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7화 (127/366)
  • 127화

    타닥―

    “후.”

    알렌의 웜홀을 통해 레일리와 이야기를 나눴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가 테이블을 부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었던 방은 어느새 깔끔하게 원상 복구 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쯤 클리어할 줄 알았는데, 당일 밤에 나올 줄이야.”

    레일리가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짙은 남색의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쨌든 잘 풀린 건 맞겠지?’

    공격이 잘 들어가 준 덕분에 3, 4페이즈를 한 번에 넘겼다. 그 덕에 끝없는 힘을 추구하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서 말의 씨앗까지 제대로 심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첫 단추는 잘 꿰었다고 볼 수 있겠지.

    “알렌, 넌 들어가라.”

    “네~”

    “라파엘라는 밖에서 기다렸다가 얘랑 같이 돌아가고.”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쿵―

    “스읍.”

    문이 닫히자 레일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도 피곤할 테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갈까.”

    “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냐.”

    레일리에게 배려심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서 좀 놀랐을 뿐이다.

    레일리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다 이내 책장 앞으로 발을 옮겼다.

    “유럽 길드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들어는 봤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달그락―

    그가 책장에서 나무판자를 꺼낸 후 내 쪽으로 던졌다. 나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천천히 살폈다.

    단순히 표면이 매끈한 나무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의 지도였다. 지도의 가장자리엔 붉은 점 수십 개가 찍혀 있었다.

    “유럽 길드들은 여름과 겨울에 길드전을 갖는다. 그걸 통해 길드들의 랭킹을 매기지.”

    어느새 내 앞에 온 레일리가 나무 지도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최소 30명 이상의 길드원을 보유한 길드만이 참가 자격을 가져. 이 조건을 통과하기 위해 몇몇 소형 길드들은 길드전 시기에 맞춰 합병을 단행하기도 한다.”

    “흐음.”

    “그렇게 모인 길드들이 평균적으로 40에서 50개 정도다.”

    ‘그럼 이 점들은 길드를 의미하는 거구나.’

    레일리의 설명을 들으며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길드전은 어디서 해?”

    “덴마크.”

    탁.

    레일리가 나무 판 중앙을 두드리자 웬 글씨가 나타났다.

    Als Island Dungeon(F Level)

    “덴마크의 알스 섬에 있는 F급 던전이지.”

    “길드전을 F급 던전에서 한다고?”

    “그렇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길드전은 이 던전에서밖에 못해.”

    도대체 이 던전이 뭐길래…….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레일리를 쳐다보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이 던전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던전이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던전?’

    유럽 길드들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고 다른 나라들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다 보니, 길드전이 어디서 열리는 건지 지금 처음 알았다.

    “알스 섬 F급 던전에 입장하면 길드당 하나씩 영지를 부여받는다.”

    “그걸 던전이 배분한다고?”

    “그래.”

    레일리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참 재밌지? 마치 각성자들이 이런 전쟁을 즐길 걸 알고 만든 것 같은 던전이야.”

    레일리의 말 그대로다. 던전은 자연 발생 하는 거라고 했지만, 이 던전은 꼭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아무튼 길드별로 영지를 배정받고 나면 왕을 정한다.”

    “그건 길드 자유야?”

    레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허공으로 손을 뻗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찰그락―

    ㅡ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될 법한 크기의 작은 왕관이었다.

    “왕으로 정해진 녀석은 영지에 있는 이 왕관을 몸에 지녀야 해. 참고로 이건 내가 만든 모조품이고 진짜는 던전 안에 있지.”

    “인벤토리에 넣으면 되지 않아?”

    “놀랍게도 안 들어가. 억지로 넣으려 하면 부서진다.”

    레일리는 가짜 왕관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 말을 덧붙였다.

    “길드전 룰은 간단하다. 왕을 찾아내서 왕관을 최대한 많이 부순 쪽이 승리한다.”

    “땅따먹기 같네.”

    “비슷한 셈이지.”

    레일리가 내 손에 있던 나무 지도를 챙겨 책꽂이에 던지듯 대충 세워 놓았다.

    “보상은?”

    “유럽 전역의 던전 소유권. 그리고 거기서 채굴되는 부산물과 아이템까지 전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보상이다. 던전 부산물이 갖고 있는 경제적 가치는 물론, 그리스 S급 던전처럼 해당 던전을 공략하고자 하는 헌터들에게 받는 입장료도 쏠쏠할 것이다.

    ‘유럽 대형 길드들이 던전 입장료로 큰돈을 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길드전을 통해 배분할 줄이야.’

    “왕관을 부순 개수대로 순위가 정해지고 그 순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던전의 개수가 달라진다.”

    “왕관을 부숴도 던전을 못 얻는 경우도 생기겠네?”

    “그렇지. 던전 개수는 한정적이니까 말이야. 대부분 상위 네다섯 개의 길드만이 던전을 갖게 된다.”

    레일리는 뒤를 돌아 책꽂이를 등지고 섰다.

    “신지의.”

    “왜.”

    “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

    “응.”

    황금색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창조자에게 모든 길드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했다.”

    “…….”

    “그랬더니 그 녀석은 내게 이걸 주더군.”

    레일리가 심장 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키이이잉―

    그의 심장 주위로 새카만 빛무리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검푸른 보석이 엄청난 스파크를 일으키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창조자의 파편…….’

    치지직―

    레일리가 파편을 콱 움켜쥐자 파편은 꾸물거리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툭.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작은 책으로 변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읽었던 바로 그것.

