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47화 (147/366)
  • 147화

    [전개 달성률 : 90%]

    ‘진짜로 성공할 줄이야.’

    편지와 상태창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소설 속 세상에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레일리를 창조자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충격받은 연기라도 좀 하는 게 어때?”

    그때 레일리가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곤 곧바로 내 옆에 있던 벽에 등을 붙였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자 가드너 부부가 편지 내용을 궁금해하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 리디아가…….”

    “리디아?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위컴과 함께 떠났대요…….”

    “뭐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편지를 가드너 부부에게 내밀었다. 그들은 편지에 코를 박고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편지에 집중하는 동안 난 눈만 굴려 레일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린 채 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툭―

    나는 그 주먹에 내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가드너 부부가 내 쪽으로 고개를 올리자 난 곧바로 울상을 지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들은 손 아래 가려진 내 입이 한껏 웃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후의 전개는 말 그대로 폭풍처럼 지나갔다.

    급히 집으로 돌아오니 베넷 부인은 앓아누웠고 위컴, 그러니까 최민 헌터로부터 편지가 와있었다. 내용은 원작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 자금 명목으로 리디아에게 5천 파운드를 증여하고 매년 100파운드씩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베넷 씨는 이 과정에서 가드너 부부가 경제적으로 지원을 준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아시가 해결한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사실을 알고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결혼을 허락한다는데……. 과연 그 장면까지 가야 하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우리 리디아가 결혼을?”

    앓아누웠던 베넷 부인은 막내딸의 결혼 소식에 갑자기 반색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온 동네에 자랑이라도 할 것처럼 활기를 띄었다.

    ‘하여간 골 때리는 캐릭터야.’

    알렌과 함께 스토리가 진행되는 걸 지켜보며 하루하루 버텼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최민 헌터가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한 후 리디아와 함께 떠나기 직전 내게 은밀하게 말을 걸어왔다. 난 주위의 눈치를 한 번 슬쩍 본 후 입을 열었다.

    “리디아를 어떻게 데리고 나온 거예요?”

    “…뭐, 최선을 다해 봤습니다.”

    “크흡…….”

    누군가를 열심히 꼬시는 최민 헌터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아 결국 웃음이 터졌다.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겨우 진정시킬 때쯤 최민 헌터가 고개를 홱 돌렸다. 설핏 보이는 귀가 아까보다 약간 붉어져 있었다.

    “위컴~”

    그때 리디아가 위층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예뻐 죽겠는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최민 헌터와 팔짱을 꼈다.

    “언니도 빨리 결혼하면 좋을 텐데. 난 정말 매일 매일이 행복해~”

    “어, 어… 그래. 행복하게 잘 살아.”

    “알겠어. 갈까요, 위컴?”

    리디아의 말에 최민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나한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리디아와 최민 헌터가 탄 마차가 집을 떠나 비탈길을 따라 쭉 내려가자 눈앞에 휘갈겨 쓴 글자가 떠올랐다.

    [전개 달성률 : 95%]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 * *

    “어머 세상에 저거 빙리 씨 아냐?!”

    ‘올 것이 왔군.’

    창밖을 바라보던 베넷 부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말에 키티도 창문으로 달려가 호들갑을 떨었다.

    “옆에 그 인간도 왔네? 그, 리지 언니가 싫어하는… 누구였더라?”

    “다아시.”

    “어, 맞아 그 사람!”

    키티의 말에 대답해 주며 나도 창가 쪽으로 발을 옮겼다. 레일리와 세빈이가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청혼하러 오는 사람들의 얼굴이냐…….’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일에 지친 직장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얘들아 자연스럽게 행동해라, 자연스럽게. 제인, 너도 긴장하지 말고. 알았지?”

    “알겠어요.”

    베넷 부인은 알렌의 머리를 한 번 정리해 준 후 소파에 앉아 이 집의 고용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렸다. 긴장하지 말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제일 긴장한 듯 보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우리가 있는 거실 쪽으로 가까워졌다.

    “빙리 씨와 다아시 씨입니다.”

    고용인이 두 사람을 데려다준 후 다시 거실 밖으로 나갔다. 고개만 살짝 드니 아까의 무뚝뚝한 얼굴은 어디 가고 부드러운 눈으로 알렌을 바라보는 세빈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날 집요하게 보는 레일리까지.

    ‘지금부터 연기를 하는 건가.’

    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베넷 부인이든 세빈이든 누군가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결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니요. 무슨 말씀을, 호호호…….”

    베넷 부인이 어색하게 대꾸하며 세빈이와 알렌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괜찮다면 제인 양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제인, 오, 오우 그럼요. 얘들아?”

    베넷 부인이 알렌을 제외한 제 자식들에게 눈짓했다. 키티는 자신이 청혼받는 것도 아니면서 한껏 설렌 표정을 하고 있었고, 메리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읽고 있던 책을 챙겨 거실을 나섰다.

    “리지?”

    “아, 네, 네.”

    부지런히 거실 밖으로 나오자 레일리도 내 뒤를 따라 나와 아예 마당 쪽으로 발을 옮겼다.

    베넷 부인과 동생들이 거실 문에 귀를 딱 붙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동안, 나는 창문 너머로 레일리를 응시했다.

    ‘음?’

    레일리가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전달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리키던 레일리의 손가락이 호수를 향했다. 그러곤 거실 쪽으로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후, 이번엔 나를 가리키곤 호수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 세빈이 쪽이 해결되면 호수로 오라는 뜻이구나.’

