 저도 견딜 수 있겠죠.”
“그랬으면 좋겠어.”
두 번째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저…… 먼저 갈게요.”
굽타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그 버스에 도망치듯 올라탔다.
뒷자리 구석에 웅크리고 앉자마자 온몸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렸다. 숨쉬기가 힘들어서 한동안 심호흡을 계속 해봤지만 여전히 숨이 가빴다. 그 아름다운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까? 그리고……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이 떨렸던 건 진짜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내려서 택시를 잡을 때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집에 도착해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생각해보니 낮에 비를 맞았고, 젖은 옷을 입은 채 에어컨 빵빵한 세미나 룸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헤슬렘과 저녁을 먹을 때 피곤하고 갑자기 입맛이 없었던 것도 감기 때문이었다.
감기치곤 증세가 심하고 약도 잘 듣지 않아서 결국 다음날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이틀간 입원했고 퇴원한 후에도 이틀을 꼬박 누워만 있었다. 누워 있는 시간 대부분을 자면서 보냈고 언제나 꿈을 꿨다. 꿈엔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엄마, 외할아버지, 오닐, 처음 만났을 무렵의 위니, 그리고 니콜라스…… 태어나서 이렇게 지독한 감기는 처음이었다.
“좀 어때?”
누군가가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며 속삭이듯 물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이번엔 또 누굴까…… 좀 전까지는 한 무리의 집시 아이들이 내 주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예전 그 모습인데 나만 훌쩍 큰 어른이었다. 반갑고도 쓸쓸했다.
“나 알아보겠어? 무슨 감기를 이렇게 심하게 앓아?”
그제야 눈을 떴다. 비니였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다시 떴지만 여전히 비니였다. 감기가 독한 건지, 약이 독한 건지…… 가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도 어려울 만큼 몽롱했다. 하여튼…… 꿈이든 현실이든 비니가 나타나면 좋을 게 없었다.
“뭐 하러 왔어?”
“벌써 나흘째잖아. 어떤가 걱정돼서. 출근 전까진 여유도 좀 있고…….”
출근이라……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클럽 말이야.”
“아…….”
고개를 약간 들어 넘겨다보니 굽타 선배가 비니 뒤에 서 있고, 문가에서는 크롬웰이 위니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반장님……은?”
“아르바이트.”
“엉?”
아르바이트라니…… 경제적으로 쪼들린 나머지 나이트클럽 주말 문지기라도 하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굽타가 비니를 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닷새 전에 14번 부둣가 근처 창고 밀집 구역에서 심하게 훼손된 여자 시체 하나가 발견됐어. 카버 반장이 1년째 붙들고 있는 사건 알지? 동일한 수법이고, 이번에 세 번째 시체였어.”
1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산 살인사건’ 얘기다. 부두 근처에서 2주일 상간으로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둘 다 얼굴이 없었다. 범인이 황산을 들이부어서 녹여버린 것이었다. 범죄 심리학자 말로는 피살자 신분을 은폐하려고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증오심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거다. 두 여자의 신원은 그 주일이 지나기 전에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쪽도 연쇄살인인가요?”
굽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하나 찍어 놓고 잠복이라도 하고 있지, 불쌍한 카버는 아예 감도 못 잡고 있거든. 그래서 서장이 마키바를 그쪽에 줘버렸어. 덕분에 네 번째 시체가 생기는 걸 마키바가 막을 수 있다는 데 6:4로 내기가 걸렸지. 난 물론 막을 수 있다에 걸었어.”
이 빌어먹을 동네가 나날이 험악해져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자고 터졌다 하면 연쇄살인인지 모르겠다.
“저도 그쪽에 걸래요. 그런데…… 헤슬렘은 어쩌고요?”
“잽싸게 해치우고 컴백한다니까 믿어 보자고. 게다가 헤슬렘은 요즘 진짜 열심히 일하는 중이거든. 아마 회사를 팔아치울 모양이야.”
누워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뭔가 큰 거래가 있는 것 같더라니…….
“눈치채고 튈 궁리를 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흉악한 연쇄살인범을 영영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낭패감과 그냥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드니까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게다가 그런 생각하는 도중에도 까무룩 졸았다. 아무래도 약을 그만 먹어야 할까 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굽타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 봤다.
병원에 있을 때는 그래도 자다 깨서 밥은 먹었는데 집에 온 후론 먹지도 않고 잠만 잤다. 위니는 아픈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어느 순간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지곤 했다. 온 종일 자다 깨다 하는 처지라도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면 한밤중에 들어와서 잠깐 자고 아침에 출근할 때보다는 많은 걸 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헛된 기대로 자신을 속이기도 어려웠다.
위니는 약간의 우울증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런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위니의 옆모습은 이미 시들어버린 식물 같았다. 위니에게 필요한 건 좋은 의사와 안전한 직업을 가진 자상한 남편이었다. 위니가 그렇게 원한다면 일을 그만둘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위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창백하고, 눈빛도 멍하고, 까칠하니 수염도 자랐고…….”
며칠 머리도 못 감고, 면도도 못했으니 몰골이 말도 못하게 흉악한 모양이다.
“섹시해. 헤슬렘이 봤으면 환장했을 걸?”
“그 작자가 연쇄살인범이긴 해도 지저분한 거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던데요.”
문득 걱정이 돼서 문 쪽을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문가에 위니와 크롬웰이 서 있었는데…… 조그맣게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부엌에서 차라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정신이 나기는커녕 눈앞이 핑핑 돌았다.
“열도 내렸고, 정신도 맑아졌고…… 이제 괜찮아요. 내일은 출근할 수 있어요.”
말하면서 슬그머니 다시 누웠다. 내일은 출근해야 되는데…….
