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0화 (90/366)
  • 90화

    “신지의 헌터?”

    “헉……!”

    차도윤 헌터가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다른 헌터들도 게이트에 전부 들어와 내부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아까 그 상태창은 나에게만 보인 것 같았다.

    “원래 가평 S급 던전 내부가 이랬나요?”

    “아니요. 조금 더 야생에 가까웠습니다.”

    최민 헌터가 벤치를 손으로 건드리며 대답했다.

    다를 수밖에 없지. 여긴 창조자의 파편을 부쉈을 때 나오는 공간이니까.

    스물 몇 번째의 시간선, 의도적으로 녀석의 사도가 된 적이 있었다. 집에 쌓인 빚을 전부 갚아달라는 얄팍한 소원과 함께 창조자의 파편을 손에 넣었다.

    녀석의 종말 계획을 막기 위해 그 파편을 부쉈지만 결국 이 공간에 혼자 떨어져 S급 몬스터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래도 이 공간에서 탈출만 하면 파편은 소멸한다.’

    파편 안에서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창조자가 중얼거렸던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창조자의 파편의 소멸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파편을 갖고 있는 사도가 사망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편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 소멸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파편마다 다르다고 했다.

    우우우웅.

    [왜■, ■질■, 혼■의 공간에 입■하셨습니다.]

    [■지된 생■체의 수 : ■명]

    경계에 입장할 때 등장하는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파편도 경계의 일부인 건가.’

    절대자들이 던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편 속에 숨어있던 게이트는 우릴 경계로 끌어들였다.

    “엉망진창이네.”

    세빈이가 중얼거리며 ‘영’을 뽑아 들었다. 다른 헌터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한진우 헌터는 ‘행운의 토끼발’의 크기를 미리 키워두고 언제라도 올라탈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멍하니 사색에 잠겨있던 최민 헌터도 자신의 무기인 ‘프라타파나’를 고쳐 끼우며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싸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정원에 있던 꽃들이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치솟았다. 형형색색의 꽃잎이 아래쪽으로 휜 포물선을 그렸다. 사람의 감은 눈 같기도 하고, 웃고 있는 누군가의 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꽃잎 무리에서 새빨간 액체가 흘러내렸다.

    [■■■을 벗■난 몬■■가 등■■니다.]

    [개■수 : 5마리]

    [■체■ : 식용 ■수]

    [■체 등■ : S급]

    [개■ 특징 : 이 개체는 먹■ 수 있■니다.]

    두근.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가의 ■몽에 입■하셔야 합■■.]

    그래. 식용 괴수라는 종이었다. 첫 번째 몬스터까지는 어찌어찌 해결했는데 체력이 바닥나서 두 번째 몬스터한테 당했지.

    “식용이라, 미묘하네요…….”

    한진우 헌터가 중얼거렸다. 미래 씨가 타액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가, 정말로 이 게이트가 누군가의 입안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S급 다섯 마리라…….’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 수만큼 소환되었다.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소환될지는 모르겠지만 S급인 만큼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녹두야.”

    꺄―웅!

    팔찌에서 녹두가 튀어나왔다. 전보다 몸집이 약간 커진 녹두는 제법 성체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니 공격 보조 부탁해. 다른 사람들도 도와주고.”

    ‘걱정 마!’

    우렁차게 하울링을 하는 녹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선홍빛 액체는 부글부글 끓으며 점점 형태를 잡아갔고, 그중 하나가 가장 먼저 제대로 된 모양을 갖췄다.

    튼튼한 가지에 사과가 잔뜩 달린 커다란 사과나무였다.

    [■용 괴수 ‘태초의 사과■무’가 소■■니다.]

    [식용 ■수 ‘태■의 사과나무’]

    [체력 : 100,000/100,000]

    나왔군.

    달칵.

    자아를 꺼내 손에 쥐었고, 녹두는 이미 공중에 우뚝 서서 자리를 잡았다.

    공격 자체는 굉장히 단순했던 걸로 기억한다. 방어력도 높지 않았고.

    저 몬스터의 진짜 공격은 체력이 반쯤 떨어졌을 때 나오는 정신계 스킬. 그때부터가 진짜 전투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력이 엄청나네.”

    “무슨 스킬을 쓸지 모르니까 조심해.”

    세빈이에게 대답하자 동그랗게 뜬 눈과 마주쳤다.

    ‘아,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순간 말이 튀어나왔다.

