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드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정 내려가고 싶으면 주말에 시간을 내든가, 서장한테 2, 3일 휴가를 얻든가…… 어쨌든 갑작스런 부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건 곤란하다는 타당한 지적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신발은 갈아 신고 와야 할 거란 소리에는 약간 동요를 보이더니, 만약 경찰 수색대가 지하로 쏟아져 내려가는 불상사가 생기면 책이란 물건은 귀퉁이를 찢어서 메모지로 쓰거나, 씹던 껌을 붙이거나, 경찰서에서 난동 피우는 갱단 녀석들 대가리 후려갈기는 용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 무식한 놈들이 지하실에 가득 찬 고문서들을 어떻게 다룰지 생각해보라고 한 대목에선 드디어 백기를 들었다.
일곱 시까지 혹시나 싶어 마리우스를 기다렸지만 지하실에선 희미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텅 빈 위장에 되는대로 먹거리를 쓸어 넣었던 로빈이 드디어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급히 가게를 나와야 했다. 쥬드는 안타까운 얼굴로 마리우스의 책방을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마치 그곳이 한번 사라지고 나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경찰병원까지 가는 동안 로빈은 새벽에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던 모든 것을 다 토해냈다. 처음에는 자기 발로 차에서 뛰어 내렸고, 두 번째는 내가 끌어내렸는데…… 먹은 양이 엄청난 만큼 토해낸 양도 어마어마했다. 만약 재규어 뒷좌석에다 이런 오바이트를 했다면 쥬드 손에 죽임을 당해서 길가에 버려졌을 거다.
로빈을 병원에 던져 넣고 나온 우리는 본격적인 도시의 출근길 러시아워에 합류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경찰서로 향했다.
“청바지랑 운동화…… 노트북, 나침반, 비상식량, 침낭…… “
쥬드가 마치 소풍을 하루 앞둔 어린애처럼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먼저 장 박사한테 전화부터 해야지. 싱클레어 교수한테 이 메일도 보내고…… “
“누구?”
“언어학자에요. 고대 언어를 주로 연구하는데…… 세계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쿠간에선 최고죠. 쿠간 대학 교수거든요. 싱클레어 교수는 중세 전문가지만…… 고문서 전반에 권위가 있는 양반이니까 그 서고를 보면 정신이 나갈 만큼 좋아할 거예요. 문제는 영국에 있고, 지금이 학기 중이란 건데…….”
“서장이 먼저야. 잘 얘기해서 휴가부터 받아.”
쥬드가 뭔가를 곰곰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 카메라! 카메라도 챙겨야지…….”
내 얘긴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쥬드와는 바로 헤어졌다. 나는 본래 파트너 운이 없는 걸까? 쥬드가 비니만큼 위험한 건 아니지만 편안한 파트너는 절대로 아니었다. 지하실에 갖다 와서 그런지 비니랑 다닐 때보다 더 피곤했다.
“너 요즘 간이 부었냐? 허구한 날 땡땡이야?”
복도에서 마주친 반장이 대뜸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땡땡이 친 적 없어요.”
“어제 오후에 나가서 지금까지 어디서 뭐했어?”
“로빈을 찾았어요.”
반장이 복도를 건성으로 빙 둘러봤다.
“내 눈엔 안 보이는데?”
“병원에 있어요.”
병원이란 소리에 반장이 긴장했다.
“총에 맞기라도 했어?”
“배탈이 났어요.”
반장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로빈에게 그렇게 먹으면 탈난다고 분명히 경고했었다.
“칼은?”
“아직…… 찾는 중이에요.”
“뭐야?”
반장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세트로 잃어버렸으면 세트로 찾아와야 할 거 아냐? 한 놈은 얻다 흘리고 아직이야? 게다가 경찰서에 지겹도록 전화를 해대는 건 로빈의 할머니가 아니란 말이야!”
“걱정 마세요. 며칠 안으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며칠?”
반장의 노성에 복도를 지나가던 사무엘이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더 이상은 물러날 데가 없어서 벽에 등을 대고 붙어 섰다. 며칠 안에라도 찾으면 다행이지…… 영 못 찾고 말면 칼의 할머니가 얼마나 상심이 클까.
“이 망할 놈의 도시가 요즘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판인데 짭새 한 마리 찾자고 배치할 인력이 어디 있어? 게다가 넌 강력반 베테랑이야! 그동안 놀고 다닌 것도 모자라서 앞으로 며칠? 죽을래?”
쥬드를 들쳐 업고 가파른 계단을 두 시간이나 올라오느라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뱃속을 까서 보여줄 수도 없고…….
반장한테 덤빌까 말까 생각을 좀 하고 있는데 복도 저쪽에서 서장이 장갑차처럼 씩씩거리며 이쪽으로 돌진했다. 쥬드가 종종걸음을 치며 바짝 따라 붙어서 뭔가 얘기 중인데…… 서장은 그 얘기가 듣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크롬웰,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휴가? 한 달? 당장 사무실에 가서 자네 책상 위에 처리할 서류가 얼마나 쌓였는지 보고 얘길 해!”
“한 달이 너무 길면 2주일…….”
“시끄러!!”
서장의 기세에 놀란 반장이 내 옆으로 와서 붙어 섰다.
“가서 밀린 일이나 해! 그리고 휴가는 남들처럼 여름에나 가란 말이야!!”
“좋아요!”
쥬드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서장은 자신의 호통이 먹혀든 줄 알고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가려던 참이지만…… 저건 고분고분 지시를 따르겠다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다.
“정 그러시면…… 사직서를 쓰겠어요!”
쥬드의 폭탄선언에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다 놀랐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역시 서장이었다.
“뭐가 어째?”
서장이 쥬드를 금방이라도 한대 칠 듯 노려봤다. 반장하고 나는 무서워서 서로 손을 붙잡고 떨고 있는데…… 역시 쥬드는 협상 전문가라서 상황의 주도권을 틀어잡고 마지막 배팅을 날렸다.
“일주일…… 주말 끼고. 더 이상은 양보 못해요.”
서장과 쥬드 크롬웰이 싸우면 결과는 대부분 쥬드의 승리였다. 서장은 타고난 바보 멍청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쥬드를 너무 믿거나 쥬드한테 오래 시달리다 보면 이와 같이…… 저 여자가 없으면 점심 메뉴도 못 고르는 머저리가 되고 만다.
서장이 나름대로 버텨봤지만 성과라곤 당장 휴가 내놓으라는 쥬드의 요구를 델파소 붕괴 사건이 행정적으로 마무리된 이후로 미룬 정도였다.
쥬드도 서장도 협상 결과가 썩 내키질 않아서 얼굴 붉히며 헤어진 후…… 반장은 내 손을 그대로 잡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칼하고 로빈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주 복잡한 동네에서 길을 잃었어요.”
“무슨 소리야? 델 파소가 자갈밭으로 변한 게 언젠데?”
“거기 말고요.”
“어쨌든 안 돼!”
반장이 잘라 말하고 문을 열어젖히더니 밖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앤디, 이리 들어와!”
앤디라길래 마약 단속반의 엔디 포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애가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불쑥 들어왔다. 잘 해봐야 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데 경찰서엔 무슨 볼일? 견학이라도 왔나?
“앤디 나스카에요.”
앤디가 붙임성 좋게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내민 손 마주 잡고 흔드는 사이, 반장은 어딘지 부산스럽게 서랍을 뒤져서 담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또 주머니 뒤져서 라이터 내려놓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혼잣말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앤디는 리즐 시에서 근무하다가 며칠 전에 이쪽으로 지원했어.”
잠시 멍한 눈으로 앞에 선 남자애를 쳐다봤다.
“요번 주부터 파커랑 파트너로 현장 근무를 했는데…… 어제 파커의 발목이 부러졌어.”
“강도 용의자를 쫓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거든요.”
앤디가 잽싸게 끼어서 부연 설명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애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내 눈엔 여전히 어딘지 들떠있는 10대로밖에 안 보였다. 아무리 일손이 아쉬워도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을 강력반에 배치하는 경우는 없다. 얘는 뭘까? 경찰학교 최연소 졸업에 에쉬보다 더 막강한 동안童顔이라도 되나?
“앤디랑 파커는 어제, 그제 이스마엘 거리에서 연속으로 벌어진 강도 살인사건을 수사 중이었어. 근데 너도 알겠지만, 요즘 파커가 몸이 좀 불었잖아. 엔디는 아직 동네 지리가 깜깜이고…….”
반장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어딘지 떳떳치 못한 기색이었다.
“그래서……요?”
나도 기분이 별로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뭐가 그래서야? 둘이 손 붙잡고 튀어 나가서 어제 놓친 그 강도 놈 당장 잡아와!”
반장이 버럭 소리쳤다.
“이 어린 애하고요?”
“앤디도, 너도 파트너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강력반 업무는 아직 익숙칠 않아요. 계속 정복 근무였던 데다 제가 있던 곳은 굉장히 조용한 동네였거든요.”
“계속 거기 있지, 이런 덴 뭐 하러 왔어?”
내 뚱한 대꾸에 앤디가 당황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가 필요한 곳에 있고 싶었고, 쿠간 시는…….”
경찰이 많이 필요한 동네다. 그건 사실이다.
“그만 나가 봐. 나도 할 일 많아.”
반장이 덜 마른 장작처럼 담배연기를 뭉게뭉게 내뿜으며 신경질을 냈다. 조용히 나가려다가 문득 왜 기분이 이렇게 언짢은지 깨달았다.
“그런데…… 비니는 그냥 좀 다친 거지 죽은 게 아니거든요?”
파트너 바꿔 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바뀌길 바란 건 아니었다.
“누가 죽었대?”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잖아요. 지금…….”
내 대꾸가 거슬렸는지 반장이 막 새로 피워 물었던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럼, 비니 정신 차릴 때까지 혼자 놀러나 다닐래?”
“일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2인 1조는 강력반 규정이야! 누구 맘대로 혼자서 돌아다녀?”
근무 규정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파트너가 한심할 정도로 어린놈이긴 하지만…… 지금 거슬리는 건 버릇없는 고등학생 같은 낯짝을 가진 새 파트너가 아니라 반장의 태도였다. 뭐냐? 저 암울한 표정, 말투…… 마치 비니가 영 가망 없는 것 같은…….
“비니 상태도 제대로 모르잖아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면 안 돼요?”
“빨리 안 나가?”
반장이 집어던진 작은 액자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서 문에 맞고 튕겨 나갔다. 반장을 꼭 닮은 아들이 예쁜 강아지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더 이상 얼굴 마주 하고 있어봐야 서로 좋은 말은 안 나올 것 같았다.
나오면서 죄 없는 문짝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공연한 짓이었다. 문짝은 부서지지도 않았고 사무실 사람들만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생각나서 돌아보니 앤디가 완전히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성질 더러운 파트너랑 엮였다고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도 살인이랬어?”
“예…….”
“얘기 해봐.”
근처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 거리 10번가 뒷길에서 젊은 남자 시체가 발견됐거든요. 사흘 전에요. 그리고 또 어제…… “
쿠간에서 일어나는 강력범죄의 절반이 강도 살인이었다. 돈푼께나 있어 보이는 행인을 덮쳐서 죽이고 금품을 약탈하는 그 비열한 범죄엔 딱히 수사할 만한 꺼리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범행현장 주변을 탐문하고, 죽어라 순찰하고…… 그러다 또 요행히 다른 범행 현장과 맞닥뜨리면 해결이고, 아니면 신발 밑창만 절단 나는 심란한 케이스였다.
앤디가 주섬주섬 어제 저녁 파커와 순찰 돌던 중 마주친 수상쩍은 남자를 20여 분이나 추적한 끝에 파커가 허름한 서민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추락한 경위를 설명했다. 파커는 요 몇 달 사이 몸무게가 10킬로그램 가까이 불었는데 아내와의 불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오로지 먹는 것으로 푼 결과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상했는데?”
“그냥…… 우리를 보더니 달아났어요.”
이 웃기는 도시엔 경찰만 보면 냅다 도망치는 이상한 시민들이 간혹 있다. 상대가 우릴 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면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죽어라 쫓아가서 잡아 놓는데, 정말 운이 좋아서 수배 중인 흉악범인 경우도 어쩌다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이유 없이 내달린 경우였다. 정복경찰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사복경찰까지 알아보고 그러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래도 상당히 수상하긴 했어요.”
자기도 한심하다 싶었는지 앤디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런 사건은 일단 현장을 보는 게 순서였다.
“사건 파일 좀 챙겨와 봐. 가면서 보게.”
탄창, 수갑, 신발 밑창…… 장비점검 하고 막 나가려는데 반장실 문이 열렸다.
“야…….”
반장이 나를 불렀다.
“지금 나가는 길이에요.”
“잠깐 들어와 봐.”
좀 전에 자기 방 문짝을 부숴버릴 뻔했던 행패에 대해 유감이 남았는지 말투나 표정이 엄청 시무룩했다.
“비니 말이야…….”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반장이 긴 한숨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제 병원에 가 봤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어.”
순간, 바닥이 한 바퀴 빙그르 돌았다.
“어떻게……요?”
“기계가 아니면 식별도 못할 만큼 심장 박동이 약하다나……. 호흡도 거의 멎은 거나 다름없대. 의사가…….”
“…….”
“별다른 외상도 없는데 혼수상태가 너무 오래가는 게…….”
반장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여태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아무래도 뇌사가 아니겠느냐고…… 자기네들끼리 그러더라고.”
앤디가 챙겨다 준 사건 파일을 대강이라도 훑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볼수록 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왜 이렇게 자꾸 한숨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결국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파일을 뒷좌석에 던져버렸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앤디가 내 눈치를 힐끔 살폈다.
“병원에 잠깐 들러야겠어. 겐지 클리닉…… 알아?”
쿠간 시 신참인 앤디가 제대로 아는 길은 자기 아파트에서 경찰서, 경찰서에서 이스마엘 거리로 가는 길뿐이었다. 덕분에 복잡하지도 않은 대로를 30분이나 헤맸다. 내가 길을 잘 일러 줬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내도록 머릿속이 멍해서 길잡이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로비에서 잡지나 보고 있으래도 앤디는 부득불 내 뒤를 따라왔다. 비니 입원실은 7층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앤디가 내 팔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기…… 바바라 소사 아니에요?”
리즐 시 출신이면 시장 얼굴은 몰라도 바바라 소사는 알아보는 게 정상이다. 비록 그녀가 병원 벤치 구석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고 해도…….
그녀도,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오늘따라 불길하게만 보였다. 검은 정장이야 늘 입고 다니는 건데, 마치 상복 같았다. 아는 척을 할까, 그냥 지나갈까…… 머뭇거리고 있는데 바바라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바바라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같이 있었잖아요!”