    “시나리오구나.”

    “시나리오다.”

    레일리와 말이 겹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나리오대로 행동했더니 정말로 길드전에서 승리를 했다.”

    “…….”

    “이게 녀석의 파편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말야.”

    그는 시나리오를 한 장씩 넘기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네 녀석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이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어.”

    “어떤 문제?”

    “시나리오의 정확도가 반 토막 났다.”

    레일리가 이를 아득 갈았다.

    “그 외의 다른 요인은 없어. 정확히 네가 나타난 그 순간을 기점으로 시나리오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졌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그래, 졌다.”

    [발언 결과 : 수치]

    ‘엄청 창피했나 본데.’

    그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패배였지.”

    “그럼 누가 1위를 차지했어?”

    “이탈리아의 아우레올라 길드 놈들이다.”

    레일리는 안대 위에 손을 얹었다.

    “길드장 녀석이 처음 보는 S급이더군. 속성은 어둠이었고 말이야.”

    그는 분을 삭이기 위함인지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서 내가 네게 비는 소원은 단 하나.”

    레일리가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아우레올라 길드 놈들을 누르고 이번 길드전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

    “…….”

    “시나리오라는 편법 없이 1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할 수 있겠나?”

    레일리의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든 적은 98번째의 시간선에서 사도들을 살해했을 때뿐. 그 외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아무리 지능이 높은 몬스터라고 해도 인간의 수준까진 아니기 때문에, 패턴만 파악하면 쓰러트릴 확률이 더 높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스킬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스킬 운용만 잘 한다면 A급 헌터가 S급 헌터를 이기는 일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즉, 내가 있다고 해서 길드전에서 무조건 승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할 수 있어.”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내 대답에 레일리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약속했잖아.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흐음.”

    레일리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발언 결과 : 신뢰]

    결과는 다행히 내가 바라던 방향이었다.

    그는 한 번 픽 웃곤 다시 입을 열었다.

    “출발은 모레 새벽. 규칙과 전략은 내일부터 네 뇌에 쑤셔 박아주겠다.”

    텁.

    내 어깨 위에 레일리의 손이 얹혔다. 그의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흥분과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있었다.

    “하아아…….”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야.”

    문득 98번째의 시간선, 내게 살해당하기 직전 보았던 그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격렬한 전투와 죽음으로 내몰려 흥분이 가라앉지 않던 그 얼굴.

    ‘이번엔 그럴 일 없어.’

    반드시 레일리에게 승리를 안겨 그가 가진 파편을 파괴할 것이고, 카르마의 탄환으로 업까지 청산할 것이다. 지난 시간선의 ‘나’들이 쌓은 업을 내가 청산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을 따라 줄지어 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 *

    달칵―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아침부터 던전에 끌려가 몬스터를 해치우고, 돌아와선 레일리와 한바탕 이야기를 했더니 온몸이 무거웠다.

    ‘설마 이 자식 저주 때문은 아니겠지?’

    옆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라파엘라를 슬쩍 본 후 성호를 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몸이 무거운 걸 보니 그냥 피곤 때문인 것 같다.

    끼익―

    바람이나 좀 쐴까 싶어 조심스럽게 발코니 문을 열었다. 조금은 차가운 영국의 밤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테르의 로브를 꺼내 입은 후 양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할 겸 아예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으려나.’

    아마 그들은 길드전에 들어갈 때쯤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마음 같아선 어떻게든 내 상황을 알리고 싶지만, 라파엘라가 업무용 핸드폰까지 부수는 바람에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없어졌다.

    길드전에서 승리하면 창조자의 파편을 부수게 될 테고, 그러면 또다시 레일리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면 안 될 텐…….’

    또각―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과 함께 구두 소리가 들렸다.

    “누구, 읍……!”

    투욱―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의 손이 내 입을 가볍게 막곤 다른 한 손으론 내 뒤통수를 눌러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 단단한 품에 안긴 채로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려 순간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퍽!

    금방 정신을 차리고 있는 힘껏 밀치자 정체불명의 인간이 뒤로 밀려났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대체…….”

    잠깐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몸이 피곤하긴 한가 보다. 이런 헛것까지 보고.

    바스락―

    “응?”

    나 자신을 비웃으며 무심코 아이테르의 로브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무언가가 내 손에 걸렸다. 난 그것을 잡아 단번에 꺼냈다.

    [모레 오전 8시. 이 발코니로 와.]

    엇나가는 것 없이 반듯하게 쓴 글씨. 난 이 글씨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세빈이 글씨야.’

    두근, 두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세빈이가 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혼자 왔나?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안 거지?

    물어보고 싶은 건 한가득인데 내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난 다시 손바닥 안의 쪽지를 바라보았다.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한 구출 예고였다.

    하지만 세빈이가 말한 날짜는 내가 덴마크로 출발하는 날. 이렇게 가면 100% 세빈이와 엇갈린다.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든 세빈이에게 알려야 하는데…….

    “우음… 자매님?”

    그때 라파엘라가 잠에서 깼다.

    그는 상체만 살짝 일으킨 채 발코니 쪽으로 목을 쭉 빼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시나요?”

    “…그냥 밤공기 좀 쐤어.”

    “감기 걸리십니다. 들어오세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쟤 스킬 중에 꽤 쓸모 있던 게 하나 있었는데…….’

    오른쪽 눈을 감고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자 내가 원하던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써먹어야겠네.”

    끼익―

    난 쪽지를 로브의 깊숙한 곳에 쑤셔 넣으며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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