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50화 (150/366)
  • 150화

    “날, 한 번만 믿어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내 말에 레일리의 미간 사이의 골이 깊어졌다.

    [발언 결과 : 의문]

    “믿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더 믿으란 말이냐.”

    “라파엘라가 지금 쓰러진 것도 소설가의 장치 중 하나일 거야. 진짜로 라파엘라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흥분으로 상기됐던 레일리의 얼굴이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레일리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저 녀석은 해피엔딩을 좋아해. 과정이 험해서 그렇지 우리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그것도 네 경험담인가?”

    “아니.”

    고개를 가로 저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다른 사도들의 파편에 들어온 건 처음이야. 하지만 저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

    “라파엘라는 무조건 악몽에서 빠져나올 거야. 걱정하지 마.”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어차피 엔딩은 우리의 승리로 정해져 있으니까, 녀석의 입맛에 맞게 쇼나 보여주자고.”

    레일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조금 당황한 눈치의 그는 라파엘라와 나를 번갈아 보다, 이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발언 결과 : 강한 신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동료 걱정하는 모습이 왜 꼴사납겠어.”

    “아니, 방금 내 모습은 더럽게 꼴사나웠다.”

    레일리가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쉰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꼴사나운 김에 부탁 하나만 좀 하지.”

    “뭔데?”

    “이 녀석이 악몽에서 깰 때까지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도 괜찮겠나?”

    부탁의 축에도 못 들 정도로 가벼운 요청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고맙다.”

    레일리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에서 나를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을 보호할 만한 장소가 필요하겠네.’

    난 고개를 들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최민 헌터를 향해 손짓했다.

    후웅―

    따뜻한 기운과 함께 그가 내 옆으로 날아왔다.

    “최민 헌터, 라파엘라와 레일리에게 방공호 좀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꼭 라파엘라를 데리고 방공호 밖으로 나와야 해. 알았지?”

    “알겠다.”

    나와 최민 헌터가 레일리의 땅 위에서 벗어나자 새빨간 불길이 레일리와 라파엘라를 덮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불길 속에 그들을 둔 채 나는 다시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사제를 믿자.”]

    [빛의 구원자가 다른 영웅들에게 말했다.]

    [“맞아요. 금방 일어날 거예요.”]

    [바람의 저격수가 빛의 구원자의 말을 거들자 동요하던 대지의 기사도 천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입이 험하셔서 그렇지, 참 존경할 점은 많은 길드장님이에요.”

    알렌이 내 곁으로 날아와 말을 건넸다. 그에 나는 살짝 웃어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불의 무도가가 자세를 잡아 마왕의 어깨를 가격했다.]

    [그 틈에 밤의 암살자가 마왕의 발목을 끊어놓았다.]

    그때 문장이 또 다시 등장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두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나는 의지를 다지며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 * *

    한편, 라파엘라의 악몽 속

    “이번 시험에서도 만점이래.”

    “마르코 추기경님도 쟤를 알 정도니 원.”

    “성경을 히브리어로 전부 외웠대. 난 발음하기도 힘들던데, 미친놈…….”

    수단을 입은 남녀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수군댔다. 그들의 말엔 부러움. 그리고 그 감정을 넘어선 시기와 질투가 담겨 있었다.

    ‘하여간 능력도 안 되면서 질투심만 많아 가지곤.’

    그 말들을 들은 주인공은 그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복도를 조용히 걸어갈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그런 소문들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라파엘라 자매님.”

    “좋은 아침입니다, 요한 주교님.”

    라파엘라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주교도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오늘은 수업도 없는 날인데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고해 성사실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후엔 도서관에서 책을 좀 읽을까 합니다.”

    “역시 자매님은 훌륭하세요.”

    주교의 칭찬에 라파엘라가 손을 내저었다.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한 걸요.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주교와 라파엘라가 서로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그대로 복도를 스쳐지나갔다.

    신학교의 모범생, 윗분들의 희망, 미친놈, 독한 놈. 그 모든 말은 라파엘라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그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고해 성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쿵―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허억, 허억, 허…….”

