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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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파티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대여한 리무진을 타고 와서 몬티첼리의 이니셜이 찍힌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 입장에는 사소한 시비나 소란도 없었다. 새로 맞춘 예복을 입고 파티 홀에 들어선 그를 사람들은 처음 몇 분간은 호감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니콜라스는 정장이나 턱시도를 정말 맵시 있게 잘 입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낯익은 검은 눈동자나 짙은 갈색머리카락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 걸리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파티가 한창인 홀에 들어올 때까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지만 이 저택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100명이나 있는데 어째서 그 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르시아는 오른쪽 문으로…… 오스카는 왼쪽 문으로 밀고 들어갔었죠. 후원 테라스에도 20명 정도 일렬로 서서 놈을 정조준하고 말입니다.”

오스카는 일전에 세자르와 한판 붙었을 때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구경만 하던 인정머리 없는 금발머리였다. 그놈이 그림자 부대의 대장이었다. 레빈의 말대로라면 초기대응은 정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럼 어디서 일이 잘못된 걸까?

“가르시아와 오스카가 헤슬렘의 머리에 소총을 정조준하고 막 끌어내려는 참에 주인님이 놈에게 뭘 물어 보셨죠.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몬티첼리의 질문은 간단한 것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정문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니까 그냥 들여보내 주더군요.”

니콜라스가 목덜미를 찌르고 있는 가르시아의 총구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치우면서 대답했다.

“댁한테 초대장을 보낸 기억이 없는데?”

“실은 해치 씨한테서 얻었습니다.”

“해치? ……에드가?”

몬티첼리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면서 반문했다.

“옛 친구가 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파티가 열린다기에……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부득이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니콜라스가 만인을 속여 먹은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몬티첼리가 헛소리 작작하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법원이 심신상실로 판정한 당신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이대로 얌전히 나가준다면 그다지 큰 폐랄 것도 없고 말이오. 하지만 내 파티 초대장을 아무한테나 내돌리다니…… 해치 그 작자한테는 나중에 좀 따져봐야겠군요.”

“그건 어려울 겁니다.”

니콜라스가 몬티첼리를 쳐다보면서 빙긋 웃었다.

“죽었으니까요.”

“그 한마디에 주인님이 뻑 갔죠.”

레빈이 내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에드가 해치는 2, 3년 전부터 기회만 있으면 주인님을 밀어내고 보스 자리를 차지하려고 뒷공작을 하고 다니던 놈이거든요. 없애버리려고 해도 그놈 밑에 받치고 있는 조직의 규모가 만만치 않아서 손을 못 대고 있었죠. 그렇지 않아도 루크 첸 때문에 골치 아픈데 내분까지 겹치면 좋을 게 없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저녁이라도 먹고 있다는 겁니까?”

내 반문에 레빈이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택 본채의 1층에는 대서재와 몇 개의 응접실, 주방과 그에 딸린 대 식당 외에 필리스 홀이라는 넓은 방이 있었다. 애초에 몬티첼리의 첫사랑 이름을 따서 로즈마리 홀이라고 불렀다는데, 이후로 몬티첼리의 애인이 바뀔 때마다 홀의 이름도 바뀌어서 필리스 홀이 된 지는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2층까지 트인 높직한 천장에는 여섯 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보석처럼 번쩍거리고 바닥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붉은 빛 도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호사스런 방인데 몬티첼리가 탱고 연습을 주로 거기서 한다.

필리스 홀의 특이한 점은 후원 쪽 벽 한 면이 다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좋으면 창을 걷어내고 잘 꾸민 후원과 그대로 통하게 개방해 놓는데 지금은 겨울이라서 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하지만 고용인들이 항시 투명하게 잘 닦아 놓은 덕분에 개방감은 여전해서 필리스 홀에서 바라보는 눈 쌓인 후원 풍경은 잘 그려 놓은 크리스마스 엽서처럼 달콤했다. 그 외에 필리스 홀로 통하는 문은 두 개였다.

“간 커…… 정말…….”

필리스 홀의 정문격인 필리스 도어 바로 옆에 PDW 소총을 움켜쥐고 서 있던 가르시아가 혼잣말 하듯 으르렁거렸다. 값비싸 보이는 유화와 벽걸이로 장식된 복도에는 가르시아 외에도 스무 명 남짓한 경호원들이 모여 서 있었다. 가르시아는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진짜 미친놈 아냐?”

“대부님 하시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뒷말 달기 싫지만…… 너무하시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놈이랑 한 상에서 밥을 먹지?”

테시오도 불안한 듯 투덜거렸다. 스콜피온을 들고 있는 테시오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티는 테시오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다.

“에드가 해치를 없애줬으면 저녁 한 끼는 대접하는 게 인사지. 상대가 누가 됐든지 말이야. 나는 대부님의 그런 신사적인 면이 참 맘에 들어.”

“신사적인 면 좋아하네!”

가르시아가 베네티에게 나직하게 소리쳤다.

“저건 구제불능의 왕자병이야. 언젠가는 저 잘난 척 때문에 크게 당할 날이 있을 거야! 그게 오늘일지도 모르고…….”

보스의 이해할 수 없는 고집으로 홀에 니콜라스를 버려둔 채 나오기는 했어도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라서 가르시아는 조금 열어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수상한 낌새만 보이면 곧장 밀고 들어갈 태세였다.

몬티첼리의 허영심은 한 번씩 세간의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니콜라스 헤슬렘 같은 유명 인사와 우아하게 저녁 한 끼 먹는 것으로 배짱 좋다는 찬사를 들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가 볼 때는 사자 아가리를 벌리고 머리통을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이었다.

생각해보면 몬티첼리의 무모함을 비웃을 처지도 아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더 웃기는 짓일 수도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서 필리스 도어 쪽으로 돌아섰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눈빛만 봐도 알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입 다물고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안에 정말 니콜라스가 와 있는 걸까?

