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49화 (349/366)
  • 외전 11화

    <승전가>

    ―지옥도 25일차, 미준.

    인천공항 활주로에 작은 비행기 하나가 착륙했다. 계단을 실은 트럭이 비행기로 다가가는 동안 미준이 헬리콥터에서 내려 비행기 쪽으로 향했다.

    ―끼익.

    비행기 문이 열리고 카렌과 이시카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같으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을 두 사람이었지만 센의 실종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진 상태였다.

    “와줘서 고마워, 카렌. 그리고 네네 공주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당신은 여전하네요.”

    “그게 낫지 않아? 이럴 때일수록 더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카렌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동안 미준은 그들을 헬리콥터 쪽으로 이끌었다. 세 사람이 전부 자리에 앉아 헤드폰을 쓰자 헬리콥터는 빠르게 강남 쪽으로 이동했다.

    미준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비행장 주위의 아파트가 배리어겔로 뒤덮인 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재앙이 장기화되면서 부식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무너질 일은 없어 보였다.

    S급 게이트 하나의 예상 피해 규모는 최소 하나의 구, 최대 도시 하나로 계산한다. 지금처럼 수십 개의 S급 게이트가 떨어진 상황에서 그 어떤 도시도 궤멸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대비가 철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게 미래를 안다고 되는 일인가?’

    미준은 이 상황을 대비한 지의를 떠올렸다. 단순히 미래를 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피해를 줄이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관리자용 헌터넷을 열었다. 아직도 지의의 위치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하아…….”

    “도착했습니다. 착륙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걱정할 틈도 없이 조종사가 미준을 향해 이야기했다. 헬리콥터가 게이트 옆 공터에 천천히 착륙하자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멈칫했다.

    “하미준 헌터!”

    “어어, 다들 수고했어요~ 여기 던전은 저랑 일본 헌터 협회 소속 헌터들이 공략할 예정이니까 여러분들은 여기서 대기를…….”

    ―쿵!

    미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가 빠져나왔다. 포항 S급 던전의 일반 몬스터인 거대한 화석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아스팔트를 순식간에 갈라놓았다.

    ―콰과광!!

    갈라진 아스팔트 틈으로 다시 화석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대열을 흐트러트린 화석은 주변의 빌딩을 부술 기세로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쳇!”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쾅!

    이시카와가 혀를 차며 헬리콥터 밖으로 몸을 던졌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화석과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동안 미준의 나무뿌리도 녀석을 쫓았다.

    “이야아압!”

    ―콰그작!

    결국 이시카와가 화석을 따라잡았다. 그는 가위를 던져 화석을 맞힌 후 곧바로 화물차로 모습을 바꿔 녀석을 짓눌렀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화석이 반으로 쪼개져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네네 쨩, 비켜 주세요!”

    “알겠다!”

    ―콰과과광!

    이시카와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며 뒤로 물러나자 카렌의 고유 스킬인 하시히메가 화석 바로 앞에 소환되었다. 하시히메는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화석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양손으로 화석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화석은 결국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 하시히메는 그제야 만족한 듯 모습을 감췄고 짧은 전투가 마무리됐다.

    “이 몸이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아하하하!”

    그러자 이시카와가 한껏 기고만장해진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헌터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저마다 이상한 눈으로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또각.

    미준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이시카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공주님이 다 잡았네. 이제 던전 안으로 에스코트해도 될까?”

    “고, 고, 공주라고 부른 것이냐, 지금? 이 몸은 마왕이다.”

    “아하하. 네네 양이 마왕이면 그 마왕에게 사로잡힌 내가 공주인가 봐.”

    미준이 싱긋 웃자 이시카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미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러자 미준은 이시카와의 손을 그러쥐며 게이트 쪽으로 천천히 이끌었다.

    “미나토 군이 없어서 다행이네…….”

    “카렌, 가자!”

    “네.”

    카렌은 미준에게 푹 빠진 이시카와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다 곧 그들의 뒤를 따랐다.

    ―타닥.

    포항 S급 던전의 내부는 길게 쭉 뻗은 해안길이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고, 바람에 실려 온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쾅, 쾅, 쾅

    평화로운 내부와 달리 몬스터들은 투박하고 과격하게 등장했다. 방금 전 부쉈던 화석 몬스터가 또다시 바다에서 굴러 나왔고 맹렬한 속도로 미준의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몸에게 맡겨라!”

    ―콰과광!

    이시카와가 태풍의 눈을 시전한 채로 화석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몸 주위에 생긴 강한 바람이 화석들을 밀어내며 녀석들의 중심을 흐트러트리자 카렌의 화살이 미친 듯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외피 때문에 한 번에 산산조각 나진 않았다. 카렌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후 이번엔 노멘을 시전했다.

    ―파바바박!

    가면을 쓴 수십 명의 카렌이 크로스 보우를 들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그동안 진짜 카렌은 화석 주위로 하시히메를 설치하며 녀석들이 함정에 걸리길 기다렸다.

    “카렌, 하시히메 어디에 설치했어?”

    “현재 화석 위치에서 동쪽으로 30m, 그 위치에서 후방으로 10m,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10m요.”

    “오케이.”

    ―콰그작!

