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6화 (36/366)
  • 36화

    【사도】

    권능, 이 세계의 절대자인 창조자가 내게 빌려준 신의 능력.

    이걸 설명하려면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말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짧게 써왔는데…….

    ‘언제 본 거지?’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게 뭐죠?”

    “…이몽룡이 폭주하기 직전에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봤구나.’

    최민 헌터는 손을 내리고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에 그림자가 졌고 그 때문에 더욱 위압감이 느껴졌다. 오직 검붉은 눈동자만이 짐승의 것인 양 빛날 뿐이었다.

    “아… 제가 그랬나요?”

    “네. 정확히 보였습니다.”

    ‘집요하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이나 발뺌하는 건 오히려 의심을 키울 것 같고, 일단 대충 둘러대야겠다.

    “사실 스킬이에요.”

    “스킬?”

    “네. C급 확대 스킬. 이렇게 하면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크게 보이거든요.”

    내 뻔뻔한 태도에 최민 헌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부우웅.

    ‘나이스 타이밍.’

    마침 내가 탈 리무진이 도착했다. 도망치듯 차로 걸어가 뒷자리 문을 열었고 최민 헌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지의 헌터.”

    “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차에 올라타기 전 또다시 최민 헌터가 말을 붙였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다 눈만 굴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깨 치료, 꼭 다시 받으세요.”

    “…아.”

    ‘…다정하네.’

    진주현 헌터 덕분에 어느 정도는 치료가 됐지만 그래도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지.

    갑자기 치고 들어온 걱정에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최민 헌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쿵.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가 서울 방향 고속도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자 최민 헌터의 뒷모습도 금세 점이 되어 사라졌다.

    ‘정말 뭐 하는 사람일까.’

    의문스러운 점도 한 트럭이고 성격도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지유 얘기를 했을 때 동요하기도 했고.

    우웅, 우웅.

    그때 평소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엄마

    ‘아, 클리어 속보 보셨겠구나.’

    전화를 받으려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귀가 먹먹하더니 이내 눈앞까지 흐려졌다.

    ‘너무 졸린데…….’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온몸을 덮쳐왔고, 결국 필름이 끊기듯 정신이 날아갔다.

    * * *

    쏴아아.

    파란색 물감을 푼 것 같은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파도가 모래에 닿을 때마다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고 새하얀 물거품이 되어 부서졌다.

    ‘또 창조자가 날 불렀나 보군.’

    아직 창조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난 하늘을 향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창조자!”

    “안녀엉~”

    예상과는 다르게 바닥에서 소리가 들렸다. 모래 알갱이들이 모이더니 도마뱀 형상을 이루었고 몸을 한 번 털자 매끈하고 새까만 표면이 드러났다. 요란하게 등장한 창조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까 그 여자랑 무슨 사이야아~?”

    “최민 헌터 얘기야?”

    “우웅. 시간의 이탈자.”

    ‘시간의 이탈자?’

    기묘한 별명이다.

    그 말만 들으면 꼭 최민 헌터가 회귀자 같네.

    창조자는 짧은 다리로 제 턱을 긁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파사삭.

    창조자의 꼬리가 모래사장을 쓱 쓸자 먼지바람이 불었고 그 속에서 최민 헌터처럼 보이는 헝겊 인형이 나타났다. 인형 위에는 빨간 실이 가로로 둥둥 떠있었다.

    “혹시 방공호라는 스킬 들어봤어어? 이 애의 고유 스킬인데에.”

    “응. 알아.”

    “거기 안에 있으면 시간 영향도 안 받는 거 알아~?”

    “응.”

    창조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라는 눈치다.

    “많이 알고 있네에. 아무튼 그 애는 방공호에서 수십 년을 시체처럼 살았어어.”

    툭.

    인형 위에 달려 있던 빨간 실이 뚝 끊겼다.

    “그때 이 애의 시간선은 이렇게 뚝~ 끊겼지이. 그래서 시간의 이탈자라고 부르는 거야~”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아직 창조자는 요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창조자를 빤히 바라보자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왜냐면 뚝 끊긴 시간선을 다시 이어 준 친구가 있는데에, 그 친구가 나쁘거든~”

    “누군데?”

