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8화 (128/366)
  • 128화

    【임시 동맹】

    [모레 오전 8시. 이 발코니로 와.]

    지난밤, 세빈이가 내게 줬던 쪽지가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가 여기 있단 걸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누구와 함께 온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다.

    ‘아니. 오히려 세빈이가 내게 물어볼 게 많겠네.’

    납치당한 건 사실이지만 탈출 생각도 안 하고 여기서 길드전까지 참가하게 된 이유를 말해야 한다. 아니, 그것까진 어떻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 후에 파편을 수습하는 건 이야기하기 어렵다.

    “듣고 있나?”

    “…어, 어?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 정신으론 1등은커녕 10위 안에도 못 들 거다.”

    레일리가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자기 옆에 세워 놓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세빈이에 관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길드전에만 집중해야 한다.

    난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레일리의 말에 다시 집중했다.

    “길드전 규칙은 어제 말했다시피 각 영지의 왕을 찾아서 왕관을 빼앗고 파괴하면 된다.”

    “왕이 누군지에 따라 왕관의 개수도 다르게 계산된답니다?”

    “다르게 계산된다고?”

    “아, 내가 그걸 얘기하지 않았군.”

    레일리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을 덧붙였다.

    “왕의 등급에 따라 왕관의 개수도 달라진다. F급이면 한 개, S급이면 백 개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같은 등급이어도 개수가 다르게 측정되는 경우도 있어요. 완전 던전 마음대로거든요.”

    이번엔 알렌이 추가로 설명했다. 그는 메모지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 그렸어?’

    대충 슥슥 그린 것 같았는데 메모지에는 제법 정교한 성 그림이 있었다.

    알렌이 그린 성 꼭대기에 달린 깃발 위에 1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왕이 왕관을 수령하면 이렇게 성 위에 왕관의 개수가 떠요. 그걸로 다들 무슨 등급의 헌터가 왕이 되었는지를 유추하죠.”

    “심리전이 필요하겠네요.”

    “말하는 게 멍청할 정도로 당연한 얘기지만, 왕을 선정하는 것도 전략이다.”

    레일리가 우리가 있는 테이블 앞까지 왔다. 알렌이 그린 종이를 보던 모두의 시선이 레일리를 향했다.

    “먹잇감이 되는 게 두려워 어중이떠중이를 왕으로 세우면 그만큼 뺏기기도 쉽지. 그렇다고 S급을 왕으로 세우면 모두에게 노려진다.”

    쿵―

    레일리가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찻잔과 다과들이 흔들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와삭―

    ‘이 와중에 잘 먹네.’

    라파엘라는 레일리의 손을 피해 쿠키를 하나 집어먹었다.

    “지난번엔 누가 왕이었어?”

    “저요.”

    알렌이 나를 보며 손을 들었다. 처음 봤을 땐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번뿐만 아니라 모든 길드전에서 제가 왕이었어요.”

    모든 길드전에서 그를 왕으로 설정했다는 건 노블레스가 왕의 역할에 관한 심리전은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이다. 왕관 개수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툭―

    레일리가 알렌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 녀석은 우리 길드의 A급보다도 왕관 수가 적게 계산된다. 아마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스킬이 거의 없기 때문이겠지.”

    “DF랭킹이랑 비슷하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레일리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스크린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화면엔 노블레스 길드원들의 이름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맨 위엔 S급 세 명이 떡하니 자리했다.

    “우리 길드엔 S급 3명, A급 12명, B급과 C급을 합친 게 43명, 그리고 D급이 스무 명 좀 넘게 있다. D급은 그냥 사무직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동안 몇 명씩 참여했어? 입장하는 길드원 수 제한은 없는 거야?”

    “최소 30명만 맞추면 된다. 그것 말고는 인원 제한은 없어.”

    ‘사람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닌가?’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더 나을 것이고, 둘보단 셋이 낫다.

    “헌터가 많으면 방어전에선 유리할 거예요. 어쨌거나 버티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게 좋으니까요.”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라파엘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길드전에서 방어는 곧 패배예요.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왕관 사냥에 나서야 승리하는 구조니까요.”

    “그래서 정예들만 모아 40명 정도로 구성한다.”

    스크린에 적혀있던 D급들이 사라졌다. 그러곤 전투에 나서는 사람들의 이름만 남았다.

    “이번 작전도 일단 지난번과 유사하게 가지. 알렌을 왕으로 세운 후 나를 주축으로 주변 영지부터 처들어간다.”

    “…근데 지난번에 졌다면서.”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발언 결과 : 수긍]

    “…그랬지.”

    내가 각성하기 전까지는 그게 필승법이었을 것이다. 창조자의 힘이 깃든 시나리오가 알려준 것이었을 테니까.

    레일리는 쿠키 하나를 입에 쑤셔 박은 후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모든 길드들이 탈락하고 우리와 아우레올라 놈들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길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맞아. 그 길드의 S급 녀석이 왕일 줄 알고 총력을 다해 그 녀석을 쓰러트렸지만.”

    까득―

    레일리가 이를 깍 물며 얼굴을 구겼다.

    “알고 보니 다른 A급 놈이었더군. 우릴 완벽하게 속였어.”

    “그러다가 제가 왕인 걸 들켰고 거기 행동 대장쯤 되는 애한테 왕관을 뺏겼어요.”

    알렌도 한숨을 길게 쉬며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을 떠올린 건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지.”