    “어, 어쨌거나 S급이잖아. 뭐, 정신계 스킬이나 함정계 스킬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알겠어. 조심할게.”

    세빈이는 생긋 웃은 후 다른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웃었냐는 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한진우 헌터와 차도윤 헌터는 최대한 타기팅 안 되게 조심하세요. 아, 지의 너도.”

    “알았어.”

    “최민 헌터는 공중과 방어를 맡아주세요. 전방엔 제가 서겠습니다.”

    지휘를 마친 세빈이가 사과나무 바로 앞에 섰다. 태초의 사과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흔들자 초록색 나뭇잎이 사방으로 퍼졌다.

    [한 입만 ■보는 게 어때?]

    [한 입 정도는 괜■을 거야.]

    [체력 : 100,000/100,000]

    나뭇잎이 순식간에 칼날이 되어 우리 쪽으로 쏟아졌다.

    끼기긱.

    나뭇잎이 나를 찌르는 것보다 내가 실드로 막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수십 개의 나뭇잎을 막기엔 실드가 너무 얇아서 금방 깨져버렸다.

    벌집이 된 실드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낮말을 듣는 새’로 도약해 공격을 피했다.

    초록색 바람 화살이 날아가 태초의 사과나무의 정중앙에 꽂혔다.

    콰과광!!

    사과나무의 뿌리가 차도윤 헌터가 서있던 지면을 뚫고 위로 솟았다.

    “칫.”

    간발의 차로 피한 차도윤 헌터가 인상을 구기며 ‘천재지변’으로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공중으로 살짝 띄웠다.

    탕!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 탄환이 뿌리를 끊어내자 태초의 사과나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호기■이 없■ 아이■이구나.]

    [체력 : 74,213/100,000]

    퍼버벙!!

    이번엔 최민 헌터의 불꽃이 녀석의 몸을 휘감았다. 시뻘건 불기둥 너머로 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춤을 추는 것처럼 녀석의 형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세빈이가 태초의 사과나무 쪽으로 영(影)을 높이 던졌다. 방향을 잃고 공중을 방황하던 영을 세빈이의 그림자에서 치솟은 검은 손이 잡았다.

    찌지직.

    영을 잡은 검은 손이 곧바로 태초의 사과나무를 찍어 내렸다. 사과나무에 검이 꽂힌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탈그락.

    자아를 땅에 내려놓고 박격포 형태로 바꾸었다.

    태초의 사과나무가 불길을 이겨내고 우리를 향해 다시 뿌리를 뻗던 그 순간.

    퍼버벙!!

    자아에서 커다란 소리 포탄이 튀어나왔다.

    소리 포탄이 자아에서 빠져나오자 공기 전체가 울렸고, 그로 인해 위협적이었던 사과나무의 뿌리는 순식간에 먼지가 되었다.

    콰드득.

    포탄이 녀석의 몸을 완전히 관통했다.

    [아■… 먹기엔 너무 평■해서 그■가?]

    [체력 : 48,000/100,000]

    “다음 페이즈로 넘어갈 것 같아요!”

    소리를 지른 후 자아를 다시 손에 쥐었다.

    남은 체력은 절반 정도. 이제 녀석이 정신계 스킬을 쓸 것이다.

    정신계 스킬을 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효과는 반감되겠지만 그래도 방심하면 당한다.

    다른 사람을 슬쩍 보니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웅―

    “읍……!”

    갑자기 달콤한 냄새를 잔뜩 실은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과 사과가 우수수 떨어지며 순식간에 제 모습을 숨겼다.

    [이러■ 좀 구미■ 당겨?]

    [체력 : 50,000/100,000]

    “언니!”

    ‘젠장!’

    짝!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뺨을 내리쳤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S급 스킬이긴 하네. 정신계 스킬인 걸 알고 있어도 한 번에 안 깨고.

    고개를 들자 병실 침대에 앉은 채 내게 사과 한 조각을 내미는 지유가 있었다.

    “나 이거 다 못 먹는데.”

    지유는 입을 삐죽 내밀며 포크로 사과 조각을 괴롭혔다.

    볼 안쪽을 꽉 깨물고 한 손으론 팔뚝을 꼬집었다. 희미한 고통과 함께 눈앞의 지유의 모습이 크게 흔들렸다. 환상이란 걸 알면서도, 여기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지유의 모습이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언니이…….”

    지유의 볼멘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팔을 꼬집던 손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콱!

    “악!”

    컹! 컹!