“오랜만에 듣는 희소식이군. 한꺼번에 두 명이나 빠지는 바람에 비니까지 잠복조에 합류했거든.”
저런…….
“선배님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은데 이토가…….”
굽타가 비니를 힐끔 돌아봤다. 철옹성 같은 이성과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차분함의 소유자인 굽타의 눈빛에도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그냥 이토가 덤벙거리다 혼자 사고 친 거지, 저랑은 상관없다고요!”
비니가 투덜거리며 범행 사실을 딱 잡아뗐다. 늘 하는 소리다.
“뜨거운 커피를 엎어서 다리에 화상을 입었어.”
“많이 다쳤어요?”
“다행히 일을 쉴 정도는 아니야. 한두 주일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는 받아야겠지만…….”
비니한테 걸린 거 치곤 약하다. 이토는 운 좋은 녀석이다.
위니와 크롬웰이 차를 준비했다고 해서 모두 거실로 나왔다. 인스턴트커피나 몇 잔 놓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실엔 뜻밖에도 빛깔 고운 홍차, 핸드메이드 쿠키, 아몬드 빵, 각종 샐러드, 테이블 중앙엔 멋들어진 센터피스까지 놓여 있었다.
“모두 미스 크롬웰이 준비해온 거에요. 나는 그냥…….”
나를 쳐다보는 위니의 얼굴이 며칠 만에 밝아 보였다.
“별거 아니에요. 서장님 몰래 빠져 나와서 중심가에 있는 빵 가게 서너 군데를 돌아다닌 것뿐인 걸요. 그리고…… 그냥 쥬드라고 부르세요.”
크롬웰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친근하고 살갑게 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크롬웰이 미인인데다 머리 좋고, 빈틈없고 남자 취향이 위험하다는 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다정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찻잔이 정말 예쁘다는 둥…… 거실 한 구석에서 먼지에 뒤덮인 채 눈길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었던 골동품 장식장이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스타일이라는 둥…… 수사팀이 네 명이나 모였으니 늦은 점심의 주제는 당연히 헤슬렘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롬웰은 끝도 없이 빅토리아 시대 가구 얘기만 떠들었다.
“고가구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
크롬웰 양의 길고 긴 가구 예찬 끝에 위니가 어색한 호감을 표시했다.
“고가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 섬세한 곡선, 수공으로 깎은 정교한 장식, 시간이 빚어낸 깊은 색감…… 한마디로 예술이죠.”
“저도…… 좋아해요. 몇 년 간 고가구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공부도 좀 했었고…….”
“어쩐지 우린 할 얘기가 엄청나게 많을 것 같네요.”
크롬웰이 위니를 향해 흉악범 꼬실 때 써먹던 매력적인 미소를 날렸다. 위니도 따라 웃었다. 어색한 미소였지만…… 마지막으로 웃는 걸 본 게 아득한 옛날 일 같았다.
“작은 방에 고가구가 몇 점 있는데…… 구경하실래요? 대단한 건 아니고…… 작은 서랍장이랑 거울이 붙은 보석함 같은 건데…… 좋아하신다니까…….”
“보고 싶어요!”
크롬웰이 찻잔을 내려놓고 냉큼 일어섰다. 과자 한 접시를 챙겨 들고 작은 방으로 앞장서서 들어가는 폼이 오랜 친구 사이처럼 스스럼없었다. 위니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긴 한데…… 뭔가 얼떨떨했다.
“헤슬렘은 요즘 클럽에 일주일에 두 번도 안 들르는데…… 제가 매일 출근할 필요가 있을까요? 선배님?”
비니가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몇 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격무에 불만을 토로했다. 비니가 클럽에서 새벽 두 시까지 일하는 걸 감안해서 출근 시간을 약간 조정하긴 했지만 브리핑 듣고 클럽에서 있었던 상황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10시까지는 출근해야 하니까…… 비니는 벌써 몇 개월째 주 6일,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지간한 중노동엔 까딱도 않는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인 비니도 얼굴이 좀 야위었다. 덕분에 수입은 더블이었지만…….
“매일 출근을 안 하면?”
굽타가 시간을 힐끔 보며 두 잔째 홍차를 따랐다.
“헤슬렘이 클럽에 나타나는 날만 잠깐…….”
“사회생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멋대로 결근이나 하고 다니면 클럽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하지만 제가 경찰이라는 것도 다 알려졌는데…….”
“자네가 헤슬렘이 나타날 때만 출근하면 그 사람들은 경찰이 노리는 게 누군지도 금방 알게 될 거야.”
요번 잠복근무에 있어서 비니는 자기 입장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다. 굽타의 논리 정연한 지적에 비니가 찍 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비니를 점잖게 손 봐주고 난 후 굽타가 내게 차를 권했다.
“자네도 좀 들지 그래? 크롬웰이 직접 브랜딩했다는 데 맛이 훌륭해.”
“입맛이 없어요. 그리고 홍차는 별로 안 좋아하고요.”
가만히 고개만 저었는데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거라도 먹어 봐. ‘루이앤 마리’ 라고…… 시내에서 제일 비싼 제과점 히트 상품이야. 개점 시간 못 맞추면 구경도 못하는 맛있고 비싼 과자래.”
비니가 접시에서 손바닥만 한 주황색 쿠키를 들어 올렸다. 두통 때문에 먹을 거 생각 없지만, 일단 받았다.
“너…… 클럽에서 헤슬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어제.”
헤슬렘하고 데이트를 하는 건 난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비니가 나보다 헤슬렘을 훨씬 자주 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클럽에서 바텐더를 할 걸 그랬다.
“어땠어?”
“보통 때랑 같지 뭐. 늦은 시간에 혼자 와서 저녁 먹고, 술 한 잔 하고…….”