    레일리는 ‘알고 있는 것’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이 시나리오라는 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일리는 내게 묘한 눈빛을 보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지금은 새로운 작전이 필요한 거네.”

    “그렇다.”

    이번 왕 후보에선 알렌을 제외해야 한다. 아우레올라 길드는 알렌이 왕일 때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니까.

    “정체가 밝혀진 후 급습을 당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전투 능력과 빠르게 도주할 수 있는 민첩성이 필요하다.”

    “로웰드 형제님은 어떠신가요? 이동계 스킬과 공격계 스킬이 둘 다 A급이잖아요.”

    “아, 수잔 씨도 있죠. 은신계 헌터니까 영지 내에서 숨어 다니는 전략으로 가도 나쁘지 않겠어요.”

    저마다 의견을 내며 왕 후보들을 추리는 동안 나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예 레일리에게 왕 자리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의 고유 스킬이 공격 반사니까 쉽게 당할 리도 없을 것이다.

    ‘대신 왕관 개수로 정체가 발각되겠지.’

    공격계와 방어계 스킬은 전투계 스킬로 분류되기 때문에 알렌보다는 훨씬 많게 계산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레일리가 왕이라는 게 밝혀진다.

    “라파엘라 씨가 하면요?”

    “제가요? 으음…….”

    라파엘라가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비전투계 A급 정도면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공격계면 위험하겠죠.”

    헝가리 던전에서 봤던 라파엘라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큰 십자가를 휘두를 만큼의 근력도 있었고, 연계 패시브 스킬로 다른 사람에게 저주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본격적인 전투계 헌터가 오면 치유계는 밀릴 수밖에 없다. 이동계 스킬이 없는 경우에는 더더욱.

    ‘기습에 대응할 능력이 있고 정체가 노출될 확률이 낮은 인물…….’

    “……어?”

    순간 전기가 통한 것처럼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자 레일리와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할게.”

    “네가 왕이 돼라.”

    레일리와 내가 동시에 말을 뱉었다. 그러자 라파엘라와 알렌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길드장님, 진심이세요?”

    “그 어떤 길드도 우리에게 저 녀석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할 거다. 왕관 개수가 공개되면 나나 다른 A급들을 괜히 찔러보겠지.”

    레일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난 정체를 들키면 곤란한 사람이라 왕이 아니어도 숨어 다닐 거야. 전면전으로 나서지도 않을 거고.”

    “그렇지. 그럴 거라면 저 녀석이 왕을 맡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레일리도 내 말을 거들며 씩 웃었다. 알렌은 입을 쩍 벌린 채 제 상사를 보다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의 씨, 보기보다 엄청 대담하시네요.”

    그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난 동요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왕이 되면 레일리를 이용한 연막작전도 가능해.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선택이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내 등급 때문에 왕관 수가 많이 측정될 거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 정체를 숨기고 레일리가 마음껏 날뛰는 상황을 만들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다.

    [발언 결과: 수긍]

    그리고 다행히 모두가 내 말에 수긍했다.

    “그 말이 옳다. 우린 알렌 외에 다른 놈을 왕으로 세운 적이 없으니, 왕을 바꾸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혼란을 줄 수 있지.”

    레일리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네가 왕이 돼라. 쓸어버리는 건 내가 할 테니.”

    그는 야망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날 납치했을 땐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행동하던 레일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동료인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이 길드전에서 승리하면 창조자에게 맞설 방패를 하나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친다면 일단은 예비 동료쯤을 되려나.

    터벅―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일리 앞에 섰다. 그는 자신 있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고, 난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해보자고.”

    “그래.”

    우리는 사포처럼 거친 손을 맞잡았다.

    ‘이제 남은 건 세빈이한테 내 말을 전하는 건데…….’

    나는 고개를 돌려 라파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나와 레일리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라파엘라, 잠깐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저랑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잠깐 오른쪽 눈을 감고 그의 스킬을 빠르게 훑었다.

    [A급 변신계 스킬 ‘뱀(nāḥāš)’ : 한 번 본 대상의 외형을 완벽하게 복사한다. 치명상을 입으면 변신이 풀린다.]

    그러곤 눈을 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 * *

    모레 오전 7시 50분, 노블레스 길드 정원 앞.

    바스락―

    나무 사이에서 세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 앞 공터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민과 미준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위치는 안 바뀌었어요. 여전히 손님방에 있습니다."

    “후, 다행이네. 아직 자?”

    “그런 것 같았어요. 감시하는 헌터도 없고요.”

    미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제프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지의는 지금쯤 기상해 간부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고 했다. 즉, 지금 상황은 지의가 의도적으로 그 공간에 남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말 그대로 구출하기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미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원 안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저 넓은 정원이 전부 노블레스 길드 부지란 말이지…….’

    폐쇄적인 유럽 길드답게 정원은 높은 담벼락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서있는 이 공터 주변도 사람이 살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치 숲 깊은 곳에 박힌 성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들어갑시다.”

    민이 자신의 무기인 ‘프라타파나’를 장갑 형태로 바꾸며 말했다. 새빨간 불꽃이 그의 몸 주변을 맴돌았다.

    “알겠어. 난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두 사람은 들키지 말고 신지의 헌터를 구조해. 물리적 충돌은 무조건 피하는 거야.”

    “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여차하면 정원이라도 뒤집어엎어서 주의를 끌게.”

    민과 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웅―

    곧바로 민은 높게 날아올랐고 세빈은 모습을 감췄다.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꽃의 궤적을 바라보며 미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일이 너무 잘 풀려도 찝찝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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