“뭘 하려는 거야?”

문으로 다가서려는데 난데없이 가르시아가 앞을 막아섰다.

“옛 친구가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만나는 봐야지.”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내 어깨를 가르시아가 거칠게 밀쳤다.

“저놈은 우리 거야! 넌 별채에 가서 당구나 치고 놀아. 여기 일 다 끝나면 연락해줄 테니까!”

얼마나 세게 떠밀렸는지 비틀거리면서 물러서다가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가르시아 말대로 해, 짭새. 총잡이가 몇 명인데 놈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겠어?”

테시오가 소총을 툭툭 쳐 보이며 폼을 잡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기랑 나랑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정말 맘에 안 든다. 내가 옷을 찾아 입고 방을 나오면서부터 계속 했던 말을 레빈이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굳이 들어가서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애들한테 처리하라고 하든지…… 아니면 경찰을 부르죠. 경찰을 집안에 들여 놓는 걸 달갑게 여길 사람은 없지만 그자는 어디까지나 경찰 소관이니까요.”

마치 나는 경찰도 아니라는 투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서에 전화 좀 해주세요. 칸 반장 아시죠? 여기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다 알아서 할 거예요. 부탁드릴게요.”

살다보면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강을 건너야 할 때처럼, 전혀 내키지 않는 길을 걸어야 할 때처럼, 혹은 천 길 낭떠러지에서 눈을 질끈 감고 뛰어야 할 때처럼……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에 앞서서 우선 할 일은 가르시아를 옆으로 치우는 일이었다.

“저 미친놈은 뻔뻔하게 우리 보스의 저택에 기어 들어와서 우릴 엿 먹였어! 이건 몬티첼리 패밀리에 대한 모독이야. 놈이 오늘 이 집에서 살아 나가면 내 이름은 더 이상 니노 가르시아가 아니고, 더 이상은 몬티첼리 패밀리도 아니야!”

몇 주 얼굴 맞대고 지내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녀석들은 자신들을 일종의 사업가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들이 행하는 살인, 폭력, 공갈, 협박 등등으로 돈을 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주제 파악 좀 제대로 하라고 아무리 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연쇄살인 같은 반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혐오감이 보통사람들보다도 더 심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맹세하지만, 저 자식이 이 집에서 살아 나가면, 난 이 바닥에서 은퇴하고 우리 딸이 다니는 학교 앞에 꽃집을 차릴 거야!”

가르시아가 한껏 격앙된 음성으로 선언했다. 주변의 몇 명은 가르시아의 결의에 감동한 얼굴이었지만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가 아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라도 그렇게 마음잡고 살아준다면 경찰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비켜. 가르시아.”

“대체 어쩔 작정이야? 놈은 널 죽이러 온 거란 말이야!”

“좀 전에 레빈이 한 말 못 들었어? 이 일은 경찰 소관이야.”

“하지만…….”

더 이상 실랑이 벌이고 싶지 않아서 가르시아를 옆으로 밀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나는 그냥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총은 있어?”

가르시아가 마지못해 옆으로 한 발짝 비켜나면서 물었다. 총은…… 가방에 있다. 깜빡 잊고 안 챙겼네.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가르시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허리춤에서 자기 총을 빼서 내 손에 쥐어줬다.

“놈에게 기회를 주지 마. 놈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그냥 당겨 버려!”

총을 뒤춤에 꽂아 넣으며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게 꿈이고 지금이라도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꿈이 아니니까…….

니콜라스는 파티를 좋아했다. 호사스럽고 한가로운 상류층 파티의 나른한 분위기를 상당히 즐겼고 또 그런 분위기가 잘 어울렸다. 워낙 스타일이 좋은데다 행동거지가 우아한 탓에 잘 모르는 사람의 파티에서도 그는 언제나 주인의 환대를 받곤 했다.

파티에 같이 가본 건 딱 한 번이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피아니스트의 네 번째 이혼 축하 파티였다. 모두들 격식을 갖춘 정장차림이었는데 꼬질한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채 얼떨결에 끌려간 나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집 주인은 신경질적이고 거만한 남자인데다 니콜라스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뜻 깊은 이혼이었는지 허락도 없이 니콜라스를 초대한 자기 친구를 한번 노려보는 걸로 불쾌감을 표시한 것 외에 다른 푸대접은 없었다.

파티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이혼을 자축하기 위해 집 주인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신경질적이고 거만한 중년 남자의 연주는 뜻밖에도 뜨거운 사막의 열풍 같았다. 그 압도적인 연주에 화답하겠다면서 니콜라스가 허락도 없이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던 바이올린을 들고 나섰을 때 주인은 정말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니콜라스의 연주는 나로서는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가을바람 같았다고 해야 할까? 키 작은 단풍나무에 둘러싸여서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청량한 느낌이었다.

니콜라스는 앙코르를 받아서 두 곡을 더 연주했고 집 주인은 그를 위해서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놨던 비장의 와인을 땄다.

그는 곧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나는 그 모습을 좀 떨어진 곳에 서서 물끄러미 지켜봤다.

춤을 추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떨거나 초라한 몰골로 구석에 몰려 서 있지도 않았다. 정해진 각자의 자리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조용히 앉아서 자신들의 만찬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예기치 않은 손님이 들이닥치기는 했어도 뭐 대수로울 것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은 넓고 사람은 많았지만 니콜라스를 찾아서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내 눈에는 그의 뒷모습 이외의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얀 테이블보에 크리스털과 도자기로 세팅된 우아한 원탁이 다섯 개…… 한 테이블에 열두 명……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였고 넓은 홀 한쪽 무대에서 나직하게 재즈를 연주하는 18인조 밴드까지 합치면 홀 안의 인원은 대략 100명이었다. 뒤춤에 찔러 넣은 총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니콜라스는 호스트의 테이블에서 몬티첼리와 마주 보고 있었다. 상석이라고 해서 테이블 세팅이나 꽃 장식이 별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몬티첼리 양 옆에 대단한 미인들이 앉아 있었고 좀 떨어진 벽난로 바로 옆에는 위 아래로 새까맣게 차려 입은 발렌타인이 팔짱 끼고 시무룩한 얼굴로 기대 서 있었다.

