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3화 (23/366)
  • 23화

    【시부야 S급 던전, ‘하치 공(公)의 사계절’】

    난 지금 내 21년 인생 중 제법 큰 고비를 맞이했다. 미래 씨의 연구실에 갔던 날 시부야 S급 던전 파견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고, 첫 S급 던전 파견이었기에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 해외여행이 S급 던전 파견이 될 줄이야.’

    사실 갑작스러워서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도저히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의도 S급 게이트 폭발 사고 당시 일본의 S급 헌터들이 온 힘을 다해 수습을 도와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상호 파견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일본 헌터 협회의 SOS 요청에 회장님은 즉시 실력도 좋고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었던 헌터들을 골라 파견 팀을 구성했다.

    ‘일부러 더 이슈를 만들려고 한 걸 수도 있겠네.’

    어쨌든 같이 가게 된 헌터들은 TV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유명 헌터들이었고, 심지어 한 명은 옷가게 근무할 때 콜라보 제품으로 날 힘들게 했던 민지호 헌터였다. 그는 왜 인기가 많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언니라고 불러!”

    “그, 그래도 될까요?”

    얼결에 말도 놓고 번호까지 교환했다. 언니라고 부를 일이 거의 없어서 말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실력 좋은 헌터들과 화목한 분위기……. 이게 무슨 고비냐 싶겠지만, 이 파견 팀에는 유일한 흠이 있었다.

    “멍하니 있지 마시고, 이제 가시죠.”

    “아, 예.”

    하필 같이 파견된 유일한 S급 헌터가 차도윤 헌터라는 점. 훈련실 현피 사건 이후로 약간 껄끄러웠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싸가지는 건재했다.

    “좌석 벨트 부탁드리겠습니다.”

    벨트를 채우며 그냥 눈을 감았다.

    한 시간이면 가겠지만 잠이나 자자.

    * * *

    ‘협회 건물부터 엄청 일본스럽네.’

    고층 건물들 사이, 청색 지붕을 가진 5층짜리 건물이 일본의 헌터 협회 본부였다. 건물의 주변은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고 안에는 커다란 인공호수도 있었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호수를 따라 난 도로를 부드럽게 달렸고, 곧 로비 앞에서 멈췄다.

    “아, 맞다. 이거 끼우시죠!”

    그때 이상욱 헌터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선 이어폰이네. 좀 많이 투박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상욱 헌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곧장 입을 열었다.

    “자동 통역기입니다.”

    “와~ 이거 오랜만이네. 이거 끼우면 온갖 외국어 걍 한국어로 줄줄 들리거든.”

    “아, 진짜?”

    지호 언니가 신이 난 듯 자동 통역기를 귀에 꽂았고, 나도 언니를 따라 귀에 끼웠다.

    이것도 부산물에서 뽑아낸 첨단 물질로 만든 거겠지?

    새삼 미래 씨가 현대 과학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헌터분들!”

    ‘와, 진짜 한국어로 들리네.’

    로비로 들어가자 어떤 남자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입가에 상처가 있었지만 인상은 끝내주게 좋은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우리도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 시, 신지의 헌터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WHDB에서 보고 꼭 한번 뵙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저희한테 도움까지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내 정신 좀 봐. 제 소개도 안 했군요. 일본 헌터 협회장인 다나카 게이토입니다. 제대로 된 환대도 못 해드려 유감이지만, 상황이 시급한지라 일단 브리핑 룸으로 먼저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도윤은 협회장의 말에 꽤 정중하게 대답했다. 협회장도 깍듯하게 우리를 대하며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와 함께 앞장서서 걸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된 일본 헌터 협회의 홍보 영상이 벽에 달린 화면에서 재생되고 있었고, 실제 헌터들의 인터뷰 같은 것도 중간중간에 끼어 있었다.

    “어, 센이다.”

    “지금 나오는 저 사람?”

    “응. 지의 너 나오기 전엔 저 사람이 유일한 빛 속성 S급 헌터였어.”

    화면에서는 기모노를 입고 있는 백발의 여자가 차분하게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회장님과 비슷해 보였지만 옷 너머로 보이는 그의 실루엣은 오랜 시간 동안 단련한 몸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었다.

    ―헌터들이 자신의 역량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동시에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헌터가 됐다는 것은 일본은 물론 세계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 사명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저희 초대 협회장님이신 센 님입니다.”

    나와 지호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다나카 회장이 살짝 뒤를 돌아 말을 붙였다.

    “일본의 수호신과도 같은 분이시죠. 비록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활발한 활동은 못 하고 계시지만, 나라가 위험할 때마다 항상 도와주십니다.”

    센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나카의 눈빛엔 존경과 숭배가 깃들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회의실로 들어간 우리가 자리에 앉자 따뜻한 녹차가 나왔다.

    “제가 한국 헌터 협회분들께 긴급 요청을 드린 이유는 현재 일본의 S급 헌터들 대다수가 입원 중이기 때문입니다.”

    “게이트 폭발이라도 있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프랑스 S급 던전을 토벌하러 갔다가 다들 큰 부상을 입었거든요.”

    다나카 협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협회장이 녹차로 목을 축이는 동안 지호 언니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유럽 놈들은 지들끼리만 정보를 공유하거든.”

    “아, 진짜?”

    “응. 다른 나라 헌터들이 토벌하러 오면 기밀 유지 개빡세게 시켜. 입장료도 엄청 비싸게 받고.”