바바라가 화를 냈다. 대체 혈관에 피가 흐르긴 하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갑고 창백한 이 여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도 겁이 났다. 비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
잠시 나를 노려보던 바바라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내게도 고스란히 옮을 것 같아서 서둘러 병실 문을 열었다.
비니는 자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면 ‘5분만……’ 하고 중얼거리며 돌아누울 것만 같았다. 실제로 비니는 어딜 크게 다친 게 아니었다. 날아온 벽돌 파편에 이마가 약간 찢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 부상은 나도 입었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치거나 한 적도 없다.
반장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의사들이 다른 환자에 대해 얘기한 걸 주워듣고 혼자 오해를 했거나…….
“야…….”
흔들어 깨우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섬뜩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세요?”
뒤에 서 있다가 내 등에 얼굴을 부딪친 앤디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야. 그냥…….”
몸이 차가웠다. 마치 시체처럼…….
비니에게 다가가서 그 차가운 몸에 다시 손을 대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혹시 죽은 거면…… 죽은 지 한참이 지나서 몸이 싸늘하게 식도록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거라면…….
녀석은 정말 숨을 쉬는 기척도 없었다. 내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한번 털고 녀석의 손을 움켜쥐었다. 역시 차가웠다. 하지만 피부는 여전히 탄력이 있고 관절도 부드러웠다. 미약하나마 비니에겐 아직 생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걸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실낱같이 가는 호흡과 미지근한 온기 이외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 몸이라는 징후가 전혀 없었다.
앤디가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밀어줬다. 그렇지 않아도 곧 주저앉을 판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좀 전에 바바라가 그랬던 것처럼…….
“굉장히 친하게 지냈었나 봐요.”
앤디가 비니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걸었다.
“파트너니까…….”
“전, 파트너랑 사이가 좋지 못했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어.”
때로 사람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죽기도 한다. 나는 가까운 사람을 많이 잃었는데……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내 곁에서 사라져갔다. 슬픔은 사무치도록 깊고 길었다. 무엇으로도 그 공허함을 메울 수 없었고…… 지금도 가슴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허허로울 때가 있었다. 비니가 이렇게 누워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또 한편, 저 가는 호흡이 이제라도 중단되고 희미한 생기마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다들 그렇게 가버렸으니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나하고 앤디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눈앞이 흐려서 얼른 알아보질 못했는데…….
“어머…… 제이가 있었네?”
몬티첼리 부인…… 비니의 어머니였다.
“좀 어떤가 싶어서요.”
얼른 표정을 고치고 일어섰다. 몬티첼리 부인은 비니 같은 놈의 어머니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려 깊고 우아한 부인이었다.
“보다시피…… 아직 자고 있어요.”
부인이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서글픈 미소는 입가에 일어난 가는 경련과 함께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부인의 뒤에 바바라가 서 있었다.
의식 불명으로 누워 있는 파트너를 앞에 두고 그 어머니와 여자친구까지 마주 대하고 보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부인. 제가…… 제일 가까이 있었는데…….”
“당신이 최선을 다한 건 우리 모두가 알아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몬티첼리 부인을 처음 만난 건 경찰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비니가 부모님께 나를 룸메이트로 소개했을 때 몬티첼리 부부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돌아가면서 부인은 내게 몸조심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데……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 없었다.
“비니는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어요. 거의 일주일이나 내리 잠만 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연쇄살인범을 체포했을 때요. 의사들은 그때도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의식이 돌아오기 어려울 거라고 했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음성이었다. 부인이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그때처럼 한 일주일쯤 지나면 깨어날 거예요. 낮잠 잠깐 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가뿐하게…….”
그럴까? 루크 첸의 불길한 헛소리가 막 생각났다. 1년 2개월…… 그 얘길 들었을 때는 뭐 저런 헛소리가 다 있나 싶더니, 막상 비니를 보니까 그렇게라도 정신 차리고 일어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예…….”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리더니 마치 비니에게 하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떨림만으로도 부인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혼수상태였으면 좋았을 걸…… 적어도 슬퍼할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경찰학교 시절,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비니네 집에서 보냈었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내 눈에 비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처럼 보였는데, 사실이 그랬다. 크리스마스 시즌…… 비니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가정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중간이 갑자기 우지끈 부러진다거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서재 책장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불상사는 물론 있었지만 사람이 다친 적은 없었고, 비니네 가족들 중에 그 정도로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틈에 끼어 있는 게 썩 편치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모두 친절했고, 특히 몬티첼리 부인은 내게 정말 자상했다.
비니가 저렇게 된 일로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이 바로 자신일 텐데도 부인은 나하고 바바라를 번갈아 위로했고 기왕 왔으니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간곡히 나를 잡았다.
“우리 가족이 제이한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모를 거예요. 비니가…… 정말 착하고 좋은 앤데, 이상하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친구가 통 없었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비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근처에만 가도 날벼락이 떨어지는데 그 옆에 얼씬거릴 만큼 간 크고, 맷집 좋은 놈은 흔치 않았다. 나는 룸메이트라서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비니는 제이를 친형제 이상으로 사랑해요. 전에 그…… 연쇄살인범 사건 때 비니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비니가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건 처음 봤다니까요. 비니 아버지까지도 애가 무서워서 옆에 가질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때 비니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나도 들어서 안다. 그때는 비니 아버지만 그랬던 게 아니라 쿠간의 모든 경찰들이 비니를 피해 다녔다. 그 당시 비니 주변에는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비니 근처를 지나가다가 뭔가에 떠밀리듯 나자빠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느닷없이 터진 유리창은 셀 수도 없다고 했다.
뭐…… 그 정도는 비니 컨디션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전산망이 다 다운이 된다든가, 수도관이 터져서 경찰서 1, 2층이 몽땅 물바다가 된 것까지도…… 하지만 출동하던 순찰차 엔진이 터져서 차가 홀랑 타버린 것까지 비니 탓으로 돌리는 건 내가 비니라고 해도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 저런 생각하며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앤디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인 옆에서 차를 마시던 바바라가 살벌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바바라하고도 잘 지내긴 했지만…… 멀리 사니까 자주 보기는 어려웠죠.”
부인이 어깨를 끌어안자 바바라가 이를 빠드득 갈면서 시선을 깔았다. 저렇게 풀이 죽은 바바라를 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도 여전히 무섭지만…….
“어쨌든 비니가 집에 데리고 온 친구는 제이가 처음이었어요. 이후로도 오랫동안 잘 지내줘서…….”
앉은 자리가 점점 가시방석이었다. 바바라하고 마주 앉아 있기도 그렇고, 비니가 집에다 뭐라고 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게 잘 지내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고요…….”
나도 모르게 바바라 눈치를 보면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바바라 소사한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경찰이라니…….”
앤디가 방금 나온 병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뜻밖의 장소에서 바바라를 보고는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리즐 시에 있을 때 비니 얘기 못 들었어?”
앤디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도시에서 쿠간 시 소식을 일일이 알기는 어렵죠.”
여태 만났던 리즐 시 경찰들은 다 알고 있던데…… 수상쩍은 눈길로 쳐다보자 앤디가 과거를 솔직히 고백했다.
“그리고 저는…… 내도록 외딴 동네 파출소 근무였거든요.”
“그럼 곧바로 강력계로 발령 나기가 어려웠을 텐데?”
“어려웠죠. 1년 내내 집안행사, 가족 모임에 안 가겠다고 협박을 한 끝에 간신히…….”
집안행사? 협박? 요것 봐라…… 내가 우뚝 멈춰 서자 앤디가 그제야 말실수 한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뭐야? 너도 시장 처조카야?”
“아니요.”
앤디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라니 일단 다행이다.
“그럼 무슨 소리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다시 물었다.
“사실은 아버지가…… 경찰청장이시거든요.”
“뭐가 어째?”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릴 질렀다. 그 바람에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기, 그게…… 아버지가 처음부터 경찰청장이었던 건 아니고…….”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날 때부터 경찰청장은 아니었을 테니까! 당황한 앤디가 구석으로 몸을 날리며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경찰이었고, 아버지도 처음엔 경찰학교에 입학하는 걸 좋아하셨는데…… 우리 형도 경찰이고…… 그런데 3년 전에 형이 마약 사범 체포 작전 때 총에 맞아서…… 거의 죽다가 사는 바람에…… 엄마가 죽어도 짭새는 안 된다고…… 아버지가 또 엄마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시거든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앤디에게 동조하는 눈치였다.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 자기 일 아니니까.
“경찰이 다 총에 맞아 죽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도 그 시골구석에 사람을 처박아 놓고…… 저는 진짜 경찰이 되고 싶었고 또 자신도 있는데…….”
“진짜 경찰?”
“예…….”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는데, 마침 5층이라 홧김에 나도 내렸다. 앤디도 냉큼 따라 붙었다.
“나도 진짜 경찰이랑 다니고 싶어! 고위층 철부지 뒤치다꺼리는 더 이상 못해!”
“그건 말씀이 지나치신데요.”
고위층 철부지란 소리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앤디가 반격에 나섰다.
“지나친 건 내가 아니라 서장하고 반장이야. 거의 2년을 골칫덩어리 시장 처조카랑 붙여 놓은 것도 모자라서 이젠 옆 동네 경찰청장 아들을 들이밀어?”
“시장 처조카 때문에 뭐 피해 입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죽어도 잊지 못할 피해만 스무 건이 넘어!”
모르면 가만이나 있을 것이지…… 냅다 소릴 지르고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입원실 문을 두드렸다. 문 옆에 앉아 있던 사설 경호원들은 내 얼굴을 아니까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하지만 문 열고 막 들어서려던 참에 뒤에서 앤디가 붙들렸다.
“저 사람 파트너라고요!”
앤디가 경호원들의 손을 뿌리치며 투덜거렸다. 경호원들이 나를 쳐다보며 확인을 기다렸다.
“모르는 애야.”
몬티첼리는 조그만 계산기 같은 걸 들여다보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뭐……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병문안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비니 작은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진 신세도 적은 것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몬티첼리가 이 지경이 된 것에 내 책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왔어?”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도 그렇고, 베개를 포개 놓고 앉을 정도면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초췌했다.
“괜찮아. 의사들도 생각보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 하더군. 그래 봐야 한동안은 병원 신세지만.”
손에 든 게 뭔가 했더니 조그만 게임기였다.
“어쨌든 이렇게 와주니 고맙군. 옛 친구들도 뜸한 판에…….”
넓은 병실이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시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악당이긴 하지만…… 세상인심이 이런가 싶어서 서글플 정도였다.
“근처에 왔다가 들렀습니다. 저라도 좋으시다면 자주 들리겠습니다.”
“무리할 건 없고…… 그런데 비니는?”
그제야 몬티첼리가 아직 비니 소식을 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중환자라 나쁜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던 걸까? 프란시스 몬티첼리와 비니는 보통 작은아버지와 조카 사이가 아니니까 그만큼 상심이 클 거다. 앤디를 떼어놓고 들어오길 잘했다.
“다른 일이…… 요즘 시에 이런저런 사건이 많아서요.”
조만간 알게 될 일이지만 굳이 내 입으로 나쁜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대강 둘러댔다.
“난 또, 지난번에 내가 뭐라고 좀 한 거 갖고 삐졌나 했지.”
“그럴 놈이 아닌 건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그건 그렇지…….”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나도 길게 할 말은 없는 사이였다. 몬티첼리는 다시 게임기를 켰고 나도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그런데 요즘 좀 이상하단 말이야.”
다시 몬티첼리를 돌아봤다.
“뭐가요?”
“형님 댁 식구들이 아침저녁으로 병문안을 오고 있어. 형수님이야 본래 다정한 성격이긴 하지. 하지만 형님처럼 바쁜 사람이 저녁때 마다 좀 어떠냐면서 얼굴 들이미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요 며칠은 롭까지 하루에 한번은 들러. 그 집 막내 녀석은 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설마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
내 침묵을 별일 없음으로 해석했는지 몬티첼리가 게임기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누워 있으니까 걱정만 많아져. 쓸데도 없이…….”
“그만 쉬십시오.”
얼른 나오려고 문고리를 잡아 비트는데 몬티첼리의 음성이 다시 뒷덜미를 잡아챘다.
“비니한테 가끔이라도 좀 들르라고 해.”
“예.”
괜히 들어갔다. 몬티첼리 같은 사람 앞에선 거짓말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나마 부상 중이라 기백이 전 같지 않아서 대강 넘어갔지, 잘 나갈 때의 몬티첼리 같았으면 이렇게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도 않았을 거다.
문에 기대서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버르장머리라곤 없어 보이는 금발머리 고등어가 눈이 찢어져라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삐졌냐? 도련님?”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몇 살인데?”
“스물셋이요.”
한숨이 절로 나올 뿐…… 이젠 애 데리고 실랑이 할 기력도 없었다. 이제 스물셋, 경찰학교 졸업한 지 일 년이 넘었어도 사건 사고라곤 없는 조용한 변두리에서 순찰이나 돌았으니 경력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강력사건에 관한 경험은 더더욱 없을 거고…… 게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상류층 도련님, 게다가 막내…… 앤디는 비슷한 상류층이라도 절반은 마피아였던 비니하고는 상태가 또 달랐다. 나는 언제쯤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의 파트너랑 일 좀 해보나? 아니면 최소한 중산층이라도…….
“누구 병실인데 경호원이 둘이나 붙어 있어요?”
당장 경찰서로 돌아가서 다 엎어버리고 싶은 걸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데 앤디가 좀 전까지 자기를 붙들고 있던 경호원들을 꼬나보며 따지듯 물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
그 이름은 어떻게 아는 지 앤디가 긴장했다.
“선배님이 왜 그 사람 병문안을 해요?”
“개인적으로 좀 알아.”
“개인……적으로요? 마피아 보스하고?”
“왜? 안 돼?”
긴말하기도 귀찮아서 앤디를 밀치고 레빈의 방으로 향했다.
레빈은 지난밤부터 갑자기 오른 열 때문에 나른하게 뻗은 상태였다. 처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여서 당황스러웠다. 레빈은 몬티첼리와 달리 비니가 같이 오지 않은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저도 어제 알았어요. 병실에도 가 봤는데…… 그냥 자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열 때문인지 숨소리도 거칠었다. 비니가 그 꼴로 누워 있는 걸 봤을 때부터 기분은 이미 엉망이었다. 몬티첼리가 썰렁한 병실에서 혼자 게임기나 만지고 있는 걸 봤을 때는 더 그렇더니…… 이제 레빈까지 헐떡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나도 어디 침대 하나 잡아서 드러눕고만 싶었다.
“사실, 비니 도련님 일은 뭐라고 단정을 못 내리겠어요. 하지만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고…… 또 쉽게 잘못될 타입도 아니니까…… 그러다 일어나겠죠.”