“얘기는 안 했어?”
비니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는 내가 말을 걸어볼 틈도 없었어. 여자들이 어찌나 들러붙는지…….”
나도 모르게 초조해져서 손에 쥔 과자를 한입 깨물어 먹었다.
“여자들이……?”
“재클린이 그러는데 분위기가 묘하게 섹시해졌대. 나는 전혀 모르겠던데…… 어쨌든 그러고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더라고. 손님한테는 여간해서 안 그러는 여잔데…….”
“재클린?”
“2층 게임룸 담당 지배인이야. 굉장히 예뻐.”
굽타가 비니 옆구리를 꾹 찔렀다. 비니가 굽타를 한번 흘겨보고는 사정거리 밖으로 옮겨 앉았다.
“한 시간 동안 그런 식으로 접근한 여자가 3명, 남자가 1명…….”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말하기 곤란해. 손님의 사생활은 밖에서 떠들지 않는 게 우리 클럽 방침이거든.”
비니가 상류층 사교 클럽에서 술 따라주고 받는 급료는 경찰 월급보다 약간 많았다. 하지만 월급 더 받는다고 사교 클럽 운영 방침을 경찰관 근무 수칙 앞에 놓다니…….
“우리 클럽??”
우리 경찰의 근무 지침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내가 몸을 반쯤 일으키자 비니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헤슬렘은 혼자 나갔어.”
“정말이야?”
“피곤해 보였어.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피곤에 고민이라…… 일이 잘 안 풀리는 걸까? 회사를 매각하는 일이라면 전 재산이 걸린 거래니까…….
“여자들은 남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 입맛이 땡기나 봐.”
비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풀 죽은 헤슬렘의 얼굴이라면 나도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남은 과자를 한 입에 우겨 넣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과자가 굉장히 맛있었다.
기운 없고 현기증에…… 가만 앉아 있어도 눈앞이 핑핑 도는 건 감기 때문이 아니라 허기 때문이었다. 수북하게 쌓여 있던 쿠키, 빵, 샐러드를 정신없이 쓸어 먹고 났더니 컨디션이 한결 좋아졌다. 허기진 속을 대강 채우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굽타랑 비니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틀 전에 유디트 보일 박사를 만났었어.”
“뭔가 단서라도 잡으셨어요?”
굽타를 존경하긴 하지만 내 입장은 마키바 반장에게 동조하는 쪽이었다. 죽음의 신전이라니 섬뜩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헤슬렘이 설혹 그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서 살인 행각에 나섰다 해도 그 부분은 범죄 심리학자들 몫이지 일선 형사가 파고들 분야는 아니었다. 나도 헤슬렘이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을 테니까…….
“범죄의 재구성만큼이나, 신화의 재구성도 흥미진진했어. 나중에 은퇴하면 나도 그쪽으로 공부를 좀 할까 싶더군.”
“선배님이라면 뭐든 잘하시겠죠.”
“박사는 몇 년간 발굴 작업을 하면서 그 일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전승 설화를 수집했던 모양이야. 뭐…… 현장에서 나오는 것만 갖고는 뭘 어떻게 해볼 여지가 너무 적었을 테니까. 자료를 대강 훑어보는 중인데 수사하곤 별개로 상당히 재미있어.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몇 년 동안 밀림을 헤매면서 수집한 자료를 처음 보는 경찰한테 순순히 보여주던가요?”
경찰이라면 누구나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고, 묻는 말에 아주 기본적인 대답만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굽타는 뭔가 비결이라도 있는 걸까?
“먼저 내 신분을 밝히고, 고대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해시킨 다음에…… 그 고대 부족이 지내던 제사를 요즘도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거든. 복사본을 얻었으니까 관심 있으면 보여 줄게.”
비니는 클럽 출근 시간이, 굽타는 근무 교대할 시간이 다 돼서 같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위니와 함께 고물과 골동품이 잔뜩 쌓여 있는 골방에 40여 분이나 틀어박혀 있다가 유럽의 어느 귀부인 이니셜이 수 놓여 있고 가장 자리가 레이스로 장식된 손수건 세트를 얻어서 나왔다. 컬렉션은 어지간해서는 선물하지 않는데…… 크롬웰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앉아서 얘기를 좀 나눈 덕분인지 이젠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물론 며칠 만에 요기를 한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곧바로 침실로 돌아가는 대신 위니하고 같이 찻잔과 접시를 치우기로 했다.
“크롬웰 양은 정말 골동품에 대해 많이 아나 봐. 방에 있는 작은 화장대가 18세기 클로비에 공방 작품인 걸 첫눈에 알아보던 걸.”
“본래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
“좋은 사람 같더라. 그 사람 집엔 큰 이모한테 물려받은 19세기 벨기에산 수제 레이스가 있대. 빅토리아 시대 책상이랑…… 집에 놀러 오래. 구경시켜준다고.”
크롬웰을 사전적인 의미의 좋은 사람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잘됐네.”
“그런데…… 헤슬렘이란 사람이 누구야?”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장모님이 결혼 선물로 주신 거라 만질 때마다 조마조마한 물건이었다. 다행히 떨어뜨리진 않았다.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야.”
“일이라면…….”
“예전에 일어난 사건 몇 개를 다시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야. 위험한 일은 아니고…….”
“당신이 하는 일 중에 안 위험한 일도 있는 줄은 몰랐어.”
대화는 거의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또 얘기가 길어질까 봐 얼른 찻잔과 접시를 씻어서 얹었다. 옆에서 말없이 마른 행주로 접시의 물기를 닦아내는 위니의 얼굴은 이제 보통 때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항상 위험한 건 아니라고 했잖아. 위니, 강력반 형사들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늙어서 퇴직을 한단 말이야.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 같아?”