한발 한발 다가갈 때마다 내 발소리가 방안의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고개를 돌려서 나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사방에 100명의 무장 경호원들이 있으니 연쇄살인범 따위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이 사람들은 니콜라스를 전혀 모른다.

니콜라스는 몬티첼리와의 대화가 무척 재미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와의 거리가 얼마 멀지 않았다.

“……요양소 독방생활도 막상 닥치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더군요.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잠도 많이 잤어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진 않았어요. 못되게 구는 간호사나 의사도 없었고요.”

홀의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를 듣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와 만나기 전이라고 해서 내 생활이 순탄하고 안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뒷골목을 순찰하면서, 혹은 거친 깡패들과 대결하면서 죽을 고비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많이 넘겼었다. 그때마다 두려웠고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두려움은 그런 일상적인 두려움과는 달랐다.

“그건…… 상당히 실망스럽군요.”

몬티첼리가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당신이 병원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망이 크시다니 기분은 좋군요.”

발렌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자다가 불려나왔는지 나른한 얼굴로 나를 흘끔 쳐다봤을 뿐 발렌타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웬만히 지낼 만 했다니까 하는 말인데, 그냥 거기 쭉 있지 그랬습니까? 당신 아니라도 세상은 충분히 험악한데요.”

“당신 같은 사람도 세상 걱정을 합니까?”

니콜라스의 대답에 몬티첼리가 입 꼬리를 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한번 슥 올려다봤다.

“등 위에 옛 친구가 와 있는데…… 인사 안 합니까?”

그의 눈동자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로 반짝거렸다. 친구 작은아버지한테 이런 소리 하기 그렇지만, 진짜 고약한 악당이다.

“그냥 두면 당신 뒤통수라도 한대 갈길 기센데요.”

니콜라스가 흠…… 하고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전에는 항상 단정한 짧은 머리였는데 요양소에서는 이발을 안 했는지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을 정도였다. 몇 년간의 연금이 그를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몇 년간 제대로 햇빛 구경을 못한 탓인지 얼굴은 전보다 좀 더 야위고 창백해져 있었지만 그 얼굴은 어찌 보면 내 또래 청년인 듯 젊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제이.”

“…….”

“너…… 별로 변하지 않았구나.”

마치 우리 사이에 그렇게 비참하고 비극적인 사건 따위는 없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태연했다. 그 태연함에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이런 얼굴로 나를 볼 수 있을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니콜라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때때로 필요해서 강한 척 할 뿐인데…… 어떤 때는 그게 너무 힘들다. 대답 대신 총을 뽑아서 니콜라스의 미간에 들이댔다. 사방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고, 웨이터 하나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접시 몇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서둘 필요가 있나?”

“파티는 끝났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밀었다. 조금씩 고조되는 흥분 때문에…… 혹은 두려움 때문에 총구가 덜덜 떨렸다.

“당신을 체포한다, 헤슬렘. 콘웨이 요양소 방화 및 살인…….”

“사실 그 불은 내가 낸 게 아닌데…….”

니콜라스가 떨리는 총구를 불안한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중얼거렸다.

“입 닥쳐! ……에너벨 베긴 박사와 케빈 왕, 세바스찬 길버트 살인 혐의까지야! 그동안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 있으면 경찰서에 가서 해.”

“수갑이라도 채울 거냐?”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수갑이 없다. 일단…….

“당신에게는 묵비권이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어. 하지만 우선은 얌전히 굴어야 살아서 재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니콜라스가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 중에 경쾌하게 울렸다.

“너는 정말…….”

니콜라스의 말과 행동에 별다른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자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된다. 니콜라스는 뭔가 목적이 있어서 나타난 거다.

“하나도 안 변했어.”

일 돌아가는 모양을 시무룩하게 지켜만 보고 있던 발렌타인이 나와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스웨터 자락 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이제 졸음이 좀 가셨는지 눈동자가 또렷했다.

“천천히 일어나. 허튼 수작 부리면 머리통 날아갈 줄 알아!”

“왼쪽? 아니면…… 오른쪽?”

“어느 쪽이든…….”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이자는 사나운 야수의 본성을 드러낼 터였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그런 인간이다.

“왼쪽으로 돌아.”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총구에 입술이 닿았다.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서는데 놈이 내 총구를 손으로 덥석 잡았다. 순간, 총성이 쥐죽은 듯 조용한 파티 홀의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었다.

머리통을 박살내 버리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얼결에 발사된 총알에 박살난 건 니콜라스의 머리가 아니라 벽에 장식돼 있던 애꿎은 크리스털 장식등이었다. 총알은 겨우 니콜라스의 목덜미를 살짝 스쳤을 뿐이었다.

총성이 울린 것과 거의 동시에 두 군데 출입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젖혀졌다. 필리스 도어 쪽에서는 가르시아를 필두로 20여 명 정도가 니콜라스를 정조준한 채 쏟아져 들어왔고, 옆문 격인 로즈마리 도어에서는 오스카와 그의 용병들 10여 명이 밀려 들어왔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인들 중 몇몇이 앉은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조심해야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분들한테 약속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내 입장이 곤란해져.”

니콜라스가 점잖게 나를 타일렀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 나쁜데 그 소리 들으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이 개새끼! 죽여버리고 말 테다!

총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니콜라스의 손아귀에서 총신을 빼내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완력으로든 지력으로든 혼자서 당해내기 버거운 상대였다. 총은 곰 사냥용 덫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물러서! 짭새! 한방에 날려버릴 테니까!!”