잘하면 1년쯤 후에…….
“몸이 계속 안 좋았어요?”
래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았는데 어제 오후부터 좀…… 그래요. 예전에 크게 한번 다친 이후론 몸 상태가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데리고 들어온 애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별로 달고 다니고 싶진 않지만 이 방엔 불청객을 걸러내는 경호원이 없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앤디가 톡 끼어들었다.
“파트너에요.”
레빈도 어이가 없는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철부지 도련님의 사회생활 체험 프로그램이랄까…… 요즘 경찰서엔 그게 유행이거든요.”
“선배님!”
앤디가 버럭 소릴 질렀다. 넋 놓고 있다가 좀 놀랐다. 레빈이 앤디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쿠간 시에서 제일 귀여운 경찰을 파트너로 얻었군요.”
“내 타입은 아니에요.”
미소를 지으려던 레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통증이 심한 것 같았다.
“간호사를 부를까요?”
“좀 전에 왔다 갔어요.”
레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 손을 잡아서 꼭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날 뿐이었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요. 나도, 비니 도련님도 별 일 없을 테니까…….”
“내 얼굴이 어떤데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이 커다란 병원 5층에 입원한 사람들이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었다. 친구냐 아니냐를 떠나서…… 어제 밤에 또 한 명의 환자가 세상을 떠났고, 가르시아는 상태가 많이 안정되긴 했지만 중환자실에서 나올 날이 요원하다고 했다. 좋은 소식이라곤 겨우 그 정도였다.
“저 사람은 누구에요?”
궁금한 게 많은 앤디가 방을 나서자마자 뚱한 얼굴로 물었다.
“저 사람도 마피아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야.”
“아직도 돌아볼 병실이 남았나요? 벌써 오훈데…….”
앤디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채근을 했다. 신참은 첫 강도사건에 가슴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야…….”
“왜요?”
앤디가 수상쩍다는 듯 나를 째려봤다.
“사건이고 뭐고 걷어치우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내 제안에 아직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신참이 펄쩍 뛰었다.
“사건은 어쩌고요?”
“알게 뭐야? 이 동네는 뒷골목에서 마주친 놈 셋에 하나는 강도야. 하루 정도 땡땡이 쳐도 우리 몫의 강도는 언제나 차고 넘칠 거야. 그럼 된 거 아냐?”
“안 돼요!”
마치 못들을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녀석이 딱 부러지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제가 어리고, 또 현장 경험이 얼마 없다고 선배가 절 막 보시는 경향이 있는데요……. 선배님 개인 비리에 절 끌어넣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속상할 때 술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엄청난 비리야?”
“여태 마피아하고만 어울렸잖아요! 바바라 소사도 그렇고, 프란시스 몬티첼리에…… 솔직히 말해봐요. 좀 전에 그 사람도 마피아죠? 쿠간 시에선 마피아랑 경찰이랑 본래 이렇게 친한가요?”
고지식한 놈…….
“본래 대도시에선 다 그래. 못 믿겠으면 니네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 봐.”
“선배님!”
앤디가 약이 올라서 펄펄 뛰었다. 순진한 것도 좋고, 원리원칙 지키는 것도 좋은데…… 이제 와서 비니만한 파트너도 없었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할 생각도 없는데…… 술 한 잔 같이 마셔줄 친구도 없는 신세라니 서글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술이 땡기시면 혼자 드세요. 저는 일하러 갈 테니까!”
“길도 모르잖아.”
앤디가 상처 입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조금만 더하면 총이라도 뽑아들 기세다.
“제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요?”
“응.”
내가 좀 심했나? 나를 노려보는 앤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헤어져요!”
앤디가 만난 지 한 달쯤 되는 남자친구, 아니…… 여자친구한테 결별 선언하듯 빽 소리를 지르고 돌아섰다. 짜증도 나고…… 미안하단 생각도 들었다. 내가 언제는 그렇게 파트너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애한테 심술부린다고 속이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서 앤디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알았어. 강도 잡으러 가자. 됐지?”
생각해보면…… 이런 애를 앞에 놓고 술은 마셔서 뭘 할까 싶다. 그냥 강도를 쫓아서 골목길을 헤매는 편이 스트레스 풀기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이거 놔요!”
앤디가 거칠게 한번 튕겼다. 길도 모르는 주제에…… 순순히 잡았던 옷깃을 놔 줬다. 앤디가 겁나서 그런 게 아니라 좀 전에 저쪽 코너로 뭔가 시커먼 것이 지나갔던 것이다.
“어린애 취급은 지긋지긋해요! 선배님 눈엔 내가 애로 보이는지 몰라도 나도 코스 제대로 밟은 엄연한 현역 경찰이라고요…….”
애로 보이는 게 아니라 앤디는 실제로 애였다. 어쨌든,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라서 앤디를 밀치고 불길한 그림자가 바람처럼 사라진 지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병원에서 그토록 민첩하고 음산하게 움직일 사람은 딱 하나였다.
“발렌타인!”
막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지려던 발렌타인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귀찮은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뭐야?”
그 한마디엔 자기 일에 참견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은근한 위협이 깔려 있었다. 발렌타인은 전에 입었던 검은 스웨터와 바지 차림이었는데…… 오컴 추격전의 결과로 먼지가 허옇게 찌들어서 이젠 거의 회색이었다. 안색은 오히려 며칠 전보다 좋아 보였다. 그런데…… 좋으면 뭐하나? 발렌타인이야말로 가망 없는 시한부 인생인 것을…….
“지금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 퇴원하는 중이야.”
발렌타인이 비상계단 문고리를 비틀어 열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그 문을 밀어서 다시 닫았다. 영문 모르고 나를 쫓아온 앤디가 지금 막 도착해서 내 뒤에 섰다.
“비상계단을 통해서 뒷문으로?”
“상관할 거 없잖아?”
눈에 딱 띄었는데 어떻게 상관을 안 해?
“대강 좀 해둬! 당신 아니라도 지금 돌겠어!”
짜증이 치밀어서 버럭 고함을 지르자 발렌타인이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라비틀어진 발렌타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는데 발렌타인까지 이런 삽질이라니……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친 짓 작작하고, 그냥 병원에서 곱게 죽어!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길바닥에서 죽는 부랑자는 당신 아니라도 많으니까!”
“너 어디 아파?”
발렌타인이 손목을 비틀어 빼면서 으르렁거렸다. 황당하고 불쾌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픈 건 당신이잖아! 왜 이렇게 튀어? 당신만 암이고, 당신만 죽어? 그냥 조용히 살다가 남들처럼 조촐하게 장례식 치르고 공원묘지 한 구석에 묻히라고!”
발렌타인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변변찮은 일 때문에 화가 나 있었는데, 발렌타인이 거기다 불을 지른 것뿐이다.
“그러기 싫다잖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길에서 죽었어.”
하이네 얘기겠지. 그 이름도 이제 지겹다.
“말썽 안 피우고 얌전하게 죽으면 내가 책임지고 그 자식 옆에 묻어줄게.”
“무덤이…… 있었나?”
애인 옆에 묻어준다는 소리가 솔깃한지 발렌타인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세인트 세바스찬 공원묘지 언저리 어디쯤에…….”
연고 없는 부랑자나, 가족 없는 범죄자들이 죽어서 묻히는 곳이었다. 쿠간 시 남쪽 끄트머리…… 사막이 시작되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살아선 잠시 편하게 쉬어갈 움막도 없던 놈이 죽어서 호강하는군.”
쓸쓸한 얼굴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은 사람이 어떻게 살인자가 됐을까…… 이 비틀린 남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발렌타인이 상념에 젖어 있었던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갑자기 얼굴 표정이 싹 질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일전에 봤던 그 예쁘고 귀여운 간호사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성깔 있어 보이는 커다란 눈으로 발렌타인을 곧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병실에 발렌타인이 없는 걸 발견하고 찾아다니던 중이었나 보다.
“그러게 얌전하게 누워 있지. 이제 어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발렌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빌어먹을! 벌써 튀었다.
비상계단 통로로 달려들어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발렌타인은 벌써 두층이나 아래를 달려 내려가는 중이었다. 중병을 앓는 와중에도 빠르고 민첩하기가 표범 같고 송골매 같았다. 이러니 전성기 때는 온 도시의 경찰이 총출동을 해도 번번이 허탕이었지.
“선배!”
막 뛰어 내려가려는 참인데 앤디가 당황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넌 엘리베이터로 내려가! 아래층에서 기다려!”
“누군데요?”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치만…….”
“저 자식을 놓치면 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으로 쫓아 보내고 말 테니까 알아서 해!!”
서너 계단씩 뛰어 내려가면서 앤디에게 소리쳤다. 집으로 쫓아 보낸다니 기분이 상했는지, 긴장이 돼서 그런 건지 앤디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재 4층 중간, 발렌타인은 2층, 속도로 보면 엘리베이터가 더 늦을 수도 있었다. 3층까지 내려가서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 발렌타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귀신같은 놈!
2층에서 복도로 나갔는지도 모른다. 항상 사람이 많은 병원인데다 구조도 복잡한 건물이니까 사람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건 발렌타인에겐 일도 아니었다. 놈은 열 명도 넘는 전문 경호원을 따돌리고 암흑가 실세였던 루 콜롬바인을 암살하고 유유히 사라진 쿠간의 전설이었다. 경찰서에도 놈의 팬이 있을 정도다.
계단 전체를 뛰어내리다시피 2층에 도착했는데…… 복도로 통하는 문은 열렸던 흔적이 없었다. 사람이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그사이에 1층으로 내려갔나 싶어서 계단 아래쪽을 훑어보다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렌타인을 발견했다. 발렌타인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발렌타인이 손등으로 이마와 목 언저리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나한테 따졌다. 나도 모르겠다. 발렌타인이 남은 인생을 병원 침대에 누워 보내든,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다가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져 죽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게다가 나로 말하면 지난 원한이 하도 깊어서 마지막 가는 길에 길동무 삼으려고 달려들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
“불쌍해서 그래.”
발렌타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봐야 비웃는 거지만 동정한다고 화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부드러웠다.
“뭐가 그렇게 불쌍한데?”
“혼자고, 병들었고…… 죽어가니까…….”
“그거야 어디 있어도 마찬가지잖아.”
발렌타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발렌타인의 팔을 붙들었다.
“그냥 여기 있어. 이제 그만 쉬는 것도 나쁠 거 없잖아?”
고분고분하지 않을 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발렌타인의 대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격했다. 우선 내 팔을 되잡아서 확 비틀어 꺾은 다음에 내 머리를 벽에다 갖다 박아버린 거다. 환자라고 방심한 게 실수였다. 어흐…… 머리야…….
나를 가뿐하게 털어버리고 돌아서는 발렌타인의 허리를 순전히 오기로 붙들고 늘어졌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사격 솜씨만 좋은 줄 알았는데 격투기 실력도 만만치 않아서 잠깐 실랑이 끝에 발렌타인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쥐어 박히고 말았다.
“나는 니가 불쌍해.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마무리로 내 명치를 무릎으로 사정없이 올려 차서 계단에 거칠게 밀쳐버린 발렌타인이 무심하게 지껄였다. 나도 내가 불쌍하다. 장난 아니게 아프네.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통증에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몸싸움이라면 나도 누구한테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는데, 죽을 날만 바라고 있는 중환자를 상대로 주먹질을 할 수도 없으니…… 멈칫 멈칫하다 이 꼴이다.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발렌타인이 뛰어나간 비상문을 열어 젖혔다. 발렌타인은 이제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머리만 살짝살짝 보일 뿐이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저택에서 몇 주간 신세지는 불상사만 없었어도 저 자식을 개인적으로 알 일은 없었을 거고, 그랬으면 이런 일로 공연히 가슴 아플 까닭도 없었을 텐데…… 오늘따라 니콜라스가 원수 같다.
로비 한복판에 선 발렌타인이 나를 슬쩍 돌아봤다. 슬픔이 가득 고인 저 갈색 눈동자를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발렌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곤 증오와 두려움뿐이어야 하는데…… 아니, 발렌타인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난 며칠 계속 된 우울함에 마음이 지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발렌타인이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 틈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잘 가라! 이 나쁜 놈아!
명치를 제대로 얻어맞은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려서 문가에 주저앉았다. 그때, 먼 곳에서 뭔가에 놀란 사람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고, 철재 기물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로비 저쪽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발렌타인을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을 마구 밀치고, 휠체어 떠밀고, 카트도 때려 엎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앤디!!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적을 향해 돌진하는 코뿔소처럼, 엉덩이를 걷어 채인 야생마처럼 무서운 기세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한 앤디가 발렌타인을 가차 없이 덮치고 말았다. 그게 얼마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냐 하면…… 발렌타인이 달려드는 앤디를 뻔히 보고도 손쓸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냥 좀 부딪친 정도가 아니라 교통사고에 준하는 본격적인 충돌이었다. 내가 놀라서 소리도 못 지르고 입만 딱 벌리고 있는 사이, 발렌타인은 앤디의 에누리 없는 보디체크에 걸려서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졌다. 그리곤 로비 끝까지 굴러가서 벽에 등을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어떡해. 난 몰라…….
“어머!”
“뭐야? 무슨 일이야?”
방문객들도, 병원 직원들도 잠시 동안은 영문을 모르고 사건 현장을 멀뚱히 쳐다만 봤다. 앤디한테 밀려서 넘어진 사람이 세 명…… 아니, 네 명, 옆으로 넘어진 휠체어가 한 대, 중년 부인이 그 옆에 엎어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식반 카트 한 대가 통째로 뒤집어지는 바람에 로비가 온통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쉽게 말해서 로비는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박사님! 여기 좀…….”
간호사들이 허둥거리며 쓰러진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고 몇 명은 의사를 부르러 뛰어 다녔다. 여기가 병원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들을 헤치고 사고 현장으로 접근하는데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엔디가 달려들던 그 속도와 부딪치는 순간 터져 나온 비명의 강도로 미루어 예상되는 발렌타인의 부상은 최소한 골절, 심하면 뇌출혈이었다.
현장 제일 안쪽에 버티고 선 뚱뚱한 남자를 밀치는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제발…….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발렌타인의 상태를 본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나를 덮쳤고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조직 사회가 대부분 그렇지만 경찰서는 특히 파트너십이 중요한 직장이다. 직장 파트너는 친구와는 달랐다. 물론 드물게는 십 수 년씩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커플도 있고, 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직장 동료는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에쉬하고 터너가 부러울 때가 있다. 둘은 짝이 된 이후 완벽에 가까운 궁합을 자랑하는 슈퍼 커플이었다. 터너는 무뚝뚝하고 고지식한데 비해 에쉬는 싹싹하고 두뇌 회전이 빨랐다. 그에 비해 터너는 에쉬에게 다소 부족한 파워를 매꿔주고도 남는 박력이 있었다. 게다가 둘은 개인적으로도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결과, 연말마다 경찰서 내에서 행해지는 각종 설문 조사에서 5년 내리 ‘베스트 커플’로 선정되는 기록을 세웠고 부상으로 수여되는 커플링, 커플 속옷, 커플 액자, 커플 향수…… 등을 남김없이 챙겨 갔다. 올해도 다른 이변이 없는 한 커플 이벤트는 두 녀석 차지였다.