    라파엘라는 나무로 만든 좁은 방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그의 고해 성사를 들은 맞은편의 신부가 할 말을 고르는지 한참 말이 없었다.

    “자매님께선 그 힘이 주님의 뜻에 반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힘이, 속성이, 전부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제게 이런 힘이 생긴 거란 말입니까.”

    라파엘라가 이를 악문 채 겨우 말을 쏟아냈다.

    그는 갑자기 각성했다는 사실부터, 스킬의 내용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자신의 고뇌와 괴로움을 벽 너머의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되고 싶은 건 교황이지, 저급한 헌터 따위가 아니라고.’

    라파엘라는 묵주 팔찌를 손에 꽉 쥔 채 파들파들 떨었다. 신앙심으로 포장한 그의 야망이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신 후 상태창을 열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능력을 바라보았다.

    [각성자 라파엘라]

    [속성 : 어둠]

    [S급 치유계 스킬 ‘성자의 복음(Gospel of Saint)’ : 시전자의 기도로 외상을 치유한다. 기도를 들은 사람만을 치유할 수 있다.]

    [‘유다의 속삭임(Whispering of Judas)’ : 역(逆)성호를 그을 때마다 시전자가 정한 대상에게 저주를 건다. 저주가 걸린 대상은 신체 능력이 퇴화하며 스스로 성호를 그으면 저주가 풀린다.]

    <사명>

    [뱀의 혀를 가진 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져라.]

    [달성도 : 0%]

    [보상 : 업적 ‘릴리트’ 개방]

    아무리 봐도 사제가 가질 분위기의 스킬은 아니었다.

    모든 걸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은 편해졌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빛 속성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이를 아득 갈았다.

    “너무 염려치 마세요, 자매님. 복음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힘이지 않습니까.”

    “제 믿음이 약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자매님께서 이 학교에서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다는 건 주님이 아닌 저희도 알 정도입니다.”

    라파엘라가 고개를 들어 신부를 바라보았다. 촘촘한 격자 파티션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 자신과 주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신부의 말과 함께 라파엘라를 둘러싼 모든 풍경들이 흘러내렸다. 그는 덩그러니 앉아 손을 모은 채 기도문을 욀 뿐이었다.

    쿵―

    새카맣던 공간은 어느새 학교의 복도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가장 안쪽에 라파엘라는 다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라파엘라 자매님, 각성하셨는데 용케도 학교를 나오시네요?”

    “제3자가 각성 신고 하는 방법은 없나?”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라파엘라를 조롱했다. 질투와 열등감에 눈이 멀어 라파엘라의 몰락만을 기다린 무리였다.

    ‘고해 성사실까지 쫓아와서 엿들은 건가?’

    라파엘라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성이라면서. 주님 보기 창피하지 않아?”

    “말씀이 심하십니다, 안토니오 형제님.”

    “이 신성한 공간에 당신 같은 위선자가 있는 게 역겨워서 그렇습니다, 라파엘라 자매님.”

    툭―

    그가 한 손으로 라파엘라의 어깨를 쳤다. 라파엘라는 들고 있던 책을 놓쳤고, 책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물청소를 한 후, 미처 마르지 못한 물이 책에 천천히 스몄다.

    라파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요한 주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평소 자신을 특히 아끼던 고위 사제 중 하나였다. 라파엘라가 눈을 크게 뜨고 주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주교…….”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주교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의 입은 기도문을 읊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믿었던 그마저 자신을 사탄 취급 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라파엘라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하하하…….”

    “미친놈 소리 듣다 보니 정말로 미쳤나 봐요.”

    라파엘라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또다시 조롱했다.

    ‘이 망할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그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자신의 사명을 확인했다.

    <사명>

    [뱀의 혀를 가진 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져라.]

    [달성도 : 0%]

    [보상 : 업적 ‘릴리트’ 개방]

    뱀이 될 사명을 가진 존재가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니. 라파엘라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웃지만 말고 뭔 말이라도 해……. 우욱!”