가르시아가 들고 있던 소총으로 니콜라스를 정조준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 행동이나 말투에 살기가 등등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직전이었다. 연쇄살인범, 잔뜩 약이 올라 있는 한 무리의 총잡이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들의 보스, 범인에게 총구를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경찰이 한 방에 모였으니 큰 사고가 터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가르시아! 총 치워!”

몬티첼리가 냅킨을 집어던지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가르시아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대부님! 저 자식은…….”

“이 자식이 누군지는 나도 알아!”

“위험한 놈입니다. 대부님이 무슨 꿍수를 두고 계신지는 몰라도 저런 놈은 기회 있을 때 죽여버려야 뒤탈이 없단 말입니다!”

가르시아가 초강경자세로 몬티첼리와 맞섰다.

“지금 나한테는 니가 더 위험해, 가르시아. 대체 지금 누구한테 총을 들이대고 있는 건지 한번 보고 위험 타령을 하란 말이야!”

몬티첼리의 호통에 가르시아가 주춤했다. 니콜라스와 몬티첼리는 일직선상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니콜라스에게 총질을 해대면 몬티첼리가 죽을 확률이 니콜라스가 죽을 확률과 거의 같았다. 가르시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방면에서 프로라면 프로였다. 가르시아가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하고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가르시아와 몬티첼리가 실랑이를 벌이는 그 짧은 동안에 나는 니콜라스에게 총을 빼앗기는 불상사만은 면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단단히 총을 틀어잡고 있는 니콜라스의 검은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니콜라스에게 잡힌 오른손을 그냥 두고 왼손으로 놈의 턱을 후려 갈겼다. 니콜라스가 휘청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게…… 기회일까? 놈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총을 다시 한 번 힘껏 비틀었다. 덫에라도 치인 듯 꼼짝 않던 총신이 약간 헐거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니콜라스가 총을 쥔 내 손을 끌어 당겨서 손등을 덥석 물었다. 아니…… 입을 맞췄다.

“으악!!”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보니 어느새 니콜라스가 내 총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면서 웃고 서 있었다.

“저 병신…….”

가르시아가 기도 안 차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총 내려놓으시죠. 헤슬렘 씨.”

발렌타인이 경고했다. 말투는 조용했지만 태도는 단호했고, 그의 총구는 정확히 니콜라스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발렌타인 정도의 실력이라면 애꿎은 사람 다치게 하지 않고 깨끗하고 깔끔하게 니콜라스만 해치울 수도 있을 터였다.

“싫다고 하면 그 걸로 날 쏠 건가?”

“이건 꽤 쓸 만한 무기거든요.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타격이 클 겁니다. 시험해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판단을 잘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발렌타인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발렌타인이 들고 있는 것은 44구경 매그넘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쩐지 처음 만나는 사이 같지 않았다.

몬티첼리가 니콜라스와 발렌타인을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가며 노려봤다. 애초에 무슨 생각으로 니콜라스를 테이블에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총을 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

잠시 발렌타인을 응시하던 니콜라스가 묵직한 권총을 테이블 한 가운데에 순순히 내려놨다. 발렌타인도 두말없이 총을 거둬서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니콜라스가 나를 돌아봤다.

“좀 앉아. 오랜만이잖아?”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저 니콜라스의 뒤통수만 노려보던 내 주의를 환기 시킨 것은 몬티첼리였다.

“거기 그대로 서 있어도 좋고 여기서 나가도 상관없어. 경찰의 본분을 지키는 것도 물론 좋아.”

몬티첼리가 샐러드 포크로 물 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마련한 만찬인데다 나는 이 손님이 마음에 들어. 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저녁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네. 그러니…… 자네도 같이 들었으면 좋겠군.”

전 경찰이 총력을 다 해서 뒤쫓는 연쇄살인범을 보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는 건 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몬티첼리는 법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 하고 싶은 짓은 다 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헤더. 미안하지만 형사님께 자리 좀 양보하지?”

몬티첼리가 니콜라스와 중간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던 빨간 머리 미녀에게 눈짓을 했다. 내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니콜라스를 잡아먹을 듯 입맛 다시면서 앉아 있던 여자는 좀 전의 총성에 마음이 변했는지 몬티첼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섰다. 옷맵시며 몸매를 보니 모델인 듯도 한데, 나를 돌아보는 그 얼굴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앉아서 말씀들 나누세요. 저는 이만…….”

몬티첼리가 어서 앉으라고 눈총을 줬다. 몬티첼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갖고 있던 총까지 빼앗긴 이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다. 할 수 없이 빈자리에 걸터앉자 몬티첼리가 다시 가르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르시아, 너도 그만 나가 봐. 이렇게 손님들을 놀라게 해서야 쓰나?”

하지만 가르시아는 입술을 물어뜯을 듯 질근거릴 뿐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일은 제가 대부님보다 전문이란 말입니다!”

“총질은 니 전문이지만 파티는 내 전문이야. 우린 지금 파티 중이란 말이야.”

“파티를 계속 하세요! 저놈은 내주시고요!”

“가르시아!”

몬티첼리가 버럭 소릴 질렀다.

이 방에는 몬티첼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보스의 명령에 불복하는 건 남 보기 좋지 않은 광경이었다. 돈과 폭력 이외에 다른 정당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범죄조직에서 항명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치명적이다. 가르시아의 악문 이빨 사이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외할아버지는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하면 현세에서 그만큼 고생하는 법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아무리 고생스럽고 서러운 일을 당해도 길게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신세타령 따위 늘어놔봐야 여장 취미가 있는 집시 무당의 고단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을까?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외할아버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강하거나 대범한 건 아니라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조차 알아듣기 힘든 집시 사투리로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리며 아픈 마음을 달래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측은해 보였었다.