나는 뭐……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나한테도 최고의 파트너가 있었다. 내 첫 파트너 오닐은 정말 좋은 녀석이었고 오닐과 짝이 되어 쿠간 시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오닐을 그렇게 잃고 나서는 내 파트너 복도 그걸로 끝이었다. 파트너와 굳이 친하게 지낼 마음도 들질 않았고…… 오닐처럼 갑자기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증을 떨치지 못하는 바람에 일부러 철벽을 치고 거리를 뒀다. 오닐을 잃은 일로 내가 얻은 교훈이란 고작 그런 정도였다. 그 바람에 한동안은 예민하고 성격 이상한 놈이란 비아냥이 나를 따라 다녔다. 하지만 그나마도 시절 좋을 때 얘기였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사건 이후 복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반장이 나를 불러 들여서 비니를 들이밀며 새 파트너니까 앞으로 잘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그게 나더러 경찰을 그만 두라는 소린 줄 알았다. 비니가 나쁜 놈이 아닌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비니의 징크스는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사정 좀 봐줘라. 비니는 파트너 없이 떠돌아다닌 지가 벌써 1년이야.”
반장의 기준이 어떻기에 1년이란 계산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비니한테는 본래 딱 정해진 파트너가 없었다. 그런데다 1년 전에 파트너였던 스타이너를 오폐수 처리장 분뇨 탱크에 빠뜨린 이후로는 임시 파트너조차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비니는 그 이후 일손 딸리는 현장에 마구잡이로 투입되는 떠돌이 신세로 떨어져서 이제는 소속도 분명치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비니를 따돌리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고작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할까 하는 안일한 자세로 비니와 임시 파트너가 되었던 녀석들 중 상당수가 그 무서운 징크스에 딱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중 제일 안 좋은 케이스가 제리였다.
“자네가 놈에게 납치됐을 때 비니가 걱정 얼마나 했는데? 게다가 비니 아니었으면 놈의 소굴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거야.”
“그거라면 물론 고맙게 생각하지만…….”
힐끔 보니 비니는 그저 울적한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나하고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싹 돌려버렸다.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고, 밀리면 내가 죽는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반장이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최근 서너 달 동안은 다친 사람 아무도 없었어. 자네도 알잖아? 비니는 예전하곤 틀리다고.”
최근 서너 달 간 비니는 바텐더로 위장 취업해서 경찰서엔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에도 사건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고…… 비니가 겸연쩍은 얼굴로 중간에 끼었다.
“반장님.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반장이 비니를 흘겨봤다. 공연히 나서서 다된 밥에 재 빠뜨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시끄러! 대체 언제까지 길 잃은 강아지나 찾아주면서 세월을 보낼 거야? 넌 동물 탐정이 아니라 쿠간 시 경찰이야! 강력반 형사라고!”
비니가 징크스 대마왕에 살인적인 사격 실력을 가진 건 틀림없지만 집 나간 개나 고양이를 찾는데 있어 불가사의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떠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가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가서 이름을 한번 부르자 찾고 있던 고양이가 무리 중에서 걸어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강력계 형사가 본업처럼 하고 다닐 일은 아니다.
반장이 비니를 나무라고는 곧장 나를 몰아붙였다.
“그 사건 이후로 비니가 죽다 산 거 알아? 거의 열흘 동안 의식이 없었어!!”
반장도 묵을 데로 묵은 이무기라서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했다 싶으면 가차 없이 파고든다. 내가 듣기론 일주일 정도였던 것 같던데…… 어쨌든 그 은혜를 꼭 이렇게 갚아야 하나? 나도 모르게 비니를 다시 쳐다봤다. 비니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고…… 그냥 자고 일어난 거야.”
반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뭉치로 비니의 뒤통수를 한방 갈겼다. 그리곤 나를 돌아보는데…… 비위 거슬렀다가는 나도 한 대 칠 기세였다.
“비니는 널 위해서 목숨도 걸었어. 그보다 더 좋은 파트너는 세상에 없어!”
“그렇긴 하지만…….”
“너도 한가하게 파트너 고르고 다닐 처지는 아니잖아! 골라봐야 그놈이 그놈이고…….”
“아무리 그러셔도…….”
“싫으면 너도 혼자서 길 잃은 강아지나 찾아다닐래?”
반장이 내 멱살을 틀어잡고 배고픈 불독처럼 으르렁거렸다. 대꾸할 타이밍을 놓치고 꾸물거리자 반장이 틈을 안 주고 잽싸게 나를 비니 쪽으로 떠밀었다.
“잔말 필요 없고…… 그만 나가서 일 해!”
그렇게 해서 비니와 억지로 파트너가 됐다. 뭐…… 어찌 생각하면 비니와의 궁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도 아니었다. 비니는 악명 높은 부상자 제조기였고 나는 부상 회복 속도가 빨랐으니까.
그런 저런 우여곡절 덕분에 파트너에 대한 환상은 이제 없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평범한 직장 동료, 불가사의한 징크스 같은 거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맘에 썩 들진 않았지만 앤디를 데리고 나온 건 최소한 징크스는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징크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녀석도 상당히 무서운 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 앤디…… 이 무식하고 인정머리 없는 놈아! 그렇지 않아도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환자를 이래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발렌타인을 붙잡으랬지, 잡아 죽이랬냐? 사정없이 들이받아 놓고는 자기도 충격 받아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다 주저앉기를 서너 번이나 되풀이하던 앤디가 드디어 정신 차리고 자신이 저지른 짓을 눈으로 확인했다.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발렌타인을 본 앤디가 겁먹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래봐야 두려움의 크기가 내 절반이나 될까? 저 자식은 자기가 덮친 게 누군지도 모른다.
쿠르거 간호사가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발렌타인의 모습에 하얗게 질린 채 딱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앤디를 노려보는 그 눈동자에서 살기가…….
“저기…… 이봐…… 발렌타인…….”
슬금슬금 다가가서 발렌타인을 살살 흔들었다. 많은 거 안 바라고,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 가슴에 귀를 대보니 아직은 숨이 붙어있었다.
“괜찮은 거죠?”
앤디가 쿠르거 간호사의 매서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내게 구조 요청을 했다. 비니가 노상 입에 달고 다니던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만큼이나 뻔뻔한 멘트다.
“니 눈엔 괜찮아 보여?”
“죽었어요?”
“죽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야?”
주변은 일사분란하게 정리가 돼가고 있었다. 달려온 간호사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이동 침대에 실어 응급실로 옮기는 사이, 의사를 찾아서 달려갔던 간호사가 평상복 차림의 젊은 남자 하나를 질질 끌고 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발렌타인을 들여다보고 목덜미에 맥을 짚어 보던 의사가 죄 없는 간호사한테 언성을 높였다.
“저 사람이…… 갑자기 달려와서 들이받았어요.”
간호사가 앤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앤디가 화들짝 놀랐다.
“저는 그냥…… 선배님이 시켜서…….”
빙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로 쏟아졌다. 변명해봐야 내 입장만 구차해질 뿐이다. 그래서 그냥 노려보게 내버려뒀다. 비니랑 오래 다닌 덕에 이런 일도 이젠 익숙하다.
체격 좋은 남자 간호사 두 명이 환자 운반용 침대를 끌고 와서 발렌타인을 들어 눕혔다. 정신을 잃은 채 미동도 없던 발렌타인이 그제서야 콜록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발렌타인! 정신이 좀 들어? 나 알아 보겠어?”
눈은 떴어도 앞이 잘 안 보이는지 발렌타인이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리곤 나를 자기 얼굴 가까이 확 끌어 당겨서 내 귓가에 대고 힘겹게 투덜거렸다.
“너…… 자꾸 이러면 죽여버린다.”
의사는 혹시 안면 골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엑스레이를 찍어 보자고 했지만 발렌타인이 집어치우라고 쏘아붙이는 통에 머쓱해져서 진통제만 처방하고 방을 나갔다. 진통제가 필요할 거다. 온 얼굴이 탱탱 부었으니까…….
앤디는 쿠르거 간호사한테 걸려서 죽다가 살았다. 선배가 시켜서 그랬다는 어설픈 변명이 그 야무진 간호사한테는 안 통했다. 말기 암 환자를 사정없이 때려눕힌 불한당에 대한 응징은 가차 없었다.
장장 30분…… 쿠르거 간호사는 논리 정연한 비난과 그동안 살면서 섭렵한 온갖 욕설을 적절히 섞어가면서 앤디를 불끈 쥐어짰다. 덕분에 앤디는 지금껏 넋이 반쯤 나가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저기……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발렌타인이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며 짜증을 냈다.
“꺼져!”
짜증이 날 만도 한 것이…… 그 귀여운 간호사가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발렌타인의 옷이랑 구두를 싹 쓸어 가버렸다. 발렌타인은 지금 쿠르거 간호사가 갖다준 주황색 꽃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다. 간간히 토끼 무늬가 섞인…… 귀엽긴 한데 저런 걸 입고는 탈출은커녕, 복도에도 못 나갈 거다.
“또 들릴게.”
“다시는 나타나지 마!”
“파자마 진짜 예뻐…….”
발렌타인이 베개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다행히 조준이 빗나가서 넋 놓고 있던 앤디가 대신 맞았다.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이요.”
내도록 시무룩하니 입술을 내밀고 앉아 있던 앤디가 현장에 다 와서야 입을 열었다. 우회전해서 조금 더 가자 전형적인 변두리 유흥가가 나타났다. 저녁때가 거의 다 됐는데 거리는 음산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연달아 이틀간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니 범인이 체포되기 전까지는 거리 전체가 개점휴업이었다.
“첫 번째 현장은 저 골목 안쪽이에요.”
길 가에 차를 세웠다. 옷깃을 세우고 옷자락을 여며야 할 정도로 바람이 차가웠다. 앤디가 앞장서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며칠 치우지 않은 쓰레기…… 주변 업소에서 내다 놓은 잡동사니가 담벼락을 타고 어지럽게 쌓여 있는 건물 뒤쪽 풍경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비슷했다.
살인사건 현장이라고 특이할 건 없었다. 바람에 떨어져 나간 노란색 경찰 저지선과 피살 현장을 표시해 놓은 하얀 페인트가 얼마 전에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피살자가 열아홉 살이었다고?”
“스무 살 생일이 2주일 남아 있었어요. 피살자는 저 안쪽에서 찔린 다음에 여기까지 기어 왔어요. 의사 말로는 한 20분 정도 숨이 붙어 있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칼에 깊이 찔린 건 아니었는데 출혈이 심했어요.”
페인트 자국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져 섰다. 출혈 과다라…….
“무슨 생각하세요?”
앤디가 나를 힐끔 돌아봤다.
“여기쯤 서서 지켜봤을까?”
“뭘……요?”
“피살자가 죽어가는 거.”
앤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커 선배는 단순 강도사건 같다고 하던데요? 빈 지갑이 골목 입구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열아홉 살짜리가 평일 새벽에 이런 뒷골목엔 무슨 볼일이었지?”
“딜러였어요. 현금이 좀 있었겠죠.”
종종 그런 일이 있다. 마약 딜러는 질도 나쁘거니와 위험한 직업이다.
“딜러라면 조직원이었을 텐데?”
조직범죄 과가 아니라서 계보를 상세히는 모르지만 이런 유흥가엔 서너 개 정도의 조직이 혼재한다. 장사가 잘되는 구역을 놓고 자기네들끼리 한 번씩 구역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 방식이 때론 상당히 잔혹할 때도 있다.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파일에 다 있어요. 다시 읽어 보실래요?”
앤디가 이젠 대놓고 나를 갈궜다. 하는 게 하도 같잖아서 잠깐 쳐다봤다. 물끄러미…….
“저는 그냥…….”
풍파라곤 모르고 살아온 고위층 막내아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기는 억울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는 그냥 못 넘어간다 이거다. 인생 자체가 억울한 사람으로서…… 한대 쥐어 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선배님이 하도 심각하게 꼭 잡아야 된다고 하기에…… 대단한 흉악범이라도 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니가 몰라서 그렇지, 대단한 사람이야.”
“말기 암환자라면서요! 그 쬐끄만 간호사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요?”
알지, 옆에서 다 봤으니까. 그 현란한 욕설 퍼레이드엔 발렌타인도 상당히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꽃무늬 잠옷을 받아 들고는 바로 구겨졌지만…….
“오늘 일로 좋은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해.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그렇게 받아버리면 못 써. 최소한 재판받기 전까지는 살려둬야지.”
“선배님!”
쫑알거리는 소리 더 듣기 싫어서 녀석을 돌려 세우고 등을 밀었다. 초동 수사는 벌써 다 끝난 다음이라서 현장엔 볼 것도 별로 없고…… 이 골목은 너무 추웠다. 더 늦기 전에 두 번째 현장을 봐두려고 여전히 툴툴거리는 앤디를 재촉했다.
두 번째 사건 현장은 첫 번째 현장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나이트클럽 옆 골목이었다. 역시 어수선한 골목길이었고…… 다행히 이쪽엔 목격자가 몇 명 있었다. 새벽 세 시면 나이트클럽도 파장 무렵이라 클럽에서 나오던 행인 몇 명이 골목을 나와서 도주하는 남자를 봤다.
용의자를 봤다고는 해도 정확하게는 피 묻은 트렌치 코드, 푹 눌러쓴 모자, 신장은 약 185센티미터 정도…… 단서라고 하기엔 너무 모호하고 별 거 없었다.
“동일범이에요. 같은 무기로 거의 같은 부위를 찔렀어요. 하지만 이번엔 상처가 훨씬 깊어서 피살자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고요. 이 주변에서 버즈로 통하는 굵직한 딜러였는데, 거구에다 상당히 거칠어서 피살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당했다는 데 상당히 놀라더라고요. 뭐, 죽은 걸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속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금품을 노린 단순한 강도사건인 것처럼 말하더니…… 이게 어떻게 단순 강도야?
“지갑은?”
“예?”
“이 근처에서도 빈 지갑이 나왔느냐고?”
앤디가 고개를 저었다.
“지갑은…… 저 구석에 그냥 던져 놨더라고요. 목격자 때문에 놀라서 그냥 달아난 것 같아요. 경황이 없었겠죠.”