“몇 명은 길에서 죽잖아. 오닐처럼…….”
“오닐은 운이 없었어.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도 생기는 거고…… 길에서 죽는 경우는 형사보다 일반인들 쪽이 훨씬 많아. 그러니까 경찰이 필요한 거잖아?”
“나는…….”
위니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그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마 우리는 이런 대화를 수백 번은 더 했을 거다.
“생각하기 싫어도 자꾸 생각이 나. 낮에 전화벨이라도 울리면 혹시라도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가,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약을 먹어도 이제 머리만 멍하고 잠도 안 와. 당신한텐 정말 미안한데…… 이러다 미칠 것 같아.”
위니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그동안은 위니가 저렇게 울 때면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거나 어디론가 나가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고통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나도 위니만큼 힘들다고 변명하면서…….
아직도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위니의 고통을 그런 식으로 외면하려고 사랑하고 결혼했던 건 아니었는데.
한동안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위니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대신 위니의 옆으로 다가가서 두려움과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슬픔 때문에 떨고 있는 여윈 어깨를 끌어안았다. 달래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까지는 생각이 안 나서 그냥 그렇게 안고만 있었다. 위니의 흐느낌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격해졌다.
“저기, 위니…… 이번 일만 끝나면…….”
같이 병원엘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 위니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휴가를 얻어서 단 둘이 조용히 지내자. 우리…… 그래 본지도 꽤 오래 됐으니까.”
위니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고 나를 보는 눈동자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위니를 볼 때면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지 꽤 오래됐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도저히 위니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리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사막에 가고 싶어. ……응. 인간들 틈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외로움이 그리워질 줄은 나도 몰랐지. 요즘은 바람 부는 소리조차 듣기 싫어.」
막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헤슬렘은 하루 종일 회사에 있다가 10시가 좀 넘어서 귀가했다. 헤슬렘이 집안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불이 켜지질 않았다. 들어가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했다. 좀 전에야 거실에 불이 켜졌고 헤슬렘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사막엔 바람이 많이 불 거예요.」
여자였다. 여자의 목소리야말로 모래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같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공허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날 비웃었지.」
「가세요. 사막으로…… 어디든 당신 가고 싶은 곳으로…… 하지만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사막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잖아요?」
별로, 비웃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있을 곳은 내가 결정할 거야.」
「그게 당신의 위대하면서도 어리석은 점이죠.」
「당신이랑 꼭 한번 자보고 싶었어. 떠나기 전에 한번…… 어때?」
어쩌다 이런 놈한테 빠져버렸을까?
「미안해요. 난 침실에 죽음을 끌어들이는 취미는 없어요.」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잖아.」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당신의 형편없는 남자 취향을 깜빡했어. 그 볼품없는 빵집 주인은 잘 있어?」
「오래 전에 죽었어요. 한…… 200년쯤 됐을걸요.」
헤슬렘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라니…… 잠시 피었다 시드는 들판의 꽃보다 나을 게 없어.」
「나는 그 들판의 꽃들이 되도록 오래 피어 있길 바라요. 그러니 함부로 꺾어서 당신의 제단을 치장하지 말아요.」
달콤하면서도 단호한…… 마치 강력한 주문과도 같은 어조였다. 이런 종류의 충고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은 그런데…….
「그런 잔소리는 이제 지겨워.」
헤슬렘이 대뜸 신경질을 냈다.
「그럼…… 끊을까요?」
대화가 끊어졌다. 둘 사이의 냉랭한 기류를 나조차 느낄 정도였다. 둘이 동시에 전화기를 집어던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헤슬렘이 뜬금없이 물었다.
「인간을 사랑하면 기분이 어때? 그 빵집 주인 조니를 사랑할 때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은 죠수아였어요.」
「죠수아가 죽었을 때 기분은 어땠지?」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요?」
여자가 발끈했다. 당연하다. 면전이었으면 따귀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을 거다.
「200년 전에 죽은 남자잖아? 다 지난 일인데 얘기 좀 해주면 어디 덧나?」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슬펐어요. 진짜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태양이 뜨고 지는 게 꼴 보기 싫었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았어요. 당신이 부러워요. 그런 기분은 절대 모를 테니까.」
말투는 조용했지만 여자는 열을 많이 받았다. 이쯤에서 사과하고 잽싸게 전화를 끊는 게 신상에 좋을 것 같은데…….
「맞아. 난 그런 바보짓은 안 할 거야.」
「지옥에나 가요!」
결국 여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니 남자친구가 수화기를 집어던졌나 봐.”
잠시 후 이토가 혀를 끌끌 차며 헤드폰을 벗었다. 그리고 좀 전까지 파란 불이 들어와 있던 곳을 가리켰다.
“신호음이 완전히 나갔어.”
도청기가 깨진 모양이었다. 불 켜진 창을 올려다봤다. 얼핏 사람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로 꼬박 일주일간 결근하고 지난 월요일에야 출근했다. 금요일에 출근을 하긴 했는데 경찰서 현관에서 현기증으로 주저앉는 바람에 만인의 눈총을 받으며 조퇴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월요일엔 괜찮았다.
복귀한 후 한 주일 내내 그를 지켜봤다. 그래봐야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출퇴근할 때 잠깐 뿐이었지만…… 헤슬렘은 고객들과 점심 약속 있는 날을 빼곤 온종일 회사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진짜 열심히 일했다. 회사를 비싼 가격으로 팔아넘기고 이 도시를 떠나기 위해서…… 사막으로 갈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쿠간을 떠날 생각인 건 분명했다.
“이대로 그냥 날라버리면…… 우린 어쩌죠?”
