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64화 (364/366)
  • 외전 26화

    ―휘이이잉.

    몸이 떨어지자 바람이 빠르게 불어 지의의 고막을 때렸다.

    ‘생각보다 많이 높네.’

    지의는 밑을 흘긋 본 후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녹두를 소환할 준비를 했다.

    ―퍼버벙!

    그때 난간 밖으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다. 불꽃은 지의를 향해 유성처럼 떨어졌고 곧 지의의 시야에 민이 잡혔다.

    ―쿵.

    “윽.”

    지의가 슬레이트 지붕에 처박히기 직전, 민이 그의 멱살을 낚아채다시피 잡곤 품으로 끌어왔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긴 건지 민의 쇄골에 코를 부딪친 지의가 억눌린 신음을 냈다.

    지의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민이 한껏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 미쳤어?”

    “…뭐 생각난 거 없어요?”

    “생각난 게 있긴 뭐가 있…….”

    그때 민이 멈칫했다. 지의를 끌어안은 팔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폭발과 열기, 몬스터의 비명, 그리고 품속의 지의. 모든 게 갑자기 익숙하게 느껴져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또 눈앞에서 누군가 죽을 뻔했어.’

    카멜레온의 발톱으로 일그러진 차와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여전히 민의 눈에 선했다.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고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렸다.

    ―툭.

    지의의 손이 민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민이 화들짝 놀라며 지의를 흘긋 내려다보았고,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

    “최민 헌터한테 상처만 준 것 같네요.”

    지의 역시 창백해진 민의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지금의 민은 가족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란 걸 간과했다.

    ‘또 다른 트라우마를 줄 뻔했어.’

    지의는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탁.

    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날아올라 다시 전투가 벌어졌던 옥상에 가볍게 착지했다.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침묵은 옥상에 버려진 화물 트럭보다도 무거웠다.

    “가요. 보스전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미안한 마음에 지의는 말을 줄였고 먼저 자리를 떴다.

    ―쿵, 쿵.

    민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지의의 뒷모습을 보며 또 다시 기시감이 들었다. 갑자기 지의가 난간에서 떨어졌을 때 느낀 것보다 더 큰 불안이 그의 심장을 마구 움켜쥐었다.

    “약속할게요. 절대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게요.”

    지의의 음성이 민의 귓가에 맴돌자 지의가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스락.

    결국 민이 아이테르의 로브 끝을 잡았다. 갑자기 옷이 당겨진 지의가 뒤로 휘청거렸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민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지마.”

    “…네?”

    “먼저 가지 말라고. 같이 걸어.”

    명령조로 이야기하는 민에 지의는 한참 눈을 끔벅거렸다.

    ‘기억이 돌아오는 과정이면 좋겠는데…….’

    ―타닥.

    그렇게 생각하며 지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민의 옆에 섰다. 발끝을 민의 것과 딱 맞춘 후 다시 그를 올려다보자 되려 민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제 됐죠? 얼른 가요.”

    “…….”

    민은 자신이 애 취급 받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조금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것을 자초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옷도 놔 주세요.”

    “아, 그, 그래…….”

    민이 아이테르의 로브에서 재빠르게 손을 떼곤 뒷짐을 져 손을 숨겼다. 무심코 한 행동에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탁, 탁.

    두 사람은 말 없이 계단을 오르기만 했다. 다시 생각해도 유치한 대화였기에 어느 한 사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원래의 최민 헌터가 보고 싶어.’

    지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민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믿음직하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다정한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날 서 있는 민은 모든 시간선을 통틀어 처음이었기에 괴리감이 상당했다.

    침묵 속에서 보스 소환 장소에 다다랐다. 지의는 자아의 충전 상태를 확인하며 게이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까 중간 보스 몬스터랑 비슷해요. 파괴력이랑 방어력이 조금 더 강한 정도니까, 빨리 해치우고 나가죠.”

    “그래.”

    민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렴풋이 지의가 자신을 서서히 포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서였다.

    ‘나도 답답해 죽겠다고.’

    민은 서운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겨우 삼켰다. 자신의 무기인 프라타파나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쿵.

    ‘뭐지?!’

    그때 민이 심상치 않은 가슴 통증을 느꼈다. 창에 찔린 것 같은 강렬한 통증에 몸이 절로 구부러졌고, 눈앞이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텁.

    미처 민을 발견하지 못한 지의가 게이트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게이트 뒤에서 보스 몬스터, ‘늙은 예술가’가 천천히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물감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전투 준비 하… 최민 헌터!”

    “관광객들이 너무 많군…….”

    ―콰과광!!

    지의가 쓰러진 민을 발견함과 동시에 '늙은 예술가'도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바닥에 뿌려진 붉은 액체가 용암처럼 치솟자 민과 지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우우우―!”

    ―쾅!

    녹두가 긴 울음 소리를 내며 민을 물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의가 공기를 진동시켜 붉은 페인트 기둥을 무너트렸고, 페인트 기둥은 작은 물방울로 분해돼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우웅, 우웅.

    지의는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녹두를 향해 달려갔다. ‘늙은 예술가’가 그런 지의의 급소를 노리려 붓을 휘둘렀지만, 그의 그림은 새하얀 음파에 닿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민 헌터, 정신 차려 봐요!”

    지의가 녹두에게로 다가가자 녀석의 등 위에 힘없이 쓰러진 민이 보였다. 민이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지의는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댔다.

    ‘처음 쇼크 왔을 때랑 비슷해……!’