그렇지 않을 거다. 우선 현금을 노린 단순 강도는 거구의 딜러 같은 위험한 상대를 택하지 않는다. 이런 유흥가엔 널린 게 취객이고 여자들이다. 죽이거나, 돈을 강탈하거나…… 그쪽이 훨씬 손쉬운 상대다. 이 구역 폭력 조직 간에 전쟁이 벌어진 게 아니면 이건 특정 업계 종사자들을 노린 연쇄살인이었다.
“파커 선배도…… 조직 다툼일지 모른다고 했었거든요.”
너무 추워서 일단 차안에 들어와 앉았다. 파커랑 어디까지 수사를 했는지 물어보면서 뒷좌석에 던져둔 파일을 집어서 다시 펼쳤다. 피살자는 둘 다 젊고 건강한 남자였다. 쿠간 시 뒷골목이 아무리 험해도 이렇게 거칠게 생겨먹은 악당들이 맥없이 죽어 나갈 정도는 아니다. 특히 두 번째 피살자는…… 이런 남자와 격투를 벌여서 결국 죽여 버릴 정도라면 살인범은 전문적인 킬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주변 탐문도 좀 해보고, 조직범죄 과의 이쪽 담당한테 협조 요청도 하고 그랬는데요…… 둘이 같은 조직이더라고요. 이 거리는 두어 달 전에 정비가 다 끝나서 캡틴 시어파란 애들이 장악하고 있었데요.”
안 좋은 소식이다. 조직범죄가 아니면 연쇄살인이란 얘긴데…….
“조직내분인가 하는 의심도 해봤는데…… 그놈들 소굴에도 가 봤거든요. 그런데 조직원을 둘이나 죽일 만큼 대단한 내분이 일어날 만한 조직도 아니었어요.”
연쇄살인은 단순 강도 전문인 나하고, 그나마 전문도 아직 없는 새파란 신참 둘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고해서 전담반을 꾸리던가, 아예 전문 수사팀에 넘기는 게 앞으로 발생할 희생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긴 한데…… 만날 땡땡이나 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 하는 반장이 곧이들어 줄지 그게 좀 걱정이다.
“이건 뭐야?”
제일 뒤쪽에 너덜너덜한 복사지 몇 장이 끼어 있어서 펼쳐보니…….
“용의자 몽타주요.”
“이게?”
짧지 않은 짭새 인생에 참 희한하게 생겼다 싶은 몽타주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없는데?”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고 벙거지 모자 아래 턱만 쬐끔 그려놓고 이걸 몽타주라고 우겨?
갑갑해서 의자를 뒤로 재끼고 눈을 감았다. 우선 진정 좀 하고…….
“선배!”
앤디가 버럭 소릴 질렀다.
“왜?”
“수사 안 해요? 여기서 자면 어떡해요?”
어서 한 건 해치우고 반장한테 칭찬도 듣고 아빠한테 자랑도 하고 싶어서 앤디는 지금 마음이 매우 바쁘다. 안됐다. 첫 사건인데 만만치 않아서…….
“생각 중이야.”
“무슨 생각이요?”
“뒷골목 마약상만 골라서 죽이고 다니는 놈은 대체 어떤 놈일까? 너도 생각을 좀 해봐.”
뭐 그런 성의 없는 질문이 다 있느냐는 듯 앤디가 냉큼 말을 받았다.
“마약상의 지갑을 노리는 놈이요.”
“길바닥에 깔린 게 지갑이야. 술에 취해서 자기 몸도 못 가누는 남자도 많고…… 한두 시간 더 기다리면 업소에서 퇴근하는 아가씨들도 많았을 거야. 그 사람들 지갑은 지갑이 아냐?”
“그런 사람들은 지갑에 몇 천 불씩 넣어 다니진 않잖아요.”
“딜러들도 마찬가지야. 많아 봐야 4, 5백 정도지.”
“두 번째 피살자 지갑엔 천오백 불이나 들어 있었다고요.”
“그런데도 그냥 던져 놓고 갔다며?”
드디어 앤디가 잠잠해졌다. 잠잠해진 건 좋은데 얘랑 차에 백날 앉아 있어 봐야 실마리가 풀릴 것 같질 않았다. 우선 주변 탐문을 좀 해보고…… 정 안 풀리면 쥬드한테 물어봐야겠다.
앤디를 끌고 대로변에서 제일 번듯한 클럽에 들어갔다. 규모도, 시설도 중심가 클럽 못지않은데…… 걱정스러울 정도로 파리를 날리는 중이었다. 입구를 지나 홀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라곤 종업원들뿐……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이라면 그저께도 왔다 갔는데…….”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바텐더는 경찰을 가려내는 짭새 레이더라도 있는지 신분증을 내밀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고…… 마티니 한잔 주세요.”
“그럽시다. 까짓 거……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근무 중인데, 술을 마셔요?”
바텐더가 돌아서서 술잔을 고르는 사이 앤디가 못마땅한 얼굴로 근무 수칙을 일깨웠다.
“사복 근무의 묘미지.”
“파커 선배님은…….”
파커는 술을 안 마신다. 대신…….
“근무 중에 햄버거를 세 개씩 먹는 것보다는 나을 걸?”
몸이 조금만 날렵했다면 별로 높지도 않은 비상계단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이 부러질 일도 없었을 거다. 말문이 막힌 앤디가 약이 바짝 올랐다.
“레드 존 뒷길에서 죽은 애에 대해선 몰라요. 이쪽으론 온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더티 제리’는 잘 알죠. 거의 매일 장사를 하러 나왔어요. 주일날 빼고. 크리스찬이었거든.”
올리브 띄운 마티니 한 잔을 내 앞에 밀어주며 바텐더가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더티 제리’라…… 별명만 들어도 인근에서 평판이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성질이 보통 아니었나 봐요?”
“보통 아니었죠. 작년부터 장사 좀 괜찮다 싶은 요 근처 업소 몇 개를 혼자 먹다시피 했는데…… 아주 악질이었어요. 서너 달 전에도 이 동네 갱단 애들이 한판 붙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두 명인가 평생 불구가 될 정도로 심하게 다쳤고 한 명은 아예 죽은 일이 있었는데…… 하여튼 그때도 짭새깨나 들락거렸었죠. 그런데 그게 ‘더티 제리’ 짓이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뭐, 떠도는 소문이었고 증거가 없으니까 놈은 무사했지만…….”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겠군요.”
“그놈을 알면 안 그러기 어렵죠.”
마티니를 한 모금 홀짝거리고 내려놨다. 입맛이 썼다. 용의자가 너무 많아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죽었단 소식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겠어요.”
“아니, 놀랐어요.”
바텐더가 옆에서 침만 꼴딱 삼키고 있는 앤디에게 캔 콜라 하나를 꺼내주며 대꾸했다.
“괜찮은데…….”
앤디가 약간 기분 상한 듯 콜라 깡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애 취급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비스에요. 어떤 놈인지 몰라도 빨리 잡아야 우리도 먹고 살지.”
바텐더가 능수능란하게 앤디를 달래고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섰다.
“제리는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였어요. 온갖 종류의 싸움에 이력이 붙은 놈이었고…… 그런 악당이 뒷골목에서 강도 손에 죽다니…… 놀란 정도가 아니고 다들 충격 받았어요. 죽어서 슬프거나 안타깝다는 뜻은 아니지만…… 알죠?”
“대강…….”
죽은 게 제리 혼자였으면 사건의 성격이 훨씬 단순했을 텐데…… 마티니 한 잔을 천천히 비우면서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제리의 대외적인 악명 이외에 더 얻어 들을 건 없었다.
“왜요? 그냥 강도사건이 아닌가요?”
제리와 그 조직에 관해 꼬치꼬치 캐자 바텐더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마약상한테 특별히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요. 둘이 한 조직이었다니…… 조직에 원한이 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 사람이야 엄청나게 많죠.”
바텐더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리뿐 아니라 이 동네 애들은 특히 질이 안 좋아요.”
“바가지라도 씌우나요?”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걔네들이 파는 건 대부분 조잡한 조제약이에요. 뭐…… 돈 많은 단골들한테는 좋은 거 팔겠죠.”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런 동네 뜨내기들은 대부분 같은 돈을 내고 성분불명의 화학 쓰레기를 들이마시게 된다. 재수 없으면 병원행이고 아예 황천으로 떠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누구한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다.
“그러고도 별 탈이 없나요?”
앤디가 눈살을 찌푸리며 바텐더한테 따졌다. 사람 좋은 바텐더는 앤디의 무례에도 별로 화난 기색이 없다. 그저 ‘그놈 참 귀엽네…….’ 하는 얼굴이었다.
“끄떡없어요. 사먹는 애들이 탈이지. 뭘 갖다 섞는지 몰라도 심하면 하루 밤에도 대여섯 명씩 쓰러진다니까요. 죽은 애도 하나 있었어요. 지난달에…….”
“여기서요?”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엔디가 놀라서 물었다. 바텐더가 장난스럽게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누스」라고……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클럽에서요.”
첫 번째 클럽을 나온 이후 인근의 클럽과 술집 무려 다섯 곳을 그렇게 돌았다. 가는 데마다 종류도 다양하게 술을 한 잔씩 걸친 나는 취해서 기분이 약간 들떴고, 가는 데마다 콜라 한잔씩을 얻어 마신 앤디는 뱃속이 출렁거려서 그런지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였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단서도 없고, 몇날 며칠 이 거리에 늘어선 모든 클럽과 술집을 전전해야 할 판이긴 하지만…… 실로 이 얼마 만에 사건다운 사건이냐? 적어도 이번 사건의 범인은 옛날이야기 책에 나오는 얼토당토않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지난 몇 개월간 시달려 온 별 희한한 사건들에 비하면 뒷골목 연쇄살인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건이었다.
“이젠 어디 가요?”
앤디가 꺼억 트림을 하면서 배를 문질렀다.
“글쎄…… 한 군데만 더 들어가 보자.”
“또요?”
앤디가 짜증을 냈다.
“여섯 군데나 돌았지만 그 얘기가 그 얘기였잖아요? 피살자들을 직접 아는 것도 아니고 거의 다 주워들은 얘기…… 게다가 여기서 한잔만 더 마시면 선배는 취해서 몸도 못 가눌걸요. 그리고 저도 콜라는 더 이상 못 마셔요.”
“그렇긴 한데…… 저녁은 먹어야지.”
수사 1순위는 서너 달 전 캡틴 시어파와 전쟁 끝에 중상 두 명, 사망 한 명으로 참패를 당하고 찌그러져버린 불운한 갱단이었다. 파커도 주변 탐문하고 피살자 주변 인물까지는 수사를 했었다. 그리곤 발목이 부러져버렸지만…….
말단 형사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허름한 식당에 앉아서 사건 파일과 오늘 탐문한 결과를 대강 맞춰보니 파커도 그쪽에 혐의를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독사파가 얼마 전에 여기서 밀려났다는 그 갱단이야?”
앤디가 으깬 감자에 케찹을 마구 비벼서 한입 밀어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아봤는데, 지금은 다벤 거린가…… 하는 동네로 옮겨가 있데요.”
“변두리로 확 밀렸군.”
다벤가는 뜯어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가난한 동네였다. 이런 식으로 원한도 갚고, 옛 일터로 복귀도 하려는 시도라면…… 그럴 듯하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선 조직 범죄과도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할 거다. 캡틴 시어파 애들이 언제 걔네들을 덮치러 다벤가로 쳐들어갈지 모르니까.
파일을 밀어두고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어서 한입 먹었다. 과자처럼 바삭바삭한 것이…… 묘한 맛이었다.
“그럼 이게…… 조직 간의 복수극인가요?”
“상황이 확실치 않을 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거야.”
예전에 굽타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굽타의 어록은 기억해두면 써먹을 데가 많다.
“어째 아닐 것 같다는 투네요.”
“글쎄…….”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언제부터 뒷골목 갱단간의 세력 다툼 양상이 길거리 총격전에서 단순강도를 가장한 암살로 옮겨갔을까?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킬러를 고용하는 건 프란시스 몬티첼리 정도되는 거물들의 수법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퇴근하기로 하고 앤디와 헤어졌다. 엔디가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고마운 제안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집이 없는 처지였다.
“신세지고 있던 집에 불이 났거든.”
“그럼…… 어디서 자요?”
“주로 서에서 가까운 모텔이나…… 병원…… 날밤 새운 적도 많고.”
“그럼 경찰서 근처까지라도…….”
마음은 고맙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근처에서 잘래. 술을 좀 마셨더니…… 피곤해.”
멀어져 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복잡했다. 귀엽긴 한데…… 발렌타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저것도 만만찮은 사고뭉치다. 안됐지만 요번 사건만 해결하고 탁 털어버려야겠다.
찬바람을 맞으며 길을 따라 걷다가 눈을 쏘는 것 같은 녹색 조명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녹색, 노란색, 주황색…… 노란색, 다시 녹색…… 《클럽 야누스》라…….
클럽의 풍경은 여태 들렀던 다른 클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을 컨셉으로 잡은 까닭에 실내장식이 조잡하면서도 그로테스크했는데 다른 클럽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은 처지였다.
“한 잔 드릴까요?”
며칠 계속된 개점휴업으로 종업원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바에 가서 자리를 잡자 바텐더가 마지못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브랜디…… 얼음 잔뜩 띄워서…….”
의자에 걸터앉으며 배지를 내보였다.
“그래, 범인은 언제쯤 잡을 것 같습니까?”
바텐더가 대뜸 시비조로 나왔다.
“이런 사건은 시간이 좀 걸려요.”
“경찰은 대체 강도를 잡을 맘은 있는 겁니까? 며칠 전에도 형사라고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가긴 갔는데…… 기가 막혀서, 웬 뚱땡이 하나에 고삐리 하나…… 이래 갖고 우리가 누굴 믿고 장사를 합니까?”
바텐더가 술잔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파커랑 앤디 커플이 강력계 형사로는 비쥬얼이 약한 편이긴 하다.
“제리가 여기 자주 왔나요?”
“가끔 똘마니가 오는 날도 있긴 했지만. 일요일 빼곤 매일 1시에서 3시 정도까진 죽치고 살았죠.”
“살해되던 당일도?”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로 죽은 애는요?”
“걘 잘 몰라요. 물 좋은 영업장은 모조리 제리 차지였으니까…….”
“제리가 죽은 게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니까…… 나가자마자 당했다고 보면 되겠군요.”
“그날따라 제리는 장사를 짭짤하게 했어요. 지갑이 빵빵했을 걸요.”
그렇게 짭짤한 부수입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가버린 건 항상 돈에 굶주려 있는 갱단 애들이 취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걔네들이 팔던 물건이 질이 별로 안 좋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바텐더가 흥…… 하고 거친 콧바람을 내뿜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릴 들으셨구만. 질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고 거의 독약이었지.”