이토가 감자칩 한 주먹을 입안에 우겨 넣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떠나기 전에 한 탕 더 뛸 계획이 없다면…… 글쎄, 손이나 흔들어 줄 수밖에 없어.”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이토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헤슬렘이 얘를 어떻게 할 것 같진 않거든요. 제 생각엔…….”
“니 생각은 뭐 어떤데?”
갑자기 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커먼 그림자가 상반신을 쑥 들이밀었다. 간 떨어질 뻔했다. 그 망할 그림자는 마키바 반장이었다.
“놀랐잖아!”
굽타가 반장을 향해 감자칩을 봉지째 집어던지며 투덜거렸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반장이 좁은 차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이토를 다그쳤다. 이렇게 공 들인 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나 마키바 반장 앞에서는…… 이토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굽타가 옆 자리로 비켜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서.”
마키바 반장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운전석 쪽으로 바싹 밀렸다.
“너는 몰골이 왜 또 그 모양이야?”
반장이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제 몰골이 어디가 어때서요?”
“왜 이렇게 비쩍 말랐어? 피골이 상접이잖아. 헤슬렘이랑 낚시 가기로 한 날이 내일 아냐?”
감기로 빠진 몸무게가 아직 그대로였다. 날도 꽤 더워진데다 도통 입맛도 없어서 신경을 안 썼더니 보는 사람마다 비슷한 소리를 했다.
“제발 니 역할이 뭔지 파악 좀 제대로 하고, 비쥬얼에 신경 좀 써. 언제까지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놈의 전화나 엿들을 거야? 이제 슬슬 진도를 좀 나가야 할 거 아냐? 서에선 우리가 유령을 쫓아다닌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단 말이야.”
반장이 길게 늘어진 녹취록을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오늘 것만 해도 2미터가 넘을 정도로 길지만, 대부분 회사에서 주고받은 통화였고 순전히 업무에 관련된 사항이었다. 개인적인 통화는 좀 전에 여자한테 시비 걸다가 욕먹은 그게 다였다.
“진도 나가는 거 하고, 제가 살 좀 빠진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세요?”
“희생자들 사진 못 봤어? 눈이 다락 같이 높은 놈이야. 뽕 맞은 슈퍼모델 취향이 아니라고.”
“저도 느끼한 백만장자 연쇄살인범 취향은 아니었어요.”
반장이 나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
그렇게 말하는 반장도 가만 보니 얼굴이 안 됐다. 여자를 죽여서 시체에 황산을 들이붓는 미친놈을 찾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굽타가 반장의 녹취록을 낚아채서는 마지막 통화 부분을 접어서 돌려줬다. 녹취록을 잠깐 들여다 본 반장이 혀를 끌끌 찼다.
“거 봐, 이 자식 바람피우잖아.”
“그게 어딜 봐서 바람이에요? 대판 싸우고 끊었다고요!”
“싸우는 건 그만큼 친하단 뜻이야. 넌 이 자식하고 말다툼이라도 해봤어?”
“싸울 일이 있어야 싸우죠!”
“하긴, 한 달에 두 번도 간신히 보는데 싸울 시간도 없었지.”
하마터면 반장한테 덤벼들 뻔했다. 굽타가 들썩거리는 나를 잡아 앉히며 화재를 건전한 방향으로 틀었다.
“자네 사건은 어떻게 돼 가?”
“교본대로 피살자 주변 탐문하고, 가족, 친구, 이웃 닥치는 대로 조사하고, 2년 내에 이 빌어먹게 커다란 도시에서 황산을 개인적으로 구입한 사람들 추적하고…… 그게 천 명도 넘었어.”
“카버도 그 정도는 했을걸.”
“했지. 아주 성실하게…… 도움이 많이 됐어. 하지만 카버가 부지런하기는 해도 상상력은 바닥이잖아.”
“대부분 그렇지.”
그것도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시간, 인력이 엄청나게 들고 성과를 보장하기도 어렵고…… 다른 미해결 사건과 달리 그런 사건은 덮을 수도 없었다. 계속 피해자가 생기니까.
“이 여자…… 헤슬렘에 관해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아. 번호를 추적할 수 있을까?”
마키바 반장이 이토에게 묻자 굽타 선배가 반장의 손에서 녹취록을 낚아챘다.
“여기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 일이나 신경 써. 얼굴이 녹아 없어진 여자 시체 따위 더 이상 보기 싫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좀 전에 잡아서 유치장에 처넣고 왔으니까.”
마키바 반장이 좀 전에 카버 반장의 상상력을 비웃었지만 마키바 자신 역시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느낌도 별로 없었다. 마키바 반장에겐 그렇게 건전한 형용사는 안 어울렸다. 반장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게 아니라 사건에 집착하고, 미친 듯 몰두했다. 게다가 마키바 반장은 맹수가 사냥감의 냄새를 맡듯 범죄자의 냄새를 맡았다.
황산 연쇄살인의 첫 번째 피해자인 제니 리는 누드모델이었다. 부지런한 아가씨라 시내에 있는 3군데 미술 대학을 돌아가며 모델 일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누드를 그린 학생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수입 명세로 봐서는 과외 수입도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일일이 영수증 주고받는 거래가 아닌지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두 번째 피해자인 마리아 하겐은 법률 회사 비서였다. 가족사가 복잡해서 부모가 다른 형제가 3명이나 있었고 그녀 자신도 직장 상사와 시내 호텔을 전전하는 사이였다. 얼굴은 아주 예쁜 편이었는데 성격이나 인품은 별 거 없었던지 평판이 상당히 안 좋았다.