그건 그렇고…… 전생에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하면 현세에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니콜라스와 한 밥상에 앉아 있다니…… 가르시아가 말한 대로 그냥 다가가서 쏴버릴 걸, 체포하겠다고 주제넘게 까분 대가가 너무 비싸다. 총은 아직 테이블 한가운데 놓여 있는데, 어떻게 저걸 잡을 방법이 없을까?

“참으로 끝내주는 파티요. 돈 몬티첼리.”

가르시아와 오스카 일당이 문 밖으로 철수하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초로의 남자가 참을 만큼 참았다는 투로 이죽거렸다. 남자의 이름은 알베르토 마르첼로였다.

키는 약간 작은 편이고 체구도 왜소했지만, 어디 가서 인상 나쁘다는 소리는 안 들을 정도로 점잖게 생겼다. 하지만 실상은 인정 많아 보이는 외모와 판이하게 달라서 조직범죄 쪽하고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도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악당이었다.

“희대의 살인마에, 미쳐 날뛰는 당신 경호원들에…… 호모 경찰까지 등장했는데 이게 다요? 아니면 아직 또 뭐가 남았소?”

“로만 가든의 수석 요리장이 준비 중인 비장의 요리가 있으니까 기대하십시오. 절대 실망스럽지 않을 겁니다.”

몬티첼리의 유들유들한 대꾸에 마르첼로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로즈마리 도어가 벌컥 열렸다. 또 뭔가 싶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쏟아졌다. 대형 트레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온 건 10여 명의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었다.

갱 영화 같은 거 보면 이런 경우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자동 소총이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는 사실은 연방 수사관들이고…… 그렇던데, 혹시 그런 경우 아닐까 하는 무리한 희망을 잠시 가져봤다. 하지만 레빈이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들어 올린 은제 덮개 속에는 품위 있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 접시가 얌전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콘웨이 요양소 식사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메뉴가 너무 단조로웠거든요. 오늘의 환대는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니콜라스가 와인 잔을 들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파티가 끝나고 경찰에 인계될 때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겠소.”

몬티첼리가 잔을 마주 들면서 대답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본인도 구태여 감추려하지 않았으니까…… 몬티첼리는 니콜라스가 마음에 쏙 들었던 거다.

웨이터들이 부지런히 접시를 테이블에 나르는 사이 사방에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볼멘 불평이 터져 나왔다. 노릇하게 구운 특상품 안심에 연한 갈색 소스가 깔끔하게 얹혀 있는 메인 코스는 겉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스테이크였지만 그 냄새만으로 목이 맵고 눈이 아릿했다.

이른 바 루셀로 씨의 비장의 요리라는 건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바다 스테이크’ 정도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부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시위 현장에 최루탄 대신 이거 한 접시 던지면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와중에도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지 별 생각 없이 고기를 한 입 썰어 먹은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벌떡 벌떡 일어섰다.

뜨거운 입김은 내뿜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사람도 있었고 빵을 한입 가득 넣고 질겅질겅 씹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부인은 아예 엉엉 울고 있었다. 그 외에 크게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지만 홀 안은 소리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몬티첼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상황을 모른 척하고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저 만족스런 표정을 보니 루셀로처럼 미각이 상해 아무 맛도 모르든지 아니면 주방에 손을 써서 자기 요리는 따로 만들었든지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 어떻게 비니 같은 놈한테 저런 작은아버지가 있을까?

“요양소 음식은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지. 사실 지겨웠어.”

니콜라스가 요리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듯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하…… 하는 탄식 비슷한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왜 저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무런 가책이나 후회가 없는 걸까? 차라리 저자가 치료 불가능한 광인이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내가 미워?”

니콜라스가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며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스테이크용 나이프에 불과했지만 니콜라스가 칼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발렌타인을 돌아보니 그는 속이 안 좋은지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계속 느껴왔던 거지만 많이 아픈 모양인데…… 이 상황에서 믿을 사람이 저런 환자밖에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많이 불편한가? 발렌타인?”

니콜라스가 발렌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상한 일이다. 저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알까?

“칠리 냄새만 맡아도 속이 따끔거리는군요. 헤슬렘 씨.”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을 손끝으로 문질러 닦으며 발렌타인이 대꾸했다.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알긴 알아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니콜라스가 발렌타인에게 한 눈 파는 사이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소매 속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그러다 몬티첼리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그러니까…… 들고 있던 총도 빼앗긴 놈이 고작 스테이크용 나이프로 뭘 하겠느냐는 의미였다. 레빈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네가 이런 데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잘 지냅니다.”

“뭐 특별히 하는 일이라도?”

니콜라스가 스테이크를 크게 썰어서 한 입 밀어 넣으며 물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요. 소소한 무기 중계도 하고 애들한테 총 잡는 법도 가르치고…… 가격만 맞으면 살인도 합니다.”

순간 니콜라스가 컥…… 하고 기침을 했다. 발렌타인의 대답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역시 스테이크가 너무 매웠나?

“정말?”

니콜라스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면서 반문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파서 그런 건지 발렌타인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참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얼른 당신 볼일이나 보고 꺼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자다가 불려나왔단 말입니다.”

“자네가 사람을 죽인단 말이야? 그것도…… 돈을 받고?”

니콜라스를 노려보는 발렌타인의 시선이 복잡했다. 화가 나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 외에 또 뭔가가 있었다.

“사이몬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니콜라스와 발렌타인이 잠시 침묵 속에 서로를 주시하는 사이에 궁금한 거 못 참는 몬티첼리가 끼어들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군요.”

니콜라스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대꾸했다. 그리고는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스테이크 한 조각을 다시 입안에 넣고 씹었다. 발렌타인의 직업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하루 두 끼 식사를 시리얼과 손에 걸리는 패스트푸드로 대충 때우는 경찰관 기준으로 봤을 때는 상당한 미식가였다. 게다가 쳐다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스테이크는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전기 충격 같은 걸 세게 받으면 입맛도 바뀌나 싶어 의아한데, 니콜라스가 갑자기 옆에 놓인 물 컵을 움켜쥐었다. 찬물 한 잔을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키고도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데 그 모양이 꼭 불 뿜는 용 같았다.

