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46화 (46/366)
  • 46화

    【비상(非常)의 축제】

    [왜곡, 무질서, 혼돈의 공간]

    [경계에 입장하셨습니다.]

    [감지된 생명체의 수 : 6명]

    상태창이 말을 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시커먼 글자들이 눈앞에 떠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개체수 : 15마리]

    [개체종 : 편집 괴수]

    [개체 등급 : A급]

    [개체 특징 : 한 번 노린 생명체를 죽을 때까지 쫓습니다.]

    [경계 소멸 조건 : 편집 괴수 몰살]

    소멸 조건까지 이야기해 주다니, 경계는 생각보다 친절한 곳이네.

    “디펜스전이 되겠군.”

    김민숙 헌터가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진우 헌터를 중심으로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도 자아를 고쳐 쥐며 흘러내리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투쾅!!

    무의미하게 액체만 뿜던 태양에서 갑자기 석고로 된 손이 튀어나왔다. 기계로 된 발, 다음에는 생선 지느러미, 이번에는 토끼 귀. 각각 다른 신체의 일부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바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한 마리씩 맡죠. 먼저 처리하면 주변 헌터 돕는 걸로 해요.”

    “한진우 헌터는 위험할 때 저 부르세요.”

    “걱정 마세요! 혹시라도 방공호 들어가도 5초 세고 바로 나올게요.”

    세빈이가 ‘영’을 꺼내 자세를 잡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콰과광!!

    몸의 파편들이 땅에 부딪혔다. 새하얀 연기의 틈새로 그들의 형체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최민 헌터가 먼저 몬스터의 틈으로 달려들었다.

    [편집 괴수 ‘부활절 토끼의 단두대’가 ‘최민’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꿈을 먹는 이무기’가 ‘하미준’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시리얼 박스’가 ‘강세빈’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가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곰을 향해 달려가는 힘찬 연어’가 ‘김민숙’을 타기팅합니다.]

    다행히 한진우 헌터를 타기팅한 몬스터는 없었다. 한진우 헌터가 ‘행운의 토끼발’을 탄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내리자 달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뭔 냄새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달콤한 냄새에 일단 뒤로 물러났다.

    쾅!!

    커다란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 걸리더니 하이힐을 신은 다리 하나가 뚝 떨어졌다.

    잘린 단면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진짜 사람 다리였다.

    다리는 반짝이는 가루를 떨어트리며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고, 그럴 때마다 하프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편집 괴수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

    [체력 : 7,000/7,000]

    던전을 돌면서 단 한 번도 체력 수치를 본 적이 없는데. 흔한 RPG게임처럼 다리 위에 체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떠다니고 있었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29%]

    두근.

    “윽!”

    또다. 기억이 흘러들어 오려는 것처럼 가슴이 타들어 갔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날아다니는 망치, 시체 더미, 그리고 종이학. 기묘하게 생긴 몬스터들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아 씨, 진짜 구면이잖아.’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가 반응했다는 것, 그것은 내가 이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었다는 걸 뜻한다.

    ‘저 몬스터는 처음 보네.’

    ‘뭐?’

    ‘어?’

    자아의 중얼거림에 지나치게 반응했는지, 자아가 반문했다.

    쉬이익.

    자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날렵하게 갈린 구두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탱!!

    실드를 만들어 한 손으로 지탱하자 마찰음과 함께 실드가 조금씩 깎여 나갔다.

    ‘저 몬스터 처음 본다고?’

    ‘응. 넌 본 적 있어?’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사명의 달성도도 올라갔고.’

    ‘뭐어?!’

    쨍그랑.

    실드가 결국 깨졌고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가 또다시 내 목을 노렸다.

    “흡!”

    콰직.

    내 목을 노린 가녀린 발목을 주먹으로 쳐올려 뼈를 부쉈다. 너덜너덜해진 발목과 함께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체력 : 6,950/7,000]

    녀석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지난 시간선의 기억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 방어력은 높지 않지만 움직임이 빠르고 환각계 가루를 쓰는 몬스터. 가루를 마시면 단순히 환각에 걸릴 뿐만 아니라 목구멍 전체를 긁어 놓는다. 전에 근거리에서 싸웠던 하미준 헌터가…….

    삐이이이.

    [■■째 ■■■의 ■■, ■의 ■이 해당 ■억을 삭■합니■.]