카버 반장은 하겐 주변의 인물들은 조사하면서 그녀와 한때 형제 관계에 있었고 몇 년간 소원한 관계였던 사람들은 조사 대상에 넣지 않았다. 연쇄살인의 두 번째 희생자 주변 인물 중에서 범인을 찾아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랬겠지만…… 그게 실수였다.
마키바 반장은 하겐의 이복동생이 중견 조각가의 조수로 일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황산을 개인적으로 구입한 사람 중엔 예술가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철이나 동으로 제작한 작품을 녹이고 부식시키기 위해 황산을 구입했다. 게다가 조각가는 첫 번째 피해자인 제니 리를 고용한 적이 있었다.
폴 하겐은 얌전한 남자였다. 폴을 고용한 조각가는 그를 조용하고 성실한 젊은이라고 칭찬했다. 얼마나 성실했냐 하면 작업실에 딸린 작은 지하실에서 생활했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지도 않을 정도였다. 여자들에게 호감을 살 만한 외모였지만 여자친구도 없었고, 일하는 것 외엔 다른 취미도 없었다.
폴은 부모가 이혼한 후론 이복누이와는 왕래가 거의 없었고 죽은 것도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차분하고 흠잡을 데 없는 태도였지만 마키바 반장은 그 젊은 남자에게서 살인자들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그냥 수상하다는 이유로 체포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지.”
헤슬렘의 집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공터에 세워진 벤 안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처음엔 한 사람만 남겨놓고 어디론가 마시러 가자고 했지만 마키바 반장의 최신 무용담을 다음 날 신문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내가 차로 30분이나 가야 하는 편의점까지 가서 맥주를 한 박스 사왔다.
“뭐야? 결국 감으로 때려잡은 거잖아?”
굽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수사는 과학적으로 해야지 그게 무슨 짓이야? 자넨 드라마도 안 봐?”
마키바 반장이 3병째 맥주를 따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물론 폼 나게 하고 싶지. 하지만 보는 순간 감이 딱 오는 걸 어쩌라고?”
마키바 반장은 머지않은 미래에 경찰 서장이 될 거다. 나는 언제쯤이면 관상만 보고도 살인범을 잡아내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일이 항상 순조롭게 풀리는 건 아니지만…….
“누구는 감이 없어서 반 년씩 웅크리고 있나? 증거는 어떻게 찾았어?”
굽타가 반장과 병을 부딪치고는 반이나 남은 맥주를 원샷으로 마셔 치웠다.
“놈은 결벽증 같은 게 있어. 뭔가 어질러져 있는 꼴을 못 보는 거지. 자네도 놈이 사는 지하실을 봤어야 돼. 수색 영장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얼마나 깔끔하게 치워놨는지 뒤질 것도 없겠더라고. 있는 거라곤 싱글 베드, 책상, 의자, 작은 책장…….”
“잘난 척 작작 좀 해.”
굽타 선배가 반장에게 땅콩을 집어던졌다. 선배가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어딘가에서 살해된 후 버려졌다. 첫 번째 피해자는 실종된 후 최소한 이틀 정도는 살아 있었으니까 놈에게는 어딘가에 소굴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헤슬렘과 비슷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폴을 지켜본 반장은 폴이 소심하고 증오심에 가득 찬 별 볼일 없는 놈이란 걸 알았고, 기다리는 게 지겨워졌다.
“모든 연쇄살인범이 헤슬렘 같지는 않아. 우리한테는 다행이지.”
세 번째 피해자는 나이트클럽 종업원으로 퇴근길에 실종됐고, 실종 4일 후에 시체로 발견됐다. 동료 종업원 중 한 명이 폴의 사진을 보고 클럽에 몇 번 왔던 손님이라고 확인을 했고 반장은 세 여자와 폴 하겐의 연관성을 근거로 폴의 지하실을 수색했다. 수사관 3명이 지하실을 뒤지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놈의 지하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깔끔했거든.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지. 우린 영수증이 잔뜩 들어 있는 상자를 찾아냈거든.”
“상자에 뭐가 있었는데요?”
내가 조바심을 내자 반장이 음흉하게 웃었다.
“물론 영수증이지.”
수사팀은 폴이 수년간 모아온 수천 장이나 되는 영수증을 뒤진 끝에 그가 2년 전부터 하이드 거리에 소형 창고를 대여 중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그걸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
“일종의 금광이었지. 수백 장이나 되는 여자들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고 수갑에, 피 묻은 노끈, 머리카락…… 그리고 여자들을 살해할 때 사용했던 해머까지…….”
얘기를 들으며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어느새 맥주도 바닥이었다. 마키바 반장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구했고, 참혹하게 살해당할 위험에서 여자들을 구했고, 쿠간 시를 구했다.
“쉬운 사건이 아닌데 일이 순조롭게 풀렸군. 클럽 웨이트리스가 범인의 얼굴을 알아봤다니…….”
“순조로웠지. 그런 애들은 주머니에 100달러만 찔러주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알아보거든.”
한순간 차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증인을 매수했단 말이야?”
굽타 선배가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굽타 선배의 태도가 순식간에 차가워지자 반장이 침을 꼴깍 삼켰다.
“결정적인 증언도 아니었고…… 수색 영장이 필요했어.”
“그렇다고 증인을 매수해?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굽타가 정색을 하고 반장을 다그쳤다. 선배로써 후배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가 반장한테서 배우고 싶은 게 바로 그런 추진력이었다. 굽타의 비난에 마키바 반장도 얼굴이 좀 굳었다.
“갑자기 왜 이래? 우린 그동안 더 심한 짓도 해왔잖아.”
“더 심한 짓, 뭐?”