“요리사가 누구라고?”

니콜라스가 혀를 길게 빼 물고 레빈에게 물었다.

“주세빼 루셀로 씨라고…… 칠리소스의 명인이죠. 물을 더 드릴까요?”

레빈이 트레이 아래쪽 선반에서 물 주전자를 꺼내 들었다. 가만히 보니 준비해온 주전자가 여섯 개였다. 니콜라스가 혀를 물고 헉헉거리면서 물 잔을 내밀자 레빈이 잔 가득 넘치게 얼음물을 따라줬다.

“고맙네.”

“뭘요.”

레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몬티첼리 옆에 앉은 여자가 훌쩍거리면서 내민 물 잔을 채우기 위해 돌아섰다. 그 태도는 어디까지나 예의 바르고 책임감 강한 집사의 그것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덧붙인 말 한마디 때문에 레빈은 아름다운 여자의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에 얼음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칠리소스의 명인인 루셀로 씨를 좀 불러주겠나?”

영문 모르고 불려 들어온 루셀로가 홀에 한 발짝 들여 놓으려다가 멈칫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몬티첼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루셀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스는 잔뜩 긴장해서 주저주저 다가온 루셀로에게 그렇게 위협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한번 가 보게.”

“하지만 저는 아픈 데가 없는데요?”

루셀로가 기분 잡쳤다는 얼굴로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사실, 니콜라스 같은 사람한테서 충고를 듣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아픈 데가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들이 얘기해주겠지.”

60인분의 요리를 만들어내느라 피곤해서 신경이 곤두선 데다 본인 생각에는 얼토당토않은 작자로부터 들은 잔소리 때문에 자존심까지 상한 루셀로가 겁도 없이 니콜라스 면전에 대고 콧방귀를 풍…… 날렸다.

“사실…… 당장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바로 선생 아니신가요?”

니콜라스가 바구니에 놓인 밀 빵을 뜯어서 입안에 밀어 넣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꼭 어딜 크게 다쳐야 병원에 갈 마음이 생기겠다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

니콜라스는 가끔 사람을 음습하게 노려볼 때가 있었다. 화가 났다거나 위협할 마음이 있을 때만 그런 건 아닌데,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한기가 느껴지곤 했다. 니콜라스의 그런 시선과 마주치자 루셀로가 당황해서 뒷걸음을 쳤다.

루셀로가 몬티첼리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얘기를 홀린 듯 듣고 있던 몬티첼리가 문득 정신이 돌아온 듯 험험…… 헛기침을 했다.

“헤슬렘 씨 말대로 하게, 주세빼. 내일 일찍 병원에 가 봐.”

“하지만 식당은 어쩌고요? 제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형님도 가게보다는 자네 건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 거야. 형님하고 자네는 오랜 동업자가 아닌가?”

몬티첼리가 한껏 부드러운 얼굴로 루셀로를 달랬다.

“정말 제 요리가 그렇게 형편없습니까?”

루셀로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몬티첼리에게 따졌다. 몬티첼리가 약간 움찔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주 만족스러워.”

순간 사방에서 불만 가득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마치 니콜라스보다 루셀로의 스테이크가 더 위협적이라는 투였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거 없어, 루셀로. 누가 뭐래도 자네는 최고의 요리사야. 하지만……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쁠 거 없잖아?”

루셀로는 몬티첼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대신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요리를 입에 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노골적인 불만의 얼굴도 있었고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각은 다 상했어도 장님은 아니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가는 루셀로의 뒷모습이 너무 작아 보여서 내 처지도 잠시 잊은 채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지하실에 로마뉴콩테 남은 거 있나?”

루셀로가 방을 나가자 몬티첼리가 레빈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분위기가 꽤나 진지했다. 로마뉴콩테가 뭘까? 신형 무기 이름인가?

“몇 병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요?”

술 이름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을 가진 더럽게 비싼 와인이 있다는 소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다.

“한 병 가지고 와.”

몬티첼리의 지시에 레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건…….”

“내 술이야!”

내 술 내가 먹겠다는데 무슨 잔소리냐는 위엄 어린 태도에 레빈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섰다.

“불청객을 이렇게까지 환대해주시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와인 좋아하는 니콜라스가 로마뉴콩테라는 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얼굴로 몬티첼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몬티첼리가 한껏 으스대며 인사를 받았다.

“죄질이 나쁠수록 대접이 좋아지는 게 내 집 불문율이외다.”

몬티첼리는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뜻밖의 불청객으로 인해 그간 골머리를 앓아온 내부 경쟁자가 깨끗이 제거된 데다 큰 형님 식당의 오랜 갈등까지 해결됐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몬티첼리는 유명한 영화배우를 만난 초등학생처럼 호감 가득한 얼굴로 니콜라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요양소 화재 건은 어떻게 된 거요? 정말 그 여의사랑 공모해서 불을 지르고 도망 나온 겁니까? 그 다음에 여자를 해치우고…….”

직설적인 몬티첼리의 질문에 니콜라스는 곤란해 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니콜라스가 빵 조각을 뜯어서 우물우물 씹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베긴 박사 소식은 신문에서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몬티첼리가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빤한 거짓말은 집어 치웁시다, 헤슬렘 씨. 일이 성사된 후에 공모자를 해치우는 정도야 굳이 숨길 만큼 엽기적이거나 비열한 짓도 아니잖소?”

니콜라스가 몬티첼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노려본 것도 아닌데 시선이 마주치자 들뜬 기분이 가라앉는지 몬티첼리가 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박사의 집에 갔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아파트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살아 있었어요.”

