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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48화 (248/366)
  • 248화

    [시대의 부름에 응한 자가 소멸합니다.]

    [체력 : 0 / 4,000]

    꽤 길었던 전투가 끝났다. 대역 인형을 완성하기 위한 모든 재료를 다 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지직.

    녀석이 소멸했다는 상태창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쉴 때쯤, 다른 문구가 치고 들어왔다.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너는 내 옆에 계속 있기만 하면 돼’의 씨앗을 각성자 ‘강세빈’에게 심겠습니까?]

    ‘응?’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세빈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세빈이의 얼굴은 땡볕에 놓인 양 붉게 익어 있었다.

    씨앗을 심으려고 일부러 던진 말도 아니었고 그저 세빈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인데, 그게 의외로 세빈이의 마음을 후벼팠나 보다. 아무래도 이미 말의 씨앗이 개화한 대상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처음 세빈이에게 말의 씨앗을 심었을 땐 기억을 되찾기 전이라 세빈이가 배신자라고 오해를 한 상태였다. 세빈이의 잘못된 선택을 막기 위해 심은 것이나 다름없었지.

    ‘지금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겠네.’

    세빈이가 예상외로 내 죽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세빈이의 마음을 안정시킬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이번 씨앗도 심는 게 좋겠어.

    ‘예.’

    [각성자 ‘강세빈’에게 ‘너는 내 옆에 계속 있기만 하면 돼’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상태창을 향해 수긍하자 씨앗이 심어졌다는 안내와 함께 상태창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세빈이의 얼굴이 더욱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있는 세빈이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멋쩍어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널 매번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어? 아니야!”

    그때 세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부정하자 고개를 돌린 채 눈만 굴려 나를 바라보다 곧 말을 덧붙였다.

    “요즘 들어 자꾸 이상한 꿈을 꾸거든.”

    “…아.”

    “그래서 계속 확인받고 싶었나 봐. 네가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 그것은 여전히 세빈이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집을 사고 나서 벙커를 만든 이유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 세빈이가 겪고 있을 불안이 다시금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제 좀 안심이 됐어?”

    “응. 미안해.”

    “괜찮아.”

    세빈이의 어깨를 토닥이자 그제야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대역 인형의 후광을 획득했습니다.]

    [모든 저주가 해제됩니다.]

    “어!”

    갑자기 상태창이 나타났다.

    ‘저주가 해제된다고?’

    시험 삼아 세빈이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보니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호흡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졌다. 정말로 저주가 해제되었다.

    ―터벅.

    후광이 걸려 있던 도장 안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울을 들고나오는 최민 헌터가 보였다. 그는 태연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최민 헌터만 따로 저주받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이걸 획득하면 모든 저주가 풀린다고 나와 있더군요.”

    “붉은 머리 여자 말이 맞다.”

    곧이어 나타난 이시카와와 사와구치도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한 거지? 친구 사이에 그렇게도 할 말이 많은 것이냐?”

    “뭐,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이?!”

    “최민 헌터, 빨리 이동하죠!”

    “알겠습니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이시카와를 뒤로 한 채 출구를 향해 달렸다.

    액자 밖으로 나오자 무채색이었던 세상에 순식간에 색이 입혀져 있었다. 별다른 안내가 뜨지 않았으니 아직 그림이 완성되기 전이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때 우리보다 먼저 나왔던 녹두가 대역 인형을 등에 얹은 채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잘했어, 녹두야!”

    “아우우―!”

    녹두의 기분 좋은 하울링을 들으며 인형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최민 헌터가 내미는 후광을 받아 인형의 뒤에 대자 ‘달칵’하고 자석처럼 붙었다.

    ―바스락.

    그와 동시에 인형에게도 센이 입었던 남색 기모노가 입혀졌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만 제외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센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잠깐 비켜. 내가 완성시킬 테니까.”

    “네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사와구치 미나토’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짜증]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앞으로 인형을 끌고 왔다.

    “왜, 내가 못 미더워?”

    “그렇게까진 얘기 안 했어. 머리 묶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까칠한 정도가 차도윤 헌터 저리 가라네.’

    내 말을 무시한 사와구치는 손목에 끼워져 있던 머리끈을 빼, 인형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 번 해본 것처럼 능숙한 손놀림에 사람들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머리도 짧은 녀석이 웬 머리끈을 갖고 다니는 것이냐?”

    “…네가 밖에서 밥 먹을 때마다 머리카락 불편하다고 계속 짜증 냈잖아.”

    “아~ 그런 용도였느냐? 준비성이 아주 철저하구나.”

    그래도 이시카와한테는 나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사와구치의 귀가 묘하게 붉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쯤 그가 인형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오!”

    “이만하면 어느 정도는 비슷해졌겠지.”

    “대단하네요. 정말로 센 씨 머리 같아요.”

    “너한테 칭찬받고 싶지 않아.”

    사와구치가 또다시 세빈이에게 날을 세웠지만 세빈인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희생하는 화가의 손에서 역작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정말 이날만을 기다려 왔어.”]