    그때 다리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퍼졌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아픔에 순간 몸이 휘청거렸고, 고개를 드니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지유의 환상에 금이 가고 있었다.

    ‘언니,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녹두야!”

    녹두였다. 녹두는 내 다리를 다시 놓아주었고, 덕분에 바지에 송곳니 자국이 남았다.

    녹두는 날 꾸짖는 것처럼 크게 짖곤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고마워, 녹두야.”

    ‘조금만 더 저항하면 완전 풀리겠어.’

    정신계 스킬에서 벗어나는 원리는 꿈에서 깨는 것과 비슷하다. 스킬에 걸린 걸 인지한 채로 강한 물리적 타격을 받거나 큰 소리를 들으면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철컥.

    나는 자아를 입가로 가져온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신계 스킬입니다! 일어나세요!!”

    내 목소리가 이 공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콰그작.

    지유의 환상이 완전히 부서졌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반응한다.]

    [발언 결과 : 자각]

    그제야 주위에 서있던 헌터들이 제대로 보였다.

    “아.”

    정신을 차린 차도윤 헌터가 잠시 머리를 부여잡더니 금방 회복했는지 곧 ‘나팔꽃’의 시위를 당겼다.

    피잉―

    바람 화살이 수십 개로 갈라져 태초의 사과나무에 일제히 꽂혔다.

    “이제 깼나 보네.”

    “세빈…….”

    세빈이를 제대로 부르기도 전에 그가 태초의 사과나무를 가로로 베었다.

    그러고 보니 세빈이는 정신계 스킬에 면역이 있는 것 같던데. 지금 이 스킬도 전혀 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 어쩐지. 미래 씨가 나한테 그렇게 상냥하게 말해 줄 리가 없지…….”

    한진우 헌터가 한숨을 푹 쉬며 우리가 있는 공간 전체에 ‘약손’을 뿌렸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함께 피로가 약간 회복됐다.

    철컥.

    태초의 사과나무가 맥을 못 추는 틈을 타 자아를 다시 조준했다.

    탕!!

    방아쇠를 당기자 손에서 적당한 진동이 느껴졌고, 얼마 안 있어 새하얀 탄환이 녀석을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체력 : 0/100,000]

    [제법 심지■ 굳■ 인간■이네.]

    [그 의■가 얼마나 오래■지는 모르■지만 말이■.]

    [식용 괴수 ‘태초의 사과나무’가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식용 괴수 ‘해골 수프’가 소환 대기 중입니다.]

    [식용 괴수 ‘트라우마 파우더’가 소환 대기 중입니다.]

    ‘최민 헌터는 괜찮나?’

    고개를 들어 최민 헌터를 쳐다보았다. 그는 공중에 뜬 채로 태초의 사과나무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 그의 고개는 여전히 땅을 향하고 있었고,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몬스터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네요.”

    “체력이 높긴 하지만 방어력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예요.”

    세빈이의 말을 차도윤 헌터가 거들었다.

    쿠구궁.

    차도윤 헌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면이 흔들렸다. 자세를 낮춰 주위를 살피자 땅속에서 커다란 해골 머리가 솟아올랐다. 그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었다. 눈구멍으로 저 액체가 용케도 안 흘러나왔다.

    피잉―

    포물선 모양의 구름을 비집고 또 다른 괴수가 튀어나왔다. 손으로 직접 갈아 쓰는 후추 통이 방정맞게 하늘 위를 날아다니다 해골머리 위에서 멈춰 섰다. 겉에는 글씨를 갓 배운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하게 ‘트라우마 파우더’라고 적혀 있었다.

    [식용 괴수 ‘해골 ■프’]

    [체력 : 10,000/10,000]

    [신라■ 어떤 승려■ 인정하는 해■ 수프! 여러분들도 드시러 오■■!]

    [식용 괴수 ‘트라■■ 파우■’]

    [체력 : 7,000/7,000]

    [수프에 뿌려 먹■면 더 맛■는 ■라우마 파우더~ 당신의 무■식에 있던 ■몽을 깨워■니다!]

    ‘나왔다.’

    저 몬스터들의 협공 때문에 한 번 죽었다. 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질 때 녀석이 몸을 파르르 떨던 게 선명하게 기억났다.

    “여러분! 트라우마 파우더부터 처리하고 갈게요!”

    몬스터들을 보며 외치자 다들 전투 대형을 잡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투쾅!

    그림자 손들이 트라우마 파우더를 움켜쥐는 것을 시작으로, 정신없는 전투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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