뜻밖의 주장에 만찬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니콜라스에게 집중되었다.

“병원에 불을 지른 게 당신 짓이 아니란 거야?”

내가 물었다. 나도 모르게…….

“베긴 박사를 죽인 게 당신이 아니라고?”

“그날 밤 병원에는 손님들이 왔었어. 상당히 거칠고 무례한 자들이었지.”

믿을 수 없다. 요양소 화재 사건에 외부 침입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콘웨이 요양소가 잿더미로 변한 덕에 제 세상 만난 건 니콜라스뿐이다.

“거짓말…….”

“멀리서 바라본 요양소는 한바탕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 같았지. 마침 세상은 물안개에 푹 젖어 있었고……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만든 건 바로 너였어.”

얘기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당황스러운데 니콜라스는 흐뭇한 옛 기억을 되살리는 노인처럼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우연이 또 있을까? 난 사실 처음부터 보고 있었어. 너랑 그 이탈리아 친구가 편의점에 든 강도 때문에 분투하던 모습은 오래 못 잊을 거야. 특히나 떨어져 내린 간판에 깔린 강도를 사람들이 들어내고 난 후의 니 표정은…….”

사람들은 편의점 강도사건을 모른다. 그날 밤엔 다른 큰 사건이 많았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넌 여전히 경찰이고 여전히 선량하고, 여전히 아름답더구나. 감동적이었어.”

저렇게 낯 뜨거운 소리를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니콜라스와 세트로 묶어서 엄한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런 판에 뭇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아름답다는 둥, 감동적이라는 둥 하는 소릴 지껄여 대면 내 입장만 더 곤란하다. 경찰은 더럽게 보수적인 집단이다.

“대체 당신 속셈이 뭐야?”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재미있는지 니콜라스가 실없이 웃었다.

“속셈이라니?”

“여긴 뭐 하러 왔어?”

버럭 소릴 지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발렌타인이 번개같이 총을 뽑아서 내 심장을 겨눴다. 발렌타인은 누구 편도 안 들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할 모양이었다. 발렌타인은 내 편을 들어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나를 죽일 마땅한 핑계를 못 찾아서 여태 두고 본 거지, 건수만 잡으면 가차 없이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보내버릴 터였다.

내가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자 니콜라스가 이상한 소릴 했다.

“시간을 담은 병은 어쨌니?”

“……뭐?”

금시초문이다. 시간을 담은 병이라니…… 시계를 말하는 건가? 얼핏 생각나는 건 니콜라스가 선물로 사준 시계뿐이었다. 그거라면…….

“버렸어.”

순간, 니콜라스의 표정이 굳었다.

돈 많은 바람둥이란 본래부터가 남한테 이것저것 사주기를 즐기는 사람들인지 니콜라스는 만날 때마다 내게 뭔가를 선물로 주곤 했다. 부자 친구를 만난 빈곤층 백수가 그런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라는 쥬드의 지시 때문에 주는 대로 다 받아 챙기기는 했지만 받을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난감했었다.

선물은 종류도 다양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전시회라든지 공연 같은 문화행사에 같이 다닌 적이 많아서 선물도 주로 그와 관계된 것들이었는데 유명한 화가의 판화 한정판이 가장 비싼 선물이었고 세계 마스크 전시회라는 곳에서 발견한 동남아시아 도깨비 가면이 제일 값싼 선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선물들 중에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은 별로 없었다.

“어디다 버렸어?”

니콜라스가 엄숙한 얼굴로 추궁했다. 그 모양을 보니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서 이제 곧 넘칠 것만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산산조각 나서 시립 쓰레기장 어딘가에 묻혀 있지 않겠어?”

지금 니콜라스가 애타게 찾고 있는 시계는 꽤 고가품이라는 걸 빼고는 특이한 것도 없는 그냥 시계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서부 저수지에 같이 밤낚시 하러 갔다가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서 못쓰게 된 시계 대신 받은 건데, 쥬드 말로는 100년에 2, 3초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명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수백 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보면 100년에 3초 밖에 안 틀리는 시계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 빌어먹을 시계를 버렸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멀쩡한 걸 벽돌에 묶어서 강에 던져버렸다거나 도로에 던져놓고 차로 밀어버린 건 아니었다. 근무 복귀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노상강도와 실랑이 끝에 풀어져서 바닥에 떨어진 걸 비니가 야무지게 밟아서 영 못쓰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멀쩡한 물건을 버리기도 뭣해서 그냥 차고 다니긴 했지만, 그놈의 시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던 참에 그렇게라도 해결이 나서 홀가분하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아무래도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게 쉽게 깨지는 물건이 아니야. 제이.”

안됐지만 아무리 튼튼한 물건이라도 비니한테 제대로 걸리면 별 수 없다.

“그걸 찾으러 내 집에 왔었던 거야?”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니콜라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믿을 수가 없다. 니콜라스는 병원에서 탈출하자마자 내 집에 왔었고, 거기서 허탕을 치자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수사관을 둘이나 죽였다. 게다가 파티 초대장을 얻으려고 에드가 해치를 죽였다고 자기 입으로 떠들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옛날에 사준 시계 타령이라니…… 좀 전까지 느껴졌던 숨 막힐 것 같던 불안감이 삽시간에 분노로 바뀌었고,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니콜라스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내가 휘두른 스테이크 나이프에 니콜라스의 소맷자락이 날아갔다. 나이프가 제대로만 들어갔으면 동맥이 끊어져서 피가 솟구쳤을 텐데, 뱀 같은 자식! 무방비 상태로 그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몸놀림이 빈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민첩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니콜라스의 몸통 깊숙이 나이프를 찔러 들어갔지만 놈은 이미 자세를 가다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날이 놈의 옆구리를 미끄러지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니콜라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없다는 체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니콜라스가 몸을 틀어 칼날을 피한 것과 거의 동시에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쥔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차가운 금속성의 울림을 남겼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죽여버릴 수 있을까?