    유럽 던전 보상이 좋다는 건 들었지만, 하다하다 이젠 던전으로도 갑질을 하냐.

    “그렇다 보니 국내 S급 던전의 관리가 어려워졌습니다. 다른 던전들은 괜찮지만 시부야 던전을 토벌한 지가 꽤 됐죠.”

    “그렇군요.”

    “일주일 내에 들어가서 몬스터들의 개체수를 줄여놓지 않으면 게이트 폭발 시기가 앞당겨지거나 던전 내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협회장이 비서에게 눈짓하자 그가 회의실 앞쪽에 있던 화면에 지도처럼 생긴 그림을 띄웠다. 그림에는 친절하게 한글 설명이 나와 있었다.

    어디 보자…….

    시부야 S급 이야기 던전, 하치 공(公)의 사계절

    우리로 치면 동화 던전이나 신화 던전 같은 건가?

    “하치 설화를 아시나요?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치’라는 강아지가 죽은 주인을 충직하게 기다렸다는 그 이야기 맞죠?”

    “정확합니다.”

    지호 언니가 또랑또랑하게 대답한 후 녹차로 입을 축였다.

    나도 녹차 맛 좀 볼까.

    쌉쌀한 찻잎향이 입안을 향긋하게 채웠다.

    “이 S급 던전은 바로 ‘하치’의 이야기를 담은 던전입니다. 저희 일본 헌터 협회는 한국의 헌터 여러분들께 이 던전의 클리어를 요청드립니다.”

    다나카 협회장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부릅뜬 눈에서 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보통 클리어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7~8일 정도가 소요되지만 공략법만 알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하실 수 있습니다. 던전의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제 비서가 이어서 알려 드릴 겁니다.”

    협회장이 우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고, 젊은 남자 비서가 브리핑 룸의 구석에 서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 브리핑을 맡은 이케다 쇼입니다. 지금부터 시부야 S급 이야기 던전, ‘하치 공의 사계절’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지호 언니는 박수를 치며 밝게 웃었다.

    여기까지 같이 오면서 느낀 건데, 이 언니 정말로 태평하다…….

    “게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여러분들은 하치와 그의 주인을 보호하셔야 합니다. 일반 필드 몬스터로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고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난도는 어느 정도죠?”

    “S급 헌터면 무난하게 공격이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지도 위에 할아버지와 하치의 일러스트가 등장했다. 그 둘은 지도 위를 함께 쭉 걷다가 하치는 게이트 쪽으로, 할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빠졌다.

    “그리고 하치와 주인은 중간에 헤어지기 때문에 헌터 여러분들도 두 팀으로 나뉘어서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주인은 하치와 헤어지고 한 시간 이내에 자연 소멸합니다. 자연 소멸 이후 빠르게 게이트 쪽으로 복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길을 잘 기억해 놔야겠군요.”

    할아버지 일러스트가 사라지고 게이트 앞에 있는 하치 쪽으로 화면이 전환됐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언제 제작한 건지 모를 우리들의 캐릭터가 등장했다.

    “생각보다 너무 깜찍하게 그렸는데?”

    지호 언니는 그것을 보자마자 엄청 좋아하며 옆에 있던 내 팔을 쳤다.

    “다들 게이트로 모이시면 본격적으로 하치의 사계절이 시작됩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각각 다른 중간 보스가 나오며,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던전 내의 환경도 사계절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체력 관리에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겨울 보스까지 다 잡고 나면 최종 보스 ‘하치’가 등장합니다.”

    ‘순식간에 보스로 돌변하는구나.’

    비서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 설명을 덧붙였다.

    “방어력이 매우 높고 무적 스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킬이 풀릴 때를 노려서 공격하시면 될 겁니다.”

    “구체적인 설명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가도 될까요?”

    차도윤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협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게이트로 모시겠습니다.”

    * * *

    커다란 고층 건물 사이로 리무진이 부드럽게 나아갔다. TV에서만 본 시부야 스크램블을 직접 보다니. 생각보다 훨씬 정신이 없어서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기 보이는 도리이가 던전 입구입니다.”

    운전기사가 가리킨 곳에는 신사에서 볼 법한 붉은 도리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무로 된 게이트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저렇게 뻥 뚫린 곳에 있으면 위험하지 않나요?”

    “다른 나라에서 온 헌터분들도 전부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기사가 살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는 지진 때문에 국민 모두가 재난 상황 매뉴얼을 외우고 있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들도 히라가나를 떼기 전에 매뉴얼을 먼저 외웠을 겁니다.”

    “와…….”

    “게이트를 직접 확인하며 관리하는 것이 더 편하기도 하고… 국민들도 항상 안전 의식을 갖자는 뜻으로 센 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게이트가 언젠가 폭발과 함께 사라질 존재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지, 그냥 컨테이너로 가려놓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라별로 차이점이 있는 건 좀 흥미롭네.

    리무진이 게이트 앞에 서자 기다리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이런 대접은 아직도 영 익숙하지 않아 멋쩍게 웃으며 차에서 느릿느릿 내렸다.

    “아이템은 습득하실 수 있지만 부산물은 가져오실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스캔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호 언니가 힘차게 게이트 문을 열었다.

    클리어에도 약 일주일이 걸리고 몬스터들의 수준도 A급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바로 그 S급 던전.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지만, 뭐든지 처음은 긴장되는 법이다. 손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땀을 닦았고 자아를 꽉 쥐었다.

    끼이익.

    그렇게 S급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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