    미준의 나무뿌리가 화석의 밑에서 솟구쳐 나왔다. 나무뿌리는 화석들을 휘감은 채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고 카렌이 알려준 위치로 화석을 던졌다.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자 하시히메가 튀어나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화석을 한 차례 공격했다. 화살보다는 공격이 깊게 들어갔다.

    ―쿵.

    나무뿌리가 화석들을 다시 잡아 이번엔 뒤로 던졌다. 또다시 하시히메의 영역에 들어온 화석은 똑같은 부위에 상처가 생겼고 상처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깟 돌덩어리 따위가 이 몸을 이길 순 없다!”

    ―쾅!!

    이번엔 이시카와의 공격이었다. 거센 바람으로 화석의 가장자리를 부수는 동시에 하시히메가 설치된 마지막 영역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잔뜩 성이 난 하시히메가 양손으로 화석을 짓이겼다.

    돌 부스러기가 바닥 위로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졌고, 부산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공격력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연계 공격이 나쁘지 않아.’

    카렌은 방금 전의 공격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준의 지시에 따라 게이트의 방향을 찾아갔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제거했다.

    그렇게 수십 시간을 쉬지도 않고 달려갔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었지만, 누구 하나 쉽게 쉬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쉰다면 사라진 동료들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묘한 불안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 욱…….”

    “카렌, 괜찮, 아?”

    “미준 씨야말로, 하아, 지친 것 같, 네요…….”

    미준이 숨을 몰아쉬며 카렌에게 묻자, 그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곧 보스전이니까 한 번은 쉬어야겠군.’

    ―털썩.

    미준은 눈치를 보다 셔츠 소매를 걷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행동에 일부러 오기를 부리던 카렌이 두 눈을 크게 떴고 미준은 대자로 뻗은 채 대답했다.

    “하아, 맞아. 나 지쳤으니까 10분만 쉬었다 가자. 앞으로 한 시간만 더 가면 보스 나올 거야.”

    “좋은 생각이다, 카사노바 공주… 으윽.”

    이시카와는 바닥에 완전히 뻗어버린 채 숨을 고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력 회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얼마 안 있어 입 안에 퍼지는 떫은맛에 몸부림쳤다.

    카렌도 그 자리에 앉아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조차 삼키기 힘들 정도로 지친 상태라 그저 고개만 숙인 채로 심장만 가라앉히는 게 전부였다.

    ‘…반지 긁혔네.’

    카렌이 왼손 약지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멀쩡했지만, 반지의 몸체가 여기저기 긁히고 일그러져 있었다. 이 반지를 끼울 때만 해도 이런 재앙이 닥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카렌.”

    “…….”

    “거의 다 왔어. 지옥도인지 뭔지 하는 것도 곧 사라질 거야.”

    “당신의 그 타고난 여유가 가끔 좀 부러울 때가 있어요.”

    “칭찬 고마워.”

    미준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풀었다. 카렌도 그를 따라 전신의 근육을 쭉쭉 늘렸다.

    “결혼식 전까지 모든 걸 마무리 할 거예요. 빨리 부부로 인정받고 싶거든요.”

    “포부 좋네~ 축의금만 보내도 되지?”

    “어머… 약혼자의 전 애인이 제 결혼식에 오는 걸 허락할 만큼 제가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야박하군.”

    ―철컥.

    카렌이 크로스 보우를 고쳐 끼우며 다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엎어져 있던 이시카와도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기를 들었다. 세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튀어 나갔다.

    * * *

    ―쾅, 쾅, 쾅!

    보스 몬스터 ‘상생의 손’과 하시히메의 손톱이 맞부딪혔다. 무게 차이 때문에 하시히메의 손톱은 녀석의 몸체에 살짝 생채기를 내곤 그대로 부러졌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챙

    이시카와가 가위를 쫙 벌린 채로 휘두르자 상생의 손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이시카와는 한껏 들뜬 얼굴로 미준을 내려다보았고 곧바로 크게 소리쳤다.

    “카사노바 공주, 보았느냐? 이 몸의 완벽한 크레센트 어택… 악!”

    “이런.”

    ―우드득.

    상생의 손에게 머리카락이 잡힌 이시카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미준의 나무뿌리와 카렌의 화살이 동시에 상생의 손을 맞췄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는지 여전히 이시카와는 커다란 손에 머리카락이 끼여 버렸다.

    “어쩔 수 없네… 네네 쨩, 머리카락 자를게!”

    “아, 안 된다! 으으, 이렇게 된 이상…”

    ―쏴아아아.

    이시카와가 쿠노이치로 자신을 모래로 바꾸었다. 모래알이 상생의 손 틈새로 우수수 떨어졌고 바닥에 쌓이자마자 다시 이시카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에퉤퉤! 으… 이래서 하기 싫었던 건데.”

    “우리 마왕님,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아. 머리카락이 잘려도 그 미모는 여전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알았지?”

    “흥, 고려하도록 하지.”

    이시카와는 히죽 웃으며 다시 상생의 손을 향해 튀어 올랐다.

    ‘이 기세면 두 시간 안에 끝낼 수도 있겠어.’

    미준이 시간을 대충 확인한 후 상생의 손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거대한 손이 위협적으로 공간을 헤집고 있었다.

    ―쾅!

    미준은 숨을 한 번 고르곤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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