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02화 (302/366)
  • 302화

    ―쿠구구궁.

    포탄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 잔디가 이리저리 헤집어져 경기장이 쑥대밭이 됐다. 흙먼지가 날려 시야가 잠깐 가려졌지만 기절해 있던 저격수가 어느새 일어나 바람 총알로 먼지를 걷었다.

    그러자 몸의 절반이 날아간 녀석들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녀석들은 아까처럼 우아하게 돌아보려 했지만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 위로 쓰러졌다.

    “끼야아아악!!”

    녀석들이 또다시 비명을 질렀고 연약한 팔을 들어 우리를 향해 손을 펼치려 했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틴 후 자아를 입가로 가져와 소리쳤다.

    “정신계 공격이 올 거예요! 다들 조심하세……!”

    ―파사삭.

    하지만 내 경고가 무색하게 녀석들의 팔이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흰색과 검은색, 두 상반된 색깔의 물감이 한데 섞이더니 이내 잔디 위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경기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던 녀석들의 비명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해… 해치운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혹시 몰라서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도 살폈다. 다행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생각보단 간단하게 끝났군.’

    ‘파괴자의 의지―시간'이 워낙 까다로웠던 터라 이 녀석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다.

    이제 남은 건 불꽃과 바람 문양에 위치한 녀석들이다. 아직 헌터넷에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두 녀석을 직접 마주한 사람들이 없는 것 같…….

    ―우우웅.

    인벤토리에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기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미준 헌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후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신지의 헌터, 지금 바로 인왕산 쪽으로 이동해줘.

    “알겠어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파괴자의 의지, 두 녀석이 만났어.

    “…젠장.”

    무조건 막아야 했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꾹 누르며 녹두의 등 위에 올라탔다.

    “먼저 가 볼게요.”

    “아, 알겠습니다!”

    헌터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자 녹두가 금방 하늘 위로 올라가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반응하는 곳을 향해 턱짓하자 녀석은 나를 태운 채 빠르게 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동중이에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하필 서촌이랑 독립문 근처에 있던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발견됐어. 서로 가깝게 있는 걸 안 건지 눈앞의 헌터들은 공격하지 않고 인왕산 근처로 바로 이동했고.

    ―후우웅.

    하미준 헌터의 급한 목소리가 녹두에게까지 들렸는지, 녀석이 더욱 가속하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지금 전투 중인가요?”

    ―아니 아직. 두 개체가 합쳐지긴 했는데 새로운 게 만들어지진 않았어. 공격해도 안 통해.

    하미준 헌터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이번 차례에 소환된 던전들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야. 다음 파견팀 들여보내서 공략하는 동안 상급 헌터들이 이 몬스터를 처리하는 걸로 하자고.

    “알겠어요. 곧 갈게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녹두 덕분에 어느새 인왕산 근처에 도착했는지 주변 풍경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화르륵.

    그때 무언가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산 중턱에 거대한 불타는 집이 떠올라 있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일렁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오른쪽 눈을 감았다.

    [‘파괴자의 의지―감성’]

    [파괴자의 다섯 가지 의지 중 감성을 다루고자 하는 힘]

    [다섯 가지 의지 중 파괴력이 가장 높다]

    [‘파괴자의 의지―이성’]

    [파괴자의 다섯 가지 의지 중 이성을 다루고자 하는 힘]

    [다섯 가지 의지 중 회복력이 가장 높다]

    [*파괴자의 의지가 둘 이상 모이면 새로운 개체가 탄생한다*]

    [*파괴자의 의지 전체 소멸 시 지옥도 생산력 대폭 하락]

    합쳐진 두 녀석은 감성과 이성이었다. 파괴력과 회복력이 높은 두 개체가 모여 탄생하게 될 미지의 존재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지면과 가까워졌을 때 녹두의 등에서 뛰어내렸고 헌터들이 모인 산책로 주위로 다가갔다.

    “지의야!”

    “아, 세빈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리의 한가운데 있던 세빈이가 내 이름을 부르자 거기에 있던 모든 헌터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쳐 보이네.’

    세빈이는 가볍게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전투 때문에 부쩍 수척해졌다. 기력 회복제로 온갖 체력이란 체력은 다 끌어모은 상태일 것이다. 빨리 눈앞의 저 녀석을 해치우고 한 시간이라도 휴식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일단 S급은 너랑 나, 그리고 최민 헌터뿐이야. 서울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서 민지호 헌터도 이쪽으로 복귀할 거라고 했어.”

    “…저 녀석들이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말이지.”

    하늘에 뜬 집을 보며 중얼거리자 세빈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내게 조용히 말을 전했다.