    “윽?!”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머리를 쪼갤 듯한 큰 이명에 중심을 잃었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아부터 전방을 향해 뻗었다.

    퍼버벙!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는 새하얀 탄환을 춤을 추듯 날렵하게 피했다.

    ‘어떻게든 내 기억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후웅―

    “컥!”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달큼한 가루가 순식간에 폐부에 쌓였다.

    “콜록! 켁!”

    억지로 숨을 토해 내며 가루를 뱉자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인벤토리에서 곧장 물을 꺼내어 입에 들이부었다.

    [바보 같은 오베론. 그러게 장난도 정도껏 쳤어야지.]

    [체력 : 6,950/7,000]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가 중얼거렸다. 곧바로 고개를 드니 이미 녀석의 형체가 수십 개로 보인 후였다.

    ‘결국 당했군.’

    입가를 소매로 가린 채 최소한의 호흡만 허락했다. 본체는 딱 하나. 똑같이 생겼어도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파바바박!!

    ‘문제는 자세히 볼 틈이 없다는 거지.’

    녀석의 다리가 창처럼 날아와 내가 있던 곳에 꽂혔다. 뒤로 물러나며 다리 더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흰 탄환이 다리들을 전부 터트렸다.

    [어라, 어린아이야. 우리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구나.]

    [체력 : 5,727/7,000]

    “뭐? 억!”

    쾅!!

    기어코 다리 하나가 내 복부를 쳐올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게 물들었지만 곧장 실드를 만들어 다른 공격들은 전부 튕겨냈다.

    ‘저 몬스터도 날 기억하고 있어.’

    철컥.

    나를 향해 다시 날아오는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후 파도처럼 밀려오는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본체만 부수면 돼, 오직 본체만.

    [이 공격, 내가 잊을 리가 없지 않느냐. 군주가 된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법.]

    [체력 : 4,291/7,000]

    녀석이 대화하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내게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은 그 순간, 가장 구석에 있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목에… 멍이 있네?”

    펑!

    처음에 내가 부러트려 놓은 녀석의 발목이다. 방아쇠를 당기자 탄환이 저 가녀린 다리를 그대로 관통했고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체력 : 0/7,000]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아이야, 우린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수십 개의 파편으로 쪼개진 다리의 조각들이 달콤한 가루가 되어 연기처럼 흩어졌다.

    [편집 괴수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가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비디오 타워’가 소환 대기 중입니다.]

    ‘…너 진짜로 저 몬스터들 만난 적 있어?’

    손에서 웅웅거리기만 하던 자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사명 달성도까지 올라간 거 보면 거의 확실하지.’

    ‘나도 기억 못 하는 걸…….’

    자아는 뒷말을 삼켰다.

    아마 ‘네가 어떻게 기억하는 거야.’라고 말하려 했겠지.

    최재윤 헌터를 구한 것도, 연우를 구한 것도 자아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선에서 내가 쌓은 업이다.

    ‘나만이 기억하는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어.’

    비상식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을 향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두근, 두근.

    이곳에서 내 기억을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날뛰어 주마.’

    [편집 괴수 ‘시리얼 박스’가 ‘강세빈’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미친 화가의 캔버스’가 소환 대기 중입니다.]

    일단 주변 사람들부터 돕자. 특히 하미준 헌터랑 ‘꿈을 먹는 이무기’의 상성이 아주 최악일 텐데.

    타닥.

    발 없는 말로 빠르게 접근해 하미준 헌터에게 다가갔다.

    “오, 지의 양. 금방 끝냈나 봐?”

    콰과광!!

    평온하게 말하는 것치곤 손은 분주했다. 하미준 헌터가 허공을 움켜쥘 때마다 땅속에서 굵은 나무줄기가 튀어나왔지만 이무기와 거리를 좁히는 덴 번번이 실패했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30%]

    ‘그야 저 녀석은 말도 안 되게 미끄러우니까.’

    나무줄기들은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은색 이무기의 뒤를 맹렬히 쫓았다.

    “쯧.”

    하미준 헌터가 혀를 찼다. 줄기 자체로 공격을 하기엔 이무기의 몸이 종이처럼 가벼워 근처에 오기만 해도 날아갔고, 그렇다고 몸 자체를 옭아매기엔 표면이 너무 미끄러워서 나무줄기가 닿자마자 그대로 스쳐 지나가 버렸다.

    “체력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안 깎였어. 공격이 닿질 않으니, 원.”