    쿵―

    라파엘라가 역성호를 긋자 안토니오라고 불린 남자가 입을 틀어막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래요, 안토니오 형제님. 형제님 말이 맞아요.”

    “욱, 우욱……!”

    “주님 보기 창피합니다. 그야 이런 능력을 가져버렸으니 말입니다.”

    라파엘라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내기엔 비각성자의 몸은 너무나 연약했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 바닥에 온몸이 축 늘어졌다.

    “이, 이 사탄……!”

    “빨리 형제님 의무실로 데려가!”

    라파엘라는 허둥대는 학생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욱!”

    “커헉……!”

    그러곤 그대로 저주를 걸었다. 라파엘라를 에워쌌던 열댓 명의 무리가 순식간에 쓰러져 그의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손톱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사명>

    [릴리트]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43%]

    “하아… 진작 이럴 걸 그랬습니다, 주님.”

    라파엘라는 지독한 해방감을 맛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악몽의 배경이 또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쿵―

    에든버러의 작은 펍, 라파엘라는 술에 취해 바 테이블에 아예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속 쓰려.’

    학교를 나오면서 말 그대로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사람들과 진탕 굴러보기도 하고 기절할 정도로 술도 마시고 정체 모를 약도 먹어봤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니 이젠 충실할 욕망도 없었다.

    <사명>

    [뱀의 혀를 가진 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져라.]

    [달성도 : 99%]

    “여기서 뭘 또 어떻게 채우라고, X발…….”

    라파엘라가 욕을 중얼거리며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쾌락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사명은 달성을 문턱에 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툭―

    “어이.”

    그때 누군가 라파엘라의 몸을 흔들었다. 골 전체가 울리는 감각에 라파엘라가 인상을 찌푸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을 깨운 인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 왠지 모르게 낯이 익어 라파엘라는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라파엘라 맞지? 요크 신학교 출신.”

    “그걸 그쪽이 어떻게…….”

    “난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 S급 헌터다.”

    그의 성을 듣자마자 라파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왕가 사람이잖아.’

    국왕 후계자의 언니가 왕실에서 퇴출됐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얼핏 있었다. 술 때문에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돌아왔다.

    “학생 열두 명을 기절시키고 튀었다고?”

    “네.”

    “뻔뻔하군. 참으로 우스울 지경이다.”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레일리의 태도에 라파엘라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절 잡으러 오신 겁니까? 왕실을 나왔다고 했는데 경찰이 되기로 한 겁니까?”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난 그저 널 만나러 여기 온 거다.”

    왕실에서 퇴출된 저 망나니가 왜 자신을 만나러 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을 무렵, 레일리가 말을 이었다.

    “너의 그런 대담하고 충동적인 면이 마음에 들었다.”

    “…네?”

    “내 동료가 될 기회를 주겠다.”

    난데없는 소리에 라파엘라의 사고가 멈췄다. 하지만 레일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드를 만들 예정이다. 네가 내 길드원이 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보장하지.”

    “왜 굳이 절……?”

    “내 길드엔 너같이 배짱 있는 놈들이 필요하니까.”

    라파엘라는 인상을 구기며 레일리가 하는 말을 차근히 곱씹었다.

    그는 신학교를 다닐 시절에도 늘 혼자였다.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고, 라파엘라 스스로가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레일리는 그들과 달랐다. 어둠 속성으로 각성한 것 하나만으로 자신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조롱하던 존재들과 달리, 레일리는 오직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 낡은 술집까지 찾아왔다.

    ‘날 동료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시커먼 욕망만이 가득했던 라파엘라의 머릿속에 ‘동료’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고개를 들었다.

    “자,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레일리가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라는 그 손과 그의 눈을 번갈아 보다 이내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렸는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명>

    [뱀의 혀를 가진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업적 ‘릴리트’ 개방]

    사람을 싫어하던 존재의 마지막 욕망은, 결국 사람으로 채워졌다.

    레일리와 라파엘라의 마주잡은 두 손에선 새하얀 빛보다도 더욱 눈부신 검은 가루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