    “조율자.”

    쿡.

    “윽!”

    ‘조율자’라는 이름이 귀에 꽂히자마자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20%]

    ‘아 씨, 젠장… 아는 놈인가 보네.’

    “에에엥? 왜 그래~ 괜찮아?”

    “허어, 어… 응.”

    일단 창조자가 개새끼인 건 확정인데, 그럼 조율자는? 이 세상의 편이었나?

    이름을 듣고 불길한 예감도, 혹은 든든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無), 조율자에 대한 느낌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중립일 가능성이 커.’

    숨을 고르며 가슴을 쓸었다. 창조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조율자는 나와 같은 절대자야아. 이 세상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무서운 친구지이.”

    이 세상의 유지. 그럼 적어도 세상을 망하게 할 입장은 아니다.

    “조율자는 왜 최민 헌터의 시간선을 붙인 거야?”

    “자신의 사도로 삼으려구우. 방공호 안에 있던 그 애를 직접 꺼냈어어.”

    순간 사고가 멈췄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기 전에 창조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조율자의 사도야아.”

    잠깐,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가족을 잃은 슬픔에 방공호 안에서 동면하던 최민 헌터를 조율자가 꺼냈고, 그런 최민 헌터를 사도로 삼았다는 뜻이지?

    수많은 의문문 사이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몰라아. 하지만 그 애를 사도로 삼고 나서 세상은 종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어어.”

    창조자는 조율자가 세상을 망하게 하는 존재라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뭔가 부자연스러워.’

    교묘하게 거짓말은 피했지만 내가 ‘조율자는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장단을 맞춰 줘야지.’

    “그러니까 네 말은 조율자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고 있고, 최민 헌터가 그걸 도와주고 있다는 거지?”

    창조자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쭈, 진짜 확답을 안 주네.’

    “난 거짓말 안 쳐어.”

    ‘그렇겠지. 대답을 아예 안 했으니까.’

    창조자가 애매하게 굴수록 오히려 답이 보였다.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려는 창조자가 최민 헌터를 거슬려한다는 건 최민 헌터도, 그리고 그를 사도로 삼은 조율자도 일단 창조자를 막는 쪽이라는 걸 의미한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과 함께 모래사장 위에 앉았다.

    “지의는 아직도 내 사도가 될 생각은 없는 거야아?”

    “되게 질척거리네.”

    “그야 난 지의처럼 강~한 사람의 힘이 필요한거얼…….”

    손이 한 번 날아갔는데도 나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나 보다.

    ‘나를 미끼로 삼아서 정보를 더 뜯어내야겠군.’

    창조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종말을 막는 부적이라는 거, 나한테 줄 거 하나뿐이야?”

    “아니이? 몇 개 더 있어어.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거든.”

    “흐응. 그럼 내가 제일 마지막에 받는 사람인 거네.”

    “그렇…….”

    쿠구구궁.

    ‘됐다.’

    물 흐르는 듯한 내 유도심문에 창조자가 실언했다. 잔잔하게 치던 파도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창조자의 노란 동공이 세로로 길어지고 평화롭던 하늘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어머, 실수우.”

    달칵.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다시 바닷가는 평화를 되찾았다. 창조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바보 같은 얼굴로 돌아왔고 모래사장을 굴러다니며 뾱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자식의 바보 같은 실언 덕분에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창조자의 파편은 이미 사도들이 나눠 가진 상태라는 것.’

    이걸로 변수 하나는 줄었네. 내가 SS급으로 각성하는 바람에 미묘하게 바뀐 것들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사도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자아가 내 기억을 막는 놈의 정체를 찾아 없앤 후 사도가 누군지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

    “아무튼 알겠어. 최민 헌터를 조심하면 되는 거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조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웅. 그 여자는 위험하니까아~ 그리고 지의 너는 백 번 천 번 더~ 조심해야 해애.”

    “내가?”

    창조자가 짧은 다리를 내 어깨 위에 올리며 나를 측은하게 내려다보았다. 태양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동자가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왜냐면 생각해 봐아. 내가 만약에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은 절대자구, 지의 네가 유일한 SS급이라는 걸 알았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이 자식의 발을 치우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나느은~”

    촤아악.