    ‘일반 스킬로는 아무래도 공격하기 힘들겠지.’

    쿠구궁.

    꿈을 먹는 이무기가 입을 쩍 벌리자 농구공만 한 운석이 나와 하미준 헌터 쪽으로 떨어졌다. 그는 실드를 펼치며 옆으로 피했고 그 후에도 반짝이는 운석 몇 개가 더 떨어졌다.

    ‘꿈의 조각.’

    일정 체력 밑으로 떨어지면 녀석이 뱉는 운석들이다. 그리고 저 녀석의 말도 안 되게 가벼운 질량을 무시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기도 했다.

    드르륵.

    하미준 헌터 쪽으로 꿈의 조각을 툭 차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저 녀석의 움직임을 막을 테니 그 틈에 이 돌덩이를 던져 주세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 보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지의 양은 가끔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할 때가 있단 말이지.”

    확실히 예리하네.

    뼈가 있는 하미준 헌터의 말에 나 혼자 지레 찔렸다. 하미준 헌터의 시선을 피하고 꿈을 먹는 이무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감이에요. 자기가 뱉은 거니까 역으로 당할 수도 있겠죠.”

    “흐응.”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이럴 땐 아예 뻔뻔하게 나가는 게 제일이다.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대답하자 하미준 헌터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한번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콰드득.

    “그래, 한번 지의 양 말대로 해볼게.”

    “…바로 할게요.”

    의심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이무기를 향해 자아를 들었다.

    우우우웅.

    아무리 가벼워도 공기의 떨림까지 피할 순 없었다. 꿈을 먹는 이무기가 새하얀 음파를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굳었고 화질이 나쁜 영상처럼 모습이 희미해졌다.

    “하미준 헌터!”

    “오케이.”

    콰과광!!

    나무줄기가 꿈의 조각을 집어 던졌다. 녀석의 몸에 꿈의 조각이 정확히 맞았고, 동시에 꿈을 먹는 이무기의 몸이 맹렬한 속도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하, 살려 달라고 엄청 비네.”

    하미준 헌터가 후련한 듯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꿈의 조각에 깔린 이무기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얇은 몸으로 돌덩이를 치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미준 헌터가 녀석에게로 성큼 다가가 ‘나무꾼’을 높이 들었다.

    쩌엉!!

    [편집 괴수 ‘꿈을 먹는 이무기’가 ‘하미준’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황홀한 죽음의 종’이 소환 대기 중입니다.]

    나무꾼이 이무기의 몸을 반 토막 내자 그대로 클리어 상태창이 떴다.

    “고마워, 지의 양. 덕분에 해결했네.”

    “별말씀을요.”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여전히 좀 궁금하지만.”

    “…….”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지난 시간선에서 이 사람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적어도 지금의 하미준 헌터는 눈치도 빨랐고 예리했다. 저 검은 눈이 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톡.

    하미준 헌터의 손가락이 내 코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장난이야. 굳은 얼굴도 아주 깜찍해?”

    그는 생긋 웃으며 내게서 한 발 멀어졌고 나무꾼을 던져 받으며 몸을 풀었다.

    [편집 괴수 ‘부활절 토끼의 단두대’가 ‘최민’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행운의 인형 뽑기’가 소환 대기 중입니다.]

    [편집 괴수 ‘곰을 향해 달려가는 힘찬 연어’가 ‘김민숙’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녹슨 아이언 메이든’이 소환 대기 중입니다.]

    마침 다른 헌터들도 각자의 몬스터를 해치웠다.

    확실히 첫 번째 페이즈에 소환된 몬스터들이라 큰 어려움 없이 잡았나 보네.

    쿵!

    그 순간 태양이 한 번 더 반으로 갈라졌고, 그 속에서 시커먼 물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편집 괴수 ‘비디오 타워’가 ‘강세빈’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미친 화가의 캔버스’가 ‘최민’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녹슨 아이언 메이든’이 ‘김민숙’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행운의 인형 뽑기’가 ‘하미준’을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황홀한 죽음의 종’이 ‘한진우’를 타기팅합니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31%]

    두근, 두근.

    몬스터 소환창이 뜨자마자 또다시 사명이 반응했고, 몬스터의 이름들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몬스터들이 자신의 타깃을 향해 벌레처럼 기어가고 있을 때쯤 상황 파악이 끝났다.

    ‘진짜 싸움은 두 번째 페이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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