“딜러들도 고객관리를 할 텐데요?”
“이 근처는 거의 그 자식 독과점이었어요. 물론 단골들은 관리하겠죠. 하루에 한두 명은 매일 들려나가다시피 했어요. 많을 땐 내가 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고…… 성질 같아선 그놈의 자식을 걸음도 못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사장하고 거래를 하니까 별 수 없었죠.”
“얼마 전엔 죽은 사람도 있었다면서요,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티나요.”
바텐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비쩍 마르고, 금발에…… 걘 꼭 그날 아니더라도 언젠간 그렇게 죽었을 거예요. 하루 저녁 술값하고 약값만 집어주면 어떤 놈이라도 오케이였죠.”
“창녀였나요?”
“창녀보다 훨씬 값싼 계집애였죠. 죽고 나서야 열여덟 살인 걸 알았어요.”
열여덟 살이라…… 이런 클럽에서 술과 약을 맘대로 퍼먹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누군들 알았겠어요? 신분증도 위조한 거였고…… 그보다는 훨씬 나이 들어 보였었거든요.”
말하다 말고 바텐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요? 걔네들 죽은 거랑 티나랑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가능성은 열어둬야죠.”
오늘은 이 말을 많이 써먹게 되네.
“근래 죽은 사람은 또 없나요? 티나 말고…….”
그쪽은 아무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바텐더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사람 목숨이 질기죠. 그런 걸 마셔 대고도 죽는 사람이 드문 걸 보면요.”
아우…… 머리 아파. 취할 만큼 마신 건 아닌데…… 종류가 너무 다양했던 게 탈이었을까? 호텔 프론트에 모닝콜을 해달라고 부탁해 놓은 덕에 일곱 시에 일어나긴 했다. 그런데 도무지 술이 깨질 않았다. 너무 어지럽고 속이 안 좋아서 꼬질꼬질한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다 다시 시계를 보니 벌써 여덟 시 반이었다. 내가 못 살아…… 머리를 좀 굴리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반장님?”
「거기 어디야?」
“호텔이요. 현장 근처에 있는…….”
「출근 안 해?」
못하지. 벌써 지각인데다 이렇게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들어갔다간 눈앞에 뭐가 날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오전에 세인트 비숍 자선 병원에 들러서 뭐 좀 알아보고 갈게요.”
「병원엔 왜?」
시큰둥한 음성이었다. 아흐…… 머리야…….
“수사하다 보니 좀 걸리는 게 있어서요. 갔다 와서 보고 드릴게요.”
「이런 식으로 어물쩍 땡땡이를 치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어제도 밤 열한 시까지 온 동네를 다 뒤지고 다녔어요. 병원 들렀다가 몇 개월 전에 놈들이랑 시비 붙었던 갱단 애들 좀 만나보고…… 저녁에 들어갈게요. 그건 그렇고 반장님…….”
「왜?」
“앤디 아버지가 리즐 시 경찰청장이란 거…… 언제쯤 저한테 얘기해주실 생각이었어요?”
「…….」
반장이 흠흠……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아버지 직업이 뭐가 중요해? 일만 잘하면 되지.」
“반장님.”
「공연한 트집 잡지 마. 애는 나무랄 데 없잖아?」
애가…… 나무랄 데가 없다고?
“됐으니까, 파커한테 복귀하면 도로 찾아 가라고 하세요.”
「파커한테 얘기는 해볼게.」
“반장님!!”
호텔 근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앤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10시 5분 전이었다.
“좋은 아침이요.”
피부 좋고, 혈색 좋고…… 총알구멍 난 구제 청바지에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의 재킷을 걸친 앤디가 싹싹하게 아침 인사를 했다. 아무리 봐도 앤디는 해맑은 열여덟 살이다.
“앉아.”
“반장님이 그러시는데 무슨…… 병원엘 같이 가보라고요.”
“세인트 비숍 자선 병원. 멀지 않아. 차로 20분 거리야.”
“오늘은 다벤가에 가서 독사파 애들을 조사하는 거 아니었나요?”
앤디가 주문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병원이 가까우니까 들렀다 가자. 티나에 대해 알아볼 게 있어.”
“티나가 누군데요?”
티나는 약 두 달 전에 클럽 「야누스」에서 약물 쇼크사한 10대 여자애고, 그 신변에 관한 정보를 찾으러 병원에 가는 길이라는 내 설명이 앤디에겐 실망스러운 눈치였다. 어쨌든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식당에서 나왔다.
“그 티나라는 여자가 약물 쇼크로 죽어서…… 그 여자 주변에 누군가가 마약 상들한테 복수를 하고 있다는 건가요?”
“조직 간의 세력다툼일 수도 있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니 말대로 단순 강도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이 어쩐지 개인적인 원한에 얽힌 복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생각이 든다고요?”
누가 경찰학교 우등생 아니랄까 봐 따지기는…….
“무슨 근거가 있는 가설인가요?”
“그냥 느낌이 그래.”
앤디가 갑자기 길옆에 차를 세웠다. 바로 한 블록 앞이 병원인데 왜 이런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세우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려보니 앤디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수사를 그런 식으로 하라고 가르치지 않던데요.”
무슨 소린지 안다. 그러니까 증거와 정황에 입각한 과학수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겠지.
“졸업한 지 오래 돼서 거기서 뭘 배웠는지 생각이 안 나. 하나도…….”
첫 번째 사건 현장을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흉기에 찔려 피를 뿌리며 바닥을 기어가는 약삭빠른 인상의, 아직은 어린 남자애를 어떤 음산한 느낌의 남자가 미동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데…… 마치 그 장면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생생했다.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강한 느낌은 무시할 수 없다. 굽타 선배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냥 감으로 마구 찍어서 수사를 할 수가 있어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도 최소한의 인과 관계는 있다고요!”
“그럼 넌 여기서 기다려.”
비위 착착 맞춰주고 입안의 혀처럼 아양을 떨어도 출신성분이 맘에 안 드는 판인데…… 이렇게 깐깐하게 나오면 나도 굳이 달고 다닐 마음이 없다.
그냥 차에서 내려서 병원 쪽으로 걸어가는데 앤디도 덩달아 차에서 내려 뛰어오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대체 내가 왜 그렇게 맘에 안 들어요?”
“주차금지 구역이야. 이 동네 주차 단속반은 경찰차라고 봐주는 거 없어.”
“떼라 그래요! 겁 안 나니까!”
계층이 틀리면 이런 사소한 정서도 차이가 난다. 비니도 만만치 않은 부유층이었지만 녀석은 월급의 태반이 자동차 수리비와 각종 사고 처리 비용으로 들어가는 터라 사소한 비용은 되도록 줄여서 쓰는 처지였다.
“아버지 직업이 뭐가 중요해요? 일만 잘하면 되지!”
“아까 반장이 전화 받을 때 옆에 있었지?”
엔디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었다.
“나는 아버지 이름에 기댈 생각 같은 거 전혀 없어요! 그걸로 선배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을 거구요.”
“미안하지만, 니가 어떻게 해도 나는 불편해.”
“말도 안 돼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놀라서 우리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귓전에 대고 이렇게 고래고래 소릴 지르니 주저앉고만 싶었다.
“내 첫 번째 파트너는 현장에서 죽었어. 바로 전 파트너는 의식불명으로 기약도 없이 누워 있는 처지고…… 쿠간은 리즐 시하고는 달라. 험하다고.”
“그게 우리 아버지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도련님 보모노릇까지 같이 하긴 싫단 말이야.”
딱 여기까지 할 말을 끝내고 돌아섰다.
“보모노릇을 누가 시킨다고 그래요? 나도 능력이 있단 말이에요. 이래 뵈도 경찰학교를…….”
엔디가 따라 붙으며 또 시비를 걸었다. 이 자식…… 되게 질기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서! 어제는 병원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렇게 파죽지세로 덮쳤어?”
“그건 선배님이…….”
“시끄러!!”
버럭 소릴 지르며 돌아서자 앤디가 주춤 물러섰다. 얘도 기본 성품이 못됐다거나, 비뚤어진 건 아니다. 그 정도는 그냥 보면 안다. 하지만 고위층 막내 기질에 우등생 기질이 피곤하게 섞여서 죽을죄를 짓지 않고는 잘못했다는 소리 안 할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발렌타인한테도 직접적인 사과가 없었다.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는 놈이다.
“그나마 발렌타인이 성질이 많이 죽어서 니가 아직 살아 있는 줄이나 알아!”
병원 입구에 거의 닿아서 뒤를 돌아보니 한풀 죽은 앤디가 저만치 뒤처져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문 앞에서 녀석을 잠시 기다렸다. 원리원칙 따지며 시건방 떠는 것도 비위 상했지만 이렇게 풀 죽은 얼굴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젠 저도 좀 흥분했었어요. 그렇게 아픈 사람인 줄도 몰랐고…… 어쨌든, 다음에…… 사과할게요. 병원 갈 일 있으면요.”
앤디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절대 사과하고 싶지는 않은데 무서운 선생님 때문에 억지로 손을 내미는 어린애처럼…….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발렌타인에겐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진짜로 이름이 발렌타인이에요?”
아마 본명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왜?”
현관 유리문을 밀면서 되물었다.
“그냥…… 특이해서요.”
“그런 이름 처음 들어?”
발렌타인이 한창 이름 날릴 때 앤디는 잘해야 고등학생이었을 거다. 그리고 발렌타인은 관련 업계에서나 유명인이지 연예인이 아니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발렌타인데이의 그 발렌타인하고…… 사이몬 발렌타인 정도죠, 뭐…….”
어떻게 아네? 희한해서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더니 앤디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리곤 여전히 삐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놀리지 마세요.”
“그런 적 없어.”
“어제 그 사람이 사이몬 발렌타인이라고 하려던 참이었잖아요!”
싫으면 그만두지 뭐…….
세인트 비숍 자선 병원은 여태 다녀본 자선 병원 중 가장 작고 어수선하고 환자들의 행색이 초라했다. 안내 데스크에 신분증을 보여주고 이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 관련 서류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자원 봉사자인 듯 보이는 안내원이 경찰 배지를 보고는 당황한 얼굴로 나랑 앤디를 번갈아 쳐다봤다.
“총무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2층이에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찾는 사이 온통 그을린 남자 하나가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갔고, 온몸에서 매캐한 연기가 풀풀 날리는 남녀 서너 명이 뒤를 이었다. 어딘가에서 불이 났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처음 남자 빼고는 중상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니가 사이몬 발렌타인은 어떻게 알아?”
계단 초입에서 의사를 찾아 달려가는 간호사를 피해서 벽에 붙으며 앤디에게 물었다.
“하지 말라니까요?”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앤디가 신경질을 냈다.
병원 측은 수사협조 요청에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라 곧 서류를 찾아 주겠노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보통…… 이미 죽은 사람의 병원 자료를 열람하는 데엔 영장까지는 필요 없다.
“티나라고…… 성은 잘 모르고, 이슈마엘 가에 있는 클럽에서 쓰러져서 이리로 보냈다고 하던데요. 「야누스」라는 클럽이었고 여자는 도착하기 전에 죽었고요.”
바텐더가 일러준 날짜를 불러주자 컴퓨터 모니터에 곧 자료가 떴다. 그날 죽은 사람은 티나뿐이었다. 크리스티나 브론테. 약물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보호자가 시신을 찾아 갔어요. 사망한 지 4일 후에요.”
티나와의 관계를 보니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이름은 제이크 브론테…… 주소는 벨조니가 1416번지…….
“주소는 컴퓨터로 찾았어. 어때? 이만하면 과학적이지?”
주소를 받아 적은 수첩을 앤디 코앞에 흔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 딴 생각이 한창이었다.
겨울이 거의 지나갔다고는 해도 아직은 낮이 짧았다. 일단 주소를 알아놨으니 독사파 소굴을 먼저 찾아볼까? 아니면 벨조니가로 갈까? 마음 같아선 멀지도 않은 벨조니가부터 뒤져보고 싶었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아무래도 독사파 애들한테 혐의가 더 가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여기서 벨조니가로 먼저 가자고 하면 앤디가 하극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저기…….”
내도록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던 앤디가 차 유리창에 붙은 주차 위반 딱지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 봐라. 딱지 뗀다고 내가 그랬지.
“아까 그 얘기…… 그냥 농담이죠?”
앤디가 딱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뭐가?”
“어제 그 남자가 사이몬 발렌타인이란 거요.”
아니었으면 싶은 모양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긴 왜 아냐. 사이몬 발렌타인 맞아.”
“말도 안 돼요!”
앤디가 원망스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운전이나 해. 다벤가에 갔다가 벨조니가까지 돌려면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 없어.”
“암이라면서요?”
마치…… 발렌타인처럼 악명 높은 자객은 절대로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안됐지만 병 앞에 직업이 무슨 소용이냐?
“뭐야? 너도 발렌타인 팬클럽이야?”
그냥 농담이었는데…… 앤디의 표정이 더욱 더 침울해졌다.
사이몬 발렌타인에게는 비공식 팬클럽이 있었다. 그것도 경찰서 내부에…….
발렌타인은 자객이었다. 살인자란 뜻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절대 사회에서 용납 받을 수 없는 종류의 범죄자였다. 하지만…… 그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도 손을 못 쓰던 암흑가의 거물들이었다. 살인이 중한 범죄라는 건 어떤 경우라도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발렌타인이 해치우고 다닌 갱단 두목들의 죽음에까지 분노하는 것은 우리 같은 경찰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게다가 발렌타인의 솜씨는 언제나 판타지에 가까웠고, 비쥬얼도 그럴듯했고…… 마키바 반장과의 취조실 맞짱도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몇몇 경찰관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애정을 접고 발렌타인의 개인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야 뭐…… 발렌타인의 이름만 들어도 솜털이 곤두서는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심한 작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에 띄게 그러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한 무리의 정신 나간 추종자들은 남들 앞에선 정상인으로 행동하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음습한 구석에 모이기만 하면 발렌타인이 그동안 저지르고 다닌 사건을 회고하고, 나름대로 그의 범죄 행각을 추리해서 재구성해보기도 하고…… 경찰서 지하 자료실에 보관중인 발렌타인의 필름을 빼돌려서 멋대로 인화해서 나눠 가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년…… 발렌타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 없이 사라져서 아무 소식이 없었고 팬클럽도 흐지부지 흩어져서 몇 명 남지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란 건 어차피 물거품 같은 거니까…… 하지만 요즘도 가끔은 휴게실이나 로비에선 발렌타인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대화가 오가곤 했다. 발렌타인이 살인 청부업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던 데다 이후로 그에 필적할 만한 자객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리즐 시에도 팬클럽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앤디가 하도 풀이 죽어 있어서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팬클럽 같은 거 아니었어요. 그냥 형이…… 이런저런 얘길 해주길래 그런 킬러가 있다는 정도 알고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팬클럽 애들이 늘 하는 소리다. 슬쩍 눈치를 보면서 벨조니 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리상 훨씬 가깝고 왠지 필이 꽂혔다. 앤디는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니까 아직까진 별 말이 없었다.