절망적인 심정으로 니콜라스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콧잔등을 정통으로 받친 니콜라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코뼈라도 부러진 걸까?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벌건 피가 흘렀다. 작정하고 덤빌 때는 귀신같이 피하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찬스였다. 잡히는 대로 옆에 놓인 의자를 들어서 니콜라스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제법 묵직한 의자의 나무다리가 부러져 나가고 니콜라스가 고개를 꺾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대 더 갈기려고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드는 데 누군가가 뒤에서 의자 다리를 붙들었다.

“무슨 짓이야? 때려죽일 셈이야?”

몬티첼리였다. 몬티첼리가 의자 다리를 붙들고 놓질 않았다. 이 작자는 대체 뭣에 씌었기에 니콜라스를 이렇게 싸고도는 건지 모르겠다.

“이거 놔요!!”

이건 명백한 공무집행방해다. 내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에게 구조를 청했다.

“사이몬! 뭘 보고만 서 있는 거야? 좀 말려!”

하지만 발렌타인은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짧게 휘파람을 한 마디 불어 올렸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냥 두시죠. 처지가 아무리 우스워졌어도 의자에 맞아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는 사이 니콜라스가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마음은 조급한데 몬티첼리가 의자를 붙들고 고집을 피웠다. 정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의자를 몬티첼리에게 던져주고 테이블 한가운데 놓여 있던 총을 집어서 니콜라스의 밉살스런 머리통을 조준했다.

“자네가 내 파티를 다 망쳐 놓는군.”

몬티첼리가 니콜라스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면서 투덜거렸다. 여태 잘 참고 앉아 있던 부인들이 투덜거리면서 핸드백을 챙겨 들고 어서 가자고 남편들을 재촉하고 있으니 파티가 파장은 파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되는지 잘 봐뒀다가 두고두고 얘깃거리 궁할 때마다 써먹을 생각인지 눈을 반짝이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게 내 탓인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긴……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헤슬렘 씨.”

몬티첼리가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니콜라스에게 건네면서 혀를 찼다.

“근 3년 만에 만난 옛 애인한테 지난번에 내가 사준 다이아 반지 어쨌냐고 따지고 다녔으면 난 옛날에 총 맞아 죽었을 거요.”

“그 말은 명심해두죠. 돈 몬티첼리.”

니콜라스가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대강 닦더니 나를 쳐다봤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 정말이야.”

성질나서 총을 고쳐 잡자 몬티첼리가 얼른 앞을 막아섰다.

손님들의 반 정도가 홀을 빠져 나갔을 즈음 레빈이 와인 한 병을 신주단지처럼 끌어안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앞뒤 정황을 알 리는 없지만 레빈은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만족스런 눈치였다. 히죽 웃다가 몬티첼리와 눈이 마주치자 레빈이 얼른 입 꼬리를 내렸다.

“이건 도로 갖다놔야겠군요.”

레빈이 몬티첼리에게 와인 병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이리 내!”

몬티첼리가 품에 안은 아기 빼앗듯 레빈에게서 와인 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내 1년 연봉에 위험수당을 합한 것보다 더 비싸다는 그 술을 잔 두 개에 가득 붓더니 한 잔을 니콜라스에게 내밀었다.

“우리 친구 에드가 해치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한 잔 합시다.”

니콜라스가 나를 쳐다봤다. 마치…… 받아도 돼?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곤 헛수작 하지 말라고 쏘아 붙일 틈도 없이 대뜸 잔을 받아들었다.

“나는 사실 해치하고 당신이 좋은 친구 사인 줄 알았거든요.”

“이제 죽었으니까 그랬다고 칩시다.”

몬티첼리가 니콜라스와 잔을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얼마나 서운한지 잘 모를 거요, 헤슬렘 씨.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동업자나.”

“그게 좋은 생각일까요? 내 친구나 당신 동업자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많은데요.”

니콜라스가 와인 잔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그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하…… 하고 작은 탄성을 토해냈다. 그 태연자약함에 부아가 치밀어서 총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연히 시간 끌 생각 하지 마.”

“서두를 거 뭐 있니? 어차피 금방 끝날 텐데…….”

니콜라스가 내 총구에 대고 잔을 틱…… 부딪혔다. 하마터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버릴 뻔했다. 화가 나서 눈알이 튀어 나올 지경인데 레빈이 병에 남은 술을 한잔 더 따라서 내 쪽으로 가지고 왔다.

“형사님도 한잔 하세요.”

레빈도 알고 보면 참 엉뚱한 사람이다.

“근무 중에는 안 마셔요.”

“한 잔이야 뭐 어떻겠습니까? 보통은 맛보기 힘든 술입니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거든요.”

“말은 고맙지만 저 자식을 서까지 연행하기 전에는 한 방울도 곤란해요.”

“형사님께서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레빈이 미소를 지었다.

“밖에 칸 반장이 와 있거든요.”

몬티첼리가 와인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콜록거렸다. 칸 반장이란 소리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 아귀 같은 할망구가 여긴 왜?”

“주인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 5분 안에 헤슬렘을 내보내지 않으면 밀고 들어오겠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한 손으로 레빈이 내게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단숨에 한잔을 쭉 들이켰는데…… 별 맛도 없다. 왜 어떤 사람들은 고작 포도주 따위를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어쨌거나 칸 반장이 5분이라고 말했다면 그건 말 그대로 5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길고 긴 만찬이 이제야 끝날 모양이었다.

“그 물귀신 같은 여편네가 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몬티첼리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누가 신고를 했겠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요.”

레빈이 몬티첼리의 의심스런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대답했다.

니콜라스는 잔을 비우고 순순히 일어섰다. 두 손으로 총을 잡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시 걸음을 멈춘 내 귓가에도 작고 불길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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