    “…어?”

    “지의, 널 제일 먼저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아~?”

    피가 튀고 있었다. 내 목에서 쏟아져 나온 선홍빛 액체가 시야를 가렸다. 난 본능적으로 손으로 목을 감쌌다. 뜨겁고 끈적한 액체는 내 손 틈을 비집고 계속해서 흘러나와 모래사장을 적셨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내 정신은 모든 감각으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 이건, 이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놀랐어?”

    “허, 허억!”

    물에서 건져낸 건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손으로 목을 만지자 피가 묻어 나오긴커녕 상처 하나 없었고, 주변에 피라고 할 만한 액체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봐봐아~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

    타앙!!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구체가 도마뱀 형체를 반으로 갈랐지만 녀석의 몸은 잠깐 흔들릴 뿐 터져서 없어지진 않았다. 손으로 물을 젓는 것처럼 형체만 잠깐 울퉁불퉁해지더니 금방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이잉?”

    “장난하냐, 지금?”

    “무서워어~”

    창조자가 내 앞에 납작 엎드려 양발로 제 눈을 가렸다.

    탕! 탕! 탕!

    분이 풀리지 않아 녀석의 머리에 대고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탄환은 의미 없이 땅만 진동시켰다.

    몸이 덜덜 떨린다. 공포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전신을 지배해 숨을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 피는 차갑게 식고 두 눈은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넘치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냥 네 경계심을 키워 주려구우…….”

    “개소리하지 말고 나 여기서 내보내.”

    “…알았어어. 내가 미안해애.”

    파사삭.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내가 아까 탄 리무진의 문이 솟아올랐다. 마음 같아선 분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저 미친 도마뱀을 패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아마 오늘 하루로도 모자랄 것이라 꾹 참았다.

    ‘파편을 전부 찾아내서, 이 새끼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자아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으며 곧장 문을 열었다.

    * * *

    투웅.

    ―내일 서울 날씨는 전체적으로 흐릴 것으로 예상되며, 때때로 소나기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힘겹게 눈을 떠 주위를 살피자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하아…….”

    그 뭐 같은 공간에서 나오긴 했구나.

    시트에서 살짝 몸을 떼니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뒷자리에 있던 에어컨 입구를 전부 내 쪽으로 돌려놓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민 헌터가 날 구한 것도, 그가 조율자의 사도인 거랑 관계가 있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창조자보다 믿을 만한 인물인 건 맞지만…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아, 이런…….”

    그때 기사님이 짧게 탄식했다. 앞을 보자 집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이 음식물쓰레기 수거차로 막혀 있었다.

    “좀 돌아가서 내려드릴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서 올라가면 바로 있는데요, 뭘.”

    “그래도…….”

    기사님을 향해 고개를 저었고 그대로 차 문을 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지의 헌터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부우웅.

    고급스러운 리무진이 허름한 골목을 빠져나갔다. 난 고개를 돌려 우리 집 쪽을 바라보았다. 샛노란 초승달이 건물 위로 떠있었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오르막길 중턱의 빌라로 들어갔다.

    쿵.

    “하아아아.”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번엔 정말 성공할 수 있겠지?’

    아직 진짜 고생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 몸과 마음은 벌써 지쳤다.

    “지의, 널 제일 먼저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아~?”

    스윽.

    손으로 목을 다시 만져 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데도 아까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몸이 떨렸다.

    ‘살아야지, 살아야 돼.’

    이 부탁마저 들어주지 못하면 정말 지유를 볼 낯이 안 선다.

    “어떻게든 살아남을게, 지유야.”

    키이이잉.

    [돌발 지령이 도착했습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다섯 마리 이상의 소환수에게 호감을 얻어내라.]

    [1/5]

    [보상 : 사명 ‘늑대의 동반자’ 달성도 대폭 상승]

    대폭 상승이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녹두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제한 시간 : 12시간]

    “열두 시간?!”

    그 기회가 열두 시간 안에 사라질 거라는 게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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