“막상 보니까…… 생각했던 거하곤 많이 다르네요.”
“어떨 줄 알았는데?”
“그냥…….”
앤디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래요?”
“뭘?”
“암에 걸린 거 말이에요!”
“그냥 그렇게 된 거지, 뭘 따져?”
1416번지는 허름한 공동 주택이었다. 수첩을 꺼내서 주소를 다시 봤다. C동 2112호…….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닌데…… 진짜 말기예요? 그래도 치료만 잘 받으면…….”
자기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도 아직 깨닫지 못한 앤디가 계속 발렌타인 타령을 했다. 이렇게 집요한 팬은 보다 처음이다.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만 발렌타인은 너무 늦었어.”
빈민가에서 약간 벗어난 영세민 공동 주택 현관에 들어서서야 앤디는 여기가 독사파 소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너무 늦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제이크 브론테의 집은 비어 있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이웃에도 사람이 없었다. 독사파 소굴에 먼저 갔다가 저녁 때 다시 와 봐야겠다 싶어 돌아서는데 발렌타인 때문에 마음이 아픈데다 순전히 감으로 찍어서 하는 비과학적 수사가 못마땅해서 주둥이가 한발은 빠져 있는 앤디 옆으로 나이 50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지나가더니 제이크 브론테의 바로 옆집 문에 열쇠를 꽂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신분증을 보여주고 몇 가지 물어보려 하자 남자가 당황스런 눈길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이크 브론테는 인근에 있는 청과물시장에서 작은 소매상을 하는 말수 적은 남자라고 했다. 10년을 이웃에 살아도 인사 몇 마디 나눠 본 게 고작이라고…….
“딸이 있었죠?”
“참 안됐어요. 어렸을 땐 귀여웠는데…… 엇나가기 시작하니까 금방 그렇게 되더군요. 이 사람…… 딸이 그렇게 되고는 거의 한 달이나 집 밖으로 안 나왔어요. 가게를 다시 연 것도 얼마 안 돼요.”
“최근에 무슨 얘기를 나눠 보신 적 있나요?”
“별로……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서……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죠.”
“그럼 지금은 가게에 있겠군요.”
“그렇겠죠. 그런데 무슨 일이죠? 사고라도 났나요?”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별일은 아니고…….”
“잘은 모르지만…… 얌전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로 찾는지 몰라도 잘못 아셨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자식을 잃고 마음 둘 데 없는 아버지의 광기에 찬 복수 행각보다는 깡패들 세력다툼인 쪽이 나로써도 마음 편하니까. 협조해줘서 고맙단 인사를 하자 남자가 돌아서서 좀 전에 꽂아 뒀던 열쇠를 마저 돌렸다.
그때 앤디가 부스럭거리며 안주머니에서 접고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엉터리 몽타주…… 누구한테 내밀기도 쪽 팔린…….
“혹시 이런 사람 보신 적 있나요?”
벙거지 모자 푹 눌러 쓰면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다. 얼른 뺏어서 버리려고 손을 뻗다가…… 처음 우리를 봤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당황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확실친 않아요. 그런데…… 그저께 새벽에 이런 차림으로 들어오는 걸 봤어요.”
벨조니 거리 3번지엔 대형 청과물시장이 있었다. 커다란 창고형 건물 1, 2층에 과일 야채를 도, 소매하는 상점이 200개나 입점해 있는…… 규모로 치면 쿠간에서 세 번 째로 큰 시장이었다. 제이크 브론테의 가게는 2층 A구역이었다.
“명심해. 사람이 많은 곳이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총은 안 돼.”
“예…….”
첫 번째 강력사건 해결을 앞두고 앤디가 흥분했다. 나는 흥분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더티 제리’ 같은 놈을 죽일 정도면 거구에 완력이 대단할 터…… 수갑 채우기가 만만치 않을 거다. 2층 A구역이라…… 한 바퀴 돌면서 가게 주인들을 둘러봤는데 몽타주만 봐 갖고는 누가 제이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 물어볼 만한 사람이…… 그때 앤디가 커다란 토마토 박스를 들어 나르던 키 큰 남자를 붙들었다.
“제이크 브론테를 찾고 있는데…… 어디 있죠?”
남자가 앤디를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뒤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바로 저 가겐데…… 잠깐 어딜 갔나 봐요. 지금은 없네요.”
하필 지금 자리에 없다니…… 일이 잘못될 조짐이 벌써 보였다. 어쨌든 잠깐 기다려 보기로 하고 제이크의 가게 앞으로 갔다.
다행히 주인은 금방 돌아왔다. 그런데 키가 170도 안 돼 보이는 땅딸한 남자였다. 게다가 남자의 이중 턱도 몽타주에 그려진 그 턱이 아니었다.
“브론테 씨?”
앤디가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가 흐트러진 아스파라거스 줄기를 빠른 손놀림으로 정리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요? 제이크 가게는 저기 맞은편이에요.”
남자가 10여 미터쯤 떨어진 점포를 가리켰다. 거기도 손님 한두 명이 토마토와 체리를 고르고 있을 뿐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없네? 잠깐 어디 갔나 보죠.”
시장 상인들이 작당을 했나? 제이크를 찾는 사람을 합심해서 따돌리기로…… 아스파라거스에 이어 산처럼 쌓인 피망 중에 흠집난 걸 골라내던 주인이 못마땅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가게 앞에서 비켜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앤디가 눈총을 못 이기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아, 저기 있네요.”
앤디가 물러서자 시야가 트인 남자가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빌어먹을…… 좀 전에 토마토 박스 나르던 그 남자였다. 시장에 돌아다니는 하고 많은 사람 다 놔두고 하필이면 당사자한테 딱 걸릴 게 뭐냐?
복잡한 점포와 복잡하게 엉킨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뒤를 힐끔 돌아보던 제이크와 내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을 되는대로 밀치고 앞을 가로막는 좌판은 밟고 뛰어 넘으며 제이크를 추격했다. 상당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계단까지는 거리가 멀었고 나는 달리기가 빠른 편이었다. 그런데…….
“거기 서! 안 서면…….”
뒤쫓아 오던 앤디가 총을 빼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서슬에 놀라서 그만 앞에 놓인 좌판에 걸려서 엎어지고 말았다.
“너 이 자식! 총 안 치워?”
“하…… 하지만…….”
앤디도 내 고함 소리에 놀라서 주춤했다.
“내 손에 죽을래?”
아무리 현장 경험 없는 신참이라도 이렇게 분별이 없나?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총격전이라도 벌일 생각이냐? 게다가 제이크는 무기도 없는 빈손이었다. 무기도 없이 도망치는 용의자에게 총질을 할 수는 없다.
화가 나서 한대 후려갈기려다가 손에서 총만 낚아챘다.
“이제 가!”
“하지만 총도 없이…….”
“시끄러! 가서 잡아!!”
돌아보니 다행히 제이크도 화물을 운반하던 시장 인부와 부딪혀서 주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계단으로 뛰어 내려갈 참이었다.
“만약 놓치면 너…….”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다 놓기도 전에 앤디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병원에서도 느낀 거지만…… 어려서 그런지 빠르긴 진짜 빠르다. 앤디는 어제 보여줬던 그 실력을 120% 발휘하면서 제이크를 추격했다. 가는 길목에 얼쩡거리는 행인들을 거의 패대기치다시피 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앤디가 제이크를 따라 잡았다. 맘에 안 드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저런 걸 보면 또 잘만 가르치면 데리고 다니면서 써먹을 데가 많을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앤디가 성난 살쾡이처럼 몸을 날렸다. 어제 발렌타인에게 했던 그대로였다. 거기까진 딱 좋았는데…….
쿠당탕!!!!
“끼아악!!”
저런, 개도 안 물어갈 화상을 봤나? 간발의 차이로 그만 계단 옆 좌판에서 양파 고르던 아줌마를 덮치고 말았다.
혼비백산해서 쓰러진 아줌마를 잡아 흔들고 있는 앤디를 버려두고 계단으로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어디…… 어디로 갔지? 지금이 한창 시장 볼 시간인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어느 쪽으로 뛰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상자 무너지는 소리, 어이쿠……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제이크 브론테는 나이가 최소한 50대 초반 아니면 중반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빨랐다. 사람이 많은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정말 무기가 없을까? 앤디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가에 잭 나이프라도 한 자루 지니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나 인질로 잡고 버티는 최악의 경우만은 제발 없기를…… 인질도 죽이고 자신도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절망에 빠져서 밤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남자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제이크를 따라 잡은 것은 1층 뒷문 어귀에서였다. 야채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에서 나도 앤디처럼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제이크의 발목은 간신히 잡아챌 수 있었다. 거구의 제이크가 고목이 쓰러지듯 둔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예상했던 대로 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날아온 발길질을 용케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갈비뼈가 부러졌거나 탈장이 됐을 거다. 그 거친 발버둥을 피해서 몸을 일으키자 제이크가 내 옷깃을 움켜쥐고는 냅다 옆으로 밀었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몸이 잠시 허공에 붕 떴다. 제이크한테 떠밀려서 애꿎은 상자 무더기를 다 허물고 난 후 몸을 일으켜보니 제이크는 이미 뒷문으로 빠져 나간 후였다.
휘청거리며 뒷문으로 쫓아 나가보니…… 여기는 아마 쓰레기를 모아서 처리하는 구역인 것 같았다. 청소를 제때 안 했는지 썩어 문드러진 야채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해졌다. 인부들 몇 명이 대기하고 있는 쓰레기차에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청과물 쓰레기를 긁어 담는 중이었다. 제이크는 넉 대의 쓰레기차가 줄지어 서 있는 근처를 막 지나치고 있었다.
“거기 서!”
다행히…… 여긴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 거리면 오발 사고의 위험도 거의 없었고…… 허공에 공포를 한발 쏘자 제이크가 멈칫했다.
“어차피 도망 못 가! 도망쳐 봐야 숨을 곳도 없고. 우린 이미 당신이 누군지 아니까!”
제이크가 돌아섰다.
“나는 할 일을 한 것뿐이야.”
“할 만큼 했고…… 이제 끝났어.”
“내가 해야만 할 일이었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대로 순조롭게 수갑을 채울 수 있을까? 청소하던 인부들이 우리를 보고는 하나둘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티나는 천사 같은 애였어!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내 딸…… 그런데 그놈들이 그앨 창녀로 만들었어! 내가 모르고 있었는지 알아? 몇 달씩 집을 나가서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어떤 놈들하고 어울리는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그래도 언젠간 돌아올 줄 알았는데…….”
노여움과 절망…… 저 남자를 미치게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진정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제이크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뒤로 돌아.”
“그걸로 날 쏠 거야?”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럴 일은 없어. 뒤로 돌아.”
말을 끝나기도 전에 제이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게 내 총구를 틀어잡았다. 그리곤 총구를 자기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죽여봐. 난 상관없으니까.”
제이크가 얼굴을 내 코앞에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나오면 난 어쩌냐…… 사실, 놀랄 시간도 길지 않았다. 제이크가 총을 비틀어서 저만치 던져버리고 내 콧잔등을 후려 갈겼다. 예상했던 그대로 어찌나 기운이 센지…… 마치 차에 얼굴을 받힌 기분이었다. 여태 수많은 주먹에 맞아봤지만 이런 핵 펀치는 처음이었다.
아주 잠깐, 앞이 안 보이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 와중에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제이크가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내 몸이 공중에 잠깐 떴다가 야채 썩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나가 떨어졌다. 충격도 충격이고…… 냄새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직도 앞이 안 보였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형태도 분명치 않은 검은 그림자였다. 본능처럼 몸을 일으켜서 그 커다란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나보다 10센티미터는 더 큰 거구의 남자와 한데 뒤엉켜서 쓰레기 더미 위를 나뒹굴었다. 앞이 안 보이니까 나는 그저 붙들고 있는 게 고작이었고, 제이크는 그런 나를 타고 앉아서 목을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고…… 그놈들을 다 죽이고 나면 나도 죽을 거야!”
방해하는 놈도 다 죽여버릴 모양이었다. 자유로운 두 손으로 아무리 밀치고…… 때리고 뜯어내려고 용을 써도 소용없었다. 질식 상태에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내 손에 뭔가가 잡혔다. 뭔지는 확인할 틈도 없고…… 되는 대로 잡아서 제이크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그 일격에 제이크가 외마디 비명을 내뱉으며 옆으로 넘어갔다.
제이크는 삽자루에 얻어맞은 귀 뒤쪽이 10센티미터 정도 찢어져서 출혈이 꽤 심했다. 상처 자체는 대수롭지 않아서 처치도 몇 바늘 꿰매고 밴드를 붙이는 정도였다. 간단한 치료를 받는 내내, 수갑을 뒤로 찬 채 경찰차에 실려 경찰서로 호송되는 동안에도…… 제이크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이따금 백미러로 제이크의 표정을 살폈다. 반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딸이 죽고 혼자 남은 집에서…… 저 남자는 늘 저런 얼굴로 앉아 있었을 거다. 마치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유령처럼. 내겐 어쩐지 그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 남자는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 산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각을 다 잃은 것 같았다.
경찰서 앞엔 유흥가 연쇄강도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기자들 열서너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카메라를 들이대며 벌떼처럼 몰려들던 기자들이 내가 문을 열고 내리자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어으…….”
“이게 무슨 냄새야?”
“우웩!!”
좀 전에 병원에서도 그랬다. 의사들이 아무도 우리 옆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나도 처음엔 냄새가 정말 지독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좀 견딜 만한데…… 냄새가 대강 날아간 게 아니었던가? 어쨌든 기자들이 멀찍한 곳으로 물러서서 질문은커녕 숨도 못 쉬고 있으니 나는 편하고 좋았다.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서 어떻게 체포했느냐고 물어봐야 대답해줄 기분도 아니었다.
“코가 썩을 것 같아.”
연행을 도와주러 나온 러셀이 코를 틀어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옆으로 지나가던 에쉬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니 냄새가 독하긴 독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청과물시장 쓰레기장에서 격투를 벌였으니 별 수 있나.
“이리 주고, 넌 가서 샤워하고 병원에나 가 봐.”
러셀이 제이크를 거칠게 끌어 당겼다.
“거칠게 다루지 마.”