굽타가 발끈해서 움찔하는 걸 내가 잡아 앉혔다. 굽타와 마키바 반장은 오랜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도 의견 충돌은 있었다. 그리고 한 번씩 꽤 격하게 부딪치는 편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짓! 몇 개월씩 용의자 전화를 도청하고, 집 밖에 진을 치고, 그리고 내일은 이 녀석을 용의자 침실에 밀어 넣을 거잖아!”
이번엔 내가 발끈해서 일어섰다.
“그냥 낚시만 할 거예요!”
마키바 반장이 웃기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나이 좀 먹었다고 내가 바지저고리로 뵈냐? 맘에 드는 놈한테 낚시 가자고 했을 때는 속셈이 빤한 거지. 인적 드문 으슥한 물가에 보트 띄워 놓고 낚싯줄 끄트머리만 노려볼 거 같아? 이거 왜 이러셔? 요즘은 남자끼리라도 절대 그렇게는 안 끝나.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언제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데이트 코스라면서요? 게다가 낚시는 제가 가자고 한 거라고요!”
“그러니까! 니가 그놈을 덮칠 것 같단 말이야!!”
다시 차 안이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건 굽타였다. 구체적으로…… 그의 웃음소리였다. 이어서 이토가 웃었고 다음엔 반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웃음의 의미가 대체 뭐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스트레이트라고요!”
내가 노려보자 이토는 움찔하며 표정을 고쳤고 굽타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놈이 좋다며?”
그렇긴 하지만…….
“인적 드문 물가에서 덮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플라토닉한 감정일 뿐이라고요.”
반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톤도 호모였어.”
그런 소리 처음 듣는다. 하지만 굽타가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다.
경력으로나, 성깔로나, 말발로나…… 도저히 마키바 반장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그냥 구석에 찌그러졌다. 사실은 나도 걱정된다. 며칠 전부터 그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왔다. 아예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보트 위에서 헤슬렘을 덮치지는 않겠지만 낚시를 할 만큼 하고 나면…… 각자 잡은 물고기를 챙겨 들고 집으로 돌아가나? 아니면…….
“낚시는 어디로 갈 거야?”
반장이 물었다.
“서부 호수요.”
내 대답에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정을 한 거야? 거긴 쿠간에서 데이트 강간이 제일 빈번한 지역이잖아.”
작정을 한 게 아니라…… 사무엘한테 조언을 구했을 뿐이다. 낚시 때문에 이혼까지 당한 정신 나간 낚시꾼 사무엘이 말하길…… 그쪽이 이맘때는 물 반, 고기 반이라 초보자도 팔뚝만한 잉어 두 마리는 기본으로 낚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지역이 데이트 강간 다발 지역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난관에 뜻있는 강태공들이 발길을 돌리랴. 게다가…….
“데이트 강간이 발생하는 건 인근 드라이브 코스지 호수 한복판이 아니잖아요?”
“그럼 역사를 새로 쓰겠군.”
“반장님!”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굽타도 그쯤 해두라는 의미로 반장의 발등을 걷어찼다. 반장이 그제야 굽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좀 전에 하던 얘기…… 끝을 볼까?”
마키바 반장이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겁을 먹는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흉악범도 움츠러들게 할 만큼 반장의 눈빛은 위압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굽타를 겁먹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심해. 좀 더 인내심을 가졌어야지.”
“일을 규정대로만 할 수는 없어. 그건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잖아.”
“어쩔 수 없을 때만 모른 척하는 거야. 자네처럼 보란 듯 깔아뭉갠 적은 없었어.”
이런 문제는 섣불리 한쪽 편을 들어 주기도 어렵다. 두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돈으로 거짓 증언을 꾸며낸 것을 굽타 앞에서 떠든 건 경솔한 짓이었다.
잠시 마키바 반장이 굽타 선배를 노려봤다. 몸싸움이 벌어지면 나는 물론 선배님 편이지만…… 다행히 걱정했던 몸싸움도, 더 이상의 말싸움도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봐. 내가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지?”
반장이 갑자기 있는 대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물었다.
“그야…….”
굽타 선배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언제나 그랬어.”
늦잠을 잤다. 밤새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침에 교대하고 나서 이토는 집에 갔고 나, 굽타, 마키바 세 사람은 눈이나 잠깐 붙일 생각으로 가까운 호텔에 들었다. 하룻밤 새는 정도야 언제라도 있는 일이고 맥주는 아무리 마셔도 취한 적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누군가가 아무리 내 몸을 흔들어도 눈이 떠지질 않았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맥주에 약이라도 탄 거야?”
그 누군가가 계속 흔들어대던 내 몸을 침대 구석으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마키바 반장이었다. 굽타도 바로 옆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았어. 끼니도 거르기 일쑤였고. 그나저나 곤란한데…….”
“곤란하다 뿐이야?”
억지로 눈을 떠보니 마키바 반장이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나한테 달려드는 중이었다.
“당장 못 일어나? 전화 왔단 말이야!”
겨우 전화 한 통 온 거 갖고 이 난리냐…… 귀찮아서 이불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난 이 자식이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반장이 이불을 거칠게 걷어내며 귓전에 대고 소릴 질렀다. 시끄러워서 기절하겠다. 그때, 굽타가 반장을 옆으로 밀어내고 내 손에 휴대폰을 쥐어줬다.
“제발 받아. 헤슬렘이야.”
헉…….
“여, 여보세요…….”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헤슬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침대 아래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이상해요?”
「피곤한 것 같아서…… 아니면 자다 깼거나.」
“실은 지금 막 깼어요.”
「나는 한잠도 못 잤어.」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어젯밤 여자랑 통화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더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낚시는 새벽에 가는 거 아니었나?」
시계를 보니 열 시가 좀 넘었다. 좀 늦어도 서부 호수의 물고기들은 어디 안 갈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
“안 내키면 취소할까요? 꼭 낚시를 가야 되는 건 아니니까…….”
