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49화 (249/366)
  • 249화

    찢어진 하늘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치이익.

    녀석의 눈물이 꽃밭 위로 떨어지자 용암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꽃이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부우욱!

    물감 묻은 커다란 손이 균열 사이로 불쑥 나타나더니, 그대로 양옆으로 벌려 우리를 둘러싼 풍경을 찢어 버렸다.

    그러자 꽃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술 도구가 나뒹구는 허름한 작업실로 변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린 녀석의 작업대 위에 서 있었고, 녀석이 직접 찢은 캔버스 역시 작업대 한켠에 박혀 있었다.

    “윽… 물감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군.”

    이시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움켜쥐었다. 그의 말대로 숨 쉴 때마다 나무 썩은 냄새와 이상한 약품 냄새가 폐부로 들어와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저것이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존재군요.”

    센이 검을 꺼내며 희생하는 화가를 바라보았다. 녀석도 미식가와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거인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미술관에서 볼 법한 석고상의 외형이라 그동안 봤던 녀석의 파편 중 가장 사람처럼 보이는 생김새였다.

    ‘진짜 사람 눈이 박힌 건 좀 소름 끼치네.’

    유일하게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녀석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쿵.

    녀석은 등받이가 없는 둥그런 의자에 주저앉아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완전히 좌절한 눈치였다.

    [희생하는 화가]

    [예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존재]

    [현재 체력 : 1,000,000]

    풀죽은 녀석의 머리 위로 시시한 설명이 떴다. 그림에 대한 의지를 잃은 건지 벽에 걸린 도구를 쥘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체력이 100만이라는 걸 제외하면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이, SS급. 공격할 거냐?”

    “잠깐만. 내가 한 발만 쏴 볼게.”

    하지만 아직 녀석에 대한 파악이 끝나기 전이다. 섣불리 모두가 공격을 나서기엔 우리가 모르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탕.

    녀석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탄환은 정확히 녀석의 관자놀이를 관통했고,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현재 체력 : 1,000,000]

    ―치지직.

    하지만 체력은 전혀 줄지 않았고, 머리에 뚫렸던 구멍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역시 다른 조건이 있나 보네.’

    다른 사람들과 시선을 공유한 후 이번엔 구원자의 눈동자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창조자의 파편―화가]

    [속성 없음]

    [완벽한 작품에 집착하는 존재]

    [특기 : 수채화, 추상화]

    [그는 오직 자신의 피사체에게만 마음을 연다.]

    [이상하게도, 그가 완성한 그림의 피사체들은 전부 사라졌다.]

    ‘피사체에게만 마음을 연다…….’

    ―쿵!

    그 문장을 곱씹어 보는데, 갑자기 희생하는 화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예술 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희생하는 화가는 영웅을 캔버스에 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다른 피사체를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쿵, 쿵.

    녀석이 작업실 한켠에 쌓여 있던 캔버스를 이젤에 올려놓고 어디선가 연필을 꺼내 캔버스 위로 손을 올렸다.

    [자신의 완벽한 피사체를 납치한 납치범들의 모습을 말이죠.]

    ―철컥.

    “뭐, 뭐야 이거?!”

    “이시카와!”

    그때 이시카와가 소리를 질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시카와가 그의 키에 딱 맞는 액자의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실체가 있는 액자는 아닌지, 이시카와가 가위를 들고 한 바퀴 돌아 액자를 치자 안개처럼 잠깐 형체가 흐트러지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콰과광!!

    그 액자에 관심을 가질 새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던 미술 도구들이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것이 전투의 신호탄이 되어 모두 빠르게 흩어졌다.

    [희생하는 화가는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그림의 구도를 잡으며 즐거워합니다.]

    희생하는 화가는 이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얄미워서 녀석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한 번 당긴 후 자아를 입가로 가져왔다.

    “일단 공격부터 해 볼게요! 소멸 조건은 천천히 알아보죠!”

    “알겠다!!”

    “알겠습니다.”

    ―콰과광!!

    이시카와가 바람을 몸에 두른 채 화가의 뒷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가위 날이 녀석의 목에 상처를 내자 뒤이어 태풍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현재 체력 : 982,793]

    녀석의 목 뒤에서 하얀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지는 동시에 체력이 닳았다는 상태창이 떴다. 일단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럼 이시카와 주위에 있는 저 액자는 뭐지?’

    이시카와의 행동에 제약을 주거나 공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지익.

    “큿……!”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날카롭게 갈린 연필이 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쓰라림에 잠깐 중심을 잃었지만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아서 ‘아이테르의 로브’의 치유 효과로 버틸 만했다.

    ―콰드득.

    녀석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검은 손 수십 개가 빠져나왔다. 그것은 녀석의 팔과 목을 옥죄더니 그대로 관절을 비틀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날아오는 나무 팔레트를 피해 고개를 숙인 후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녀석의 머리를 향해 겨눴다.

    ―퍼버벙!!

    새하얀 포탄이 녀석의 머리를 집어삼키자 주변에 있던 먼지가 피어올라 금세 녀석의 모습을 숨겼다.

    “흡!”

    ―콰과광!