    민의 몸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또 다시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안, 가면…….”

    “최민 헌터, 제 말 들려요?”

    민은 힘겹게 눈을 떠 지의를 바라보았다. 구겨진 미간과 크게 뜬 눈에서 지의가 얼마나 놀랐는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은 곧 기시감이 되어 또 다시 민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왜 나를 구하러 오는 당신 모습이 익숙한 걸까.’

    ―텁.

    민이 지의의 소매를 잡았다. 지의가 놀란 눈으로 민을 응시했다. 올곧은 밤색의 눈이 반짝거렸다.

    ‘왜 당신의 등을 보면 영영 볼 수 없을 곳으로 갈 것 같은 불안이 들었던 걸까.’

    민의 의식은 어떤 의문점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멀어져 버렸다.

    * * *

    “허억……!”

    민이 눈을 떴다. 폐부에 갑자기 산소가 들어차 헛기침을 몇 번이고 토해 내야만 했다. 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민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이 불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이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민이 손으로 바닥을 쓸자 손이 움직인 경로를 따라 불꽃이 살짝 튀겼지만, 그의 손엔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다.

    ‘이건 아무래도 내 스킬 같은데.’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킬을 썼나 싶어 방공호를 해제해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민은 결국 걷기를 택했다.

    ―당신은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그때 지의의 음성으로 처음 듣는 문장이 울려 퍼졌다. 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지의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절대로 희생 안 해요. 이번엔 절대로 안 죽을 거예요.

    ―이번엔 제가 최민 헌터를 구해줄게요.

    지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전신이 진동했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그의 호흡까지 흐트러질 정도였다.

    ―이제 그 죄책감은 내려놓으세요.

    “헉……!”

    또다시 지의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도대체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

    “네가 뭐길래 대체…….”

    ―쿵, 쿵.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이 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욱신거릴수록 머릿속에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그저 동료였을까?’

    운명이라는 유치한 단어가 문득 민의 뇌리를 스쳤다. 동료보다 더 강한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서로가 필요하지 않았나?”

    지의의 뒷모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지의를 구하는 자신과 불꽃을 헤치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지의의 환영이 보이자 민은 한 번 더 크게 소리쳤다.

    “난 네 몸을 구했고, 넌 내 영혼을 구했어. 맞지?”

    “…….”

    “그래, 그러니까 우린 서로의…….”

    ―쩌저적.

    민을 둘러싼 공간에 커다란 금이 갔다. 틈새로 새하얀 빛이 들어오자 민의 머릿속에 졌던 안개도 서서히 걷혔다.

    “구원자였구나.”

    ―쨍그랑!

    [상태 이상 ‘프로메테우스의 열병’ 해제]

    [이식자의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민의 눈앞에 상태창이 뜨는 동시에 불의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중력에서 벗어난 민의 몸이 둥실 떠오르자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만나고 싶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민이 헤엄치듯 허공을 손으로 헤집자 곧 손가락 끝에 무언가 닿았고, 그는 한 번 더 발을 굴러 그쪽으로 날아갔다.

    ―탁!

    민이 누군가의 손을 움켜쥐자마자 순식간에 시야가 돌아왔다.

    “깨, 깼어요?”

    민은 한참 달린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이 보스 소환 장소에 대자로 누워 있고, 녹두의 배리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깜짝 놀랐네…….’

    지의가 손을 슬그머니 빼며 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혼란스럽지만 차분한 옆얼굴을 보며 말문을 텄다.

    “보스 몬스터는 아까 해치웠고, 최민 헌터가 쓰러진 지는 20분 정도 지났…….”

    “실례가 많았습니다. 신지의 헌터.”

    “어, 어?”

    사무적이면서도 정중한 말투가 지의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무심하게 말을 뱉던 지의가 숨을 들이켰고, 민은 머쓱한 듯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돌, 돌아온 거예요?”

    “네. 상태 이상으로 잠깐 기억이 도려내진 것 같더군요.”

    “하, 와, 하하…….”

    지의는 웃음이 섞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민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수 시간 동안 쌓였던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짜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

    “…염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픈 사람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지의는 그저 민이 원 상태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편하게 웃는 지의를 보던 민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신지의 헌터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왜요?”

    “신지의 헌터가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민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동안 신지의 헌터가 등을 돌리고 어딘가로 나아갈 때면, 그 끝엔 늘 당신의 죽음이 있었으니까요.”

    지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세빈 만큼은 아니었지만 민 역시 지의의 죽음을 너무나 자주 목격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느꼈을 허탈함과 상실감을 이해했다.

    ―텁.

    지의가 민의 어깨 위에 손을 얹자 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번엔 같이 걸었잖아요.”

    “…….”

    “저도, 다른 동료들도 아무도 안 죽었고.”

    민을 담은 밤색 눈동자가 자신감으로 반짝거렸다. 민은 그 눈에 매료된 양 멍하니 시선을 맞췄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동료들을 등지고 먼저 나아가지 않을 것이고, 최민 헌터를 두고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최민 헌터도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지의의 말을 듣고 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꼴사납다…….’

    동료로서 함께 해달라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버린 자신이 유치하다고 느껴졌다. 민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길게 쉬는 동안 지의는 눈만 깜박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텁.

    민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며 제 어깨에 얹힌 지의의 손 위로 제 것을 포갰다.

    “곁에 있겠습니다. 동료로서든, 뭐든.”

    그의 대답에 지의가 안심한 듯 웃었다. 포개어진 손 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평소보다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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