마키바 반장이 뭐라고 소리치려는 걸 굽타가 간발의 타이밍으로 막았다.
「어디야? 데리러 갈게. 보고 싶어.」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아무래도 전화를 오래는 못할 것 같아서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가 갈게요.”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다. 맥주 서너 병에 이렇게까지 숙취가 심했던 적은 없었다. 기분이 심란한 것도 술이 덜 깨서 그런 걸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속이 가라앉길 잠시 기다렸다.
“이렇게 뻗어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발딱 못 일어나?”
반장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는데 일어난 나를 본 반장의 얼굴이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
“좀 전에 전화로 무슨 얘기 했어? 그 자식이 뭐라 그랬어?”
“그냥 어디냐고 물어서…… 간다고 했어요. 다른 말은 없었는데…… 왜요?”
“그런데 왜 눈물을 짜고 난리야?”
“누가 눈물을 짰다고…….”
짜증을 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곤 그제야 얼굴이 젖어 있는 걸 알았다. 베개를 내려다보니 하얀 커버가 얼룩덜룩했다.
“사실은…… 일하기 싫어서 돌겠어요.”
“경찰 밥 먹은 지 20년인데 일하기 싫다고 우는 놈은 니가 처음이야.”
반장이 매정하게 쏘아붙이며 내 뒷덜미를 잡아서 욕실에 밀어 넣었다.
샤워 꼭지 아래서 한동안 찬물을 뒤집어썼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얼음처럼 아프게 등과 어깨를 때렸다. 보고 싶다는 그 짧은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텔은 헤슬렘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면 2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나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다음 순간엔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의 얼굴이나 목소리 따위 더 이상 보고 듣지 않을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헤슬렘이 무사한 채 계속 살인행각을 계속하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희대의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단 뉴스를 몇 주, 혹은 몇 개월 후에 신문에서나 봤으면 싶을 뿐이었다. 정반대 방향으로 날뛰는 두 가지 생각 때문에 요즘은 늘 머리가 아팠다.
물방울이 잔뜩 튀어 있는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거울 안에서 비쩍 마른 머저리 같은 놈이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이야 어떻든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놈은 살인범이야. 누군가 멈추게 하지 않으면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야.”
거울 속의 머저리한테 조용히 충고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거울 속의 남자는 한심할 정도로 슬퍼 보였다.
몸이 식다 못해 오한이 들 즈음에 욕실에서 나왔다. 나와 보니 침대 위엔 큼직한 쇼핑백이 두 개 놓여 있고 크롬웰이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서 있었다.
“……레드 폭스 거리 30번지요. 몬티첼리 형사 출근하는 대로 같이 가보려고요.”
굽타가 마땅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비니가 괜찮은 녀석이긴 하지만 되도록이면 같이 다니지 않는 게 좋아요.”
크롬웰에게 한마디 이른 굽타가 마키바 반장을 돌아봤다.
“누구 다른 사람을 하나 붙여주지. 자네 팀 사건도 해결했으니까 여유가 좀 있을 거 아냐?”
어젯밤 헤슬렘과 통화했던 여자를 찾아낸 것 같았다. 크롬웰이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까딱 숙였다. 덜렁 허리에 수건 하나 두르고 마주 서게 되니 몸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별로 개의치 않고 쇼핑백을 내밀었다.
“몇 가지 골라봤어요. 잘 어울렸으면 좋겠네요.”
얼른 받아들고 뒷걸음질 쳐서 도로 욕실로 들어갔다. 꺼내 보니 청바지 한 벌, 초록색 셔츠, 크림색 점퍼, 벙거지 모자. 속옷…… 이런 것도 경비로 처리가 되나?
데이트라고 번쩍거리는 새 옷으로 쫙 빼입고 나가는 것도 좀 웃길 것 같아 걱정했지만 입어 보니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낡아 보이는 청바지 덕분이기도 하고 나머지도 평소에 내가 입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입었던 옷이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감각의 차이는 확실히 있었지만…….
“오늘은 타격대가 따라붙을 거예요. 당신이 신호만 보내면 무장 경찰 아홉 명이 5분 안에 현장을 포위하고 헤슬렘을 끌어내는 거죠.”
크롬웰 양이 셔츠 주머니에 나뭇가지 모양의 배지를 달아주며 방수 기능은 없으니까 물 튀어 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갑자기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엄청나게 실감이 나면서…… 당황스러웠다.
“대원들한테 허탕 칠 수도 있다고 미리 일러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을 그렇게 서두르는 타입이 아니니까…….”
“그렇긴 한데 회사도 거의 팔아넘긴 상태고, 여자친구한테 어디론가 떠날 거라고 말한 데다…… 오늘은 교외로 나갈 거잖아요? 헤슬렘이 기다리던 타이밍일 수도 있어요.”
“무장 경찰이 아홉 명이나 대기하고 있다니…… 마음 푹 놓고 있어도 되겠네요.”
내 삐딱한 대꾸에 마키바 반장이 더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목적은 놈의 소굴을 찾아내는 거야. 하겐의 소굴 같은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증거 말이야. 그 외에 니 일은 니가 알아서 해.”
“헤슬렘이 호수 한복판에서 나를 덮쳐도 그냥 모른 척하실 거예요?"
“소굴로 끌어들여서 덮치는 패턴이면 좋을 텐데…… 아니면 니가 고생 좀 해야지 어쩌겠어?”
“자꾸 그러시면 진짜 안 해요!”
누가 누굴 덮칠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말하는 게 너무 야박해서 좀 튕겼다. 마키바 반장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나름대로 타협안을 내놨다.
“기소할 때 성폭행 혐의도 추가해줄게. 법정에서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