    “김강희 위치 파악했어.”

    “헙.”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자 세빈이가 미동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미준 헌터가 부탁했거든. 경복궁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 달라고.”

    “……….”

    “가장 안쪽, 향원정에 있었어.”

    “특별한 점은?”

    “ …부서지고 있다는 것 정도?”

    ‘부서진다고?'

    세빈이의 표현이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반가운 소식이긴 했다. 그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차도윤 헌터가 뿌린 미끼를 잡기도 쉬울 것이고 그럼 그를 제압하는 것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겠지.

    ―타닥.

    머릿속으로 대충 생각을 정리할 때쯤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최민 헌터.”

    세빈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최민 헌터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옆으로 다가왔다. 그도 아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지친 기색을 보였다.

    ―치지직

    그때 눈앞에 붉은 노이즈가 생기더니 곧 글자가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성은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이성은 감성을 억제합니다.]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려 합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공중에서 활활 타고 있는 집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헌터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치지직.

    전투의 시작을 알리듯 집의 가장 위에 녀석의 이름이 나타났다.

    [욕망과 절제]

    [현재 체력 : 1,000,000]

    “배, 백만……!”

    “괜찮은 거야?!”

    “저 정도로 높은 체력은 경계에서도 본 적 없어!”

    헌터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이 말한 대로 경계에서 보기 힘든 체력이긴 하다. 하지만 난 저 미지의 존재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창조자의 파편에 있는 보스 몬스터 같아.’

    기하급수적으로 높은 체력과 범상치 않은 문장으로 가득한 상태창. ‘욕망과 절제’는 그동안 내가 만나온 창조자의 파편과 많이 닮아 있었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도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지 크게 동요하지 않고 그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

    창조자의 파편을 떠올리다 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머릿속 퍼즐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창조자의 파편은 창조자의 힘을 나눠 놓은 일종의 재앙의 씨앗이면, 파괴자의 의지 역시 '파괴자'라고 하는 존재의 힘이 개입한 결과일 것이다. 창조자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파괴자, 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김강희, 그 자식이 파괴자다.

    창조자의 파편이 전부 사라져 지옥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자신의 힘을 보태서 이런 몬스터들을 세상에 뿌린 것이다.

    ‘애초에 게이트 폭발 때 처음 만났던 히든 몬스터도, 이걸 위한 연습이었던 거야.’

    어떻게든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있지도 않은 몬스터를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까득.

    앞뒤가 맞아들어가자 분노에 이가 갈렸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 손이 덜덜 떨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아이테르의 로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신지의 헌터.”

    그러자 최민 헌터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 얼굴을 살폈다. 내 변화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다시 고개를 들어 욕망과 절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뿐이었다.

    ―쾅!!

    그때 문에서 불꽃이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운석처럼 떨어졌다. 최민 헌터가 방공호를 펼쳐 그것을 막아내자 불꽃은 날아온 길 그대로 다시 튕겨 나오더니 이내 거대한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허공에 조심스레 엎드리더니 양손 위에 얼굴을 댄 채 우리를 구경하듯 내려다보았다.

    [욕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살육의 욕망이 끓어 넘칩니다.]

    [현재 체력 : 1,000,000]

    문장이 뜨자마자 ‘욕망’의 손가락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콰과광!

    그러자 엄청난 양의 운석이 인왕산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최민 헌터가 방공호를 펼치는 동시에 세빈이의 그림자가 녀석을 향했다. 검은 손들은 불로 된 몸을 휘감으며 녀석의 움직임을 꽉 묶어 놓았다.

    ―퍼버벙!

    바주카로 녀석을 조준한 채 발포하자 새하얀 소리 포탄이 보기 좋게 녀석의 몸에 박혔다. 하지만 ‘욕망’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갈 뿐이었다.

    [현재 체력 : 994,581]

    다행히 체력은 나쁘지 않게 닳았지만 녀석의 태연한 태도가 묘하게 찝찝했다.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녀석을 바라봤지만 과거의 ‘나’들이 그것의 정체를 파헤치느라 상태창은 이리저리 깨진 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신지의 헌터!”

    “헉!”

    ―펑!!

    오른쪽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최민 헌터가 경고를 해줬기에 망정이지 1초라도 늦었다면 이미 반신이 전부 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다시 원래대로 뜨고 자아를 더욱 꽉 쥐었다.

    [조■만 기■려 줘]

    [얼른 알■■ 볼■]

    ‘나’들이 급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이 정보를 찾는 동안 일단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여기서 그 누구도 죽도록 두지 않는 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