    녀석의 위로 센의 광휘와 사와구치의 염풍이 휘몰아쳤다. 두 사람의 공격으로 먼지가 걷히자 엉망진창이 된 석고상이 보였다.

    ―끼기기긱.

    녀석은 몸이 반쯤 부서졌음에도 연필을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캔버스엔 누군가의 실루엣처럼 보이는 가벼운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희생하는 화가의 영감이 넘쳐납니다.]

    [가끔은 추악한 납치범들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체력 : 982,793]

    “체력이……!”

    “이시카와가 공격한 이후로 조금도 닳지 않았군요.”

    ―챙!

    센이 날아오는 브러시를 쳐낸 후 작업대 위에 있던 선반 위로 착지했다. 그림자 손이 다시 녀석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자 녀석의 몸은 언제 부서졌냐는 듯 금세 원상 복구가 되었다.

    “후후, 이런…….”

    이시카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더니 곧 안대 위로 손을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이 몸의 공격밖에 듣지 않는다니. 역시 내가 나설…….”

    “이시카와, 잠깐만.”

    “뭐?”

    ‘아무래도 수상해.’

    이시카와를 둘러싼 액자, 그리고 그런 이시카와의 공격만 통하는 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시카와의 공격만 통하는 페이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을 도저히 떨칠 수 없어 왼쪽 눈으로 녀석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는 오직 자신의 피사체에게만 마음을 연다.]

    [이상하게도, 그가 완성한 그림의 피사체들은 전부 사라졌다.]

    글자 너머로 보이는 녀석의 캔버스로 눈을 돌렸다.

    ―두근, 두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밑그림만 그려져 있던 녀석의 캔버스 위엔 어느새 가위를 들고 있는 이시카와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금방 결론이 났다.

    이시카와가 저 녀석의 피사체가 되었고, 저 그림이 완성되면 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세빈아! 저 몬스터 손부터 묶어줘!”

    “알겠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녀석이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최민 헌터는 저 캔버스를 방공호 안에 넣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쾅!

    내 말에 순식간에 녀석의 손은 그림자에 묶여 옴짝달싹 못 했고, 동시에 이젤은 방공호에 덮여 완전히 봉쇄되었다. 내 행동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다들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경청]

    내게 뭔가를 따지려던 사와구치도 몸을 움찔 떨며 곧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저 몬스터가 ‘납치범’을 그린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봤어요. 피사체 얘기도 있었죠.”

    센이 내 말에 동조했다.

    “센 씨를 제외한 저희 다섯 명은 모두 녀석의 피사체 후보예요. 녀석의 피사체가 되어 그림이 완성되면 죽거나 진짜로 그림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잠깐. 설마 지금 이시카와 주위에 있는 저 액자가……!”

    “…현재 피사체로 삼은 사람을 말해주는 거겠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사와구치 미나토’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큰 충격]

    사와구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시카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이시카와가 더 차분하네.’

    반면 이시카와는 침착했다. 이상한 대사나 포즈도 취하지 않고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희생하는 화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시카와 헌터가 피사체라면, 저 몬스터는 이시카와 헌터의 공격만 통하는 거겠네.”

    “응. 내 생각도 그래.”

    세빈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희생하는 화가를 보았다.

    ―끼기기긱.

    캔버스를 잃은 녀석은 자신의 몸을 옥죄는 그림자 손에 저항하며 새 캔버스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검은 손이 더 튀어나와 녀석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피사체는 아마 일정 시간마다 바뀔 거고, 피사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역할을 둘로 나눠야겠군요.”

    센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나는 피사체가 공격을 잘 넣을 수 있도록 그를 보호하는 역할, 다른 하나는 저 몬스터가 그림을 못 그리게 막는 역할. 어떤가요?”

    “그게 좋겠네요.”

    “센 님이 말한 대로 할게요.”

    저마다 센의 말에 수긍하자 그가 차분한 얼굴로 우리 모두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일단 저는 그림을 방해하는 쪽으로 갈게요. 별다른 공중 이동 스킬이 없다 보니 이시카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순 없을 것 같아서요. 비슷한 이유로 사와구치와 강세빈 헌터도 어려울 것 같군요.”

    “센 님, 전……!”

    “사와구치. 정말로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센이 사와구치를 향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사와구치는 여전히 반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지 이내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의랑 최민 헌터가 이시카와 헌터의 보호, 나머지가 몬스터를 제압하는 방향으로 가죠.”

    잠깐의 침묵 후 세빈이가 상황을 정리했다. 세빈이는 희생하는 화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림자 손을 섬세하게 조종하고 있었다.

    ―콰드득!

    [희생하는 화가는 자신의 고통마저도 예술의 혼을 불태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녀석이 기어코 그림자들을 전부 다 떼어놓고 캔버스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녀석은 다시 연필을 들어 빠르게 이시카와의 실루엣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시카와의 옆으로 바로 붙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피사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그 사람에 맞게 역할도 바꿔요. 괜찮죠?”

    “…알겠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저마다 다른 대답이 돌아왔지만 목표는 모두 같았다.

    저 정신 나간 화가의 예술 활동을 완전히 그만두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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