    레일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몸을 돌려 호수 쪽으로 걸어 나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그에게서 시선을 뗀 후 나는 베넷 부인의 옆에 섰다.

    “좋아요…….”

    쿵!

    알렌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자마자 베넷 부인이 문을 벌컥 열었다.

    “오우, 제인……! 역시 우리 딸! 잘될 줄 알았어!”

    그가 알렌을 와락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동안 알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개 달성률 : 97%]

    [오만한 소설가는 엔딩을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정말로 거의 다 왔다.

    나는 알렌과 세빈이에게 눈으로 사인을 준 후 곧바로 집을 뛰어나왔다.

    “하아, 하아…….”

    무거운 치마를 양손으로 잡은 채로 호수를 향해 마구 내달리자 검은 코트를 입은 뒷모습이 보였다.

    “레일리!”

    내 외침에 레일리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앞에 멈춰선 후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당연하게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준비됐나?”

    “응.”

    사락―

    레일리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잔디가 그의 무릎에 눌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 양.”

    “…네.”

    그가 연기하는 투로 말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오만한 소설가가 이 소설의 절정을 기대합니다.]

    기묘한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슬쩍 돌렸지만 당연히 광활한 초원뿐이었다.

    “제 애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당신의 감정이 지난 4월과 같다면 저는 이 일에 대해 영구히 입을 다물겠습니다.”

    [전개 달성률 : 99%]

    [그 문장은 오만한 소설가가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레일리가 한 말이 실제로 원작에 있는 문장이었는지 소설가가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소설가의 반응에 화답이라도 하듯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 끝내자.’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레일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네, 저도 당신이 좋아요.”

    [전개 달성률 : 100%]

    [오만한 소설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칩니다.]

    살짝 웃으며 가짜 청혼에 응하자 소설가도 격하게 반응했다.

    사라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위 풍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커다란 붓으로 쓸어내리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다. 이내 우리의 주위는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아, 이제야 끝났군.”

    레일리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생략된 내용도 꽤 많았는데 제법 만족해하는군.”

    “이게 생략된 내용이라고?”

    “그래.”

    고작 몇 주를 소설 속에서 지냈을 뿐인데도 완전히 질려버렸는데, 이게 이미 줄어든 분량이라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키이잉―

    그때, 입고 있던 드레스가 유리가 깨지듯 금이 가더니 그대로 사라지고 내가 원래 입고 왔던 옷으로 돌아왔다. 레일리를 바라보니 그의 몸에도 길드전 내내 입었던 검은색 가죽 롱 코트가 입혀져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가와 싸우는 건가.”

    “그렇겠네.”

    “미식가 때는 어땠지?”

    “음식을 먹으면 체력을 회복하는 몬스터였어. 공격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버거운 상대까진 아니었고.”

    최민 헌터의 ‘방공호’가 큰 역할을 하긴 했지. 체력을 회복할 여지를 아예 남기지 않았으니.

    타닥―

    새하얀 공간을 부유하던 다리가 어딘가에 닿아 그대로 착지했다.

    주위를 살피니 상자처럼 사방이 나무로 된 커다란 공간에 이곳에 떨어진 모든 사람들이 있었다.

    “지의야!”

    “세빈, 왁……!”

    세빈이가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그의 품에 얼굴이 묻혔다.

    “길드장님, 오랜만입니다~”

    “멀쩡해 보이는군.”

    “라파엘라 씨, 그 무도회에서 당한 부상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알렌 형제님이 걱정하실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거든요.”

    라파엘라가 레일리. 그리고 알렌과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껴안은 세빈이를 겨우 떨어트려 놓고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그는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나와 거리를 좁히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다행입니다.”

    “최민 헌터도 고생하셨어요.”

    “나는?”

    “아, 당연히 세빈이 너도 포함이지.”

    입을 비죽이는 세빈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라파엘라 쪽으로 발을 돌렸다.

    “어머, 지의 자매님.”

    “너도 고생했어. 그 이후엔 몬스터 없었지?”

    “네. 다행히 그게 끝이었네요.”

    라파엘라는 안경을 올리며 생긋 웃었다.

    지이익―

    그때였다.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나무 벽이 네 갈래로 뜯어졌다.

    “읏…….”

    갑작스런 빛에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다행히 금세 적응해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책꽂이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간이었다. 고개를 내리니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서있는 곳은 거대한 테이블 위였다.

    “미식가 때랑 비슷한 느낌이네.”

    “응.”

    세빈이의 말에 대답하며 우선 자아부터 손에 쥐었다.

    아직 오만한 소설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미식가, 아니… 괴식가 때처럼 거인의 형상을 띄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거대한 서재와 테이블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오만한 소설가는 새로운 명작의 도착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마침 새로운 상태창이 떴다. 우리는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며 눈앞에 뜬 글자들을 차분히 읽었다.

    [힘을 합쳐 마왕을 몰아내는 여섯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매우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쿵, 쿵, 쿵―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책들은 어느새 거대한 책 더미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서서히 몸집을 불려 거인의 형태가 되었다.

    단정한 양복을 입은 마른 몸통에서 길쭉한 팔 다리가 튀어나오고 머리엔 검은색 잉크병이 얹어졌다.

    나는 긴장 상태를 놓지 않은 채 녀석이 변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만한 소설가]

    [자신의 글만이 세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존재]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우리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오만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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