러셀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일단 유치장에 넣어놔. 조서는 내가 쓸 테니까…….”
“가서 샤워나 해.”
“그리고…… 잘 좀 지켜봐. 혹시 자해를 할지도 몰라.”
“샤워나 하라고!”
“하러 간다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 앞에 놓인 대형 거울에 내 몰골이 비춰졌다. 이런…… 이제 보니 냄새만 심한 게 아니라 제이크의 해머 같은 주먹에 얼굴이 완전히 나갔다. 콧잔등부터 왼쪽 눈두덩이, 광대뼈 부근까지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한테 쥐어 잡혔던 목엔 손톱자국이 얼마나 깊은지 그 반달 같은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흘렀다. 제이크의 머리를 꿰매준 의사가 같이 치료받고 가라고 그렇게 붙잡더니…… 이랬었군.
얼굴도 그렇고…… 아까 채인 옆구리 근처가 아파 죽겠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발렌타인에게 당했지.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는 드문데 요즘은 재수가 정말 없다. 그나마 갈비뼈가 아예 나가지 않은 게 운이 좋았다면 좋은 거고…….
잠깐 거울 앞에 서 있는데 밖이 또 소란스러웠다. 얼핏 보니 좀 전에 냄새에 질려서 나한테 접근도 못하고 멍하니 들여보냈던 기자들이 바깥쪽으로 돌아서서 뭔가를 신나게 찍어대고 있었다. 누가 또 큰 거 한 건 올렸나? 요즘 굵직한 사건이 어떤 게 있었지?
뭐가 됐든 알게 뭐냐? 쿡쿡 쑤시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삐뚜룸한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시간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온몸이 아파왔다.
음악소리…… 무슨 곡이더라. 감미롭고 은근히 흥겨운…… 누가 거리 공연이라도 하는 건가? 건물 안에선 잘 들리지도 않지만 생생한 라이브라서 느낌이 또 신선했다. 아폴로 거리 쪽으로 가면 블록마다 깔린 게 거리의 악사지만 경찰서 앞길이라니,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특이한 사람들이다.
음악은 좋았다. 우울하기만 했던 마음이 약간 풀릴 정도로 아…… 이 노래. 세레나데구나. 위니가 좋아했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코너를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떤 좋지 않은 예감에 갑자기 뒷목이 뻣뻣해졌다.
“오늘이…… 며칠이지?”
러셀을 따라서 유치장까지 갔다 온 앤디에게 물었다.
“20일이요. 왜요?’
“아니, 말고…… 무슨 요일이야? 목요일…… 아냐?”
“토요일이잖아요. 그런데 밖에서 무슨 공연 같은 거 하나 봐요? …… 선배님! 샤워실 안 가세요?”
허겁지겁 달려 나가보니 정문 바로 앞 보도에서 스페니시 악사들의 흥겨운 공연이 한창이었다. 보도에 인접한 도로엔 악사들이 타고 온 것 같은 미니버스와 대체 어떤 망나니가 저런 걸 타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날티 나는 은색 리무진이 한 대 버티고 있었다. 주차금지 구역인데…….
내가 다시 나타나자 사람들이 코를 틀어막으며 얼른 비켜섰다. 덕분에 제일 앞으로 나가는 데는 전혀 곤란함이 없었다. 악사들은 모두 전통적인 마리아치의 복장을 한 프로 악사들이었다. 열 명? 아니…… 열두 명이었다.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거 설마…….
경찰서 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공연이 가장 반가운 건 기자들이었다. 카메라 플러시가 마치 폭죽처럼 연달아 터지자 악사들의 연주가 더욱더 열정적으로 변해갔다. 이쯤 되자 무심히 길을 가던 행인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악사와 기자들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경찰서 앞은 갑자기 작은 공연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공연이죠?”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서 무슨 행사가 있나요?”
경찰서 앞길에 울려 퍼지던 세레나데가 거창한 피날레로 끝나자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악단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단장인 듯 보이는 중년 남자가 신이 났다.
“우린 악단〈시에스타〉에요. 칸쿤에 있는 리츠 호텔 전속의 악사들이죠. 〈시에스타〉는 멕시코 최고의 악단입니다.”
“칸쿤이라면 가까운 곳이 아닌데 여긴 무슨 일이시죠? 순회공연 같은 건가요?”
“아니에요. 우린 오늘 아침에 여기 도착했어요. 아주 특별한 공연을 하기 위해서요.”
단장의 얼굴에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느끼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신사분이 거액을 내고 우리를 초청했답니다.”
“상당히 로맨틱하게 들리는데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로맨틱하죠. 사랑 때문이니까요.”
순간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시간의 공연을 부탁 받았답니다. 신사분이 사랑하는 어떤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서…… “
순간 나도 모르게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아가씨란다…… 그래, 그놈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지만 경찰서 앞길에서 이런 짓을 벌일 만큼 나쁜 놈은 아니겠지. 괜히 놀랐네. 기운이 다 빠져서 돌아서는데 한순간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머리가 빠개질 듯 지끈거렸다.
“그런데 왜 경찰서 앞이죠?”
“아가씨가 경찰이거든요.”
경찰이란 소리에 청중이 우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쥬드가 또 어디서 배알 빠진 놈팽이 한 놈을 낚은 모양이지.
내가 한발 앞으로 나가자 사람들 기겁을 하고 옆으로 우르르 물러섰다. 내 몸에선 대체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 걸까?
“그 아가씨가 어서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냈어요. 우리도 그 분을 빨리 만나고 싶어요.”
그때 경찰서 현관에 쥬드가 나타났다. 오늘따라 무릎에 약간 못 미치는 하얀 실크 원피스에 푸른색 캐시미어 가디건을 걸쳤는데 그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쥬드의 모습을 발견한 악사들과 청중들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화려한 이벤트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화려한 미인의 등장에 모두가 열광했다.
악단과 기자들…… 그리고 청중으로 변한 행인들을 발견한 쥬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어떤 여자가 당황하지 않을까? 자신만을 위한 이런 거창한 이벤트라니……. 아무리 쥬드라도 이런 행사는 처음일 거다.
“부러워.”
내가 다가서자 쥬드가 코를 잡고 뒤로 물러섰다.
“뭐예요? 이 냄새?”
“무슨 냄새?”
일부러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쥬드가 들고 있던 클러치로 얼굴을 막고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토할 것 같아요.”
쥬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됐다. 어서 다가와서 연주를 즐기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좀 전의 세레나데보다 좀 더 흥겹고 발랄한 곡이었다. 멕시코 최고라는 자찬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꽤 훌륭한 연주였다. 구경꾼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노래가 흥겨워서 박수치며 환호도 하는데…… 그러면서 나한테는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모른다. 이 냄새가 사방 10미터 정도를 가스처럼 뒤덮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사방 10미터 이내엔 쥬드뿐이었다.
“어딜 가나 장미꽃, 보석…… 이젠 멕시코에서 공수한 악단까지…… 어떤 놈인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정성을 봐서라도 정착을 해주지 그래? 남자 별거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쥬드가 클러치를 얼굴에서 잠깐 치웠다가 얼른 다시 가렸다.
“나도 그러고 싶긴 해요.”
“뭐…… 맘대로 해. 당신 인생이니까.”
정말 샤워하러 가야겠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막 돌아서는데 쥬드가 손끝으로 내 어깨를 꼬집듯 잡아 세웠다.
“이거 당신한테 온 선물이에요. 내가 아니라…….”
“…….”
“루크 첸이요. 오늘이 토요일이잖아요.”
“뭐……가 어째?”
순간적으로 약 먹은 것처럼 머리가 멍…… 했다. 쥬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악사들 쪽으로 다가갔다. 쥬드를 빙 둘러싼 악단이 세상에서 가장 낯간지러운 사랑 노래를 메들리로 불러 재끼더니 잔잔한 기타 반주와 함께 끝을 맺었다. 사방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젠 경찰서 안에서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동료 경관들까지 하나둘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안 되는데…….
“정말…… 아름다운 공연이네요.”
쥬드가 가능한 한 수줍은 척하며 악단장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악사들을 비롯해 기자나 행인들 중 어느 누구도 쥬드가 이 거창한 이벤트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여긴 인파가 많은 거리라서요……. 이런 문화행사는 허가 없이 할 수 없어요.”
쥬드가 침착하게 타고 왔던 차 도로 집어타고 빨리 꺼지라는 뜻을 전했다.
“이건 문화행사가 아니에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주 로맨틱한 선물이죠.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허락받을 필요가 있나요?
“당사자 허락은 얻어야죠.”
잘한다!
“미스터 첸은 당신이 오늘 저녁 파티에 참석하시길 간절히 바라고 계세요.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으시답니다.”
단장이 은색 리무진을 가리키며 거드름을 피웠다. 누가 보면 그 리무진이 자기 건 줄 알겠다.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엔 바빠요. 요즘 이 도시엔 사건 사고가 많거든요.”
계속 저렇게만 해주면 그동안 나한테 했던 나쁜 짓, 이상한 짓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내 월급에서 십일조라도 떼서 바칠 거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차를 내주던 불평 없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거고, 주변에서 쥬드를 욕하고 다니는 놈은 내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돌아가주세요. 미스터 첸에게는 나중에 설명을 드리겠어요.”
악사들도, 기자들도, 그리고 아무 상관없는 행인들까지도 실망한 얼굴이었다. 개중엔 쥬드에게 그냥 리무진에 올라타라고 부추기는 사람까지 있었다. 특히 단장은 아주 당황한 얼굴이었다. 빨리 좀 꺼져라. 이러다 서장이나 반장이라도 나오면…….
“어으…… 이게 무슨 냄새야?”
뒤에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헐, 서장님…….
“너 대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다 온 거야? 이런 냄새 풍기고 다니는 것도 범죄야.”
“어, 어떻게…… 아니, 왜…… 나오셨어요?”
“비켜, 나도 좀 보게. 누가 크롬웰한테 뭘 보냈다고?”
이러다 쓰러지겠다. 저것들은 빨리 안 가고 뭘 저렇게 꾸물거리는 거냐……? 내가 안 비키고 버티자 서장이 대뜸 짜증을 냈다.
“아, 비켜! 냄새 때문에 돌겠어!”
“쥬드한테 뭐가 왔던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서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대단한 일이 아니면? 요즘 이 빌어먹을 도시에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은데…… 저러다 덜컥 결혼이라도 해버리면 여태 크롬웰이 하던 일, 니가 대신 할래?”
서장이 나를 확 떠다밀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 믿을 건 쥬드의 순발력뿐이었다. 악단의 단장은 당황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께서 다음에 만나 뵙자고 하시는군요. 글쎄요……. 연주는 좋다고 하시는데요. 예. 금발에…… 제가 여태 뵌 분들 중에는 가장 미인이십니다.”
지금 저거…… 루크 첸 그 자식한테…….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단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좀 전과는 달리 점잖은 표정으로 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싫으시다면 굳이 강요는 말라고 하시는군요. 저희 때문에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이제 살았다. 더 이상은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쥬드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람들 몰래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니요. 잠시지만 저도 즐거웠어요. 훌륭한 공연이었고요.”
“말씀 감사합니다. 세뇨리타. 그런데 한 가지…….”
단장에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미스터 첸이 편지도 보내 오셨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읽어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편지요…….”
그럴 줄 알았다. 비열한 자식…… 이렇게 곱게 꺼질 리 없지. 이를 악물고 파김치처럼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이 한 군데도 안 아픈 데가 없다. 나는 분명히 오래는 못 살 거다. 그 사이, 쥬드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단장은 이것만은 꼭 받아줘야 한다면서 봉투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 들었다. 거의 동시에 악사들이 배경음악을 잔잔하게 깔았다.
“사랑하는…….”
“좋아요! 갈게요!”
쥬드가 단장의 손아귀에서 편지를 강탈하다시피 낚아채며 소리쳤다. 그런데 왜 사방에서 박수가 터지는 거야? 로맨틱하기만 하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상대는 쿠간 시 최악의 나쁜 놈이라고!
쥬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단장이 의기양양하게 열어준 리무진 뒷좌석에 올라탔다. 저대로 실려서 첸에게로 가는구나. 나를 대신해서……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 날이 있을 거다.
“뭐야? 이번엔 루크 첸이야? 언제 또 눈이 맞았어?”
쥬드가 리무진에 몸을 싣는 것을 본 서장이 어느 틈에 옆에 붙어선 에쉬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몬티첼리 저택 습격 건으로 왔다 갔잖아요. 그때 그랬겠죠.”
에쉬의 대답에 서장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을까요? 루크 첸은…….”
“괜찮아. 그놈은 유부남이니까.”
쥬드가 사직서를 쓰지만 않는다면 연애 상대가 누구건 서장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지 오래 됐다. 저러다 죽어도 지 팔자라면서 한숨 쉬는 걸 우리는 여러 번 봤었다.
그런데…… 곧 떠날 줄 알았던 리무진이 악사들이 악기를 다 챙겨 버스에 올라탄 후까지 출발할 생각을 않았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쥬드가 차에서 내렸다. 거의 동시에 앞자리 조수석에서도 누군가가 내려섰는데…… 전에 루크 첸의 사무실에 갔을 때 만났던…… 이름이 지오였던가, 자오였던가…… 창밖으로 사람 던지는 게 특기라던 그놈이었다.
자오가 그 험상궂은 눈초리로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쥬드가 손에 휴대폰을 쥔 채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전화기에 대고 잠시 얘기를 하더니 내게 와 보라며 손짓을 했다. 리무진이 출발하면 박수라도 쳐주려고 그러는지 아직도 안 가고 길에 버티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대체 이 남자한테 뭘 어떻게 한 거예요?”
그녀가 내 손에 휴대폰을 쥐어줬다. 그리곤 잽싸게 바람 부는 반대 방향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전화기 너머로 꿈에 들을까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내 사랑.」
“개새끼! 너…… 죽여버린다!”
내 고함 소리에 경찰서 안으로 다 들어갔던 서장이 다시 튀어 나왔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고른 악사들인데…… 왜? 맘에 안 들었어?」
“야!!!!”
「보고 싶어. 올 거지?」
“하…….”
「파티는 여섯 시 시작이야.」
이 자식이 나를 아예 화병으로 때려눕힐 작정이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참으면 화가 가라앉는 게 아니라 병이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젠 동료들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서장이 알면 얼마나 화를 낼까 하는 걱정은 두 번째였다. 너 이 자식……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그래, 너…… 꼼짝 말고 거기서 기다려!”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서 산산 조각으로 깨뜨려버리고 리무진에 올라탔다. 열린 문틈으로 기가 막혀서 입만 딱 벌리고 있는 서장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 있는 게 보였다. 카메라 플러시도 엄청 터졌다. 설마 이런 일이 내일 신문에 날까?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