    [그는 마지막 작업을 위해 새로운 물통에 물을 담으러 갑니다.]

    ‘진짜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달그락.

    상태창이 사라지자마자 최민 헌터가 인형을 조심스럽게 안아 든 후 가볍게 날아올랐다.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따라갈게요!”

    ―콰앙!

    최민 헌터가 센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자 그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불씨가 떨어졌다.

    [희생하는 화가가 피사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는 세필 붓을 쥐고 섬세한 피사체의 주름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센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그림은 완성되고 있었다.

    ‘언니! 내 등 뒤에 타!’

    ―툭.

    녹두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목덜미를 잡아 제 등 위로 올린 후, 날아가다시피 센에게 다가갔다.

    “벌써 저렇게……!”

    센은 이미 채색이 완료된 후였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얼굴의 주름, 그리고 옷 그림자까지… 사실상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타닥!

    녹두의 등에서 뛰어내려 센의 몸을 들어 올리는 최민 헌터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센을 옆에 조심스럽게 눕히자, 어느 틈에 도착한 이시카와가 센의 안색을 살폈다.

    “신지의 헌터, 상체의 후광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달칵.

    거울의 모습을 한 대역 인형의 후광과 등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들었다. 망가지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여 최민 헌터와 함께 센이 있던 꽃밭 위로 인형을 놓았다. 그러자 그것은 천천히 그림의 일부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분명하던 이목구비의 경계는 흐릿한 연필 선으로 바뀌었고 녀석에게 입혀진 색도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옅어지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붓이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센과 대역 인형 주위로 모인 사람들이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희생하는 화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역작이 완성되었습니다.]

    [희생하는 화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껴안으려다 순간 정신을 차립니다.]

    “콜록.”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상태창과 함께 누군가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바로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하늘을 향하고 있는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센 님!!”

    “저, 정신이 드세요?!”

    이시카와와 사와구치가 소리를 지르며 센을 부르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연필로 그려 물감으로 칠해진 모습이 아닌, 나와 무기를 맞대며 싸웠던 인간 센의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은 듯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 눈을 깜박거렸다.

    “하아아…….”

    안도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1분이라도 더 늦었다면 그림이 되는 건 대역 인형이 아니라 센이었겠지.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후 몸을 일으켜 센에게 다가갔다.

    “저희 누군지 기억하시죠?! 네?”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은……!”

    “멀쩡합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시카와, 사와구치.”

    “헙……!”

    이시카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삼키자 센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사와구치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 사람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센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국의 헌터분들까지 계셨군요.”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센이 세빈이와 최민 헌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도 같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나였다. 나를 바라보는 차분한 얼굴에서 수많은 감정이 읽히는 듯했다. 창조자에게 당했다는 배신감과 허무함, 하지만 결국 소중한 동료들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에 대한 고마움. 그 모든 감정이 그의 잿빛 눈동자를 통해 느껴졌다.

    “신지의 헌터.”

    “긴 얘기는 나중에 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아마노 레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것이 먼저니까요.”

    “…하하.”

    ―텁.

    그가 내 손을 잡자마자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단번에 몸을 일으킨 그가 나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요.”

    그를 향해 미소를 짓자 그도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희생하는 화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아틀리에에 초대합니다.]

    [희대의 역작을 보이며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합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희생하는 화가가 또다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갑자기 나타난 상태창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고, 주위를 살폈다.

    [“정말로 아름다운 그림이야.”]

    [“영웅을 완벽하게 담아냈군. 역시 자네는 최고의 화가일세.”]

    [사람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하하! 뭐야~ 이거 그냥 인형을 그린 거잖아?”]

    [한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소리칩니다.]

    [“뭐? 인형?”]

    [“인물화가 아니야?”]

    [사람들이 그림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진짜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이 몸의 기분 탓인 거냐?”

    “아니. 나도 느껴져.”

    이시카와의 말에 대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갇혀 있는데, 수십 명의 시선 앞에 놓인 느낌이 들었다.

    [희생하는 화가 역시 자신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그가 그린 건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교묘하게 영웅을 닮은 도자기 인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희생하는 화가를 비웃으며 그의 아틀리에를 빠져나갑니다.]

    ―쿠구구궁.

    희생하는 화가의 마음이 반영되기라도 한 듯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피사체가 납치됐음을 깨닫습니다.]

    [“가만두지않겠어가만두지않겠어가만두지않겠어가만두지않겠어.”]

    “윽……!”

    시야를 가득 채운 경고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아를 고쳐 쥐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이제 본격적으로 보스전이 시작될 거예요.”

    ―부욱.

    그때였다. 거대한 팔레트 나이프가 하늘을 찢고 나타났다.

    ―지이익.

    그것은 땅까지 쭉 내려와 이 공간을 세로로 찢고는 다시 사라졌다.

    [희생하는 화가가 납치범들을 내려다봅니다.]

    그러자 찢어진 틈새로 피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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